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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강릉 늦가을 나들이


~~~ 늦가을 조선 왕릉 나들이, 강릉~태릉 ~~~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
▲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
 


가을이 늦가을로 숙성되어 가던 10월 끝 무렵의 어느 평화로운 날, 집에서 가까운 태릉(
태/강릉)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동네 전철역인 방학역(1호선)에서 전철
을 타고 화랑대역(6호선, 석계역에서 6호선으로 환승)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서울시내
버스 202번(불암동↔후암동)을 타고 태릉에서 두 발을 내렸는데, 간만에 찾은 태릉(泰陵
)의 짙푸른 숲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이다.
(본글에서는 강릉과 태릉~강릉 숲길만 소개함, 태릉은 별도의 글에서)


♠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康陵) - 국가 사적

▲  남쪽에서 바라본 강릉 금천교(禁川橋)

태릉 정문에 이르니 시커먼 피부의 매표소가 나타나 천하에서 가장 빈약한 머니인 내 호주머
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그곳을 거쳐야만 태릉과 강릉, 태릉~강릉 숲길을 모두 누릴 수 있기에
입장료 1,000원을 흔쾌히 치루고 유료(有料)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태/강릉에 공개된 곳을 싹 살펴보니 족히 2시간은 넘게 걸렸는데, 간만에 왔으니 4자리 입장
료가 아깝지 않도록 구석구석 둘러보고 늦가을의 향연도 여유롭게 누렸다. 그래야 나중에 명
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문정왕후 아줌마한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태/강릉이 속한 노원구(蘆原區) 지역 주민(주민등록상 기준)은 50% 할인 혜택이 있으
며, 문화가 있는 날인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무료로 개방하니 이런 것을 활용해보는 것도 괜
찮다.

태릉에서 강릉으로 가려면 태릉~강릉 숲길을 넘거나 화랑로를 이용해야 된다. 숲길은 고개를
넘어 20분 정도 가야 되는데, 그 숲길은 늘 열어두지 않고 1년에 일부 날에만 발을 들일 수
있다. (4~5월 또는 5~6월, 그리고 10~11월 정도에만 개방함) 하여 그 외에 기간에는 무조건
화랑로를 거쳐야 된다.
태릉 매표소에서 화랑로를 거쳐 강릉 정문까지는 걸어서 17~18분 정도 걸리며, 보다 편하게
가고 싶다면 태릉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세 정류장 거리인 삼육대에서 내려 접근하면
된다. 또한 강릉에서도 입장권을 팔고 있으므로 강릉에서 태릉으로 넘어가도 된다.

▲  옆에서 바라본 금천교와 메마른
금천(禁川)

▲  북쪽에서 바라본 금천교


강릉 능역(陵域) 앞에는 금천교와 메마른 금천이 있다. 조선 왕릉은 능역 주위를 흐르는 개울
이나 계곡을 금천으로 삼아 능역 중심부와 바깥 부분의 경계로 삼고 금천교란 돌다리를 세워
능역 중심부로 인도한다. 강릉 이웃인 태릉(泰陵)에도 금천교와 금천이 있으나 홍살문 앞 금
천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금천교도 메워져 땅바닥에 깃든 화석처럼 되어버렸다.
그에 반해 강릉은 금천과 금천교가 잘 남아있으나 가을 가뭄이라 그런지 금천을 메웠을 수분
은 사라지고 낙엽만 가득하여 세월무상을 몸소 보여준다. 이곳 개울은 불암산에서 발원한 것
으로 태/강릉은 불암산(佛巖山)의 남쪽 끝을 붙잡고 있다. 


▲  수분은 없고 그저 낙엽만 가득한 강릉 금천
수목에게 버림받은 나뭇잎들은 우울한 이름 '낙엽'이 되어 금천의
새로운 물을 이루고 있다.

▲  강릉 홍살문

금천교를 지나면 차디찬 인상의 붉은 홍살문이 나타난다. 그는 왕릉과 관아, 향교, 왕족과 귀
족의 사당과 묘역 등 권력과 관련된 곳에 꼭 등장하는 존재로 나그네로 하여금 엄숙과 예의를
강조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정자각까지 박석(薄石)이 입혀진 향로(香路)와 어로(御路)가 펼쳐진다. 이들
을 한 덩어리로 묶어 참도(參道)라 하는데, 어로는 제왕이 걷는 길이며, 왼쪽에 조금 높은 향
로<신도(神道)>는 제향 때 향과 축문(祝文)을 들고 가는 길이다. 즉 능의 주인이 걷는 길이다.
그토록 사람을 대놓고 가리는 콧대 높은 홍살문과 참도이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그들의 눈치를
더 이상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허나 그렇다고 그들의 가치가 저렴해진 것은 아니다. 어디까
지나 이용 대상이 넓어진 것 뿐이며 엄숙까지는 아니더라도 관람 예의는 꼭 지켜야 된다.


▲  강릉 동쪽 숲길
늦가을이 그려낸 숲길이 상큼하게 펼쳐져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  홍살문 동쪽 숲속에 버려진 돌덩어리들

세월을 진하게 탄 검은 피부의 커다란 돌덩어리 4개가 세월을 원망하며 마음에도 없는 한가로
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숲 그늘에 가려진 그들의 생김새를 보니 옛 수복방이나 수라간을 받
쳐들던 주춧돌로 여겨지는데, 강릉의 옛 유물인만큼 쓸모없는 쓰레기 마냥 저리 방치할 것이
아니라 한쪽에 잘 수습하여 그들의 정체를 귀띔해주는 안내문이라도 세워주는 것이 도리가 아
닐까 싶다.


▲  강릉 비각(碑閣)과 수라간터

정자각 동쪽에는 비각과 수라간터가 있다. 비각에는 지붕돌을 지닌 비석(표석)이 깃들여져 있
는데, 그는 1753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석 앞면의 '조선국 명종대왕강릉 인순왕후 부좌(朝鮮國
明宗大王康陵 仁順王后 祔左)'라 쓰여 있어 강릉의 정체를 알려준다. 이 글씨는 태릉 비석(표
석)을 쓴 홍계희(洪啓禧)의 필체이며, 뒷면 글씨는 태릉 비석에도 참여했던 낙풍군 이무(洛豊
君 李楙)가 담당했다.
비각 옆에는 윤곽만 아련히 남은 수라간터가 있는데, 수라간은 제향 때 제사 음식을 데우거나
손질하던 작은 건물이다. 태릉도 그렇고 강릉도 그 터만 남아있다.

▲  비각에 깃든 강릉 비석(표석)

▲  최근에 복원된 수복방(守僕房)
능을 지키고 관리하는 수복(守僕)의
공간이다.


▲  강릉 정자각(丁字閣)

참도의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정자각이 있다. 싹둑 다듬은 돌로 석축을 높이 다지고 그 위
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丁'처럼 생겨서 정자각이란 단순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자각은 능 제향을 올리는 공간으로 제왕은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 제사를 치르고 반대쪽 우
측 계단으로 내려갔다. 건물 안에는 제향 때 쓰이는 여러 상(床)들이 있으며, 매년 양력 4월
4째 일요일에 강릉 제향이 열린다. 하여 그때만 잠깐 북적거릴 뿐, 그 외에는 썰렁하다.
그럼 여기서 강릉 주인인 명종(明宗)과 인순왕후(仁順王后)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고색이 묻어난 정자각 우측 돌계단
왼쪽 돌계단은 참배를 온 제왕이, 오른쪽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람들이 이용했다.
(지금은 어느 계단을 이용하든 상관 없음)


명종(1534~1567)은 조선 13대 군주로 중종(中宗. 11대 군주)의 아들이다. 그 유명한 문정왕후
(文定王后) 윤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이환(李峘), 자는 대양(對陽)이며, 1539년에 경원대군(慶
原大君)에 봉해졌다. <왕후 소생 왕자를 대군(大君)이라 하였음>
문정왕후가 33살에 용을 써서 얻은 막내 아들로 왕후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을 얻기 전
까지는 양아들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소생의 세자를 끼고 돌았으나 아들이 생기면서 윤원형(
尹元衡) 등과 함께 자신의 아들을 차기 왕위로 올리고자 권력 싸움에 뛰어든다. 장경왕후의
오라비인 윤임(尹任)은 김안로(金安老) 등과 왕후 폐위를 계획했으나 실패했으며, 1544년 중
종이 승하하자 윤임의 외조카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조선 12대 군주인 인종(仁宗)
이다.
인종은 심성이 좋고 검소함을 추구했던 인물로 군주감에 적합했으나 젊은 나이에 비해 비리비
리한 상태라 재위 8개월 만에 눈을 감고 만다. 그의 죽음에는 새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준 정신
적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종은 아들이 없다 보니 마땅한 계승권자가 없어서 자연히 문정왕후 소생인 경원대군에게 대
권이 넘어갔다. 하여 11살 나이에 조선의 주인이 되었고, 문정왕후가 어린 아들을 대신해 수
렴청정(垂簾聽政)을 펼치게 되었다.
왕후는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를 일으켜 오랜 정적인 윤임 패거리를 때려잡았으며, 1547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李沂)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란 익
명의 벽서가 발견된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통해 윤임 패거리의 남은 일당
들을 싹 청소했다. 이때 송인수(宋麟壽) 등이 처단되었고, 이언적(李彦迪)과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등 20여 명이 유배에 처해졌으며, 중종의 8번째 서자인 봉성군(鳳城君)은 역
모의 빌미를 이유로 처단되었다. 그렇게 적지 않은 피를 적시며 왕후의 권력은 조선 제일이
되었고, 왕후의 아우인 윤원형의 권세 또한 백두산만큼 올라갔다.
세상에서는 장경왕후 쪽의 윤임 패거리를 대윤(大尹), 문정왕후와 윤원형 패거리를 소윤(少尹
)이라 부른다.


▲  정자각 내부의 여러 제삿상들

왕후는 조정을 좌지우지하여 인사권까지 마음대로 남용했다. 또한 왕이 말을 듣지 않으면 '주
상(主上)은 이 어미가 아니면 어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소~!'
호통을 치고 심지어 회
초리를 들고 때리기도 했다. 1553년 수렴청정을 접고 왕에게 친정을 권했으나 이후로도 계속
정치에 관여했다.
어미의 지독한 권력욕에 토가 나올 정도였던 명종은 을사사화 때 처단된 사림 패거리들을 신
원하고 사림(士林)들을 등용해 나름의 세력을 만들려고 했으나 어미의 방해로 모두 실패하면
서 정치에 대한 의지를 잠시 잃게 된다.

1565년 5월 5일, 그 위엄돋는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명종은 크게 곡소리를 내며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 그러자 신하들은 왕후가 왕의 원기를 챙길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내용을 내세
우니 왕은 그 말에 겨우 숟가락을 들어 죽을 먹었다. 허나 이후 1달 동안 거의 밥을 제대로
들지 않았을 정도로 명종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하여 신하들이 왕의 업무를 줄이자고 청하자 명종은 크게 발끈하여 모든 공사(公事)를 보고할
것을 명한다. 어미의 그늘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군주 노릇을 원했던 것이다. 하여 인재를 널
리 등용하고 좋은 정치를 펴려고 노력했다. 그때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
향인 안동(安東)에 머물러 있자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질과 스트레스로 몸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결국 몸저 눕게 되었고, 어미가 간지 겨우
2년 만인 1567년 6월 28일, 축시(丑時, 1~3시)에 34세의 나이로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했다.


▲  '가자'라 불리는 가마
제향에 쓰이는 음식을 나르는 가마이다.


명종은 어미 치마폭에 묻혀 제대로 군주 노릇을 못했으며, 어미가 간 이후, 정신을 차려보기
도 했으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그러다 보니 마땅한 업적도 없다. 그의 재위 시절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가가 국정을 개판치면서 나라 사정은 피폐해졌고,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임꺽정<임
거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까지 민란을 일으켰다. 또한 왜구들이 1555년 을묘왜란(乙
卯倭亂)을 일으켜 전남 해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등, 나라 안팎으로 영 상태가 좋지가 못했다.
왜구의 소란을 계기로 임시 관청인 비변사(備邊司)가 정규 관청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명종은 인순왕후 심씨(1532~1575) 외에 순빈(順嬪) 이씨, 숙의(淑儀)신씨, 숙의정씨, 또 다른
숙의정씨, 숙의한씨, 또 다른 숙의신씨 등의 왕후, 후궁을 두었으나 자식은 인순왕후 소생의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전부이다. 그 순회세자도 겨우 12살에 죽어 그의 자손은 끊기게 되었다.
하여 중종의 7번째 아들인 덕흥군(德興君, 덕흥대원군)의 3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을 양자
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 하성군이 임진왜란으로 허벌나게 고생을 하고 괴팍한 정치를
펼쳤던 조선 14대 군주 선조(宣祖)이다. 선조는 명종의 조카가 되며, 덕흥군은 중종의 후궁으
로 어진 여인으로 평판이 좋았던 창빈(昌嬪)안씨의 소생이다.

명종의 시호는 '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며, 어미 묘인 태릉
동쪽에 묻혀 죽어서도 어미의 그늘에 묻혔다. 자신을 허수아비 왕처럼 만들고 국정을 농단하
여 나라를 개판으로 만든 어미가 미웠지만 그 어미의 희생이 있었기에 명종 자신이 있었고 왕
까지 되었다. 그래서 어미에게 적지 않게 의지를 했고, 어미의 능 이름을 태릉이라 하며 기존
의 왕릉보다 무지 크게 지었다. 세상에서는 태릉과 강릉을 한 덩어리로 묶어 태강릉, 또는 강
태릉이라 부르며, '서울 태릉과 강릉'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정자각 서쪽 돌계단

명종의 왕후인 인순왕후(1532~1575)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이다. 청송심
씨 집안으로 세종(世宗)의 왕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6대손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
인 이대(李薱)의 딸이다.

1542년 10살의 나이로 2살 연하인 경원대군과 혼인을 했으며, 1545년 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후가 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를 생산했으나 1563년에 사망하면서 자식은 남기지 못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자 왕의 조카인 하성군(선조)을 왕위 계승권자로 정했으며, 그를 후사로
정했다는 왕의 봉서(封書)를 보이며 하성군 즉위를 도왔다.

선조가 왕이 되면서 왕대비(王大妃)가 되었으며, 새 왕이 나이가 어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의 건의로 8개월 동안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이후 1575년 창경궁(昌慶宮)에서 43세의 나이
로 승하했다.


▲  강릉 능침(陵寢)

능침이라 불리는 저 언덕에는 명종과 인순왕후의 쌍분(雙墳)이 나란히 깃들여져 있다. 저곳은
다른 조선 왕릉과 마찬가지로 금지구역으로 묶여있어 이렇게 밑에서 휴전선 너머 땅을 바라보
듯 해야된다.
난간석과 병풍석(屛風石)을 지닌 커다란 봉분<封墳, 능상(陵上)> 주위로 석호(石虎) 2쌍과 석
양(石羊) 2쌍이 둘러싸고 있으며, 봉분 뒷쪽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
遊石)과 고석(鼓石), 장명등(長命燈)이 있고,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 무인
석(武人石) 1쌍, 석마(石馬) 1쌍이 자리하여 능을 지킨다.

능침과 능역의 규모는 태릉보다 작으며, 능역 북쪽과 동쪽에는 삼육대학교, 남쪽에는 화랑로,
서쪽에는 태릉선수촌이 크게 들어앉아 능역을 크게 갉아먹었다. (동쪽 너머로 바로 삼육대가
보임) 하여 태릉선수촌 뒷쪽 숲으로 가늘게 태릉을 이어주는 숲길이 있다.
게다가 태릉은 오래전에 개방되어 관광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강릉은 계속 봉인된 채, 속세의
접근을 막다가 2014년에 비로소 속세에 해방되었다. 오랜 세월 금지된 땅으로 묶였던 탓에 강
릉 주변과 태릉~강릉 숲은 매우 울창하며, 강릉 참도에는 이끼가 두텁게 끼어있어 왕릉의 고
즈넉함과 대자연의 소소한의 멋을 보여준다.

* 강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26-17 (화랑로681, ☎ 02-972-0370)


▲  최대한 확대해서 본 강릉 능침


♠  태릉~강릉 숲길

▲  태릉~강릉 숲길 출입구 (강릉 출입구)

강릉을 둘러보니 거의 17시 직전이다. 태릉~강릉 숲길은 적어도 17시까지 양쪽 출입구를 지나
야 반대편 출입구로 넘어갈 수 있다. 하여 총알 같이 뛰어 간신히 17시에 맞춰 출입구를 통과
했다. 출입구에는 태릉/강릉 직원들이 나와 관람객들을 통제하며, 맞은편 출입구로 연락을 취
해 그곳으로 가는 인원수를 알려준다. 그만큼 숲길 통제에 철저하다.

강릉 출입구는 강릉 능침 바로 서쪽이다. 소나무들이 운치를 부리는 그 길로 들어서면 태릉~
강릉 숲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2014년에 강릉과 함께 개방된 상큼한 길로 거리는 1.8km이다.
숲이 무성하고 풍경이 고우며, 중간에 고개를 넘어야되서 오르막길이 펼쳐지나 그 경사는 그
리 각박하지 않다. 고개를 넘으면 태릉까지 내리막이 펼쳐지며, 태릉 쪽에는 조촐하게 계곡도
흘러 태릉의 금천 역할을 한다.
이곳 숲길은 나무가 삼삼하여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데, 그저 나무와 하늘만 보일 뿐이다. 강
릉 쪽에서는 태릉선수촌과 삼육대 건물이 조금 보이고, 철책 북쪽 너머로 불암산 산길과 제명
호가 잠깐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고개 정상에 이르면 불암산이 훤히 시야에 잡힌다.

태릉~강릉 숲길은 불암산의 남쪽 끝을 잡는 산줄기로 이곳 역시 불암산의 영역이다. 단 불암
산 산길에서 접근할 수는 없으며, 무조건 태릉이나 강릉에서 입장료를 치루고 들어가야 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숲길이나 늘 열어두지 않고 1년에 일부 날에만 빗장을 연다. (4~5월 또는 5~
6월, 그리고 10~11월 정도에만 개방함) 하여 나머지 기간에는 빗장을 걸어 접근을 통제하며,
이때는 화랑로를 통해 두 왕릉을 오가야 된다. 이렇게 야속하게 통제를 가하는 것은 이곳 숲
과 자연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숲길 통행시간은 9~17시까지로 적어도 17시까지 태릉이나 강릉 양쪽 출입구를 지나야 반대편
으로 넘어갈 수 있다.(11월은 16시30분까지임)

태릉에 왔다면 강릉과 함께 이 숲길도 꼭 거닐기 바란다. 인간의 말과 언어가 무색할 정도로
정말 달달하고 아름다운 길로 자연상태가 매우 좋으며, 서울에 있는 조선 왕릉 숲길 중 단연
으뜸으로 세우고 싶다.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태릉~강릉 숲길에 직접 발을 들이면서 이 숲길
에 단단히 퐁당퐁당 빠져들었는데, 내가 조물주거나 그와 비슷한 존재라면 이 풍경을 집으로
고이 가져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누리고 싶다.


▲  태릉~강릉 숲길 (강릉 쪽) ①

▲  태릉~강릉 숲길 (강릉 쪽) ②

태릉~강릉 숲길 남쪽에는 태릉선수촌이 넓게 자리해 있다. 태릉 쪽 숲길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고개를 넘어 강릉 쪽으로 가면 그곳이 조금 시야에 들어오는데, 바로 태릉선수촌 때문에 태/
강릉은 서로 떨어지게 되었고 강릉과 이 숲길은 오랫동안 금지된 공간에 갇혀 속세의 뇌리 속
에 잊혀졌다. 그 덕에 숲이 잘 보존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공간도 엄연히 태/강릉 영역이었으므로 역사 복원과 문화유산 복원, 숲 복원을 위
해 태릉선수촌과 그에 딸린 시설들을 완전히 내보내고 태/강릉 영역으로 환원시켜 이 일대를
커다란 사적공원 겸 자연공원으로 삼아 보존해야될 것이다.


▲  태릉~강릉 숲길 고개 정상
고개 정상부에 관리인이 머무는 초소가 있다.

▲  태릉~강릉 숲길 (태릉 쪽) ①

대자연이 빚은 이 아름다운 공간에 나란 존재를 던져 넣으니 마치 늦가을의 향연에 초청을 받
은 듯, 마음이 즐겁다. 허나 한편으로는 '가을이 가면 이제 올해는 끝이구나' 싶은 우울감까
지 밀려와 그야말로 병주고 약을 준다.


▲  태릉~강릉 숲길 (태릉 쪽) ②
숲길이 고와서 아무리 걸어도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이런 길이라면
1.8km가 아니라 18km도 거뜬하다.
 

그림 같은 숲길을 넘어와 태릉 출입구로 나오니 태릉 직원이 숲길 출입구에 빗장을 건다. 숲
길 중간에 샛길 같은 것이 조금 보였으나 모두 통제구역이며, 강릉 쪽은 철책 너머로 불암산
산길이 있으나 넘어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니 무조건 숲길 반대편 출입구로 나오는
것이 좋다.
마음 같아서는 이 숲길을 1번 더 왕복하고 싶으나 시간이 늦어 그러지를 못한다. 하여 다음
인연으로 애써 넘기고 태릉을 나왔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태릉~강릉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
을 고한다.
(태릉 관련 글은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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