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와 가야 사람들이
고향을 꿈꾸며 세웠던 도해궁이자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입구 |
에보시다케전망대를 둘러보고 왔던 길로 나와 와타즈미신사 남쪽 숲길에서 내렸다. 여기서 무
성한 삼나무 숲길을 들어서면 와타즈미신사로 바로 이어진다.
와타즈미신사는 팔번궁신사(하치만구신사), 해신신사(가이진신사, 海神神社)와 더불어 대마도
의 대표적인 신사이다. 초대 왜왕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이며, 평안시대(平安時代, 헤이안시대
)의 율령 등이 담긴 연희식(延喜式, 엔기시키)의 신명장(神名帳, 진묘초)에도 나올 정도로 대
마도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신사이다. |
▲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
신사 주변은 삼나무와
대나무, 편백나무 등이 짙게 숲을 이루고 있다. 만송원의 두터운 삼나
무숲처럼 햇살이 제대로 맥을 못추는 숲길 속에 신사 도리이와 토요타마히메의 분묘 비석이
있으며, 그 숲길의 끝에 와타즈미신사 배례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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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줄이 쳐진 삼나무숲 도리이 |
▲ 풍옥희(도요타마히메) 분묘 비석 |
풍옥희(豊玉姬,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는 와타즈미신사 설화에 나오는 용왕의 딸이다.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돌을 세워 비석으로 삼았는데, 그 피부에 풍옥희지분묘(豊玉姬之墳墓)
라 쓰여있다.
얼핏보면 풍옥희의 무덤으로 볼 수 있겠으나 비석에 쓰인 것과 달리 그에게 제를 지내던 제단
이었으며, 신사가 조성되기 전까지 제단으로 쓰였다. 또한 비석의 글씨 색깔이 금색으로 되어
있는데 왜열도에서 비석 글씨에 금분을 쓴 것은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년) 이후이다. 그러
니
이 비석은 그 이후에 세워진 것이 되며, 이때부터 제단이 무덤으로 둔갑된 것으로 보인다. |
▲ 와타즈미신사 직전 삼나무숲길
▲ 금줄이 쳐진 신사 앞 돌덩어리
이곳에 신사를 짓고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지으면서 이름 없는 돌덩어리까지
의미와
이야기를 구절구절 붙여놓았다. (이 돌덩어리는 안내문이
없어서 무슨 의미의 바위인지는 모르겠음)
▲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이 봉안된 신전(神殿)
배례전 뒤쪽 높은 곳에 신전이 자리해 있다. 신전은 제삿날 외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다. |
와타즈미신사는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와 하늘에서 내려온 히코호호 데미노미코
토의 사당이다. (이름도 참 징그럽게도 어렵다;;)
원래 이곳에는 신라(新羅) 또는 가야(伽倻) 사람들이 세운 사당이 있었다. 도리이가 가락국(
駕洛國)의 중심지라는 김해나 신라 서라벌(경주)을 향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
또는
가야) 사람들이 조상신을 봉안한 사당을 세우면서 고향을 향해 사당과 문을 세웠다. 하
여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들이 지은 신궁이란 뜻에서 도해궁(渡海宮)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왜가 대마도를 침탈하면서 왜식 신사로 모습이 변질되었고, 신사의 설화를 적
당히 각색하면서 왜왕실의 발원지 같은 곳이 되었는데, (최초 왜왕이 가야 출신이라고 함)
이
곳에 얽힌 설화를
잠시 끄집어내보면
대략 이렇다.
하늘의 신인 다까비무스비(高皇産靈)의 외증손으로 지상에 내려온 니니기에게 히코호호테미노
미코토(이하 히코호호)란 아들이 있었다.
히코호호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가 형에게 빌린 낚시 바늘을 바다에 빠트리고 말았는데, 그
바늘을 찾으려고 바다를 헤매다가 '시오츠라'란 신의 도움으로 용왕의 딸인 도요타마히메
노
미코토(이하 도요타마)를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용궁에서 3년 동안 팔자 좋게 지내다가 문득 예전에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이 생각이 났다.
하여 장인인 용왕의 도움을 받아 그 바늘을 찾아 지상으로 올라와 형을 만났는데, 그때 도요
타마는 만삭의 몸이라 같이 나오지를 못했다. 하여 여동생인 다마요리노히메미코토(이하 다마
요리)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바다 밖으로 나와 현재 와타즈미신사 자리에서 남편을 만났다.
도요타마는 산통을 느껴 손수 해변에 집을 짓고 남편에게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면 안돼~~!'
당부를 했다.
허나 사람의 심리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 결국 훔쳐보게 되었는데, 글쎄 큰 뱀이
산고(産苦)로 정신없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완전히 혼돈의 상태
가
되었고, 원래 모습을 들켜버린
도요타마는 너무 열받아서 막 낳은 아들을 해변에 버리고
우나자까를 메워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나자까는 용궁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곳을
헤집으면 문이 나타나고 메우면 사라짐)
이때 버리고 간 아들이 '우가야 후기아에즈(이하 우가야)'로 별명은 '이소라 에비스'이다.
우가야는 장성하여 작은 이모인 다마요리와 혼인했다. 서로 나이 차이가 좀 있을텐데 어쨌든
이모와 조카가 혼인을 한 것이다. 그들은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초대 왜왕(倭王)이라는
신무(神武)이다.
이 설화를 통해 왜왕족은 천신(天神)의 부계(父系)와 해신(海神)의 모계가 만나 이루어진 혈
통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곳이 왜왕실의 발원지임을 크게 어필하고 있다. 동시에 근친혼도
대놓고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와 고려도 근친혼이 심했음)
가야는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해 구주(九州, 규슈) 등 적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여 그들 입맛에
맞는 지방 정권을 세워 통치했다. 그때 가야 본토에서 보낸 왕족이나 관리, 또는 새로운 삶터
를 꿈꾸며 건너간 가야 사람이 초대 왜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대마도와 꽤 유별난 인
연이 있었던 듯
싶으며
그로 인해 이곳에 그의 위패가 봉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왜가 가야와 백제, 신라에 종속되고 그들에게 오지게 영향을 받았던 과거를 싹 왜곡
하고 지우면서 왜국 중심의 역사관을 짜게 된다. 그 과정에서 초대 왜왕의 대마도 이북의 족
적은 지워졌고 이곳 신사의 봉안 주체까지 바꾸어 왜왕실의 발원지로 내세웠다. 그것도
모자
라 난데없이 천신과 해신(용왕)까지 등장을 시켜 왜왕이 그들의 자손이란 허무맹랑한
설화까
지 지어
붙였다. (현실은 가야, 신라, 백제 사람들의 후손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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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타즈미신사 배례전(拜禮殿) 내부와 바로
앞에 걸린 색동줄
신사에 예를 표할 때는 방울이 달린 색동줄을 당기면서 방울소리를 낸다. 이는
신사에 봉안된 존재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자 함으로 이후 2번 예를
표하고 2번 박수를 친 다음 1번 절을 한다.
▲ 금색으로 쓰인 봉축성혼기념비(奉祝成婚記念碑)
1993년
현재 왜왕인 덕인(德人, 나루히토)의 혼인을 기리고자 신사에서 아부용으로
세운 것이다. (덕인은 2019년 5월 부왕인 아키히토의 양위를 받아 왜왕이 됨)
왜국은 아직도 미개한 부분이 적지
않아서 날짜를 표기할 때
왜왕의 연호를 쓰는 별종 짓을 보인다. |
조선 중기 이후 대마도가 왜화가 되면서 신불(神佛) 통합으로 기존 신사들이 이름이 바뀌었고
절과 마을 사당이 적지않게 신사로 강제 전환되었다. 와타즈미신사 역시 신사로 전환되었는데,
이곳 지명인 와타즈미(와타쓰미)란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고 왜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는 곳이라 신공황후(神功皇后) 개소
리나 늘어놓는 팔번궁신사보다 나은 곳이다. <신공황후 바로 이전 시절에 신라가 시마네와 야
마구치를 공격하여 왜왕 또는 그에 준하는 높은 작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음>
게다가 신사 주위로 조엽수림(照葉樹林)이 매우
울창하며
북방계와 대륙계 식물이 해안 주변
에 섞여 있어 많은 새들이 머문다. 그래서 신사
주변 숲은 장기현(長崎縣, 나가사키) 천연기
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신사 앞에
바다(니이아소만)가 펼쳐져 있어 경관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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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피부의 오미쿠지 |
저 붉은 통에 100엔 동전을 넣으면 운세가 적힌 종이가 나온다. 그 종이를 오미쿠지라
하는데
운세가 괜찮게 나왔으면 가져가도 되며, 영 좋지 않게 나왔을 때는 나무나 붉은 통 위 금줄에
묶어둔다. 그러면 신이 나쁜 운세가 좋게 되도록 빌어준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와타즈미신사
의 배때기를 불려주는 붉은 통이다. |
▲ 소원 나무판을 다는 곳(에마) |
나무판 뒤쪽에 말이 그려져 있어 에마(畵馬)라 부른다. 소원 내용과 주소, 이름을
적어서 달
면 되는데 주소는 꼭 적어야 된다고 한다. 그래야 소원이 그 주소지로 날라가 소원성취가 된
다는 것이다.
소원을 적는 나무판은 돈을 내고 사야 되며 소원판 장사는 이곳의 짭짤한 돈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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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례전 앞 1번 도리이 |
▲ 배례전 앞 도리이와 코마이누상(拍犬) |
배례전 앞 도리이 옆에는 오래된 코마이누상 1쌍이 있다. 이들은 신사를 지키는 개의
석상으
로 원래는 고려 개이다. 그것이 대마도와 왜열도로 넘어와 신사 등을 지키는 존재가 된 것이
다.
이곳 코마이누상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둘 다 특이하게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
를 모두 가지고 있다. 천하에 널린 개의 석상 중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암컷은 입을 다물고 있
는 모습인데, 이는 사람이 죽을 때 보통 입을 다물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입을 벌리고 죽는 경우도 많음;;) 그에 반해 수컷은 침을 질질 흘리며 입을 벌리고 있다. |
▲ 2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와타즈미신사
▲ 2번 도리이
▲ 땅과 바다의 경계에 자리한 3번 도리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야나 신라 사람들의 마음이 변치 않은 듯, 여전히 그들의
본거지를 향하고 있다. 이곳이 왜화가 되면서 사당은 신사로 바뀌고
이렇게 도리이까지 설치되었지만 이곳의 본마음은 여전한 것이다.
▲ 와타즈미신사의 백미, 바다에 세워진 도리이들
와타즈미신사를 상징하는 풍경으로 3번 도리이 너머로 4번 도리이와
5번 도리이가
바다에 발을 담구고 있다. |
와타즈미신사 앞에는 5개의 도리이가 있다. (숲속에 있는 도리이는 제외) 이렇게 도리이를 5
개를 둔 것은 5욕(五欲)으로부터 해탈하라는 의미라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3개의 도리
이는 땅에 있고, 2개는 니이아소만이라 불리는 바다에 있는데 이는 용왕이 이들 도리이를 통
해
신사로 들어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즉 용왕을 위한 이정표이다.
바다에 설치된 도리이는 썰물 때는 거의 육지처럼 있다가 밀물 때는 도리이의 밑부분이 물에
잠기며 바다에 떠있는 모습을 보인다. 최대 2m까지 잠긴다고 하는데 바로 그 풍경이 이곳 신
사의 백미이다. 허나 내가 갔을 때는 썰물 때라 1개만 물 위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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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번 도리이에서 바라본 니이아소만 |
▲ 신사 석조(石槽) |
신사에는 물이 담긴 석조가 있다. 생김새가 본토의 샘터와 비슷하고 바가지까지 있어서
자세
한 사연을 모르면 본토 사람의 본능상 물 1모금 들이키기 쉬운데 절대로 물을 마시는 샘터가
아니다. 이곳은 신사 참배 전에 손을 씻는 곳으로 바가지에 물을 담아서 손을 씻고 입을 닦는
다.
그런 다음 참배에 임하면 된다. |
▲ 이소라 에비스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비늘바위) |
비늘바위는 와타즈미신사의 주인공인 도요타마히메가 출산 장면을 훔쳐본 남편에게 절망하여
아들(이소라 에비스)을 버리고 용궁으로 들어갔다는 우나자까이다. 용궁으로 들어갈 때만 문
이 생긴다고 하는데 얼핏보면 설화를 끼워 맞추고자 인위적으로 만든 듯 싶으나 엄연한 자연
산 바위이다. 또한
아들인 이소라 에비스를 버린 곳이라 하여 '이소라에비스'라 부르기도 한
다.
이렇게 하여 와타즈미신사 일대를 그런데로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부근에 있는 에보시다케전
망대와 함께 대마도의 필수 관광지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했으나 2019년 9월에 신사를
관리하는 원숭이가 본토 관광객에게 무례를 범한 일이 발생하여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2020년 이후, 중공 잡것들이 천하에 악의적으로 퍼트린 코로나 전염병으로 대마도를 찾는 본
토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다가 2022년 이후 조금씩 늘고 있는데, 와타즈미신사 원숭이
들이 여전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본토 사람들에게 계속 시건방을 떨자 요즘에는 대마도 여행
상품 대부분이 이곳을 차창(車窓) 관광으로 때우고 있다. 즉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
이다.
그나마 에보시다케전망대로 가는 길목이라 차창 관광으로 봐준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그
앞을
지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토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와타즈미신사 원숭이들만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니 참 근시안적인 원숭이들이 아닐 수 없다. (왜열도 원숭이들은 이곳을 비
롯한 대마도에는 별로 오지도 않음)
와타즈미신사를 떠난 우리의 버스는 니이로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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