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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 오금공원



' 도심 속의 푸른 쉼터, 송파구 오금공원 '

오금공원 숲길
▲  오금공원 숲길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오금공원 인공폭포

▲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  오금공원 인공폭포

 



 

여름 제국이 봄을 몰아내고 천하의 패권을 쥐어들던 6월의 한복판에 송파구 오금동에 자
리한 오금공원을 찾았다.

오금공원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음에도 겨우 2~3번 가본 것이 고작이다. 그냥 숲이나
운동시설, 쉼터가 전부인 단순한 근린공원이 아닌 조선 중기 무덤을 여럿 간직한 곳으로
그들이 문득 그리워져 발길의 본능대로 그들을 찾아 나섰다.



 

♠  오금공원(梧琴公園)에서 만난 늙은 무덤들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문양군 류희림 묘역)

▲  오금공원 북부 산책로

송파구(松坡區)의 작은 밀림인 오금공원은 오금동(梧琴洞)과 방이동(芳荑洞) 지역에 한참 개
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1990년에 조성되었다. (1983년부터 개발이 시작됨;) 시골 풍경을 이루
던 공원 주변은 죄다 아파트와 주거지로 강제 성형을 당했으나 이곳은 해발 200m 정도의 야산
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래된 무덤도 여럿 있어서 거의 자연 그대로의 멋을 살려 근린공원으로
닦여졌다.
인근 올림픽공원과 더불어 송파구 동부의 소중한 오아시스이자 쉼터로 면적은 219,167.4㎡에
이르며 어린이놀이터와 자연학습장, 송파구 다목적경기장과 배드민턴장, 운동장 등의 운동시
설, 송파도서관, 산책로, 쉼터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근린공원의 자격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게다가 숲(소나무가 많음)도 아주 짙어 조촐하게 삼림욕이나 산책을 누리기에 아주 제격이다.

공원에는 2000년 5월 23일에 조성된 자연학습장이 있는데 은방울꽃, 초롱꽃, 옥잠화, 동자꽃
등 야생 초화류 30종과 자생 관목류 20종을 지니고 있으며, 2005년에는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맞닿은 공원 서쪽 모서리에 정자와 인공폭포를 닦아 시원한 볼거리를 하나 추가했다. 또한 공
원이 조성된 이듬해(1991년)부터 에어로빅 교실이 시작되어 거의 매일 아침 열리고 있는데 이
제는 공원의 명물로 자리를 잡아 아침마다 몸을 푸는 동네 사람들로 아침이 아주 활기차다.

허나 이곳에는 그런 것들보다 더 오래되고 값비싼 존재들이 있으니 바로 거창신씨묘역과 문화
류씨 묘역이다. 이들은 조선 중기 무덤들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데 바로 그들 덕분에 오금
공원이 개발의 칼질에서 비켜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들이 없
는 오금공원은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오금공원4거리에서 공원 더듬기를 시작하여 거창신씨묘역(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문화
류씨묘역(문양군 류희림묘역), 인공폭포와 충민정, 공원 남부를 거쳐 송파도서관에서 마무리
를 지었다.


▲  솔내음이 그윽한 공원 소나무숲과 그 속에 닦여진 운동시설들

▲  울퉁불퉁한 지압용 산책로
저 싱그러운 숲속에 나를 자꾸 숨겨본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게끔
하지만 나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함정...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모르겠네 ㅠㅠ

▲  지압용 산책로와 돌탑
건강을 위해 발에 진하게 자극도 줄 겸, 맨발로 거닐어보기 바란다.
(그렇게 하라고 만든 길임)


마치 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어느 신성한 곳으로 강제 인도된 기분이다. 저곳에 옛날 이야기에
나 나오는 삼한시대 소도(蘇塗)나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신선(神仙)의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오금공원의 이 산책로가 썩 마음에 든다.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돌탑, 속인들의
건강을 위한 지압용 산길, 거기에 숲까지 어우러진 상큼한 현장이라 그런 모양이다. 이들 돌
탑은 공원 수식용으로 근래에 지어졌다.


▲  지압용 산책로 주변에 솟아난 돌탑들

▲  하늘을 앗아간 울창한 숲길

정말 깊은 산골의 숲길을 거니는 기분이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시가지에 둘러싸인 근린공원
이다. 산도 아니고 궁궐도 아닌 대도시 한복판의 공원이란 말이다. 그만큼 공원을 이루는 숲
의 품격이 아주 높으며 그것이 오금공원의 자랑이다.


▲  문양군 류희림(文陽君 柳希霖)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9호

오금공원 한복판에는 거창신씨묘역과 문화류씨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들은 1991년에 서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는데(거창신씨묘역은 78호, 문화류씨묘역은 79호) 2008년 이들
묘역을 '신선경과 류인호묘역'이란 이름으로 통합을 하여 지정 번호를 78호로 했다. 즉 79호
가 사라진 것인데, 비록 문중은 다르지만 장인(거창신씨)과 사위 집안(문화류씨)으로 묶여진
혈연관계이고 무덤도 6기 밖에 없어서 그렇게 합친 것이다.

허나 문화류씨 문중에서 크게 반발하자 5년이 지난 2013년 7월에 이들을 다시 분리했다. 그래
서 기존의 문화류씨묘역의 무덤 3기는 '문양군 류희림 묘역'이란 이름으로 79호의 번호를 되
찾았으며, 거창신씨묘역의 무덤 3기는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 제일 먼저 둥지를 튼 거창신씨의 신선경 묘역이 북쪽에 있고, 그 뒤쪽에 그의 사위인
문화류씨의 류인호 부부 묘가 있으며, 동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류인호의 아들인 류복
룡과 그의 아들인 류희림 묘역이 자리한다.


▲  문원군 류복룡(文原君 柳伏龍)과 평강채씨 부부묘

류복룡은 16세기 인물로 류인호의 아들이다. 딱히 이력은 없으나 잘난 아들(류희림) 덕에 문
원군에 봉해졌으며 이들 묘역에서 유일하게 신도비까지 지니고 있다.
이 묘역은 신도비 외에 풍만하게 솟은 봉분(封墳) 2기와 묘비(묘표), 상석(床石), 향로석(香
爐石),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을 갖추고 있다.

▲  검게 빛바랜 류복룡 묘비(묘표)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신도비

▲  류복룡 신도비(神道碑)
비석을 꽂는 비좌(碑座)와 머리 부분이
동그랗게 다듬어진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이다.

▲  홀(忽)을 꽉 쥐어든 좌측 문인석
고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조금은
일그러져 보인다.


▲  류희림(柳希霖)묘

류복룡 묘 뒤쪽에는 그의 아들인 류희림 묘가 있다. 류인호 3대 중 가장 출세한 류희림(1520~
1601)은 자는 경열(景說), 시호는 문양(文陽)으로 부인은 박언량(朴彦良)의 딸이다.

성균관 유생을 지내던 1560년 왕실의 보호로 불교가 다시 뜨려고 하자 1,000여 명의 유생들을
선동, 그 대표로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모두 폐지하자는 상소문을 올려
그 존재를 크게 알렸다.
1561년 식년과(式年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이 되었으며, 검열(檢閱), 정
언(正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81년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명나
라 연경(燕京)에 동지사(冬至使)로 갔으나 명나라 왕실에서 가져온 선물이 적다고 항의하면서
엉뚱하게 파직되고 말았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한직에 머물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
事)가 되어 못난 왕(선조)을 호종한 공로로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이어서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와 예조참판(禮曹參判), 동지돈녕부사(冬至敦寧副使)를 지냈으며, 1601년 81세
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봉해지고 문양군(文陽君)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아버
지(류복룡)와 할아버지(류인호)까지 싹 군(君)의 시호를 받았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류인
호 3대의 묘역은 그저그런 사대부의 묘로 남았을 것이다.

류희림 묘는 상석과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을 갖추고 있으나 문인석은 근래에 새로 단 것들
이라 고색의 때는 아직 여물지 못했다.

* 문양군 류희림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51 (오금로 363)


▲  신선경(慎先庚)과 류인호(柳仁濠)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8호

▲  신선경과 청주한씨 부부묘

신선경은 이곳에 처음 묻힌 인물로 1456년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허나 그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더 이상 전하는 것이 없으며 그의 딸과 사위(류인호)
가 뒤쪽 좌측에 묻혔고, 그 인연으로 외손주와 외증손자까지 부근에 묻히면서 이곳은 두 집안
4대의 공동 묘역이 되었다.

신선경 묘는 봉분 2기와 묘비, 상석, 문인석 1쌍을 지니고 있으며 묘비(묘표)의 머리 부분에
연화무늬가 새겨져 있어 조선 초기 묘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이들 묘역이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것은 15~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한 점도 있지만 신선경의 묘비와 류복룡 신
도비의 영향도 크다.

▲  연꽃무늬가 새겨진 신선경 묘비
비석은 작지만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이다.

▲  홀쭉하고 긴 키를 지닌 신선경묘
우측 문인석

▲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난
신선경묘 좌측 문인석

▲  류인호와 거창신씨 부부묘


신선경 묘역 뒤쪽 우측에 자리한 류인호는 15세기 인물로 신선경의 사위이다. 죽어서도 그의
사위로 있고 싶었는지 장인과 장모 무덤 뒤쪽에 부인과 함께 묻혀있으며 공조참의(工曹參議)
정도 지낸 것 외에는 딱히 이력은 없다.
사위가 장인/장모 무덤 뒤쪽에 자리한 특이한 케이스로 합장된 봉분과 묘비, 상석, 망주석이
전부인 조촐한 모습이다. 조선 중기까지 이렇게 처가 묘역에 묻힌 양반사대부와 왕족이 적지
않았는데 제왕이었던 연산군(燕山君, 조선 10대 군주)도 처가 집안(거창신씨)에 묻혔다.

*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51 (동남로 263)



 

♠  오금공원 마무리

▲  인공폭포 위에 닦여진 충민정(忠愍亭)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맞닿은 공원의 서쪽 끝으머리에 인공폭포와 충민정이 있다. 2003년 서울
시의 지원을 받아 지하수를 개발하고 폭포와 연못을 닦아 2005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폭
포 위쪽에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인 충민정을 달아놓아 운치를 돋구었다.
'충민'이란 이름은 송파구 출신이라는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의 시호<충민(忠愍)>에
서 따온 것으로 정자 옆구리에는 지하수를 소환해 채워놓은 연못이 있고 그 밑에 인공 암벽을
다져 인공폭포를 걸쳐놓았다. 연못 너머로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주변 시가지가 바라보이며 정
자 동쪽과 북쪽에는 숲이 우거져 있어 자연히 자연과 속세의 경계 역할을 한다.


▲  충민정 연못과 그 너머로 바라보이는 송파경찰서

▲  충민정 현판의 위엄

▲  수질이 좋은 충민정 연못

충민정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이곳에 앉아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불어준 바람
을 느끼고 있노라면 정말 피서의 성지(聖地)가 따로 없다. 이제 지어진지 막 20년 남짓 밖에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존재들이지만 1개의 100년이 흐르면 20세기 초, 대표적인 풍류 명소로
크게 도마 위에 오를지도 모른다.


▲  옆에서 바라본 오금공원 인공폭포 (윗쪽에 충민정이 살짝 보임)

▲  힘차게 쏟아지는 오금공원 인공폭포

지하수를 소환해 속세에 내뱉고 있는 이 폭포는 2005년에 조성되었다. 자연산이 아닌 인공(人
工)이라 전기를 먹어야만 왕성히 움직일 수 있는데, 봄과 여름, 초가을에는 보통 18시까지 가
동을 하며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묵혀둔다. 이는 다른 인공폭포도 비슷하다. 하루종일
틀면 전기세 부담이 적지 않아 보통 아침 8~9시부터 전기를 먹인다.

폭포를 품은 암벽은 너무 인공티가 팍팍 난다. 서대문구의 홍제천(弘濟川) 인공폭포처럼 자연
산으로 착각할 정도로 감쪽같이 했으면 좋으련만 그것까지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한여
름의 납량처로 손색은 없으며 직선으로 떨어지는 폭포와 주름진 바위를 굽이쳐 내려오는 폭포
등, 2개의 폭포 줄기가 있다.


▲  주름진 인공 바위를 굽이쳐 흐르는 인공폭포 (이때가 18시 직전)

▲  다시 오금공원의 속살 속으로
인공폭포에서 오금공원 더듬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으나 공원의 남쪽 부분을
살피지 않아서 다시 공원 속으로 들어갔다.

▲  오금동 유래비 (오금공원 남부)

오금동 유래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이 지역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
는데 그 나무로 거문고나 가구 등을 만드는 장인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하여 오동나무와 거
문고를 뜻하는 오금동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병자호란 시절(1636~1637년), 청나라의 파상적인 공격에 도성 부근 무악재까지
무기력하게 밀리자 염통이 쫄깃해진 무능한 인조(仁祖)는 서울을 모두 내버리고 서둘러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오금동 백토고개에 이르렀을 때 인조는 너무 힘들어 '아이고 내 오금이야!' 주접을 떨
며 잠시 쉬어갔는데 그 연유로 오금동이라 했다고 한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판단하기 어려
우나 나는 전자에 500원을 걸고 싶다.

이곳은 오랫동안 경기도 광주(廣州)에 속해있었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었으
며, 1983년부터 도시계획 구획정리 사업이 이루어져 1990년대 초반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
었다. 그 과정에서 오금공원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곳에 서린 시골 풍경은 거의 전멸되었다.


▲  오금동 유래비 주변 산책로

▲  오금공원 남부에서 만난 나홀로 망주석

구의 무덤을 지켰던 망주석일까? 딱 봐도 오래된 티가 느껴져 이 부근에 사대부의 무덤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곳에서 업어왔을 수도 있음)
그를 거느렸던 무덤은 후손들의 관리소홀과 대자연의 집요한 태클로 사라지고 겨우 망주석 하
나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무덤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저 꼬라지가 되버
리니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사후(死後) 흔적을 남기는 것도 정말 부질없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①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②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③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④

▲  다양하고 귀여운 모습의 새집 모형들
새집이긴 하나 겉모습만 그렇지 너무 작아서 참새도 들어갈 수 없다.
하여 새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집 같은 존재들이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⑤
숲이 얼마나 두터운지 햇살도 제대로 들어오기 힘들어 벌써부터 어둑어둑하다.

▲  오금공원 남부에서 송파도서관으로 인도하는 나무데크 계단길

오금공원의 남쪽 끝인 송파도서관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19시이다. 오금공원의 북쪽 끝인 오금
공원4거리에서 시작된 공원 더듬기는 공원을 완전히 가로질러 남쪽 끝인 송파도서관에서 대단
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는 늦가을 한복판에 꼭 한번 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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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2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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