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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암산성 서문터

한우물과 불영암에서 호암늘솔길, 시흥동(벽산5단지)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호암산성 서문터가 

습을 비춘다.

이곳은 한우물, 불영암과 칼바위 사이로 경사지에 서문터가 있고, 그 좌우로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기웃거리기 힘든 천험의 자리를 자랑한다. 이곳이 서문터로 밝혀진 것이 아주 웃기게도 2018년

이후로 그 이전에는 이곳이 호암산성의 일부이자 서문터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우물~칼바위 산

길 옆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했음에도 말이다. (나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음)

 

호암산성은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347m) 정상부에 깃든 산성 유적이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으로 조성되었는데, 축성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안쪽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산성 둘레를 약 1,250m, 남아있는 길이는 300m로 보았으나 2018년 이후 새로운 곳이 발

되면서 산성 관련 자료가 크게 업데이트되었다. 하여 지금은 산성 둘레 약 1,547m, 남아있는 것은

1,016m, 산성 면적은 133,790㎡로 확장되었다.

 

1990년 봄, 호암산성과 한우물 일대를 조사하면서 우물터 2곳과 건물터 4곳이 발견되었고, 무려 6,500

여 점에 이르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이 쏟아져 나왔는데, 특

히 신라 중기 것이 많이 나왔다. 하여 신라 중기인 6세기 말~7세기 초에 군사기지로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지며, 신라 문무왕이 672년에 쌓았다는 설도 있다. 그 시절 신라는 당나라를 때려잡으며, 옛 고구려

(高句麗, 고구리) 땅의 일부인 현재 요동반도와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산성 서쪽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바라보이고, 북쪽으로 한강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잡힌다. 그래

서 서해바다와 한강, 내륙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양천고성(陽川古城, 서울 가양동)과 행주

산성(幸州山城), 오두산성(파주시)을 잇는 거점 성곽으로 보기도 한다.

 

고려 때는 한강과 서해바다를 살피는 요충지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그런데로 밥

값을 했다. 특히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에서 왜군을 때려잡은 권율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

을 쳤는데,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

게 하면서 서울 수복 작전을 펼쳤다. 호암산은 서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완전

히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현재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리 소

홀과 대자연의 무심한 장난, 덧없는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서서히 녹아내렸고, 산꾼들의 발길이 성곽

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산성 내에 늙은 존재로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 건물터, 석구상 등이 있으며, 불영암이란 작

은 절이 있다. 성곽은 동벽이 그나마 잘 남아있고, 북문터 주변과 서문터 주변, 남문터 주변에 조금씩 남

아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석구상 주변에서 북문터, 석수역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능선에서 남문

터, 불영암 남쪽 가파른 곳에서 서문터가 새롭게 확인되어 3개의 성문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대

자연에 묻힌 채, 강제로 숨바꼭질을 하던 성벽 흔적을 많이 건져내었다. 이들 성문터와 성벽 흔적들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그들이 산성의 흩어진 흔적이자 살점이었던 것이다.

 

호암산성은 석구상과 한우물, 제2한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서울 호암산성'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2. 칼바위전망대

호암산의 주요 명물 바위로 꼽히는 칼바위 위쪽 벼랑에 닦여진 전망대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바로 밑

에 칼바위와 시흥동 벽산아파트를 비롯해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안양시, 시흥시,

부천시, 인천시, 그리고 멀리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잡힌다.

 

3. 호암산 칼바위

칼바위전망대에서 밑을 바라보면 날카롭게 생긴 견고한 돌덩어리가 보일 것이다. 그것이 호암산의 명

물 바위로 꼽히는 칼바위이다. 칼바위란 이름 그대로 날카로운 칼날처럼 생긴 바위로 이런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재미난 전설이 거의 있기 마련이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 고을까지 쳐들어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무수히 때려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크게 쫄은 왜장은 그에게 호암산 중턱에 있는 칼바위에서 턱걸이 내기를 해서 이

기면 물러가겠다며 제안을 했다.

하여 장사와 왜장이 특별히 뽑은 왜군 장사는 칼바위에서 운명의 턱걸이 시합을 벌였는데, 꽤 자신만

만했던 왜군은 턱걸이가 100번째에 이를 무렵, 힘이 다하여 바위 밑으로 추락해 골로 가고 말았다. 그

때 바위의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시흥 고을 장사가 내기에서 이기자 약속 어기기를 다반사처럼 하던 왜군이 크게 겁을 먹

으며 후퇴했다. 이에 긴장이 풀린 장사는 인근에서 소변을 보았는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했던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갔다고 하며, 그 바위가 칼바위 옆에 있는 팽이바위라는 것이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 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다고 한다. 하여 6.25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지역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바위가 들어앉은 곳이 완전 벼랑이라 바위 접근이 영 좋지 못해 접근을 통제하고 있으며, 바위 밑으로

벽산아파트단지가 손에 잡힐듯 바라보인다.

 

4. 칼바위 옆에 있는 팽이바위

 

5. 칼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와 시흥동, 독산동, 가산동,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등

 

6. 칼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동과 호암산 남쪽 자락, 광명시, 도덕산, 구름산, 가학산, 시흥시, 안양시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