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법성포 우편소터

법성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진내리는 조선 때 법성진과 법성창을 지닌 진량면(현재 법성면)의 중

심지였다. (현재는 진내리와 법성리가 법성면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 진내리에는 법성 고을의 동헌

과 작청, 장청 등의 관아와 객사, 군기고, 선소, 해창, 세곡고, 사창, 동조정 등이 있었으며, 영광 지

역의 대표 특산물인 영광굴비의 본산지이기도 하다.

법성포에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법성진성의 일부 흔적과 법성진숲쟁이란 오래된 숲이 있으며, 서쪽

해변에는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로 잘못 알려진 불교 성지가 있다. 이번 영광 법성포 나들이는 법성진

성과 법성진숲쟁이, 그리고 법성포 불교도래지를 보고자 찾은 것이다.

 

법성진성 동쪽 부분에는 20세기 초 유적이 여럿 있는데, 이곳에는 1910년대에 지어진 우편소가 있었

다. 허나 그 우편소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주택과 수풀이 들어섰다.

 

2. 법성진성 축성 오백주년기념비

법성진성은 1514년에 조성된 것으로 고약한 왜정 때 상당수 파괴되어 일부만 겨우 남아있다. 2014년

에 법성진성 축성 500주년을 기념하고 장차 법성진성 복원을 다짐하는 차원에서 이 기념비를 마련했

는데, 기념비의 매끄러운 피부에는 '축성오백주년기념' 8자가 새겨져 있으며, 뒤에 보이는 하얀 피부

의 벽은 근래 복원 재현된 법성진성의 동쪽 성곽이다.

 

3. 서쪽을 향해 흘러가는 법성진성 동쪽 부분과 성곽 위에 둥지를 튼 가옥들

 

4. 법성진성 비석군

법성포 곳곳에 흩어져 있던 늙은 비석 10여 기를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

들로 법성진을 관리한 법성진 만호와 첨사를 비롯해 영광군수, 전라도 관찰사의 선정비와 불망비들이

다.

 

5. 석조 보호각에 소중히 감싸인 법성포 철비

철비는 철로 만든 것으로 천하에 거의 흔치 않은 비문 스타일이다. 이 녹슨 철비는 법성진첨사(수군첨

절제사)였던 홍대항을 기리고자 세운 선정비로 비석의 이름은 '절제사 홍후대항 청덕선정비'이다.

철비의 주인공인 홍대항은 1851년 법성진첨사로 부임해 2년 동안 이곳을 관리했다. 그는 지역 백성들

에게 선정을 베풀고 교화에 힘을 썼으며, 전라도 12고을의 세곡 업무를 공평무사하게 수행하여 고을

수령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법성진은 전라도 12고을에서 징수한 세곡과 공납을 보관하여 서울로 보

내던 곳임)

 

법성포 백성들과 전라도 12고을 수령들은 홍대항을 기리고자 1853년에 이 비석을 세웠는데, 이것과

는 별도로 '충파비'란 철비도 백성들에게 받았다. 충파비는 두꺼비의 보은 정신을 뜻하는 것으로 세간

에는 열병에 걸렸을 때 이 비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면 낫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지역 백성들이 아주

애지중지했다. 이렇듯 홍대항은 철비를 1개도 아닌 2개씩이나 받은 인물로 비록 천하에 크게 이름을

알리지는 못했지만 무지 혼란했던 19세기 한복판에 목민관의 역할을 잘했던 모양이다.

 

충파비는 1925년 지역 백성들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하여 두 동강이 나버렸는데, 비석

을 복원하지 않고 이 철비 옆에 묻었다. 그러다가 1940년대에 왜정이 철을 마구잡이로 공출하는 과정

에서 이 철비까지 군침을 흘리며 강제로 가져가려고 난리를 피웠다. 하여 지역 백성들은 이 철비를 지

키고자 땅에 묻은 충파비를 꺼내어 그것들에게 내주었다. 그래서 왜정은 그 철비만 가져갔고, 홍대항

철비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 철비는 온전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6. 법성포 철비에 쓰인 내용 (절제사 홍후대항 청덕선정비)

한결 같은 마음 굳건한 의지로

매사 옳고 바르게 처리하였네

손수 부지런히 곡식 사들여

기쁘게도 우리에게 보내주었네

1853년(함풍3년) 여름에 전라도 12고을에서

함께 세웠다.

 

7. 법성진성 중심부와 법성진숲쟁이로 인도하는 골목길

 

8. 법성진성을 오르면서 바라본 인의산(165.3m)

 

9. 법성포숲쟁이에 있는 백인기 충용비

이 충용비는 6.25시절 이곳을 지키다 전사한 백인기 지사의 충용을 기리고자 세웠다. 백인기는 법성

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했으며, 1950년 방위군 소위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정헌조 국회의

원의 수행비서직도 담당했다.

1950년 11월 북한군에게 점령된 법성면 등 영광 지역을 수복하고자 전라남도경찰국에 무장지원을

요청하려고 소대원들을 이끌고 광주로 가다가 공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그를 기리고자 지역 유지들과 가족, 친척들이 1951년 5월 독바우3거리에 세웠다가 1981년 6월 이곳

으로 옮겼으며,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매년 백인기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

내고 있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