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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지양산, 매봉산 늦가을 나들이


' 구로구 늦가을 나들이 '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지양산, 매봉산)

궁동저수지생태공원

▲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 안동권씨묘역 구로올레길 매봉산

▲  정선옹주 묘역

▲  구로올레길 매봉산

 


가을이 늦가을로 점점 숙성되어가던 10월 끝 무렵에 구로구 궁동(宮洞) 지역 찾았다. 이
곳에는 정선옹주묘역, 궁동저수지생태공원 등의 상큼한 명소들이 들어있는데, 이들도 오
랜만에 복습하고 매봉산 등 주변 미답처(未踏處)도 여럿 지우고자 겸사겸사 찾았다.

궁동은 서울 구로구(九老區)의 일원으로 동/서/북쪽이 와룡산(臥龍山)과 지양산, 매봉산
산줄기에 막혀있고, 남쪽만 뻥 뚫려있는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농사를 짓던 시골
이었다. 지금도 밭두렁이 적지 않아 전원(田園) 분위기는 여전하다.
참고로 궁동은 법정동명으로 행정동명인 수궁동(水宮洞)의 관할구역이다. 수궁동(水宮洞
)은 온수동(溫水洞)과 궁동을 합친 이름으로 흔히 생각하는 용왕의 수궁(水宮)과는 관련
이 없다.


♠  농업/낚시용 저수지에서 생태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난
궁동저수지생태공원
궁동저수지생태공원
▲  궁동저수지생태공원 동쪽 호수

궁동 한복판에 자리한 궁동저수지생태공원(이하 궁동생태공원)은 기존의 궁동저수지를 손질한
호수공원이다. 짧게는 '궁동생태공원'이라 불리며 저수지 중앙에 도로(오리로)가 지나가면서
강제로 2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서쪽은 2구역, 동쪽은 1구역이라 불리기도 한다. (본글에서는
동쪽 호수, 서쪽 호수로 표시함)
오리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동쪽 호수 옆에 있는 조그만 골목길로 서서울생활과학고에서 회차
하는 시내버스와 차량들이 오갔다.

궁동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궁동저수지는 1943년에 농업용수 해결을 위해 왜정
(倭政)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들었다. 저수지 자리에는 원래 '벼락구덩이 우물'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었는데, 마치 벼락을 맞아 생긴 듯한 구덩이에서 물이 솟아나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허나 궁동 지역 경작지가 종종 물 부족에 허덕이자 왜정은 농업용수 해결과 쌀 수탈
이라는 청사진을 이루고자 우물을 밀어버리고 저수지를 만들었다.

우물에서 솟던 물이 자연히 저수지를 채워주면서 저수지는 거의 마를 날이 없었고, 궁동을 비
롯한 이웃 오류동(梧柳洞) 주민들까지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풍수
지리적으로 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든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아름다운 형태까지 그
럭저럭 띄게 되었다. 하지만 왜정의 수탈은 나날이 심해갔고, 저수지를 왜인(倭人)이 소유하
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온갖 까칠함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 이후 저수지는 국유지로 바뀌었으며, 인근 항동저수지와 함께 서울의 주요 낚시터로 인
기를 누렸다. 게다가 저수지가 넓고 물이 깨끗해 물놀이 수요도 많았으며 연꽃까지 심으면서
한여름에는 연꽃의 화려한 향연까지 펼쳐졌다. 이 땅에서 저수지란 존재가 참 흔한 존재이나
정작 서울에서는 인근 항동(航洞)과 궁동 2곳 밖에는 없었다.
이렇게 서울의 외진 시골로 조용히 묻혀 지내던 궁동은 1970년대 이후 도시화의 물결이 몰아
치면서 많은 변화를 강요받게 된다. 적지 않은 경작지를 밀어내고 연립주택 등의 온갖 주택이
들어서면서 농업 인구와 경작지는 그만큼 줄어들었고, 저수지는 자연히 낚시터의 비중이 커지
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낚시꾼들에게 소정의 이용료를 받아 마을 기금으로 활용했으며, 저
수지가 넓다 보니 배를 타고 관리했다.

낚시터로 밥값을 하던 궁동저수지는 2000년 이후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계속되는 궁동 개발로
시가지는 궁동저수지 남쪽까지 마수를 뻗쳤고, 서울~부천간 도로 확충으로 궁동 북쪽에 도로(
신정로)가 뚫리면서 부일로(1호선 경인선 북쪽 도로)와 그 도로를 잇는 신작로(오리로)를 추
진하게 되었는데, 그 도로가 저수지를 배려하지 않고 저수지의 한복판을 건방지게 가르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저수지는 2개로 갈라졌고 덩치 또한 반토막이 되었다.
이후 수맥에 문제가 생겨 저수지는 날로 야위어갔고 수질까지 영 좋지 않게 변하면서 물고기
까지 등을 돌려 낚시터로 더 이상 부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여 점차 동네 사람들의 근심거
리로 변해갔다. 궁동의 오랜 꿀단지이던 저수지가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인하여 꿀이 쏙 빠진
깨진 단지가 된 것이다.

천덕꾸러기가 된 저수지를 두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심하다가 구로구에서 2003년 9월, 저
수지와 주변 일대 10,205㎡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결심했다. 즉 요즘 전국적으로 유행하
는 생태공원 카드를 내민 것이다. 그래서 39억을 들여 저수지 리모델링을 추진했으나 돈 문제
로 공사가 지연되면서 2008년 4월 완성을 보았다. 이렇게 하여 자칫 폐기될뻔한 위기를 극복
하고 자연 복원을 꿈꾸는 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저수지 주변에는 25,000여 그루의 꽃과 나무를 심고 서쪽 저수지 북쪽에는 3,379㎡의 생태습
지(궁동 생태습지원)까지 닦아 생태공원의 풍경을 돕게 했다. 동쪽 호수에는 연꽃을 심어 예
전의 정취를 조금씩 되찾고 있으며, 100여 마리의 비단잉어를 풀어 저수지를 다시 물고기의
세상으로 돌려놓았다.
서쪽 호수와 동쪽 호수 수면 위로 나무데크 스타일의 생태탐방로를 닦았고, 저수지 복판에 분
수대를 설치했으며, 저수지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팔각형 정자인 수궁정을 두어 쉼터의
역할도 충실히 하도록 했다.
오리로로 저수지가 분단된 탓에 조금은 좁아 보이며, 서쪽 호수의 서쪽 야산에는 궁동을 호령
했던 정선옹주와 안동권씨 묘역이 바짝 자리해 있어 같이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궁동을 넘어 이제는 구로구의 꿀단지로 고개를 든 궁동생태공원은 궁동 산신제를 비롯해 동네
의 여러 행사가 열리는 광장이 되었고, 지역 사람들의 쉼터이자 변변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
던 구로구에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  동쪽 호수를 순찰하고 있는 잉어들의 위엄

궁동저수지가 생태공원으로 새로 태어나면서 이곳을 등졌던 물고기와 많은 수중 동/식물들이
돌아오고 있다. 이런 공간이 계속 생겨나야 인간들에게도 매우 이로울 것인데,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끊임없는 욕심이 대자연과 지구에 계속해서 고
통을 주고 있다.


▲  동쪽 호수를 남북으로 가르는 생태탐방로

▲  축 늘어진 연잎들로 가득한 동쪽 호수 (북쪽에서 본 모습)

동쪽 호수와 서쪽 호수는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서로를 이어주는 작은 수로를 4개를 두
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도로를 냈을 때 저수지를 배려하여 지금처럼 막힌 둑처럼 만들지 않고
밑도리가 뚫린 다리로 놓았다면 저수지가 한때 최악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  궁동저수지 서쪽 호수

동쪽 호수에서 오리로를 넘어가면 저수지의 나머지 부분인 서쪽 호수가 펼쳐진다. 서쪽은 동
쪽과 비슷하게 수면 위로 생태탐방로를 남북으로 내었고, 팔각형 정자인 수궁정을 북쪽에 두
어 경관을 돕게 했다. 동쪽 호수는 연꽃을 잔뜩 심은데 반해, 서쪽 호수는 갈대와 다양한 수
초를 심어 생태호수의 멋을 자아낸다.


▲  서쪽 호수를 장식하고 있는 상큼한 존재들 (토끼와 거북상)

거북의 딱딱한 등짝에는 하얀 피부의 토끼가 귀엽게 서 있다. 저들은 이곳 저수지와 전혀 관
련이 없으나 이곳 행정동명이 '수궁동(水宮洞)'이다 보니 그 이름에 잘 어울리도록 별주부전
(鼈主簿傳)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을 갖다 놓았다.


▲  서쪽 호수에 발을 담구고 있는 수궁정(水宮亭)

▲  궁동생태습지원

서쪽 호수 북쪽에는 생태습지원이 조촐하게 닦여져 있다. 2013년 10월에 만들어서 그해 12월
완성을 보았는데, 환경부에서 생태계보전협력금 반환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했다. 이 협력금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납부했다.
습지원의 면적은 3,379㎡로 여러 습지식물이 살아가고 있으며, 궁동저수지를 수식하는 존재로
서남쪽에는 벼락구덩이 우물이 재현되어 있고, 서쪽 언덕에는 정선옹주 묘역이 자리해 있다.


▲  재현된 벼락구덩이 우물

궁동의 오랜 젖줄로 궁동저수지를 아낌없이 채워주던 벼락구덩이 우물이 근래에 궁동생태습지
원 서남쪽에 복원되었다. 허나 원래 위치가 저수지 한복판이라 저수지와 좀 떨어진 이곳에 재
현했으며, 옛 벼락구덩이 수맥을 이용해 우물을 채우고 있다. 만약 저수지가 지어지지 않고
부근까지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지 않았다면 이 벼락구덩이는 서울 변두리의 유명 약수로 제법
명성을 누렸을 것이다.

우물이 비록 재현되긴 했으나 수질은 아직 부실하여 손을 씻는 정도로만 써야 된다. (물을 마
시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음) 허나 수질만 잘 손을 본다면 방학동(放鶴洞)에 있는 원당(元
堂)샘처럼 좋은 약수터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원당샘은 500년 이상 묵은 늙은 우물로 한
때 죽은 우물이 되었으나 샘터와 수질을 개선하면서 살아났음)

*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42-2, 42-4


♠  명당 자리로 명성이 자자한 궁동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제일 앞쪽이 권세태묘)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서쪽 언덕에는 궁동을 호령했던 정선옹주와 그의 시댁인 안동권씨 일가의
묘역이 넓게 자리해 있다. 분명 묘역은 권협(1553~1618)을 중심으로 한 안동권씨 묘역이나 지
체 높은 공주님이 묻힌 탓에 세상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정선옹주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
에도 그렇게 나왔음) 제왕의 딸인 옹주의 위엄 앞에 권협 일가의 이름이 묻힌 것이다. (공주
는 왕후 소생의 딸, 옹주는 후궁 소생의 딸임)

묘역에는 모두 6기의 묘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권협과 전주최
씨 부인의 묘가 1단을 이루고 있고, 그 밑에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묘가 2단을
이룬다. 그 아래로 권대임의 부모인 권신중과 전주이씨 묘(3단), 권대임의 아들 권진과 남양
홍씨 숙부인(淑夫人) 묘(4단), 권진의 장남 권이경의 묘(5단), 권이경의 장남 권세태의 무덤(
6단)이 차례대로 자리한다. 그리고 별도로 권협 묘역 북쪽 숲속에는 권대임의 삼촌인 권근중(
權謹中) 내외의 묘가 숨겨져 있다.
이들 무덤은 기본적으로 묘비와 상석(床石), 문인석(文人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을 갖추
고 있으며, 권대임과 정선옹주묘는 특별히 호석(護石)에 장명등까지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묘
역과 서쪽 호수 사이 산자락에는 권대임의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서쪽 호수 솟대 옆에는 권
협의 신도비가 있어서 이곳을 비선거리 또는 비석거리라 불렸다.

권협을 기준으로 6대가 이어져 내려온 묘역으로 묘비와 문인석, 상석, 호석, 장명등, 촛대석
등이 잘 남아있어 조선 중기(16~17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나 그럼에도 아직
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국가 사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울 지방기념물의 자격은 차고도 넘치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구로구에서 서울시에 지방기념
물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전하며, 후손들도 문화재 지정에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문화재 지정에는 후손들의 신청과 관심이 필요함)

그럼 묘역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정선옹주(貞善翁主, 1594~1614)는 누구일까?
정선옹주(이하 옹주)는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7녀로 정빈(靜嬪)민씨의 소생이다. 정
빈은 어질고 예를 갖춘 여인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옹주 또한 그런 생모를 닮아서 공손하고 부
녀자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전한다.
옹주가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에게 시집을 가자 선조는 궁동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
여 그곳에 살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옹주의 위엄에 걸맞게 고래등 기와집을 지었는데, 그 집
이 궁궐만큼이나 컸다고 하며 그로 인해 동네 이름도 궁골, 궁동(궁마을)이 되었다.

옹주의 집은 궁동저수지생태공원 북쪽인 서서울생활과학고 자리에 있었는데. 학교 정문 안쪽
에 궁골유허비를 세워 옹주의 저택이 있던 곳임을 살짝 귀띔해준다. 이 집은 6.25까지 그런데
로 남아있었으며, 당시 집의 면적은 700여 평, 집 크기는 50칸이었다고 한다.
허나 6.25로 집은 모두 파괴되어 가루가 되었고, 복원되지 못한 채, 경작지가 되었다가 서서
울생활과학고가 들어앉았다.

궁동 토박이들의 증언과 집터에서 나온 기와조각과 도자기, 옹기 파편을 통해 집이 제법 대단
했음을 가늠케 하며, 집의 모습과 구조가 어떠했는지는 아직 조사를 벌이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궁집(국가 민속문화유산,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 내외의
집)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그것도 정답은 아니니 각자 취향에 따라 조선 중
기 옹주의 집을 머릿 속에 그려보기 바란다.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정선옹주 묘역은 우리나라 100대 명당 중 으뜸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궁동을 북쪽으로 감싸
는 와룡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동쪽으로 뻗어간 줄기가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서쪽으로
흐르는 산줄기가 우백호(右白虎)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정중앙에 고추처럼 생긴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흐르니
그 산줄기 끝에 이들 묘역과 궁동저수지가 자리한다. 이 지형을 풍수지리적으로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부른다. 그냥 닭도 아닌 금닭이 알을 품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지형이던가.

허나 한참 뒤에 일이지만 옹주의 집이 전쟁으로 박살이 났고, 그 후손도 딱히 두드러지는 인
물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30% 이상 부족했던 명당인듯 싶다. 저수지로 인해 그런데로
배산임수를 취해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전망도 확 트여있어 정말 욕심이 확 날 정도로 자
리도 괜찮다. 그러니 명당이나 묘자리에 관심이 있다면 꼭 둘러보기 바란다.


▲  고된 세월의 때로 가득한 권대임(權大任) 신도비

정선옹주 묘역에는 2기의 신도비가 있는데, 이들은 서쪽 호수와 묘역 중간에 자리해 있어 쉽
게 눈에 들어온다.
신도비란 고위 관료와 왕족들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이곳도 그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네모난 비좌(碑座)에 권대임의 일대기를
담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권대임(1595~1645)은 권협의 손자이자 권신중(權信中)의 아들로 자는 홍보(弘輔)이다. 서예를
매우 잘하여 선조 임금에게 자주 칭찬과 상을 받았으며, 1살 연상인 정선옹주에게 장가가 길
성위(吉城尉)가 되었다. 허나 옹주는 1614년 20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19살 한
참 나이에 홀아비가 되고 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봉헌대부(奉憲大夫)가 되었으며, 1635년 선무공신(
宣武功臣)의 적손(嫡孫) 자격으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터지자 못
난 인조(仁祖)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간 공적으로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진되고 도총관(都
摠管)이 되었으며, 163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자신의 재화를 싹 털어 병자호란 때 포
로로 잡혀간 사람들(특히 노인들)을 데리고 돌아와 칭송이 자자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선무원종공신으로 유록대부(綏祿大夫)를 더해 정1품에 추증되었으며, 신도
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기렸다.


▲  비각에 감싸인 권협(權悏) 신도비

서쪽 호수 솟대 옆에는 묘역의 최고 어른인 권협의 신도비가 있다. 생김새는 앞서 권대임 신
도비와 비슷하며, 예전에는 비석만 있었으나 근래 비각을 씌웠다.

권협(1553~1618)의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
낸 권상(權常)의 아들이다. 1577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했으며, 승문원
(承文院), 춘추관(春秋館) 등을 거쳐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589년 전국에 괴
질이 유행하자 함경도로 파견되어 백성을 돌보고 제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염통이 쫄깃해져 좌불안석이 된 선조에게 서울을 끝까지 지킬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허나 왕은 거절했으며 대신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자신이 차고 있던 패
검(佩劍)를 하사했다고 전한다.
1596년 시강관(侍講官)과 응교(應敎)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급히
명나라로 파견되어 원병을 청했다. 이때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정(李楨)은
'당신네 나라의 지세를 알아야 우리가 도울 수 있소!'

무리한 부탁을 하자 할 수 없이 조선의 지리를 도면에 그려가며 막힘 없이 설명했다. 하지만
나라의 1급 기밀이나 다름없는 전국 지도를 작성하여 제공함으로써 기밀을 유출하는 우를 범
하고 만다.

조선 지도를 얻은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은 흡족해하며 군사와 군량을 보냈으며,
원군을 끌고 온 공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604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선무원종공신(宣撫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길창군
(吉昌君)에 봉해져 전라도감사가 되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종묘(宗廟) 영건을
감수한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나,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홍문관(弘文館)의 탄
핵을 받으면서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다가 1618년 세상을 떴다. 그의 시호는 충정
(忠貞)이다.


▲  묘역 제일 앞에 자리한 권세태(權世泰)묘

▲  권세태 묘 바로 뒷쪽에 자리한 권이경
(權以經)묘

▲  권진(權瑱)과 숙부인(淑夫人) 남양홍씨묘

묘역 가장 앞쪽에 자리한 권세태는 이 묘역의 막내로 권이경의 장남이다. 1659년에 태어났으
며, 1690년 식년시(式年試)에 을과로 붙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에는 권세태의 아버지이자 권진의 아들인 권이경(權以經) 묘가 있는데, 그
는 사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그런 아들과 손자묘를 굽어보는 권진은 권대임
과 정선옹주의 장남으로 돈령부봉사(敦寧府奉事)를 지냈고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권신중(權信中)과 부인 전주이씨묘 <오른쪽 비석은 권신중 묘갈(墓碣)>

묘역 3단에 자리한 권신중(1575~1633)은 자가 군집(君執)으로 권협의 아들이자 권대임의 아버
지이다. 부인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 이정필(李廷弼)의 딸이다.

1605년 증광시(增廣試) 생원과(生員科) 3등 45위로 합격하여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
으며, 이듬해 의정부도사(議政府都事)가 되었다. 이후 형조좌랑(刑曹佐郞)과 강서현령(江西縣
令),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김제군수(金堤郡守). 단양군수(丹陽郡守) 등 여러 자리를 거쳤
으며, 말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병으로 사양했다.
장남 권대임이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지면서 좌찬성(左贊成)과 우의정(右議政)에 차례로 증직
되었고 이후 길흥군(吉興君)에 봉해졌다. 그는 총명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말수가 적고 위엄이
대단했다고 전한다.
권신중은 원칙대로라면 권협묘 밑에 있어야 맞다. 허나 며느리인 정선옹주가 어린 나이에 세
상을 등지자 일찍 묘역을 조성했는데, 신분이 높은 옹주라서 권신중이 자리를 양보했다.

무덤 동쪽에는 권신중 묘갈이 자리해 있다. 그는 1680년에 세워진 것으로 허목(許穆)이 글을
짓고 윤심(尹深)이 글을 썼다. 지붕돌, 비신, 비좌를 갖추고 있으며, 전체 높이는 약 2.3m로
거의 350년 묵은 늙은 나이에도 피부는 정정하여 글씨 확인은 그리 어렵지 않다.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묘역 2단을 이루고 있는 권대임과 정선옹주묘는 같은 묘역임에도 다른 묘와 좀 차별화를 두었
다. 봉분(封墳)만 봉긋한 나머지 묘와 달리 봉분 밑에 무려 호석을 둘렀으며, 장명등(長明燈)
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족이라 그런 파격적인 옵션을 달게 된 모양이다.

▲  표정이 밝아 보이는 정선옹주묘
서쪽 문인석(文人石)

▲  눈을 길고 가늘게 뜬 정선옹주묘
동쪽 문인석


▲  묘역의 어른인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최씨묘
묘역 1단에는 권협 내외의 묘가 자리하여 자손들의 묘를 굽어본다.


권협 묘 옆에는 와룡산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있는데, 바로 그 안에 권근중 묘역이 홀로 숨바
꼭질을 하고 있다. 이정표도 없는 그곳은 정선옹주 묘역과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데, 정선옹
주묘역과 첫 인연을 지었을 때 그의 존재를 몰라 놓쳐버렸다. 하여 이번에는 단단히 기억을
하고 있다가 그를 찾아 숲길로 들어서니 바로 숲에 묻힌 권근중묘가 모습을 비춘다.

▲  지붕돌을 지닌 권협묘 묘표

▲  권근중묘로 인도하는 숲길


▲  권근중(權謹中)과 전주이씨 묘

권근중(1586~1650)은 권협의 5번째 아들이자 권대림의 삼촌이다. 정선옹주묘역의 무덤은 부부
가 같은 봉분을 쓰고 있는 합장묘(合葬墓)인데 반해 이곳은 각자 봉분을 지닌 이른바 쌍분(雙
墳)으로 남쪽을 향해 트여있는 정선옹주묘역과 달리 무성한 숲속에 묻힌 채,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한낮에도 어둡다.

무덤의 주인인 권근중은 회인(懷人)현감을 지내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사어(司禦)가 되
었는데, 이때 부친상을 당해 여묘(廬墓)를 짓고 3년상에 들어갔다. 허나 2년여가 지날 무렵에
모친상까지 당하면서 거의 6년 가까이 시묘살이를 하는 고통을 겪는다. 그로 인해 효자로 명
성을 얻었으며, 사망한 이후에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과 이조참판이 추증되었다. 그리
고 장남인 권대운(權大運)이 숙종 시절 영의정(領議政)이 되자 영의정까지 가증(加贈)되었다.

* 정선옹주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54-2


♠  구로구의 북서쪽 지붕,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
(지양산, 매봉산)

▲  숲에 두텁게 감싸인 와룡산 숲길

정선옹주묘역 권협묘 옆에서 시작된 와룡산 숲길은 권근중묘 옆구리를 거쳐 와룡산 정상과 지
양산으로 이어진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거의 낮을 무색하게 할 정도인데, 그 길의 끝에서 구
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4.8km)와 만난다.


▲  와룡산 숲길 속으로 빠져들다 (수렁고개 남쪽)

전국적인 도보길 유행에 따라 구로구도 그 유행에 숟가락을 얹혀 '구로올레길'이란 둘레길을
세상에 내놓았다. 여기서 '올레'는 돌담길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으로 제주올레길에서 이름을
따왔다.
기존 산길과 숲길, 골목길, 하천길을 활용해 도심형 코스 2개, 하천형 코스 3개, 산림형 4개
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가 발을 들인 산림형2코스(4.8km)는 온수역에서 와룡산, 지양산 국기
봉, 매봉산을 거쳐 매봉초교까지 이어진다. 구로구의 서북쪽 지붕길로 능선길과 숲길 위주로
되어있으며, 경사도 완만하고 해발고도도 아무리 용을 써봐야 120~130m 정도이다. 게다가 숲
이 짙고 와룡산, 지양산 국기봉, 매봉산의 조망도 썩 괜찮아 동네 마실과 나들이, 걷기 명소
로 아주 좋다.
또한 와룡산~지양산 국기봉 구간은 구로구와 부천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지양산 국기봉~
매봉산 구간은 구로구와 양천구가 경계 역할을 이루고 있어 양천구에서 닦은 양천둘레길의 일
부가 이 구간의 신세를 진다.

이번 나들이는 수렁고개 남쪽에서 2코스로 진입해 지양산 국기봉과 매봉산 정상을 거쳐 매봉
초교까지 이동했다.


▲  수렁고개 (작동터널 윗쪽)

와룡산과 지양산 사이에 움푹 누워있는 수렁고개는 궁동과 부천(富川) 작동을 이어주는 고개
이다. 땅이 매우 질어서 수렁고개라 불렸다고 전하며 사람이 겨우 지게를 지고 갈 수 있을 정
도의 고갯길이다. 고개 왼편에는 냇물이 많아 질은 골짜기란 뜻의 '지골'이 있는데 그곳 약수
터가 옻이 오른 사람에게 효험이 있다고 하여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지금은 다 옛날 이
야기)
지금은 고개 밑으로 서울~부천을 잇는 작동터널이 뚫려있어 차량들의 굉음이 두 귀를 마구 때
려댄다. 계단길을 쑥 내려갔다가 다시 그 2배 이상을 올라가야 되기 때문에 이곳 구간의 경사
는 다소 흥분기를 보인다. 허나 여기만 지나면 다시 완만한 길이 펼쳐진다.


▲  지양산 국기봉
지양산 남쪽 봉우리에 천하 제일의 국기인 태극기를 걸고 봉우리 이름을
지양산 국기봉이라 했다. 지양산 정상(138m)은 여기서 북쪽인 양천구
지역에 있으며, 양천둘레길이 여기서부터 매봉초교까지
구로올레길 산림형2코스와 같은 길을 쓴다.

▲  지양산 국기봉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구로구와 양천구 지역을 비롯해 관악산(冠岳山)과 호암산(虎巖山)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지양산 궁동3거리 북쪽 산길
여기서부터 매봉산으로 구역이 바뀐다.

▲  녹음이 짙은 매봉산 숲길 ①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 양천둘레길)

▲  녹음이 짙은 매봉산 숲길 ②
매봉산은 와룡산, 지양산 못지 않게 숲이 아주 짙다.

▲  매봉산(每奉山) 정상 (해발 110m)

매봉산은 구로구의 북서쪽 지붕의 일원으로 청룡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개봉동(開峯洞) 남부
에 있는 개웅산(開雄山, 125m)과 함께 개봉동의 유래가 된 산으로 개웅산의 '개'와 매봉산의
'봉'이 합쳐져 지역 간판이 되었다.

서쪽은 지양산과 와룡산으로 이어지며, 이들과는 한 줄기로 구로구의 친숙한 뒷동산이다. 지
역 주민들의 운동, 산책 수요가 많으며,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와 양천둘레길이 거쳐가 나
들이 수요도 꾸준히 늘고 있다. 그리고 산 동남쪽 자락에는 잣절공원이 닦여져 있다.


▲  매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구로구, 영등포구, 금천구 지역)
왼쪽에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은 서울 도심의 남주작(南朱雀)인 남산이다.

▲  매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구로구, 영등포구, 금천구 지역)
오른쪽에 굵직하게 보이는 뫼들은 관악산과 삼성산, 호암산이다.

▲  매봉산을 내려오다 (매봉초교 방향)

정상이란 자리는 너무 오래 머물려고 하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게다가 일몰과 점점 약기운
이 더해가는 땅꺼미가 길을 재촉하고 있어 10분 정도만 머물고 매봉초교로 흔쾌히 내려왔다.

정선옹주묘역에서 와룡산, 지양산, 매봉산을 차례대로 거닐으니 마치 서울이 아닌 지방의 첩
첩한 산주름을 거닌 기분이다. 서울 변두리인 구로구에 이런 호젓하고 상큼한 산과 싱그러운
자연 공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역시나 삭막한 회색 도시에는 이런 산과 자연공간이
많아야 사람들에게도 좋다.

이렇게 하여 구로구 늦가을 나들이는 여로(旅路)를 넉넉히 살찌우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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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6년 2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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