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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관음사, 남현동 지역


' 늦가을 산사 나들이 ~ 관악산 관음사 '
(관악구 남현동 지역 명소들)

관음사 관세음보살상
▲  관악산 관음사 관세음보살상

효민공 이경직묘역

남현동 구벨기에영사관 (남서울미술관)

▲  효민공 이경직묘역

▲  남현동 구벨기에영사관

 


늦가을이 종점에 이르던 11월 끝 무렵, 관악산(冠岳山) 북쪽 자락에 위치한 관음사를 찾았
다.
관음사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보살좌상이 있는데, 관음사와 여러 번 인연을 지었음
에도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가 비공개 유물이면 모르겠으나 누구나 발을 들일 수 있
는 삼성각에 버젓히 있음에도 마치 눈 뜬 장님처럼 계속 놓친 것이다. 하여 관음사의 유일
한 미답(未踏) 문화유산인 그를 친견하고 남현동(南峴洞)에 있는 여러 명소도 간만에 복습
하고자 사당역으로 달려갔다.

이번 관음사 나들이는 사당역(2,4호선)에서 서남쪽으로 12분 정도 떨어진 남현동 우림루미
아트아파트에서 시작했다. 이름도 참 길고 난해한 우림루미아트아파트와 남현한일유앤아이
아파트 사이로 관악산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는데, 그 길로 들어서면 관악산 숲이 나타나고
그 숲으로 나를 밀어넣으면 얼마 가지 않아서 효민공 이경직 묘역이 마중을 나온다.


♠  관악산 관음사(觀音寺) 입문

▲  늦가을의 향연 속으로 (효민공 이경직 묘역 주변)

올해의 끝 앞에서 나무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늦가을의 막바지 향연을 이어간다. 이
번 늦가을은 겨울 제국의 기운이 생각보다 덜하여 11월을 거의 채웠지만 그래봐야 잠깐일 뿐
이다. 그래도 11월 끝에서 이렇게 늦가을의 고운 향연을 누리니 연말 우울감이 약간은 가시는
듯 하다.


▲  붉게 물든 나무들 (효민공 이경직 묘역 주변)

▲  효민공 이경직 묘역 앞 숲길 (남쪽 방향)
오른쪽 철책 너머가 이경직 묘역이다. 묘역 앞 숲길에는 쉼터 등이 닦여져
있는데 이 일대에서 고려청자와 고려백자의 파편 등이 여럿 발견되어
고려, 조선 때 주거 생활지가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효민공 이경직 묘역(孝敏公 李景稷 墓域) - 서울 유형문화유산

관음사 북쪽 산자락에 이경직 일가의 전주이씨 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동쪽을 향해 누워있
는 이곳은 전주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 덕천군은 조선 2대 군주인 정종의 아들) 함풍군(咸豊
君)의 후손인 이유간(李惟侃)과 이경직, 이장영(李長英)의 3대 묘역으로 여기서 가까운 흑석
동(黑石洞)과 사당동(舍堂洞)에도 그들 일가의 묘역이 있다.

이경직 묘역은 무덤을 지키고자 녹색 철책과 붉은 담장을 높게 둘렀는데, 묘역으로 들어가는
녹색 철문은 굳게 입을 닫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어렵다. 묘역에 제사를 지내거
나 청소하는 날이 아닌 이상은 좀처럼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묘역을 관리하는 후손에게
연락을 취하여 관람 허가를 받아 들어가는 방법이 있으나 어차피 철책 밖에서 보일 것은 거의
다 보이므로 굳이 무리해서 들어갈 필요는 없다.


▲  묘역 남쪽 구석에 자리한 이경직 신도비(神道碑)

원래는 이경직 신도비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08년 그의 묘역까지 보호구
역을 확장해 문화재 명칭을 '효민공 이경직 묘역'으로 갈았다.

맞배지붕 비각(碑閣)에 소중히 들어있는 이경직 신도비는 1668년에 세워진 것으로 네모난 받
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간단히 마무리를 지었다. 김류(金瑬)가 비문(碑文)
을 짓고 이경직의 3째 아들인 이정영(李正英)이 글씨를 썼으며, 비석 보호를 위해 비각을 씌
웠는데,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고위 관료와 왕족의 무덤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이정영 묘는 근처 사당동에 있음)


▲  효민공 이경직 묘역 앞 숲길 (북쪽 방향)

묘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이유간(1550~1634)의 유택(幽宅)이 자리하여 아들과 손자의 무덤
을 굽어보고 있다. 이유간은 자(字)가 강중(剛仲)으로 덕천군의 5세손이자 이수광(李秀光)의
아들이다.
159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절친했던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가 사산현
감(四山縣監)과 돈녕부도정(敦寧府 都正)을 지냈으며, 1634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바로 그해에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부인과 함께 묻힌 합장묘(合葬墓)로 무덤 앞에 묘표(墓表, 묘비)와 상석, 혼유석(
魂遊石)이 놓여져 있고,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망주석(望柱石) 1쌍이 무덤을 지킨다. 묘표에
는 무덤의 주인이 적혀있으나 뒷면은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렵다.

이유간 묘 밑에는 묘역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경직(1577~1640)의 무덤이 있다. 그는 이
유간의 아들로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이며 이항복과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공
부하여 1601년 사마시에 붙었다. 그리고 1606년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 4등급)로 급제
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617년 회답사(回答使)의 종사관으로 왜국(倭國)에 갔으며,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자 전라도절도사(全羅道節度使)가 되어 반란군을 진압,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수원부사가 되었다.
정묘호란(1627년) 때는 후금(청나라) 사신과 교섭하여 화의(和議)를 이루어냈으며, 병자호란(
1636~1637년) 때는 못난 인조(仁祖)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1640년 강화유수(江華留
守)로 있다가 63세에 병사하니 조정은 그에게 좌의정(左議政)을 추증했으며, 시호는 효민공(
孝敏公)이다.
무덤은 쌍분(雙墳)으로 부인인 보성오씨와 같이 묻혔으며, 옆의 봉분은 뒤에 맞아들인 고성이
씨의 무덤이다.

이경직의 무덤 밑에는 그의 아들인 이장영의 유택이 있다. 그의 대한 내용은 쿨하게 생략하며
묘역 북동쪽 구석에는 창고로 쓰이는 가건물이 있다.

* 효민공 이경직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산57-10


▲  관음사 일주문(一柱門)

이경직 묘역에서 동쪽 숲길을 지나면 관음사로 인도하는 포장길(승방1길)이 나타난다. 묘역에
서 남쪽 산길을 넘어도 관음사로 접근할 수 있는데, 승방1길을 3분 정도 오르면 관음사의 정
문인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문의 높이가 상당하여 그 기세에 주눅이 들 정도인데, 그는 2007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그를
들어서면 다리가 나온다. 계곡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나
오며 그곳을 지나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길 양쪽으로 하얀 석
등이 절까지 이어져 있으며, 그런 석등 사이로 관음대장군과 관음여장군을 칭하는 장승 1쌍이
이를 드러내며 해맑은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언덕길의 끝에 관음사가 자리
해 있다.


▲  웃음삼매에 빠진 관음대장군과 관음여장군
관음사가 관음도량을 칭하다 보니 장승까지도 관음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다.

▲  관음사 경내 (대웅전 주변)

관악산 남쪽 청계산 북쪽에 절집이 우뚝하여 긴 숲을 눌렀다.
밤비에 고함을 지르니 주린 호랑이가 부르짖는 듯하고
해돋이에 조잘거리니 그윽한 새가 우는 듯하다.
구름이 창밑에서 나니 담장이 덩굴이 얽히고
길이 돌 모퉁이로 소나무, 회나무 우거졌도다.
멀리 생각하건대 혜사(惠師)는 응당 잘 있을 것이고
산 가운데서 밤마다 꿈에 서로 찾는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의 '관음사 절경'


관악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관음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관악산 정상 밑에 깃든 연주암(戀主
庵)과 함께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유서가 깊은 절이다. '남태령 관음사','승방골 관음사'라
불리기도 하며, 절을 끼고 도는 계곡을 절골이라 부른다.

관음사는 후삼국시대로 접어들던 89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고
자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증명할 유물과 사료는 전혀 없는 실정
이라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 이렇다 할 내력은 남아있지 않으나 조선 초에 활동했던 변계량(卞季良)
이 지은 '관음사 절경'이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하고 있고, 18세기
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와 '가람고(伽藍考)','여지도서(與地圖書)' 등에 관음사가 짧게
나와있다. 또한 1977년 극락전(極樂殿)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는 1716년 4월
21일 극락전을 개축(改築)했음을 알려주는 문구가 있어 조선 초부터 18세기까지 꾸준히 법등
을 유지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절 밑에 관음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승방벌(승방뜰)이란
마을까지 있어 절의 규모가 제법 있었음을 가늠케 해준다.

1863년 8월, 철종(哲宗)의 장인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시주로 절을 정
비했으며, 1883년 봉은사(奉恩寺) 승려들이 절을 중수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1924년 승려 석주(石洲)가 주지로 부임하여 여러 신도의 도움으로 큰방 10칸을 지었고, 1925
년에 요사를 지었다. 뒤를 이은 주지 태선(泰善)은 1929년에 칠성각을, 1930년에 산신각을 짓
고 1932년에 용화전을 세웠으며, 1942년 극락전을 보수했다.
허나 1950년대 이후, 조계종(曹溪宗)과 태고종(太古宗)간의 부질없는 재산소유권 분쟁으로 10
여 년 간 지루한 송사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는 동안 사세는 크게 기울었고 건물 또한 황폐화
에 이르는 등, 역대급 위기를 겪다가 대법원이 조계종에 손을 들어주면서 1973년 진산당 박종
하(晉山堂 朴宗夏)가 주지로 부임해 옛 영광을 되찾고자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벌였다.
하지만 절 부지가 국유지와 시유지(市有地), 사유지에 고루고루 잡혀있어 소유권 분쟁이 계속
불사의 발목을 붙잡았으며, 개발제한구역과 여러 가지 규제들이 태클을 걸면서 그 역시 쉽지
않았다.
허나 불굴의 의지로 1977년 대웅전을 지었고, 1980년대에 범종각을 올리고 삼성각과 용왕각을
크게 보수했으며, 1992년 대웅전 지하에 대강당을 만들고 1천불을 봉안했다. 그리고 1997년
명부전과 요사, 9층석탑을 짓고, 2001년에 요사채를 신축했으며, 용왕각 부근 지하 150m에서
수맥(水脈)을 찾아 석조를 만들어 수각(水閣)으로 삼았다.
그리고 2002년 미타전과 관세음보살입상을 장만해 관음도량의 면모를 갖추었고, 2007년 4월에
일주문을 세움으로써 34년에 걸친 중창불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 외에 재단법인 불교방송이
발원한 '불교방송개국 기념대탑'을 크게 조성하는 등 절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과 용왕각, 삼성각, 요사(寮舍)등 9~10
동의 건물이 있으며, 오랜 역사에 비해 고색의 내음은 싹 말라버려 소장문화유산은 석조보살
좌상이 전부이다.

* 관음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519-3 (승방1길 109-80 ☎ 02-582-8609)


♠  관음사 둘러보기

▲  관음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
승) 식구들의 공간이다.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우측 옆구리로 요사 1채를 끼고 있으며
, 건물 뒤에는 얇게 대나무밭이 있는데, 중간중간에 조그만 석불이 자리를 폈다.


▲  관음사9층석탑 (불교방송개국 기념대탑)

명부전 좌측에는 하얀 피부의 거대한 9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그를 보는 순간 말 못할 압
도감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는 1997년 불교방송국 오픈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높이는
거의 20m에 달한다.


▲  삼성각(三聖閣)

명부전과 대웅전 사이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29년에
태선이 칠성각으로 세운 것으로 1989년에 개축하고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삼성각이란 이름 그대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는데,
근래에 장만한 오백나한(五百羅漢)까지 가득 머금고 있어 나한전(羅漢殿)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또한 관음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이자 가장 늙은 존재인 석조보살좌상도 이곳에 자리를
펴고 있으니 관음사에 왔다면 꼭 친견하기 바란다. (석조보살좌상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고운 색채를 지닌 돋음새김의 산신탱

▲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오백나한들


▲  관음사 석조보살좌상 - 서울 유형문화유산

삼성각에 소중히 깃든 석조보살좌상은 화강암으로 만든 44.2cm 키의 작은 보살상이다. 관음사
의 유일한 늙은 보물이라 특별히 유리막에 넣어 좋은 방석까지 갖추며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유리막에 갇힌 모습이라 조금은 답답해 보인다.
지금은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지녔지만 예전 모습을 보면 붉은 피부,
검은 피부가 뒤섞여 마치 진흙탕에 1번 들어간 듯한 모습이었다. 허나 근래에 머리부터 발끝
까지 하얗게 분을 칠하면서 근래 조성된 듯 많이 젊어졌다. 그로 인해 문화유산의 제일 매력
인 고색의 기운이 많이 떨어진 점이 아쉽다. 사람은 젊거나 어려 보이는 것이 좋지만 문화유
산은 늙어 보여야 제맛이다.

보살상의 바닥면에는 네모난 복장공이 뚫려있는데, 복장유물이 있던 것으로 보이나 유물은 하
나도 없고 내부도 텅 비어있어 그의 자세한 정보는 알 길이 없다.
2단의 단판 앙련(仰聯)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통견 법의(法衣) 안에는 가슴
을 가로지른 옷자락과 띠 매듭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법의 위에는 한 자락의 가사가 왼
쪽 어깨 위와 팔뚝을 덮고 있고 오른쪽 어깨 위에도 반달 모양의 옷자락이 살짝 걸쳐져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 바닥 위에 왼손 바닥을 겹쳐 얹고 엄지손가락을 서로 맞댄 선정인(禪定
印)의 모습으로 손가락이 유난히 길다. 선정인 아래로 U자형의 옷주름이 늘어져 있고 늘어진
옷자락이 대좌 상단을 살짝 덮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머리 뒤에는 보관을 묶은 리본이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 리본 밑에는 보관 띠가 보살상 등 뒤까지 길게 늘어져 있으며, 보관 안에는 보발을 묶은 보
계가 있다.
보계 앞에는 여의두(如意頭) 모양의 장식이 있는데, 보살의 머리카락은 귀를 지나 어깨 위까
지 늘어져 있으며, 어깨 위를 덮고 있는 세 가닥 보발의 표현이 정교하다. 그리고 양쪽 귀에
는 꽃 모양의 귀고리 조각이 있으며, 머리카락에는 검은색 채색이, 대좌에는 붉은 채색이 남
아있으나 채색의 시기는 알 수 없다. 또한 하얗게 떡칠을 하면서 그 채색도 확인하기 어렵다.

절의 이름이 관음사이고 관음도량을 칭하다 보니 막연히 관세음보살로 삼고 있으나 원래 정체
는 알 수 없으며, 선정인 수인 위에 보살상이 애용하던 물건이 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없
다. 다만 가슴 앞의 가로 주름과 그 아래의 리본, 오른쪽 어깨를 뒤덮은 반달 모양의 옷자락,
왼쪽 팔 위에 'Ω'형 옷자락의 표현 등에서 16세기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하여 1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크기는 작으나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는 보존 상태도 좋
고, 조각도 우수하다. 하여 2011년 11월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용왕각(龍王閣)과 수각(水閣)이라 불리는 석조(石槽)

삼성각 뒤쪽에는 1칸짜리 용왕각이 숲을 등지며 앉아 있다. 맞배지붕을 지닌 이 작은 건물은
용왕을 봉안하고 있는데,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산사(山寺)에서 전혀 연관도 없어 보이는 용
왕을 담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허나 용왕은 바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수
분을 관리하는 높은 존재라 물이 닿는 어느 곳이든 세울 수 있다. 그러니 잘못된 것은 없다.

용왕각은 1930년에 태선이 슬레이트로 지은 것으로 1989년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했으며 용왕
탱이 봉안되어 있다.


▲  용왕각 용왕탱(龍王幀)
붉은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용왕이 보주(寶珠)를 손에 쥐어들고 있다.
그 우측에는 누런 용이 용트림을 하고 있고, 좌우로 용왕의 신하들이 용왕을
바라보며 시립(侍立)해 있다. 이 탱화는 1989년에 조성된 것으로 내벽에는
비천상(飛天像) 1쌍이 깃들여져 있다.

▲  관악산이 베푼 옥계수가 파도를 치는 수각 연화석조(蓮花石槽)
관음사는 샘터의 역할을 하는 연화석조에게 수각이란 건물 이름을 주어
크게 대우하고 있다.

▲  아름다운 모습의 관세음보살상

파리도 능히 자빠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에 고운 자태까지 지닌 관세음보살상은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든 정병(政柄)을 들며 시무외인의 제스쳐를 보이고 있다. 머리에 씌어진 보
관은 비록 하얀 돌이나 보석이 박힌 금관처럼 눈을 부시게 하며 그의 눈빛과 유연한 몸매, 연
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蓮花臺座)까지 좀처럼 눈과 마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 보살상은 2002년에 관음도량의 품격을 갖추고자 장만한 것으로 키가 작은 돌난간이 주변에
둘러져 있으며, 보살상 앞에 석등 2기가 세워져 있다.


▲  관음사 대웅전(大雄殿)

관음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77년에 지어졌다. 이곳에
는 1942년에 지은 극락전이 있었는데, 1977년 그것을 부시고 대웅전을 지을 때 극락전 속살에
서 1716년 극락전을 개축했다는 내용을 머금은 상량문이 나와 관음사의 18세기 역사 일부를
고맙게도 밝혀주었다.
불단에는 석가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들 뒤로 1990년에 조성된 석가후불탱이 있는
데, 붉은 면바탕에 금니(金泥)로 초를 내고 부분 채색한 그림으로 매우 생소한 형태이다. 그
리고 건물 좌측 영단(靈壇)에는 1974년에 조성된 조그만 범종이 있다. (범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대웅전 금동석가여래삼존상
앳되어 보이는 늠름하고 잘생긴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좌우에 자리해 있고, 그들 뒤로 붉은색 바탕에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다.


▲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관음사 북쪽 산길 (대웅전 구역 동쪽 담장 밖)

관음사에서 관악산으로 인도하는 길은 크게 2개가 있다. 절 앞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과 북쪽
으로 가는 길(대웅전 구역 동쪽 담장 바깥)이 그것인데, 어느 길로 가든 관악산은 이어져 있
으나 북쪽 길을 많이 이용한다. 북쪽 길은 앞서 살펴본 이경직묘역을 비롯해 서울둘레길11코
스와도 이어지며, 관악산 야간등산도 이 길을 주로 이용한다.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으로 살아가고 있는 구 벨기에영사관(領事館)
- 국가 사적

관음사를 둘러보고 경내 바깥으로 나오니 햇님의 퇴근시간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여로(旅路)도 좀 살찌울 겸, 사당역 서쪽에 있는 구 벨기에영사관을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정
했다.
구 벨기에영사관은 담쟁이덩굴이 잘 어울릴 것 같은 2층짜리 근대 건축물로 현재 남서울미술
관(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여 건물 내부는 일부 공간을 제외하고 거의
개방되어 있어 관람시간에 맞춰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 서울 남쪽 변두리인 이곳에 어찌하여
이런 건물이 있게 된 것일까?

조선(대한제국)은 1901년 벨기에<Belgie, 가차자 표현은 백이의(白耳義)>와 한백수호조약(韓
白修好條約)을 맺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중구 회현동2가 78~79번지에 영사관 부지를 선물
로 제공하였다.
벨기에 전권위원인 레온 방카르(Lion Vincart)는 1902년 영사관 건축을 추진하여 1903년 7월
공사에 들어갔는데, 건물 설계는 왜인(倭人) 고다마(小玉)가 했고 시공은 왜국의 배륙토목공
사(北陸土木公社)가 맡아서 1905년 완성을 보았다.
1919년에 충무로1가 18번지로 이전되어 요코하마생명보험회사(橫濱生命保險會社) 건물로 쓰이
다가 왜정 해군성(海軍省) 무관부 관저로 둔갑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해군헌병대에서 사용
했다.
1970년 상업은행(우리은행)이 불하를 받아 사용하다가 주변 재개발과 건물 신축 공사로 1982
년 8월 이곳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때 문화재관리국 전문 위원들의 도움을 받아 원형 그대로
복원했으며, 계속 우리은행에서 가지고 있다가 2004년 5월 기업의 문화예술지원사업의 일환으
로 서울시에 흔쾌히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건물 소유는 여전히 우리은행임)
서울시는 이곳을 공공미술관으로 꾸며 2004년 9월 2일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속세에
개방했으며, 일부 특별전을 제외하고 무료의 공간으로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은 휴관, 관람시간은 평일 10~20시, 주말과 공휴일은 10~18시)

건물 구조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면적은 3,468.9㎡이다. 붉은 벽돌에 화강암을 적절하게
섞어서 지었으며, 좌우 대칭의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는데, 현관 가
운데 복도 좌우로 방과 응접실, 객실 등을 배치했으며, 현관 기둥과 1층 로지아 기둥은 투스
칸오더(Tuscan order)식이고, 2층 로지아 기둥은 이오닉오더(Ionic order)로 처리했다.
정면의 외벽면은 적벽돌로 처리했고, 적벽돌 사이로 3조의 화강암을 띠모양으로 둘러 벽돌의
구조적 취약성을 보강하고 외벽면의 변화를 주었으며, 창문틀은 모두 수평아치로 하였다.

외국 영사관에서 은행 건물, 군사시설 등으로 두루 쓰이다가 지금은 미술관으로 바쁘게 살고
있으며, 1층과 2층은 미술관 전시실로 활용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건물 내부가 조금 성형이
되긴 했으나 건물 외형과 계단 등 상당수는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 구 벨기에영사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1059-13 (남부순환로 2076 ☎ 02-598-
  6246)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피부를 지닌 구 벨기에영사관
(남서울미술관)의 뒷모습

▲  남서울미술관 정문과 돌계단


▲  1층 주 거실 원형 기둥의 머리 부분

마치 유럽의 어느 늙은 건축물에서 가져온 듯한 이 단단한 돌덩어리는 로마시대부터 쓰인 터
스칸식 기둥이다. 기둥 머리 중심이 비어있는데, 이는 실내 기둥이 구조적 기능이 없는 장식
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둥에서 떨어져 나와 옛 유물이 되어버린 기둥 부재(部材) 밑에는 장식적 효과와 착
시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세로 홈의 골줄이 있다.


▲  이제는 무늬만 남은 벽난로와 하얗게 도배된 벽
벽난로 위에는 서울 도심의 20세기 초반 사진이 푸른색을 띄며 자리해 있다.

▲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 1층 공간 ①

▲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 1층 공간 ②

▲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 1층 공간 ③

▲  이제는 화석이 되어버린 옛 벽식기둥(필라스터) 장식의 일부

이 견고한 돌덩어리는 회현동, 충무로 시절 영사관 2층 복도에 닦여진 필라스터 장식의 일부
이다. 조적조에 석고와 회벽으로 마감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장식은 건물을 옮길 때 온전하게
해체하여 재사용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원래 모습 그대로 복제해서 이축(移築) 복원을
했으며, 이전 것은 모두 썰어서 일부만 이곳에 가져다두어 전시물로 삼았다.
사각형의 이오니아 기둥의 특징인 회오리 장식과 세로 홈의 골줄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색의
때가 자욱해 중후한 멋을 풍긴다.


▲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 2층 공간
서울 도심에서 물 건너온 구 벨기에영사관은 외관은 원모습이 유지되었으나
내부 2층은 활용가치를 높이고자 일부 평면변경이 필요하다는 김수근의
의견으로 작은 방이 통폐합되어 미술관 전시실에 최적화되었다.

▲  2층 공간 벽난로와 순백 피부의 벽

▲  2층 복도 (계단 방향)
복도 좌우 공간에는 작은 방을 합쳐서 닦은 전시실이 있다.

▲  2층 복도 (안쪽 방향)

▲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서 바라본 2층 복도와 천정

▲  1층에서 2층으로 인도하는 계단 (1층 복도에서 바라본 모습)

이렇게 하여 늦가을 관음사, 남현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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