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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백양산 선암사



' 연말 산사 나들이, 부산 백양산 선암사 '
선암사 용왕당과 폭포
▲  선암사의 명물, 용왕당과 폭포
 



 

새해가 밝은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해의 끝 무렵에 이르렀다. 새해가 묵은 해가
되어 퇴장을 서두르고 또 다른 해가 바로 코앞에 대기를 하고 있으니 세월의 미친 속도
감에 그저 충격과 공포일 따름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번개처럼 흐르며 세상만물을
희롱해도 나의 역마살은 결코 잠재우지 못한다. 올해의 마지막 나들이를 장식할 장소를
두고 고민에 들어간 것이다.

비록 나를 부르는 곳은 단 1곳도 없지만(ㅠㅠ) 가고 싶은 곳은 정말 많다. 천하에 잔뜩
흩어진 명소를 두고 어디를 갈까? 물색하던 중 뜻밖에 선물이 날라왔다. 2016년 12월에
개통된 수서고속전철(SRT)에서 열차 이용 무료 쿠폰을 보내온 것이다. (SRT열차에 한해
어디든 1회 무료 이용) 간만에 좋은 선물을 받으니 흩어진 기분이 하나로 뭉친 듯 마음
이 무지 즐겁다.
그 무료 쿠폰을 등에 업고 여행 범위를 1,000리 밖까지 넓혀 처음에는 목포(木浦) 지역
을 생각했으나 갑자기 부산(釜山)이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흔쾌히 방향을 잡고 아침 표
를 예약했다.

새벽 공기가 무겁던 5시,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시내버스를 1회 환승하여 수서역으
로 이동했다. 시간이 아직 남아있어 주변 편의점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7시에 부
산으로 가는 고속전철(SRT)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시속 200~300km로 시원스럽게 질주를 하며 천안아산, 대전, 김천구미, 동대구를
거쳐 9시 24분, 경부선의 영원한 종점, 부산역에 이르렀다. 불과 몇 달 만에 와보는 부
산 땅이지만 마치 처음 발을 들인 듯 마음이 설렌다.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둔 상태라
부산역을 나와서 부산시내버스 17번을 타고 당감동(堂甘洞) 선암사입구로 이동했다.



 

♠  백양산 선암사 입문

▲  선암사로 인도하는 가파른 언덕길 (백양산로)

선암사입구에서 백양산 선암사까지는 북쪽으로 크게 구부러진 백양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올
라가야 된다. 중간에 당감뜨란채아파트 뒤쪽으로 질러가는 길이 있으나 그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예전처럼 백양산로를 쫓아갔다. (내려갈 때 지름길의 존재를 발견했음)

동양초교를 지나면 울창한 숲이 펼쳐지면서 계곡 흐르는 소리가 나의 멍멍한 두 귀를 때린다.
길 옆으로 선암사계곡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산속에 계곡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이곳
이 부산 도심 지척이라 처음에는 '내 귀가 미쳤나?' 착각을 들게 했다. 허나 그는 백양산이
빚은 자연산 계곡이 맞다.
선암사계곡은 상수원 보호구역과 선암사 경내에 묶여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그림의
떡보듯 바라보는 선에서 멈춰야 되며 그 이상의 흥분을 보여서는 절대 곤란하다. 선암사를 벗
어난 계곡은 '동천(東川)'이란 이름으로 부산 앞바다로 흘러가며, 절 밑까지 밀려온 시가지에
생매장을 당해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서면(西面) 남쪽 광무교에서 다시 햇살을 보며 바다로
향한다.


▲  백양산로 끝에 자리한 선암사 주차장 (경내 직전)

▲  속세로 길을 재촉하는 선암사계곡 (주차장 부근)

계곡 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이 다소 정화는 되었지만 대신 길의 경사는 좀 각박해진다.
허나 그 거리는 그리 길지 않으며, 그 길의 끝에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선암사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 이르면 길은 3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은 선암사 추모관과 애진봉, 백양산으로 이어
지고, 정면에 보이는 빡빡한 계단길은 선암사 경내로, 오른쪽은 어린이대공원 방면으로 백양
산나들숲길 5코스(선암길)이다. <선암길이 선암사 앞을 지나고 있음, 애진봉 방면도 그 길의
일원임>

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 대문처럼 생긴 일주문(一柱門)이 있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계곡 물소
리에 잠긴 선암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선암사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선방(禪房)

▲  대웅전 우측을 지키는 관음전(觀音殿)

부산 도심의 대표 지붕이자 부산에서 2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백양산(白楊山, 641m) 동남쪽 자
락에 선암사(仙巖寺, 仙岩寺)가 아늑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선암사는 2008년 이후 거의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이곳은 부산의 한복판이나 다름이 없는 곳
이다. 도심이 바로 지척에서 아른거리고 있건만 삼삼한 숲과 해맑은 계곡, 경쾌하게 흐르는
폭포까지 지니고 있어 첩첩한 산골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이며 산사의 내음도 꽤 진하다.

선암사는 675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여 견강사(見江寺)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안타깝게도 없는 실정으로 1867년에 작성된 '선암사 중수기(重修記)
'에는 802년 동평현(부산진구 지역) 성내(城內)에 처음 창건되었다고 나와 있어 이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400년 부산포(釜山浦) 동북쪽으로 절을 이전하였는데, 이때 선암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절 뒷산 절벽 바위에서 신라의 국선(國仙)인 화랑도(花郞徒)가 수련을 했다고 해서 선암사라
했다고도 하고, 산이 높고 바다까지 바라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라 가히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
하여 그리 했다는 설도 있다.
허나 이와 상반되게 견강사에 딸린 산중 암자로 선암사가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견
강사는 조선 중기에 초량왜관(草梁倭館) 부근인 자성대(子城臺)로 자리를 옮겼는데, 작은 암
자였던 선암사가 견강사의 자리를 대신하여 몸집을 불리면서 동평현에서 가장 큰 절이 되었다
고 한다. 즉 견강사의 부속 암자가 지역의 중심 사찰로 성장한 것이다.

1483년 각초(覺招)가 중창을 했으며, 1568년 신연이 중수를 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말끔
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681년 승당(僧堂)을 다시 지어 불상을 개금했고, 1718년 선오가
크게 중수했으며, 1866년 동악과 신겸이 돈을 모아 이듬해 중수를 벌였다.
20세기에는 뛰어난 선승(禪僧)으로 추앙을 받던 승려들이 이곳을 거쳐가며 절을 일구었는데,
혜월(慧月, 1861~1937)이 1921년부터 주지로 머물렀고, 1951년에는 향곡혜림(香谷蕙林, 1912~
1978)이 주지로 있었으며, 1955년에는 석암혜수(昔巖慧修)가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리고
2002년에는 시민들을 위해 선암도서관을 선보이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극락전, 관음전, 조사전, 용왕당, 산신각
, 칠성각, 추모관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모두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된 것들이라 고
색의 기운은 미약하다. 또한 추모관(납골당)과 공양간은 경내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절의 영
역이 보기와 달리 제법 넓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괘불탱(부산 지방문화재자료 27호)과 청동북(부산 지방문화재자료 37호)
, 3층석탑,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 등 지방문화재 4점과 조선 후기에 조성된
승탑(부도)군, 500년 정도 묵었다는 나한상 등이 있다. 이중 3층석탑은 많이 퇴락하긴 했지만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견강사의 유일한 유물이며, 괘불(掛佛)은 석가탄신일 등 극
히 일부 날에만 외출을 나오는 꽤 만나기 힘든 존재이다.

그밖에 원효대사가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우기고 있는 늙은 철불(鐵佛)과 19세기에 제작된 원
효대사의 진영(眞影)도 있었다. <원효대사는 인도에 간 적도 없으며, 철불은 신라 후기에 잠
깐 등장하는 불상 형태임> 1957년에 간행된 '부산교육'과 1966년에 발간된 '개항90년', 1969
년에 나온 '부산의 고적과 유물'에도 언급되었던 존재로 적어도 1970년대까지 전해오고 있었
으나 관리소홀로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름)

예전에는 바다가 보였다고 하나 지금은 키다리 빌딩이 즐비한 시가지에 시야가 막혀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동백나무를 비롯한 온갖 나무들이 짙게 우거져 있으며, 계곡과 폭포가 경내를
가로지르고 있어 경관 하나는 마치 신선 세계처럼 상큼하다. 범어사(梵魚寺)와 마하사(摩訶寺
), 기장 장안사(長安寺)와 더불어 부산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시내와도 무척 가깝고 접근
성도 좋은 편이다.

* 선암사 소재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 628 (백양산로 138, ☎ 051-803-7573)
* 선암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선암사 대웅전(大雄殿)

선암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인 청
동북을 품고 있다. (청동북의 위치는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하여 그것을 보려고 했으
나 마침 오전예불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선암사의 뜻인 모양
이나 또 인연이 닿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  지장보살과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冥府殿)

▲  용왕당과 극락전 구역으로
인도하는 계단


▲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에 뿌리를 내린 잘생긴 소나무

선암사 경내는 가파른 지형을 따라 크게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과 명부전이 있는 대
웅전 구역이 제일 밑이고, 거기서 1단계 높은 곳에 용왕당 구역, 다시 1단계 높은 곳에 3층석
탑이 있는 칠성각 구역, 그리고 제일 위쪽에는 조사전을 두었다.


▲  야외 법당으로 이루어진 용왕당(龍王堂)

용왕당은 병풍처럼 솟은 벼랑 밑 폭포 옆에 자리해 있다. 비록 '당(堂)'을 칭하고 있지만 건
물은 없으며, 이글거리는 동그란 두광(頭光)을 지닌 용왕상과 그에게 예를 표하는 야외 공간
이 전부이다. 특이한 것은 각(閣)이나 전(殿)이 아닌 마을의 용왕당처럼 당을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암사에 용왕상을 세운 것은 2003년이다. 비록 여기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가까운 곳에
서 바다가 넝실거리고 있고 경내에 계곡이 흐르고 있으므로 일종의 마켓팅과 새로운 명물을
구축하고자 용왕당을 닦은 것이다. 용왕은 물을 관리하는 존재로 불경을 용궁(龍宮)에 모아놓
고 지키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이는 용왕이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면서 그에게 떠넘긴 의
무이다. 또한 용왕이 물을 관장하고 있으므로 폭포 옆에 그의 거처를 마련했다.

용이 새겨진 의자에 앉아있는 용왕은 마치 사천왕(四天王) 같은 모습으로 조금 무섭게 생겼는
데, 그 앞에는 살짝 구부러진 작은 돌다리를 두었고 그 옆에는 폭포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높은 벼랑이 칼처럼 솟아 그늘을 드리우며 선암사를 더욱 아름답고 신비롭게
수식해준다. 벼랑 옆에는 돌로 다진 높은 석축이 있는데, 그 위에는 3층석탑과 칠성각이 자리
해 있다.
용왕상 주변에 서면 폭포에서 서늘한 기운이 불어와 마치 동굴에서 부는 바람 같다. 하여 한
여름에 찾아와 이곳에 있으면 정말 피서가 따로 없을 것이다.


▲  선암사 용왕 불사공덕비(佛事功德碑)
2003년에 용왕당을 지은 기념으로 세운 비석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자랑한다.

▲  용왕상과 벼랑 밑에 자리한 폭포
경내에 자연산 폭포를 둔 절은 그리 흔치가 않다. 허나 이곳은 하나도 아닌
무려 여러 개의 작은 폭포를 지닌 특별함을 보이고 있다.

▲  용왕당에서 칠성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계단길
계단이 얼마나 각박한지 계단 옆에 줄까지 달아놓았다. 맨정신으로 오가기가
어렵다면 쓸데없는 자존심을 잠시 날리고 줄의 신세를 지기 바란다.



 

♠  선암사 마무리

▲  선암사3층석탑 - 부산 지방문화재자료 53호

칠성각 구역에는 칠성각과 극락전, 산신각, 3층석탑이 있다. 이중 칠성각 뜨락 한복판에 앉은
뱅이 신세로 자리한 3층석탑을 꼭 살펴보자. 비록 생김새는 우울하지만 고려 말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는 탑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견강사의 유일한 흔적으로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주는 존재이다.

석탑이라고 하지만 겨우 옥개석(屋蓋石) 3매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하여 그를 3층석탑으로 막
연히 추정하고 있다. 옥개석 사이를 두툼히 채웠던 탑신(塔身)과 탑의 밑도리를 이루던 기단(
基壇)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싹 침몰한 상태이며, 옥개석도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
다. 그러면 최소 5층석탑까지는 되었을 것이다.
부산의 많은 절이 잿더미가 되었던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되어 저런 고통스런 모습이 된
것으로 여겨지며 옥개석의 크기를 보아 같은 탑의 부재(部材)가 분명해 보인다. 1층 옥개석은
땅과 맞닿은 밑도리가 흙에 많이 파묻혀 있으며, 낙수면과 옥개석 받침 등의 치석(治石)은 좋
은 편이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 달린 머리장식은 근래에 선암사에서 덧붙인 것이다.

   ◀ 세월의 모진 풍파가 느껴지는 3층석탑
옥개석 피부에는 푸른 이끼 옷이 덮여져 있어
이곳의 청정한 기운과 탑의 장대한 내력을 느
끼게 한다. 비록 앉은뱅이 신세나 다름이 없지
만 선암사의 지긋한 역사를 온 몸으로 알려주
는 산증인이다.

▲  3층석탑을 굽어보는 칠성각(七星閣)
달랑 1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칠성 식구들의
거처이다.

▲  칠성각과 산신각 사이를 경쾌하게
흘러가는 선암사계곡

◀  계곡 바람이 지나가는 벼랑 밑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벼랑 그늘에 산신 할배의 거처인 1칸짜리
산신각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  극락전(極樂殿)
칠성각 좌측에 자리한 극락전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3존상
<가운데 불상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95호>


극락전의 주인장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고려 후기 것으
로 여겨진다.
선암사의 빛바랜 일기장인 '선암사기(記)'에 따르면 고려 말 왜구들이 빼돌려 그들의 본거지
에 절을 지어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강제로 제자리를 떠난 불상이 단단히 뿔이 났는지 그 지
역 사람들이 비명횡사로 계속 죽어나가자 염통이 쫄깃해진 그 잡것들은 다시 배에 실어 웅천
에 있던 성흥사(聖興寺, 창원시 진해구)에 기증했다고 전한다.
이후 선암사로 흘러들어왔으며, 왜구에게 납치당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흔치 않은 불상으로
그 사연이 전해지면서 영험이 있는 불상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전설의 불상이 이것이 아닌
다른 불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유리막에 감싸인 아미타불은 온화한 표정을 지은 동그란 얼굴로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있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양 손은 제1손가락과 제3손가락을 맞
댄 채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있는데, 오른팔은 팔꿈치를 접어 가슴 높이에서 손바닥이 보이
도록 바깥을 향하고 있으며, 왼팔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가슴 밑에 댄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
)을 취하고 있다.
그의 뱃속에서는 고맙게도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나왔는데, 복장개부 입구에서 얼굴 부위까지
책자형 경전과 향, 중수 사실을 기록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발원문에는 중수 시기와 참
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불상의 양식으로 봤을 때 불상과 발원문의 시기가 그
리 일치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쨌든 옛 사람들이 넣어둔 발원문 덕분에 이 불상은 2008년 지
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선암사의 꼭대기, 조사전(祖師殿)

칠성각 뒤쪽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조사전이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으로 보통 절 꼭대기에는 삼성각이나 산신각을 두기 마련이나 여기는
조사전을 위쪽으로 올리고 그들을 1단계 밑에 깔았다. 정면과 측면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원효대사를 비롯해 이곳을 거쳐간 승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여기서 길은 벼랑으로 막
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


▲  조사전에 봉안된 승려의 진영
가운데 승려가 원효대사인듯 싶다. 좌우는 누구인지 모르겠음..

▲  선암사에서 바라본 백양산 애진봉(589m)

선암사 경내를 둘러보고 명부전 서쪽 길을 가니 너른 밭과 공양간이 나온다. 마침 점심 때라
절의 인심도 확인할 겸, 공양간 앞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외지인은 안된다는 차가운 안내문이
공양간 문에 자석처럼 붙어있었다. (자리 협소를 이유로 제공하지 않는다고 함)
하여 허탈감을 애써 뒤로 하며, 절 뒤쪽에 아른거리는 애진봉이나 잠깐 올라가기로 했다. 애
진봉은 백양산의 일원으로 부산 최대의 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곳인데, 선암사에서 애진봉 정
상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허나 몇 발자국 떼기가 무섭게 귀차니즘이 거세게 밀려오면서 선암사 서쪽 소나무숲에서 발길
을 돌렸다. 이렇게 바로 철수하니 정말 밥을 조금 먹다만 기분이다. 허나 땡기지가 않으니 어
쩌겠는가. 이렇게 스치고 지나가는 수밖에...


▲  애진봉으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  선암사 서쪽 소나무숲

▲  선암사 약수터

다시 공양간으로 내려오니 그 옆구리에는 나그네를 위한 쉼터가 있었다. 쉼터에는 간단한 먹
거리와 염주, 불교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쉼터 의자에는 산꾼 여럿이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를 섭취하고 있었다.
쉼터 옆에는 선암사 약수터가 있는데 지역에서 꽤 알려진 약수로 물의 낭비를 줄이고자 수도
꼭지를 달아 물을 통제하고 있었다. 졸고 있는 파란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목구멍에 들이
키니 물이 빛의 속도로 목구멍과 폐부를 시원하게 적셔준다.
선암사 경내로 다시 들어가 청동북이나 보고 가려고 대웅전을 기웃거렸으나 아직 예불은 끝나
지 않았다. 새가슴마냥 문 밖에서 청동북의 안부를 확인해 보았으나 내부가 다 보이지 않아
쿨하게 포기하고 일주문과 각박한 계단을 통해 선암사를 나와 다음 정처로 이동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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