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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소금강, 금강공원


' 부산의 소금강을 거닐다. 금정산 금강공원 '
금강공원 소나무숲
▲  금강공원 소나무숲
 


새해를 코앞에 둔 1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우리나라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을 찾았다.

이번 부산 나들이는 운 좋게 얻은 수서고속전철(SRT) 무료 쿠폰을 이용해 아주 기분 좋
게 다녀왔는데, 새벽의 차디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7시에 수서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고속전철(SRT)에 몸을 싣고 2시간 20여 분을 달려 경부선의 남쪽 종점인 부산역에
두 발을 내렸다.

부산은 북쪽으로 울산(蔚山) 울주군, 서쪽은 경남 창원(昌原)과 맞닿아 있으며, 동쪽은
동해바다에 접해 있고,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른다. 벌써 70번 넘게 인
연을 지은 곳이라 딱히 땡기는 미답처(未踏處)가 없어 아주 부질없는 추억팔이도 할 겸,
가슴을 시리게 했던 옛 추억이 아련히 깃든 몇 곳을 그날의 메뉴로 삼았다.

부산에 이르자 제일 먼저 서면(西面) 부근에 자리한 선암사(仙巖寺, ☞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즐거운 추억이 여러 겹이나 쌓여있는 해운대(海雲臺)로 넘어가 늦은 점심으로
소고기국밥 1그릇을 말았다.
그렇게 시장한 뱃속을 달래고 저 앞에 아른거리는 해운대 해변도 간만에 가볼까 했으나
해가 짧은 시기라 쿨하게 접고 해운대역(2호선)에서 부산시내버스 31번(송정↔모라주공
아파트)을 타고 동래(東萊)로 넘어가 온천장 뒤쪽에 있는 금강공원을 찾았다.

동래의 뜨거운 현장인 온천장(溫泉場, 동래온천지구)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잠시 금강공원을 접어두고 온천장 거리를 배회하니 나를 여기로 부른 용각과 온정
개건비가 활짝 마중을 나온다.


♠  동래온천의 빛바랜 일기장과 온천 용왕신의 공간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와 용각(龍閣)


▲  온정개건비(부산 지방기념물 14호)와 욕탕으로 쓰였던
옛 석조(石槽)


천하 제일의 온천으로 오랫동안 명성이 높았던 동래온천(東萊溫泉)은 해운대온천과 더불어 부
산 지역의 대표적인 온천이다. 동래온천 일대를 흔히 온천장이라 부르고 있으며, 동래 지역의
뜨거운 혈맥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이다. <온천은 온정(溫井), 탕천(湯泉)이라 불리기도 했음>

동래온천이 속세를 향해 언제부터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신문왕(神
文王, 재위 681~692) 시절 재상을 지냈던 충원공(忠元公, 김충원)이 683년 장산국(萇山國) 온
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 들판에서 쉬었다는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록이 있다. 여기서 장산국온천이 동래온천이라고 하니 적어도 신라 중기부터 온
천으로 쓰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온천물이 얼마나 좋은지 계란이 익을 정도로 물이 뜨겁고 병든 사람이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
다고 하며<온정개건비에 '탕에 들어가 목욕하면 모든 질병을 고친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있음
> 고려 후기 문신(文臣)인 정포(鄭誧, 1309~1345)가 이곳을 다녀가 온천에서 받은 감동을 시
로 남기기도 했다.

온천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와 욕실이 지금까지 남아있네
물줄기 오는 곳 멀지 않으니 욕조가 항상 따뜻하네
1년을 질병에 시달린 몸 반나절 목욕으로 씻은 듯하네


1617년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중풍을 치료하고자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
은 적이 있었다. 그는 정포의 후손이기도 한데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지역 선비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30일이나 머물면서 온천욕을 41회나 했다. 그의 동래 나들이는 제자들이 세심
하게 정리하여 기록을 했으니 그것이 바로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이다. <여기서 봉산은 동
래의 별칭임>
그 기록에 따르면 동래온천에는 신라 제왕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돌로 된 욕조가 있었으며, 욕
조 하나는 5~6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욕조 윗부분 돌구멍에서 온천수가 나왔고 소문
대로 너무 뜨거워 손발을 급하게 담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온천 본전을 뽑고 그해 9월 4일 고향 칠곡(漆谷)으로 돌아왔는데, 안색과 기혈이 전보
다 좋아져 사람들이 목욕의 효과라고 찬양했다. 정구는 그의 조상인 정포처럼 동래온천의 덕
을 톡톡히 본 것이다.

1691년 온천의 옛 천원(泉源) 부근을 파서 새로운 천원을 발견해 돌로 다진 2개의 욕탕과 욕
사(浴舍)를 새로 지었다. 1730년과 1740년에 중수했으나 건물이 낡고 탕까지 막히자 1765년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1767)가 크게 손질하여 남탕과 여탕을 나눈 9칸짜리 건물을 지
으니 그 모습이 마치 상쾌하고 화려해 꿩이 나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동래 지역의 큰 경사였던 그 중수를 영원히 기리고자 1766년 온정개건비를 세웠으며, 비문(碑
文)은 동래 유생인 송광적(宋光迪)이 작성했다.

비석의 몸매는 높이 1.47m, 폭 64cm, 두께 21cm로 10행x16자가 쓰여져 있으며, 그 앞에는 욕
조처럼 생긴 석조가 누워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 후기에 쓰였던 욕조(浴槽)로 유일하게 1기만
남아있다. 거의 1인용 수준인 저 탕에 몸을 푹 끓이는 기분은 과연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온정개건비 자리에서 온천수를 뽑아 올렸으며, 이후 물 뽑는 자리가 바
뀌면서 지금은 동래온천의 과거를 보관하는 공간이 되었다.


▲  삼문으로 이루어진 용각의 정문, 온정용문(溫井龍門)

온정개건비와 옛 욕조는 용각 뜨락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용각은 온천수를 관리한
다는 용왕<龍王, 용왕신>이 봉안된 건물로 매년 음력 9월 9일에 온천수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용신제(龍神祭)를 지내며 착한 품질의 온천물이 계속 나오기를 염원한다.
온천장의 성역과 같은 곳이라 관리와 정성이 대단하며, 제삿날과 일부 날을 제외하고 용 문신
이 굵게 그려진 온정용문은 굳게 닫혀 있어 내부 진입은 거의 어렵다. 허나 붉은 피부로 이루
어진 키 작은 담장 너머로 온정개건비와 옛 욕조, 용각 모두 확인이 가능하니 굳이 무리를 하
면서까지 담을 넘을 필요는 없다.


▲  용왕이 봉안된 팔작지붕 용각

용각을 둘러보고 잠시 넣어두었던 금강공원으로 길을 향했다. 온천장을 벗어나 '금강공원로'
를 따라가던 중, 계속 뭔가 허전한 구석을 느꼈다. 골목에 꽉 차게 들어앉아 금강공원의 관문
역할을 했던 망미루(望美樓)가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싶어 고개를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는데 알고 보니 2014년에 그의 제자리였던 동래부 동헌(東軒)으로 이전
되었다.

금강공원로 끝에는 금정산(金井山)의 동쪽 밑도리를 가르는 '우장춘로'가 있는데, 그 길로 접
어들면 금강공원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 온정개정비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35-26 (금강로124번길 23-17)


♠  부산의 작은 소금강(小金剛), 금강공원(金剛公園)

▲  금강공원 정문
정문 옆에 입장료를 징수했던 옛 매표소의 흔적이 남아있다.


금정산 동남쪽 자락에는 부산의 소금강이자 대표적인 공원으로 추앙을 받는 금강공원이 넓게
누워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기암괴석, 계곡이 어우러진 수려한 절경을 자랑해 마치 작은 금강산(金剛
山)과 같다 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는데, 1940년 왜정(倭政)에 의해 공원으로 개발되
어 금강원이라 불렸으며, 1972년 부산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공원 전체가 문화재 보호구역이
되었으나 1993년 지방기념물에서 정리되면서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방되었다.
1973년 6월부터 입장료를 받으면서 31년간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쳐다보았으나 2004년
7월 무료로 바뀌었다.

공원의 면적은 2,220,372㎡로 금정산 540m 고지까지 빠르게 이어주는 금강케이블카가 있으며,
임진동래의총과 금정사,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 부산민속예술관, 이영도 시비(詩碑), 지석영
선생 공덕비, 허종배선생 기념비 등의 많은 명소를 품고 있다. 동래 중심지에서 강제로 이전
된 독진대아문과 이섭교비, 내주축성비 등도 잠시 이곳의 신세를 졌으나 모두 제자리로 돌아
가 지금은 임진동래의총만 남아있다.

마치 아무렇게나 놓여진 바위가 계곡과 어우러져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빚어내고 있으며, 거
미줄처럼 닦여진 산책로가 그 절경 사이를 가르고 있어 나들이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금정산
까지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빠르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금강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되며, 공원
안쪽에는 소나무 숲을 지붕으로 삼은 둘레길이 펼쳐져 있다.

이 공원은 벌써 3번째 인연으로 상큼한 추억이 서린 현장이기도 하다. 그 현장을 이렇게 홀로
다시 찾으니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공원은 거의 그대로인데 예전의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
부가 되어 기억 조차 희미하고 '나'라는 존재도 그 사이 적지 않게 나이가 누적되면서 볼품이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 모든 것이 참 덧없기만 하다.

* 금강공원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1동 27-9 (우장춘로 155 ☎ 051-860-7880)
* 금강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선생 공덕비

송촌(松村) 지석영(1855~1935)은 서울 출신으로 부산과도 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20대 초
반 부산 제생원(濟生院)에서 종두법(種痘法)을 익혀 이 땅에서 천연두를 완전히 뿌리뽑는데
공헌했으며, 1895년에는 동래부사로 부임해 선정(善政)을 베풀고, 왜인(倭人)의 밀수 무역을
때려잡기도 했다.


▲  거북바위 (금강케이블카 남쪽)
거북이 몸을 잔뜩 움츠린 듯한 모습이다.

▲  금강공원의 자랑, 소나무 숲길

▲  대자연의 돌 창고는 아니었을까? 돌과 바위로 가득한 금강공원
금강공원의 제일 큰 매력은 공원 곳곳에 널린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돌덩어리들이다. 왜정이 이곳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그들의 어설픈
조경(造景) 방식에 따라 배치한 바위도 있지만 상당수는
거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  제자리로 돌아간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터

독진대아문은 동래부 동헌의 바깥 대문으로 왜정 때 이곳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2014년 12월
망미루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그가 80여 년 동안 발을 붙였던 자리에 작게 표석을 세워
떠나간 그를 추억한다.

독진대아문 안쪽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강제로 옮겨진 이섭교비(利涉橋碑)와 내주축성비(來州
築 城碑)가 있었으나 2012년 9월 다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섭교비는 낙민치안센터 앞 둑,
내주축성비는 원래 자리(동래경찰서)가 어려워 동래읍성 북문으로 옮겨짐>


▲  빛바랜 동래금강원 표석(표지석)
독진대아문터를 지나면 왜정 때 세워진 동래금강원 표석이 모습을 비춘다.

▲  금강공원 연못
금정산이 베푼 물을 막아서 만든 그림 같은 연못으로 연못 한복판에
돌다리를 다져 풍경을 한껏 돋군다.

▲  북쪽에서 바라본 연못
물 색깔이 유난히 푸르다. 그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하며
그들의 삶터를 지킨다. (수심이 2~3m 정도 됨)

▲  서쪽에서 바라본 연못

▲  소나무숲을 가르며 흘러가는 금강공원 둘레길

예전 금강공원에 왔을 때는 딱 독진대아문 자리까지만 가고 길을 돌렸다. 그 이상은 딱히 볼
거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 이번에는 그 선을 넘어 미답의 공간으로 남아있
던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 보았는데, 푸른 연못과 돌다리, 그리고 소나무숲과 둘레길까지 오히
려 독진대아문 밑보다 풍경이 훨씬 진국이었다. 나의 그릇된 생각이 공원의 진풍경을 만나지
못하게 시야를 가렸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금강케이블카를 타고 금정산성까지 훌쩍 올라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공원 위쪽에서 길을 접고 북쪽 방향 둘레길로 들어섰다.
둘레길은 그윽하게 우거진 소나무들이 하늘을 훔치며 늘씬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오각과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중간에 계곡과 연못, 쉼
터가 있으며, 걷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  계곡과 만나는 금강공원 둘레길
수심이 얕은 조그만 소(沼)가 길 옆에 펼쳐져 있다.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①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②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③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④

▲  계곡을 막아서 다진 금강공원 북쪽 연못

금강공원 둘레길을 이 정도 거닐고 임진동래의총을 보고자 동쪽으로 내려갔다. 부산민속예술
관 옆을 지나 남쪽으로 빠지면 태극 문신을 지닌 기와집 문(외삼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들어
서면 그 길의 막다른 곳에 금강공원의 유일한 사적(史蹟)인 임진동래의총이 있다.


♠  금강공원의 문화유산들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  임진동래의총 정문인 외삼문(外三門)

외삼문은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 있었다. 태극마크가 요동치는 가운데 문과 왼쪽 문은 제
향이 있는 날에만 주로 열리므로 평소에는 굳게 입을 봉하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20기의 늙은 비석들이 1열로 늘어서 조촐하게 비석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들 비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들로 동래 시가지 정비로 이곳으로 강제 집합된 것
인데, 대부분 동래부사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다.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처럼 허전한 비석, 푸른 피부의 비석까지 부산 인구만큼이나 다
양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저들 중 진정으로 선정비(불망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목민관
(牧民官)이 얼마나 있을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비석들에게 묻고 싶다. 아마도 적지 않은 비석
들이 그와 상관없이 지어져 외람되게 선정비를 칭하고 있을 것이다.

▲  외삼문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비석들 (모두 20기임)

▲  임진동래의총으로 인도하는 길 ▲
외삼문에서 내삼문 구간 길바닥에는 박석이 꼼꼼히 입혀져 있다. 무덤 주위로
소나무가 삼삼하여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하며, 길 왼쪽
담장 너머는 금정사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임진동래의총 내삼문(內三門)
내삼문도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있다.

▲  임진동래의총 충혼각(忠魂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동래의총이 이곳에 안착했던 1974년에
지어졌다. 충혼각 바로 뒤쪽 높은 곳에 임진동래의총이 있으며, 보통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무덤에 예를 표하고 왼쪽 계단으로 내려오면 된다.

▲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 부산 지방기념물 13호

임진동래의총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동래 사람들이 안
장되어 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진(釜山鎭)을 점령한 왜군은 동래부의 중심인 동래성을 공
격했는데, 성을 지키는 유리한 입장임에도 왜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 앞에 금방 털리고 만
다.
이때 전사하거나 살해된 동래성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은 대부분 남문 해자(垓子)와 그 부근에
버려졌는데,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읍성을 수축했을
때 옛 남문터에서 적지 않은 유골과 포환(砲丸),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하여 그 시신을 거두
어 삼성대(三姓臺) 서쪽 구릉지(내성중학교 부근)에 6개의 무덤을 만들어 안장하고 '임진전망
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란 비석을 세웠다. 그것이 이 무덤의 첫 이름이다.

조선 조정에서 제사 비용을 위해 제전(祭田)을 내리고 동래향교에 제사를 맡겨 매년 한가위에
제를 지내게 했으며, 순절일(4월 15일)에는 관에서 장사(壯士)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왜정은 토지개간을 이유로 무덤을 영보단(永報壇, 복천박물관 자리) 부근으로 강제 이장시켰
는데, 이후 비석도 그곳으로 추방시켰다. 그러다가 1974년 복천동 개발로 다시 짐을 싸고 지
금의 자리에 안착했으며, 그때 '임진동래의총'으로 이름을 갈았다. 즉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
서 순절한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이란 뜻으로 여기서 '총(塚)'이란 주인을 모르는 무덤에 붙
이는 이름이다.
제향은 동래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5일에 무덤 밑에 있는 충혼각에서 지내고 있으며, 동래구
청에서 직접 주관하고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임진동래의총

임진동래의총과 충혼각은 동래읍성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정에 의해 제자리를 떠났
던 망미루와 독진대아문, 이섭교비 등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쁨을 누렸지만 임진동래의
총은 제자리에 이미 건물이 들어찬 상태이다. 그렇다고 그 부근으로 옮기자니 무덤의 덩치도
크고 딸린 식솔(충혼각, 외삼문, 내삼문, 돌담)도 많아 그들을 수용할 자리가 여의치 않다.
하여 무덤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곳에 눌러 살고 있다. 허나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이곳도 자리가 괜찮아 계속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덤 앞에는 제물을 올릴 수 있는 상석(床石) 1기가 누워 있으며, 무덤 밑도리에는 호석을 둘
렀는데, 무덤 정면 밑에는 제를 지내는 충혼각이 있고, 뒤쪽에는 담장을 둘러 성역의 경계를
구분 지었다. 이 담장은 외삼문에서 임진동래의총까지 빙 둘러져 있다.

* 임진동래의총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산 17-7


▲  충혼각 옆구리에 있는 '임진전망유해지총' 비석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그가 작성했다. 비석 높이는 103cm,
너비 45cm로 앞면에는 '임진전망유해지총' 8자를, 뒷면에는 10행 분량으로
무덤의 내력을 기록했다.

▲  금정사 보제루(金井寺 普濟樓)

임진동래의총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금정사로 넘어갔다. 비록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문이 닫혀져 있어 외삼문으로 나가 보제루로 빙 돌아가야 된다.

금정사 자리는 원래 동래부 사형장으로 죄인들의 목을 가차없이 썰었던 으시시한 곳이다. 바
로 그 현장에 1954년 승려 금우가 그 원혼을 달랜다며 인적도 거의 없던 이곳에 절을 세웠다.
석주가 중건하여 선학원(禪學院)에 등록했으며, 현재 대웅전과 보제루, 칠성각, 요사 등 5동
정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 있는데 바로 그를 보고자 간만에 금정사에 발을 들였다.

* 금정사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282 (우장춘로 157-59 ☎ 051-555-1208)


▲  소나무숲에 감싸인 고적한 금정사 경내 (정면 건물이 대웅전)

▲  보제루 부근에 자리한 5층석탑

▲  대웅전 옆구리에 있는 칠성각(七星閣)


▲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금정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멀리 전북 완주군(完州郡)에서 넘어온 것
이다.
1677년 혜희(慧熙)를 중심으로 한 7명이 제작하여 고산현(완주군 북부) 대둔산(大芚山) 용문
사(龍門寺)에 봉안했던 것으로 그 절이 사라지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곳에 안착했다. 좌우
에 조그만 협시보살(夾侍菩薩)은 그의 허전한 옆구리를 채워주고자 근래 붙여놓은 것으로 서
로간의 덩치가 너무 차이가 나 마치 아비와 어린 자식들이 나란히 앉아 가족 사진을 찍는 것
같다.

머리는 나발(꼽슬)로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으며, 신체에 비해 머리와 얼
굴이 지나치게 크다. 고개는 앞으로 조금 내밀어 밑을 굽어보는 모습인데, 이는 조선 후기 불
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정면 밑을 바라보고 있으며,
코와 붉은 입술은 조그맣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통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수인(手
印)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무릎의 너비가 상반신보다 넓어 안정감이 있으
며, 법의가 발까지 모두 가리고 있다.

이 불상이 속세의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그의 뱃속에서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나왔기 때문이
다.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7종 8점의 경전류, 목판으로 찍어낸 수백 매의 다라니가 쏟아져 나
왔는데, 조성발원문을 통해 그의 탄생시기와 고향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의 주인 역할
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석가여래상 옆을 지키던 협시상으로 다른 협시상은 전주(全州) 일출암
에 있다고 한다.
후령통에서는 조성발원문 외에 그 시절 흔치 않았던 동으로 만든 오보병(五寶甁)이 나왔고 경
전류에서는 당시 훈민정음(訓民正音) 표기법이 남아있어 국문학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
다. 게다가 판각 연대도 나와 있어 조선시대 만다라 연구에도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다. 바로
옛 사람들의 그런 배려가 불상의 과거는 물론 그 시절의 여러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고
그것들이 이 아미타불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이다.
복장유물은 절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어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나 그들을 오랫동안 품었던 아미
타여래좌상은 이렇게 대웅전에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금정사를 둘러보니 벌써 17시가 넘었다. 어둠의 기운이 스르륵 내려와 밝은 기운을 잡아먹으
니 햇님도 그 등쌀에 떠밀려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한다. 비록 낮은 짧지만 그날 목적한 정처(
定處)를 싹 둘러보니 은근히 배가 부르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고, 당일 일정으로
콩 볶듯 내려왔기 때문에 다시 나의 제자리로 돌아가야 된다. 아무리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
열차가 2시간대로 연결해준다고 하지만 여전히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온천장 부근에서 저녁으로 순대국밥을 섭취하고 지하철로 구포역(龜浦驛)으로 이동하여 서울
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고된 몸을 실었다. 부산으로 올 때는 고속열차(무료 쿠폰 사용)로
왔으나 제자리로 돌아갈 때는 느림의 미학도 느낄 겸,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빈약한 내 지갑
의 사정도 고려할 겸, 빨간색 무궁화호를 이용했다.
열차표를 판매하는 구포역 역무원이 은근히 고속열차를 권하며(무궁화호를 타면 지하철 막차
못탑니다. 이런 식으로) 나의 지갑을 자꾸 흥분시키려고 했지만, 빨리 가나 느리게 가나 서울
만 가면 되고 서울의 교통과 지리는 지구에서 본인을 능가할 사람이 없으므로 흔쾌히 거절했
다. <역무원의 지하철 막차 설교에 속으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름>

서울역까지는 5시간이 걸려 자정 너머에 도착했으며,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
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문득 깨어보니 난 내 방에 있었다. 부산에 갔다온 것이 아리송할 정도
로 말이다. 그렇게 그날은 흩어져 나의 기억력까지 햇갈리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벌처럼 날라가 개미처럼 올라왔던 부산 연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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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1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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