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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래읍성 북문으로 인도하는 숲길 (동래사적공원)

동래읍성은 옛 동래부의 중심부이다. 지금이야 동래가 부산의 그늘에 있지만 조선 후기까지는 그

반대로 부산의 천하(기장군, 강서구 제외)가 동래부 그늘에 있었다.

동래읍성은 마안산과 충렬산 뒷산인 망월산에 걸쳐져 있는데, 산지와 평탄지에 조성된 평산성 스

타일로 조성되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읍성으로 언제 처음 조성되었는지는 마안

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삼국시대부터 성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에 있었다는 독로국

을 동래 지역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왜열도 쓰레기 학자들과 식민사관 쓰레기들이 지들 멋대로 비

정한 것이라 100% 정답이 아님)

고려 현종 시절인 1021년에 동래군 성을 수리했다고 하는데, 그 동래군 성을 동래읍성으로 보기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1387년에 동래성을 크게 손질했는데 이때 둘레 3,090자, 높이 13자에 이

르렀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지금의 읍성이 조성된 것은 고려 후기~조선 초기로 여겨진다. 조선 때 이곳이 동래부의

중심지가 되면서 읍성과 관아를 크게 증축했는데, 동래부는 조선시대 주요 큰 고을로 세종 때 경상

도에 들어간 대마도를 관리, 단속했으며, 왜국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하여 대마도와 왜열도에서 하

례하러 온 사신과 상인들의 발길이 빈번했으며, 왜열도로 건너가는 조선 사신들도 이곳을 거쳐 바

다를 건넜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졌는데, 4월 14일 정발이 지키던 부산진이 털리고 4월 15일 송상현이 지

키던 동래부까지 털렸다. 동래성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군인과 백성 3,000여 명이 전

사, 살해되었고, 왜군은 겨우 100여 명이 썰리는데 그쳐 거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임진왜란 이후 동래읍성은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 오다가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주요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내세워 읍성을 크게 증축했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둘레 약 3.8km로 조선

의 읍성 치고는 매우 큰 편에 속했는데, 그때 증축된 읍성이 현재의 읍성이다.

읍성에는 동문(지회루). 서문(심성루), 남문(무우루), 북문을 기본으로 하여 인생문과 암문이 있었

으며, 남문에는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새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의 2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

지 문도 옹성을 두어 수비력을 높였다.

 

1910년 이후 왜정은 동래 시가지 개발이란 이유로 평지에 있던 읍성은 다 밀어버렸으며, 산지(마안

산, 망월산)에만 성곽이 겨우 남아있다. 근래 읍성 복원을 추진해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

장대가 재현되었으며,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하나하나씩 재현중에 있다. 또한 동래읍성의 마안산

구역은 동래사적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동래사적공원과 동래읍성 마안산 구역은 관람시간에 제한

이 없음)

 

이번 동래읍성 나들이는 동래사적공원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북문으로 접근했는데, 동래읍성을 제

대로 둘러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 동래읍성 북문

동래읍성 북문은 마안산에 자리해 있다. 1층 문루를 지닌 조금은 작은 문으로 문 앞에 옹성이 둘러져

있다.

 

3. 동래읍성 북문 앞 산책로 (동래사적공원)

 

4. 동래읍성 북문의 안쪽 모습

 

5. 내주축성비

동래읍성 북문 안쪽에 자리한 내주축성비는 1731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동래읍성을 크게 수축한 것

을 기념하고자 세운 비석이다.

읍성을 증축하기 전, 읍성의 규모는 둘레 약 1.4km, 높이 3.9m 정도로 1731년 성터를 측량하고 경상

도 65개 고을에서 52,000명을 동원하여 연인원 417,050명, 쌀 4,585석, 베 1,552필, 전(錢) 13,454냥

을 투입해 그해 4월에 성벽을 축조했다. 하여 5월에 성문, 7월에 문루를 완공했으며, 이를 통해 동래읍

성은 둘레 약 3.8km,높이 5.1m로 크게 업그레이드 되었다.

 

비석의 높이는 약 422cm, 폭 108cm로 비좌와 비신, 이수를 지니고 있는데, 비좌에는 연꽃무늬가 조

각되어 있으며, 이수에는 이무기가 현란하게 새겨져 있다. 비문은 황산도 찰방 김광악이 짓고, 송광제

가 썼으며, 전자는 현풍현감 유우기의 글씨이다.

비문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기록했고, 뒷면에는 축성에 종사한 임원의 명단을 새겨

놓았다.

 

그는 원래 동래읍성 남문 밖에 있었으나 1930년에 왜정이 금강공원으로 강제 이전시켰으며, 2012년

에 이르러 금강공원으로 이전된 동래읍성의 옛 유물(망미루, 독진대아문, 이섭교비 등)과 함께 동래읍

성으로 돌아왔다. 허나 내주축성비는 제자리 컴백이 여의치 못해 공간이 넉넉한 이곳에 안착시켰다.

(예전 금강공원에서 내주축성비와 망미루, 독진대아문을 본 기억이 있음, 그것이 불과 10여 년 전)

 

6. 동래읍성 북문 서쪽 성곽

 

7. 늙은 성돌과 어린 성돌의 어색한 조화 (동래읍성 북문 서쪽 성곽)

 

8. 동래읍성 북문에서 바라본 동래읍성역사관(바로 앞에 있는 기와집)과 복천동고분군, 그리고 망월

산(충렬사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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