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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와타즈미신사


' 부산 대마도 나들이 '
(만관교, 에보시다케전망대, 아소만, 와타즈미신사)

와타즈미신사 앞 도리이
▲  와타즈미신사 앞 도리이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만관교 주변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여호도(메고시마)


* 대마도의 본토는 우리나라(대한민국)이다. <본글에 나오는 본토는 우리나라를 뜻함>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대한해협에 떠있는 부산 대마도를 찾았다.
대마도는 2004년 가을부터 계속 인연을 노렸으나 태풍이 계속 초를 치면서 인연이 자꾸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 5월에 이르러 다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흔쾌히 도와주어 100% 대마도 상륙 확정이다.

아침 일찍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일행들을 만나 대마도로 가는 오션플라워호(대아
고속해운)에 몸을 실었다. 배는 고요하기 그지 없는 대한해협을 유유히 가로질러 2시간
20분 만에 대마도의 주요 관문인 이즈하라<엄원(嚴原)>항에 우리를 무사히 가져다 주었
다. 드디어 대마도에 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처음 발을 들인 대마도의 첫 느낌은 본토의 어느 섬에 들어온 듯한 무척 낯익은 모습인
데, (완전 '부산광역시 대마군' 같은 기분) 그런 즐거운 흥을 회충처럼 생긴 왜열도 글
자(가나)가 건방지게 깨뜨리려 든다. (가나는 신라가 만든 이두식 글자임)

대마도<왜어(倭語)로 쓰시마, 쯔시마(つしま)>는 5개의 유인도와 102개의 무인도 등 총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708㎢이다. 남북이 꽤 길쭉하여 제법 큰 섬으
로 다가오는데, 남북 길이가 82km, 동서 길이는 최대 18km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옛 땅의 일부로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동남쪽 끝을 맡고 있었으며, 우
리의 동남쪽 끝이자, 왜국(일본)의 서북쪽 끝으로 그 예민하고 외로운 위치 때문에 '국
경의 섬'이라 불린다.
우리 본토에서도 아주 가까워(부산에서 49~50km) 매우 저렴한 금액과 짧은 시간으로 외
국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으며, 그 매력으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
이 많은 편이다. (2017년에 70만 명이 찾았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마도는 우리가 꼭
회복해야될 땅이라는 것이다. (대마도의 역사와 지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첫날은 이즈하라 시내의 여러 명소를 돌아다녔다. 만송각(반쇼가쿠)이란 왜식(倭式) 식
당에서 본토식이 가미된 대마도 토속음식인 이시야키(石燒)와 이리야키(いリやき)로 거
하게 저녁을 먹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아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즈하라에서 둘러본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에서는 둘째 날 오
전에 둘러본 곳만 다루었다.


♠  대마도를 2개의 섬으로 나눠버린 만관협곡과 그 협곡에 놓인
만관교(万關橋, 만제키바시)

▲  만관교(만제키바시)

대아호텔에서 대마도의 첫 저녁이자 첫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 햇살의 성화에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 1층 온천탕(바닷물을 가져와서 끓인 것임)에서 몸을 푹 삶고 1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
었다.
아침은 본토의 밥상보다도 크게 떨어지는 왜식(倭式) 정식을 먹었는데 밥도 그렇고 반찬도 그
렇고 양이 매우 적었다. 하여 식당 직원에게 리필을 요청하니 반찬은 일절 안되고 밥만 된다
고 그런다. (반찬도 없이 어찌 밥을 먹나?) 본토 회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임에도 식당 운영은
좁쌀처럼 왜열도 스타일로 하는 것이다.

아침을 먹고 객실(3층 다다니방)로 올라가 여장을 꾸리고 나오니 우리를 태울 버스가 대기하
고 있었다. 30인승 정도의 중형버스로 일행을 모두 태우자 대아호텔을 뒤로하며 이즈하라 시
내로 내려갔다.
어제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이즈하라 시내의 아침 풍경은 마치 텅 빈 영화세트장처럼 너무 적
막하여 우리가 어제 이곳을 거닐었는지도 햇갈리게 만든다.

이즈하라를 벗어난 버스는 북쪽을 향해 열심히 바퀴를 굴려 게치와 대마공항(쓰시마 야마네코
공항)의 밑도리를 지나 어느 다리 앞에서 바퀴를 멈춰섰다. 그곳이 둘째 날의 첫 답사지인 만
관교이다.


▲  만관교 서쪽 아소만

대마도(면적 708㎢) 본섬은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지금은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2개의 섬이 구분되는 곳이 바로 만관교가 있는 만관협곡(만관운하)이다.
만관월(万關越, 만관키코시)과 남쪽에 있는 대선월(大船越, 오후나코시), 북쪽의 소선월(小船
越)은 해발이 바다에 닿을 정도로 매우 낮고 대마도에서 가장 폭이 좁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소선월은 왜에서 신라와 당으로 보낸 사신이 지나
가던 곳이며, 대선월은 대마도 최초의 운하이나 폭이 좁음)
허나 배를 밀거나 들고 가는 식으로 운반하거나 반대쪽으로 넘어가 배를 갈아타는 식이라 불
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왜국 해군은 선박의 왕래와 대한해협의 제해권 장악을 위
해 1897년에 만관월에 삽질을 가해 1901년 운하를 완성시켰다. 그것이 바로 만관협곡(만관운
하)이며, 운하 삽질로 나온 흙과 바위는 운하 동쪽에 있는 메고시마의 육지 매립에 쓰였다.

운하의 등장으로 아소만과 마우라만(삼포만, 三浦灣)은 완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그 짧은 거리 때문에 배를 직접 운반하거나 한참을 돌아가야 했었다. 운하 위에는 1901년 80m
길이의 나무 다리(만관교)를 지어 운하로 끊어진 남쪽과 북쪽을 잇게 했으며, 1956년 기존의
다리를 부시고 81.6m의 새 다리를 닦았고, 1996년 현재의 다리를 새로 닦아 대마도의 북섬과
남섬을 끈끈하게 붙잡고 있다. 다리 길이는 210m, 폭 10m, 높이 25m로 2차선 도로와 뚜벅이길
을 갖추고 있다.

대마도의 중심지인 이즈하라에서 히타까츠를 비롯한 북섬으로 가거나 반대로 가는 경우 무조
건 이 다리를 건너야 된다. 주변 풍경도 그런데로 볼만하여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자리를
잡았으며 협곡 동쪽인 메고시마(여호도, 女護島) 포구로 내려가면 협곡과 다리의 전경을 싹
살펴볼 수 있다.


▲  만관교 서쪽 만관협곡 (아소만 방향)

▲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메고시마 포구(왼쪽 마을),
구스보(久須保, 오른쪽 산지)

▲  만관운하를 닦은 기념으로 2005년에 세워진 개삭비(開削碑)

▲  만관교 주변(구스보, 메고시마) 지도


♠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아소만과 그 아소만을 굽어보는
에보시다케(烏帽子岳)전망대

▲  오로지 전망을 위해 설치된 에보시다케전망대

만관교를 짧게 둘러보고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도요타마마치(풍옥정, 豊玉町)에 이
르러 와타즈미신사 방면 길로 좌회전하여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으니 에보시다케전망대 주차
장이 마중을 나온다.

에보시다케는 해발 176m의 낮은 뫼로 와타즈미신사의 바로 뒷산이다. 그 정상에 전망대가 닦
여져 있는데 전망시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오로지 조망을 위한 공간으로 주변이 온통 낮은
산과 무성한 숲, 바다 일색이라 360도 조망이 가능하다.
이곳에 올라서면 서쪽과 서남쪽, 동쪽으로 리아스식 해안과 무수한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아
소만이 훤히 바라보이며, 그 모습이 마치 월남(越南,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일명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린다. 바로 그 풍경 때문에 이 궁벽한 곳에 전망대를 닦은 것이
다.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자리를 잡은 이곳은 날씨가 좋을 때는 본토의 부산(釜山)까지 흐릿하
게 시야에 들어온다고 한다. 여기서 부산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나 공기가 깨끗한 겨울
에는 잘하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전망대 밑까지 1.5차선 크기의 도로가 닦여져 있으며 차에서 내려 각박한 산길을 조금 올라가
면 된다.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올라갈 수 있으니 이곳에 왔다면 꼭 전망대에 들려 일품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이곳은 워낙 산골벽지라 시내버스 같은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풍옥정의 중심 마
을인 니이(仁位)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거나 와타즈미신사를 경유하는 투어버스(이즈하라↔
히타까츠)를 타고 걸어서 들어가야 된다.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포구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①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②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③

▲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④

▲  숲에 묻혀있는 에보시다케전망대 남쪽 봉우리

▲  주차장에서 바라본 에보시다케
붉은 피부의 버스는 본토 관광객을 태우고 온 버스들이다. 그들 너머로 높은 산이
보이는데 그 봉우리가 에보시다케로 그 정상에 전망대가 닦여져 있다.

▲  에보시다케 주차장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주변


♠  신라와 가야 사람들이 고향을 꿈꾸며 세웠던 도해궁이자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입구

에보시다케전망대를 둘러보고 왔던 길로 나와 와타즈미신사 남쪽 숲길에서 내렸다. 여기서 무
성한 삼나무 숲길을 들어서면 와타즈미신사로 바로 이어진다.

와타즈미신사는 팔번궁신사(하치만구신사), 해신신사(가이진신사, 海神神社)와 더불어 대마도
의 대표적인 신사이다. 초대 왜왕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이며, 평안시대(平安時代, 헤이안시대
)의 율령 등이 담긴 연희식(延喜式, 엔기시키)의 신명장(神名帳, 진묘초)에도 나올 정도로 대
마도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신사이다.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신사 주변은 삼나무와 대나무, 편백나무 등이 짙게 숲을 이루고 있다. 만송원의 두터운 삼나
무숲처럼 햇살이 제대로 맥을 못추는 숲길 속에 신사 도리이와 토요타마히메의 분묘 비석이
있으며, 그 숲길의 끝에 와타즈미신사 배례전이 있다.

▲  금줄이 쳐진 삼나무숲 도리이

▲  풍옥희(도요타마히메) 분묘 비석

풍옥희(豊玉姬,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는 와타즈미신사 설화에 나오는 용왕의 딸이다.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돌을 세워 비석으로 삼았는데, 그 피부에 풍옥희지분묘(豊玉姬之墳墓)
라 쓰여있다.
얼핏보면 풍옥희의 무덤으로 볼 수 있겠으나 비석에 쓰인 것과 달리 그에게 제를 지내던 제단
이었으며, 신사가 조성되기 전까지 제단으로 쓰였다. 또한 비석의 글씨 색깔이 금색으로 되어
있는데 왜열도에서 비석 글씨에 금분을 쓴 것은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년) 이후이다. 그러
니 이 비석은 그 이후에 세워진 것이 되며, 이때부터 제단이 무덤으로 둔갑된 것으로 보인다.


▲  와타즈미신사 직전 삼나무숲길

▲  금줄이 쳐진 신사 앞 돌덩어리

이곳에 신사를 짓고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지으면서 이름 없는 돌덩어리까지
의미와 이야기를 구절구절 붙여놓았다. (이 돌덩어리는 안내문이
없어서 무슨 의미의 바위인지는 모르겠음)

▲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이 봉안된 신전(神殿)
배례전 뒤쪽 높은 곳에 신전이 자리해 있다. 신전은 제삿날 외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다.


와타즈미신사는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와 하늘에서 내려온 히코호호 데미노미코
토의 사당이다. (이름도 참 징그럽게도 어렵다;;)
원래 이곳에는 신라(新羅) 또는 가야(伽倻) 사람들이 세운 사당이 있었다. 도리이가 가락국(
駕洛國)의 중심지라는 김해나 신라 서라벌(경주)을 향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
또는 가야) 사람들이 조상신을 봉안한 사당을 세우면서 고향을 향해 사당과 문을 세웠다. 하
여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들이 지은 신궁이란 뜻에서 도해궁(渡海宮)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왜가 대마도를 침탈하면서 왜식 신사로 모습이 변질되었고, 신사의 설화를 적
당히 각색하면서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이 되었는데, (최초 왜왕이 가야 출신이라고 함) 이
곳에 얽힌 설화를 잠시 끄집어내보면 대략 이렇다.

하늘의 신인 다까비무스비(高皇産靈)의 외증손으로 지상에 내려온 니니기에게 히코호호테미노
미코토(이하 히코호호)란 아들이 있었다.
히코호호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가 형에게 빌린 낚시 바늘을 바다에 빠트리고 말았는데, 그
바늘을 찾으려고 바다를 헤매다가 '시오츠라'란 신의 도움으로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
미코토(이하 도요타마)를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용궁에서 3년 동안 팔자 좋게 지내다가 문득 예전에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이 생각이 났다.
하여 장인인 용왕의 도움을 받아 그 바늘을 찾아 지상으로 올라와 형을 만났는데, 그때 도요
타마는 만삭의 몸이라 같이 나오지를 못했다. 하여 여동생인 다마요리노히메미코토(이하 다마
요리)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바다 밖으로 나와 현재 와타즈미신사 자리에서 남편을 만났다.
도요타마는 산통을 느껴 손수 해변에 집을 짓고 남편에게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면 안돼~~!'
당부를 했다.

허나 사람의 심리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 결국 훔쳐보게 되었는데, 글쎄 큰 뱀이
산고(産苦)로 정신없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완전히 혼돈의 상태
가 되었고, 원래 모습을 들켜버린 도요타마는 너무 열받아서 막 낳은 아들을 해변에 버리고
우나자까를 메워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나자까는 용궁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곳을
헤집으면 문이 나타나고 메우면 사라짐)
이때 버리고 간 아들이 '우가야 후기아에즈(이하 우가야)'로 별명은 '이소라 에비스'이다.

우가야는 장성하여 작은 이모인 다마요리와 혼인했다. 서로 나이 차이가 좀 있을텐데 어쨌든
이모와 조카가 혼인을 한 것이다. 그들은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초대 왜왕(倭王)이라는
신무(神武)이다.
이 설화를 통해 왜왕족은 천신(天神)의 부계(父系)와 해신(海神)의 모계가 만나 이루어진 혈
통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곳이 왜왕실의 발원지임을 크게 어필하고 있다. 동시에 근친혼도
대놓고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와 고려도 근친혼이 심했음)

가야는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해 구주(九州, 규슈) 등 적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여 그들 입맛에
맞는 지방 정권을 세워 통치했다. 그때 가야 본토에서 보낸 왕족이나 관리, 또는 새로운 삶터
를 꿈꾸며 건너간 가야 사람이 초대 왜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대마도와 꽤 유별난 인
연이 있었던 듯 싶으며 그로 인해 이곳에 그의 위패가 봉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왜가 가야와 백제, 신라에 종속되고 그들에게 오지게 영향을 받았던 과거를 싹 왜곡
하고 지우면서 왜국 중심의 역사관을 짜게 된다. 그 과정에서 초대 왜왕의 대마도 이북의 족
적은 지워졌고 이곳 신사의 봉안 주체까지 바꾸어 왜왕실의 발원지로 내세웠다. 그것도 모자
라 난데없이 천신과 해신(용왕)까지 등장을 시켜 왜왕이 그들의 자손이란 허무맹랑한 설화까
지 지어 붙였다. (현실은 가야, 신라, 백제 사람들의 후손들임)


▲  와타즈미신사 배례전(拜禮殿) 내부와 바로 앞에 걸린 색동줄
신사에 예를 표할 때는 방울이 달린 색동줄을 당기면서 방울소리를 낸다. 이는
신사에 봉안된 존재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자 함으로 이후 2번 예를
표하고 2번 박수를 친 다음 1번 절을 한다.

▲  금색으로 쓰인 봉축성혼기념비(奉祝成婚記念碑)
1993년 현재 왜왕인 덕인(德人, 나루히토)의 혼인을 기리고자 신사에서 아부용으로
세운 것이다. (덕인은 2019년 5월 부왕인 아키히토의 양위를 받아 왜왕이 됨)
왜국은 아직도 미개한 부분이 적지 않아서 날짜를 표기할 때
왜왕의 연호를 쓰는 별종 짓을 보인다.


조선 중기 이후 대마도가 왜화가 되면서 신불(神佛) 통합으로 기존 신사들이 이름이 바뀌었고
절과 마을 사당이 적지않게 신사로 강제 전환되었다. 와타즈미신사 역시 신사로 전환되었는데,
이곳 지명인 와타즈미(와타쓰미)란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고 왜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는 곳이라 신공황후(神功皇后) 개소
리나 늘어놓는 팔번궁신사보다 나은 곳이다. <신공황후 바로 이전 시절에 신라가 시마네와 야
마구치를 공격하여 왜왕 또는 그에 준하는 높은 작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음>
게다가 신사 주위로 조엽수림(照葉樹林)이 매우 울창하며 북방계와 대륙계 식물이 해안 주변
에 섞여 있어 많은 새들이 머문다. 그래서 신사 주변 숲은 장기현(長崎縣, 나가사키) 천연기
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신사 앞에 바다(니이아소만)가 펼쳐져 있어 경관도 괜찮다.


▲  붉은 피부의 오미쿠지

저 붉은 통에 100엔 동전을 넣으면 운세가 적힌 종이가 나온다. 그 종이를 오미쿠지라 하는데
운세가 괜찮게 나왔으면 가져가도 되며, 영 좋지 않게 나왔을 때는 나무나 붉은 통 위 금줄에
묶어둔다. 그러면 신이 나쁜 운세가 좋게 되도록 빌어준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와타즈미신사
의 배때기를 불려주는 붉은 통이다.


▲  소원 나무판을 다는 곳(에마)

나무판 뒤쪽에 말이 그려져 있어 에마(畵馬)라 부른다. 소원 내용과 주소, 이름을 적어서 달
면 되는데 주소는 꼭 적어야 된다고 한다. 그래야 소원이 그 주소지로 날라가 소원성취가 된
다는 것이다.
소원을 적는 나무판은 돈을 내고 사야 되며 소원판 장사는 이곳의 짭짤한 돈줄이다.

▲  배례전 앞 1번 도리이

▲  배례전 앞 도리이와 코마이누상(拍犬)

배례전 앞 도리이 옆에는 오래된 코마이누상 1쌍이 있다. 이들은 신사를 지키는 개의 석상으
로 원래는 고려 개이다. 그것이 대마도와 왜열도로 넘어와 신사 등을 지키는 존재가 된 것이
다.
이곳 코마이누상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둘 다 특이하게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
를 모두 가지고 있다. 천하에 널린 개의 석상 중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암컷은 입을 다물고 있
는 모습인데, 이는 사람이 죽을 때 보통 입을 다물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입을 벌리고 죽는 경우도 많음;;) 그에 반해 수컷은 침을 질질 흘리며 입을 벌리고 있다.


▲  2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와타즈미신사

▲  2번 도리이

▲  땅과 바다의 경계에 자리한 3번 도리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야나 신라 사람들의 마음이 변치 않은 듯, 여전히 그들의
본거지를 향하고 있다. 이곳이 왜화가 되면서 사당은 신사로 바뀌고
이렇게 도리이까지 설치되었지만 이곳의 본마음은 여전한 것이다.

▲  와타즈미신사의 백미, 바다에 세워진 도리이들
와타즈미신사를 상징하는 풍경으로 3번 도리이 너머로 4번 도리이와
5번 도리이가 바다에 발을 담구고 있다.


와타즈미신사 앞에는 5개의 도리이가 있다. (숲속에 있는 도리이는 제외) 이렇게 도리이를 5
개를 둔 것은 5욕(五欲)으로부터 해탈하라는 의미라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3개의 도리
이는 땅에 있고, 2개는 니이아소만이라 불리는 바다에 있는데 이는 용왕이 이들 도리이를 통
해 신사로 들어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즉 용왕을 위한 이정표이다.

바다에 설치된 도리이는 썰물 때는 거의 육지처럼 있다가 밀물 때는 도리이의 밑부분이 물에
잠기며 바다에 떠있는 모습을 보인다. 최대 2m까지 잠긴다고 하는데 바로 그 풍경이 이곳 신
사의 백미이다. 허나 내가 갔을 때는 썰물 때라 1개만 물 위에 있었다.

▲  3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니이아소만

▲  신사 석조(石槽)

신사에는 물이 담긴 석조가 있다. 생김새가 본토의 샘터와 비슷하고 바가지까지 있어서 자세
한 사연을 모르면 본토 사람의 본능상 물 1모금 들이키기 쉬운데 절대로 물을 마시는 샘터가
아니다. 이곳은 신사 참배 전에 손을 씻는 곳으로 바가지에 물을 담아서 손을 씻고 입을 닦는
다. 그런 다음 참배에 임하면 된다.


▲  이소라 에비스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비늘바위)

비늘바위는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인 도요타마히메가 출산 장면을 훔쳐본 남편에게 절망하여
아들(이소라 에비스)을 버리고 용궁으로 들어갔다는 우나자까이다. 용궁으로 들어갈 때만 문
이 생긴다고 하는데 얼핏보면 설화를 끼워 맞추고자 인위적으로 만든 듯 싶으나 엄연한 자연
산 바위이다. 또한 아들인 이소라 에비스를 버린 곳이라 하여 '이소라에비스'라 부르기도 한
다.

이렇게 하여 와타즈미신사 일대를 그런데로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부근에 있는 에보시다케전
망대와 함께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했으나 2019년 9월에 신사를
관리하는 원숭이가 본토 관광객에게 무례를 범한 일이 발생하여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2020년 이후, 중공 잡것들이 천하에 악의적으로 퍼트린 코로나 전염병으로 대마도를 찾는 본
토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다가 2022년 이후 조금씩 늘고 있는데, 와타즈미신사 원숭이
들이 여전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본토 사람들에게 계속 시건방을 떨자 요즘에는 대마도 여행
상품 대부분이 이곳을 차창(車窓) 관광으로 때우고 있다. 즉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
이다.
그나마 에보시다케전망대로 가는 길목이라 차창 관광으로 봐준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그
앞을 지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토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와타즈미신사 원숭이들만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니 참 근시안적인 원숭이들이 아닐 수 없다. (왜열도 원숭이들은 이곳을 비
롯한 대마도에는 별로 오지도 않음)

와타즈미신사를 떠난 우리의 버스는 니이로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별도
의 글에서(☞ 관련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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