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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랑생가 동쪽 문간채

강진 읍내 북쪽에 자리한 남성리 북산 자락에 영랑생가가 있다. 강진 지역에 주요 명소로 격하게

꼽히는 이곳은 이 땅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영랑 김윤식의 생가로 1903년 1월

16일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 사이에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재 영랑생가는 1906년에 기존 집을 부시고 새로 지은 것으로 안채와 문간채, 사랑채, 은행나무

를 지닌 어느 정도 먹고 살던 집이다. 1948년 영랑은 이곳을 팔고 서울로 이사를 갔으며, 이후 여

러 번의 매각을 거쳐 1985년 12월 강진군청 소유가 되었다. 1986년 전남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

으면서 꾸준하게 관리를 받았으며, 2007년 10월 국가민속문화유산(그 시절에는 '국가 중요민속자

료')으로 승격되었다.

 

영랑은 1915년 3월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서울로 올라와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

학했다. 그런 다음 휘문의숙에 진학했는데, 1919년 3월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구두 안창에 독

립선언문을 숨겨 넣고 강진으로 내려와 강진 지역 독립운동(강진 4.4운동)을 주도했다. 허나 왜정

의 탄압으로 왜경에 체포되었으며,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왜열도로 건너가 청산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이때 용아 박용철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으며, 이때부터 시 창작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변영로, 신석정, 이하윤 등과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1934년 4월 '문학'지 제3호에 그 유명한 '모란이 피기까지는'

을 발표했다. 1935년에는 '영랑시집'을 냈으며,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냈다.

 

그는 왜정이 벌인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삭발령을 모두 거부했으며, 1945년 해방 이후 새 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허나 1950년 6.25전쟁으로 크게 부상을 당했고, 그해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에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유택은 망우역사문화공원(예전 망우리공동묘지)에 있으며, 87편에 이르는 주옥 같은 시를 남

겼는데, 그중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매우 유명하여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교과서에 적지 않게 실

렸다. 또한 정부로부터 2008년 금관문학훈장을 추서받기도 했다.

 

2. 사랑채 뜨락에 있는 은행나무 (영랑생가 은행나무)

100년 이상 묵은 나무로 영랑생가에 오랫동안 일품 그늘을 드리웠다. 지금은 겨울 제국에게 몽땅 털

린 앙상한 모습으로 가지를 높이 쳐들며 애타게 봄의 해방군을 염원한다.

 

3. 서쪽 문간채 (안채 입구)

 

4. 영랑시비(모란이 피기까지는)와 서쪽 문간채, 동쪽 문간채

 

5. 활짝 열린 영랑생가 (영랑생가 관리소 앞)

영랑생가는 9~18시까지 문을 연다. (입장료는 없음)

 

6. 시문학 제1호 비석

'시문학'은 1930년대 카프(KAPF)의 정치성이나 사상성을 배제하고 순수 서정시를 추구하고자 1930

년 3월 5일에 창간되었다. 주요 멤버들은 영랑 김윤식과 용아 박정철, 정지용이며, 여기에 위당 정인

보와 연포 이하윤이 참여하여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이후 수주 변영로, 김현구가 제2호(1930년 5월

20일)에, 신석정과 허보가 제3호(1931년 11월 11일)에 동참했다.

'시문학'은 이 땅의 순수문학 운동의 기반을 다졌으며, 이후 '시원'(1935년), '시인부락'(1936년)으로

이어지면서 1930년대 이 땅 현대시의 맥을 형성했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

뒷줄 왼쪽부터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영랑생가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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