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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벽송사 경내와 지리산 산줄기

산자락을 따라 층층이 이어진 벽송사 경내 너머로 지리산의 첩첩한 산주름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지

금은 벽송사가 3층석탑 밑에 펼쳐져 있지만 원래 벽송사는 3층석탑 주변에 있었다.

 

2. 벽송사3층석탑

벽송사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3층석탑은 이곳의 유일한 국가 보물이다. 원래 석탑 서쪽에 대웅전이

있었는데, 6.25 시절에 빨치산 패거리에 의해 절이 오염되었고, 국군이 그것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절이 완전히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다. 다행히 석탑과 부도탑은 살아남았으며, 1960년대에 이곳 밑에

절을 중창하고 원래 자리는 공터로 두었다.

 

이 석탑은 법당(대웅전) 앞이 아닌 옆에 있었다는 특징이 있는데, 신라 석탑 양식을 지니고 있어 예전

에는 신라 후기나 고려, 늦어도 조선 초기 탑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이제는 신라 탑을 흉내낸 16세기

석탑으로 해석하여 안내문에 내놓고 있다. 물론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탑의 높이는 3.5m로 바닥돌과 2중 기단, 3층 탑신, 머리장식을 지니고 있으며, 머리장식으로는 복발

과 노반이 남아있다.

 

3. 3층석탑 옆에 누워있는 고색의 돌덩어리

석등을 받치던 돌덩어리로 여겨진다. 그 석등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지금은 밑도리만

덩그러니 남아 세월무상을 느끼게 한다.

 

4. 미인송

벽송사 제일 윗부분에 뿌리를 내린 잘생긴 소나무로 그에게 기원을 하면 미인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나무의 이름이 미인송이라고. 추정 나이는 도인송과 비슷한 것으로 보이며, 3층석탑 주변에 늘 일품

그늘을 드리운다.

 

5. 밑에서 바라본 미인송의 위엄

옛 벽송사 자리 밑에 둥지를 튼 새 벽송사와 속세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것일까? 나무가 곧게 자라나

지 못하고 남쪽 방향으로 크게 휘어져 있다. 그래서 그의 허리가 부러질까 우려되어 철기둥을 세워 그

의 몸을 지탱하게 했다.

 

6. 바로 밑에서 바라본 도인송의 윗도리

 

7. 벽송사 원통전에 봉안된 금동 피부의 관세음보살상

관세음보살상 뒤로 11면 관세음보살이 그려진 관세음후불탱이 있고, 그 좌우로 지장탱과 신중탱이 자

리한다.

 

8. 벽송사 간월루

팔작지붕 2층 건물로 수행선방으로 살아가고 있다.

 

9. 평화롭고 정갈한 모습의 원통전, 벽송선원 앞뜨락

 

10. 요사채로 살아가고 있는 청허당

 

11. 밑에서 바라본 벽송사 경내

벽송사는 1520년에 벽송 지엄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경내 윗쪽에 있는 신라 양식을 지닌 3

층석탑을 이유로 신라 후기에서 고려, 조선 초에 창건된 것이라 했으나 요즘에는 1520년 벽송 지엄

창건설을 크게 내세운다. 만약 그 이전부터 절이 있었다면 1520년은 창건 시기가 아닌 중창 시기가

된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했으며,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등의 고승들

이 앞다투어 여기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의 중심이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1704년 환성지안이 크게 중수했으며, 이때 법당과 선원, 강당 등 30여 동의 건물을 지녔다. 머무는

승려는 300여 명에 이르렀으며, 부속암자는 10여 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이후 300년 가까이 조선불

교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하지만 6.25 시절 빨치산 패거리가 지리산에 들어가 난리를 피우면서 벽송사를 접수해 야전병원으

로 삼았으며, 국군의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벽송사가 완전히 전소되는 비운을 겪는다. 이후 1960년

대에 구한원응이 원래 자리 밑에 절을 중창했다.

 

벽송사는 지형을 따라 크게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윗쪽이 옛 벽송사 자리로 3층석탑과 부

도탑 3기, 미인송, 도인송이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새 벽송사가 둥지를 틀었다. 절이 남쪽을 향하

고 있어 지리산의 첩첩한 산주름이 시야에 들어오며 완전 산간벽지라 잠시 속세를 등지며 숨어있기

에 좋다. 또한 수행 사찰이라 많은 승려들이 여기서 수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