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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빈안씨묘역으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창빈안씨 신도비 직전)

국립서울현충원 배꼽 부분에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가 있다. 군인과 애국지사, 역대 대통령의 유택

밖에는 없을 것 같은 현충원에 뜬금없이 조선 왕족의 늙은 무덤이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저건 뭐지?'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현충원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창빈 묘역은 이곳의 오랜 주인으로 현

충원 일대를 거느렸다.

1954년 이후 국립묘지가 닦이면서 묘역에 딸린 토지 대부분이 호국신의 공간이 되었고, 1965년 묘

역 북쪽에 이승만 전대통령의 묘역을, 그리고 2009년에는 바로 남쪽에 김대중 전대통령의 묘역이 닦

이면서 묘역은 더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2010년 이전에는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도, 안내문도 전혀 없었다. 외진 곳도 아니고 현

충원 한복판에 있음에도 어떠한 안내문도 없었으니 그 앞을 지나쳐도 전혀 모른 것이다. 다행히 2010

년 이후, 묘역 북쪽에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졌고 현충원 안내도에도 그의 묘역이 표시되면서

뒤늦게나마 약간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곳의 오랜 주인이자 터줏대감임에도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잉여로운 신세로 고통받고 있는 창빈

안씨묘역, 그렇다면 묘역의 주인공, 창빈안씨는 누구인가?

창빈(1499~1549)은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의 후궁이다. 1499년 경기도 시흥에서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났다고 전한다.

집안이 어려워서 1507년에 궁녀로 들어갔으며, 20세에 중종의 사랑을 받아 22세에 상궁으로 승급되

었다. 그녀는 행동이 단정하고 정숙했으며,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로 덕망이 높았다.

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왕비)의 총애를 받았으며, 시어미의 후원으로

31살에 숙원<淑媛, 내명부(內命婦) 종4품>이 되었고 이어서 숙용<淑容, 내명부 종3품>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永陽君), 덕흥군(德興君), 정신옹주(靜愼翁主) 등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

중에서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아비이다. (덕흥군은 선조 시절에 덕흥

대원군으로 추존됨, 즉 조선 최초의 대원군임)

 

창빈은 1549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처음에는 양주 땅 장흥(현 양주시 장흥면)에 묘역을

썼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2. 창빈안씨 신도비

창빈안씨묘역 북쪽 소나무 숲에는 창빈안씨의 신도비가 있다. 1683년에 왕명으로 마련된 것으로 비

문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신정(申晸, 1628~1687)이 짓고 글씨는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왕족 출신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비석 높이는 3m로 귀부와 이수를 갖춘 다른 신도비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네

모난 바닥돌에 하얀 피부의 기단석(基壇石)을 얹히고 그 위에 날씬한 몸매의 비신을 심어 창빈의 일

대기를 적었으며, 비석 꼭대기는 지붕돌로 마무리지었다.

 

3. 소나무숲 솔내음을 두고두고 누리는 창빈안씨 신도비

 

4. 창빈안씨묘역 (무덤 봉분과 장명등, 상석, 묘표, 곡장, 망주석 등)

창빈안씨묘역은 조선의 수많은 후궁 묘역의 하나로 자칫 잊혀질 뻔했으나 덕흥군의 아들이자 그녀의

손자인 하성군(河城君,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 호강을 받게 된다. 하성군은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때마침 적당한 인물이 없어서 정말 운이 좋게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에게는 행운

이었으나 조선과 이 땅에게는 불행이었음)

허나 선조는 적통이 아닌 서자(庶子)의 아들이란 이유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여 자신의 권위

를 높이고자 아버지와 할머니를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그들을 높이는데 지나치게 공을 들인다. 하여

1577년 할머니에게 창빈이란 시호를 올렸으며, 무덤의 격을 능으로 높이고 묘역을 현충원 일대로 확

장시켰다. 능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동작진(銅雀鎭)의 이름을 따 동작릉(銅雀陵)이라 했으며, 아비

인 덕흥군의 묘역 또한 백성들의 입소문과 많은 돈을 이용해 잠시나마 덕릉(德陵)으로 높이는데 성공

했다.

 

하지만 선조가 1608년 골로 가자 동작릉은 창빈안씨묘역으로 격하되고 만다. 하지만 이는 원래의 자

리로 돌아온 것 뿐이다. 창빈의 성격상 동작릉이란 이름에 꽤 부담을 가지며 손자를 원망했을지도 모

른다.

 

참고로 창빈의 아비인 안탄대는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겸손했다. 딸이 제왕의 후궁이 되었음에도 부

귀영화와 출세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어린이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성품을 알만하다.

그는 스스로 천인(賤人)이라 자처하고 계속 가난하게 살았으며, 벼슬은 종7품 유순부위(油順府尉)가

전부이다. 그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으며, 묘역은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5. 옆에서 바라본 창빈안씨묘역

못난 손자(선조)에 의해 한때 능의 대접까지 받았지만 창빈 묘역은 조촐하기 그지 없다. 전형적인 후

궁의 무덤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동그란 봉분 앞에는 수려한 조각의 이수

를 지닌 묘표(묘비)와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좌우로 조그만 망주석(望柱石) 1쌍, 그

앞쪽에는 홀을 쥐어든 문인석 1쌍이 무덤을 지킨다. 그리고 봉분 뒤쪽에는 기와를 지닌 곡장이 둘러

져 있다.

 

6. 고된 세월의 때로 가득한 창빈안씨 묘표

묘표 이수에는 구름과 용이 뒤엉킨 고품격 조각이 새겨져 있다.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이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저기에 적당히 색만 입히면 3D영화처럼 실감이 클 것

이다.

 

7. 창빈안씨 묘역 문인석

500년 가까운 세월에도 정정한 모습을 거의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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