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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곡동 못골공원 산책로 (못골위근린공원)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이 있는 자곡동 못골은 대모산 산주름에 묻힌 산골이다. 예전에는 두멧골 급
이었으나 개발의 칼질이 서울의 동남쪽 변두리인 자곡동과 내곡동, 세곡동 지역까지 마구잡이로 들
쑤시면서 못골에도 회색빛 아파트들이 들어찼다.

이후원 묘역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래미안강남힐즈아파트, 동쪽에는 단독주택단지가 넓게 들어섰고,
남쪽에는 숲이 무성한 못골공원(못골위 근린공원)이 들어서 이곳의 조그만 뒷동산 역할을 한다. 그
리고 묘역 북쪽에는 대모산의 푸른 숲이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올라가는 길은 딱히 없다.

 

2. 못골공원의 싱그러운 숲길 (못골위근린공원)

 


3.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남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 (못골위근린공원)

이후원묘역 서쪽과 동쪽은 주거지가 들어섰으나 남쪽은 일부 공간이 묘역의 보우로 자연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묘역 남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나무 그늘을 누리고 있는데, 바위 생김새가 마치 닭이나
개, 다람쥐처럼 보인다. (바위의 이름과 유래는 딱히 없음)

 

4. 남쪽에서 바라본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대모산 동남쪽 자락인 자곡동 못골에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묘역의 주
인공인 이후원(1598~1660)은 자는 사진, 사심, 호는 우재로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의 7세손이다.
그의 아비는 이욱, 어미는 장수황씨로 황정욱의 딸이다.

 

10대 시절, 김장생의 문하로 들어가 공부했는데, 이때 김집과 조속, 송준길과 친분을 쌓았다. 1623년
서인 패거리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으로 평가를 받아 완남군에 봉해졌으며,
1624년 이괄의난 때 반란 토벌에 앞장섰다.

1627년 정묘호란이 터지자 총융사로 전쟁에 임했으며, 이듬해(1628년)에 청나라군을 포로를 잡은 공
로로 녹훈되었으나 이를 반기지 않았다. 이후 단양군수와 태안군수를 지냈고, 조정으로 돌아와 한성
부서윤을 지내다가 1635년 익산군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뒤늦게
과거시험을 통과했다.

 

1636년 김상헌의 천거로 지평이 되었으며, 얼마 가지 않아서 장령이 되었다. 바로 그해 12월 병자호
란이 터지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서둘러 도망을 쳤으며, 그곳이 청군에게 포위되자 염통이 오
그라든 김류 등이 강화도로 도망치자며 인조를 구워삶았다. 그러자 이후원은 남한산성을 끝까지 지
킬 것을 주장해 그들의 의견을 가라앉혔고, 최명길이 항복을 제안하자 죽기로 싸울 것을 주장했다.

 

1639년 승지가 되고 이어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인조가 그를 곁에 두고 싶어서 병조참지로 삼았
다. 이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백성의 힘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을 변경시켜 군정을 닦았으며
이어 강화부유수가 되었다가 1642년에 대사간, 그리고 1643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1644년 심기원이 좌의정과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임하자 심복의 장사들을 호위대에 집어넣고 전 지
사 이일원과 작당하여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후원이 반란을 토벌했으
며 이듬해 호조판서와 대사헌이 되고 1646년에는 형조참판이 되어 회명연에 참여했다.

 

1650년 효종이 청나라 정벌 프로젝트인 북벌을 추진하자 그 참모가 되었다. 하여 효종의 명으로 전
함 200척을 준비해 그때를 대비했으나 1659년 효종이 아쉽게도 승하하면서 북벌프로젝트는 흐지부
지 되고 만다.

1653년 도승지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655년에 예조판서로 추쇄도감제조가 되어 도
망간 노비와 부역, 군역을 회피한 사람들을 잡아와 그 죄를 물었고, 악학궤범을 개간해 사고에 나누
어 보관하게 하였다. 이어서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공조판서, 대사간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이 되었는데, 이때 송시열이 이조판서, 송준길이 병조판서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세자
좌부빈객,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등을 지냈다.

 

그는 성품이 청개(청렴하고 절개가 있음)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으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멀리했다.
그리고 관직생활 중에도 틈틈히 경사를 읽으며 머리 속에 늘 풍부한 지식을 쌓아두었다.

1685년 경기도 광주 수곡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완남부원군이
라 부른다.

 

 

5.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이후원 묘역은 광명시 일직동 삼석산 호봉골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원익(1547~1634) 묘역 부근이다.

그러다가 1685년에 광주 세촌 금성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714년 현 자리에 완전히 안착을 했다. 이
때 그의 전처인 광주김씨, 후처인 영월신씨와 같은 봉분을 쓰는 합장묘로 조성되었다.

 

6. 완남부원군 이후원 신도비

이후원 신도비는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다. 신도비란 2품 이상의 높은 사람과 왕족들만 지닐 수 있
던 아주 비싼 비석으로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해 놓는다.

두툼하게 생긴 비좌 위에 글씨를 머금은 비신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지은 단출한 모습으로 비
석에 딱히 신도비를 칭하는 내용은 없다. 허나 신도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고, 묘표(묘
비)도 따로 있어서 그를 신도비로 봐도 무리는 없다.

비문은 이후원의 벗인 송준길이 짓고, 송시열이 추기를 지었으며, 명필로 유명한 이정영이 글씨를 쓰
고, 영의정 김수항이 두전을 썼다. 1685년 광주로 이장되었을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절 유
명 인사들의 글과 글씨를 풍부히 머금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대단하다.

 

7. 이후원 묘

이후원과 그의 전처, 후처가 모두 안장된 합장분이다. 봉분을 중심으로 묘표, 상석, 향로석, 망주석 2

기, 해치석 2기를 지니고 있는데, 봉분 밑도리에는 호석이 둘러져 있으며, 묘표는 봉분 앞이 아닌 옆

에 두었다. 허나 높은 사람들의 무덤에 많이 쓰는 문인석과 동자석 등의 석인상은 전혀 갖추지 않았

다. 대신 독특하게도 해치석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다른 사대부나 왕족의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

는 아주 희귀한 예로 무덤 지킴이로 배치되었다.

 

8. 이후원묘 상석과 향로석

상석 앞에 있는 향로석 피부에는 '완남 이충정공묘(完南 李忠貞公墓)'라 쓰여 있는데, 여기서 완남 이
충정공은 이후원을 뜻한다. 향로석에 무덤 주인의 이름이나 호, 시호가 쓰여있는 것은 꽤 드문 예로
300년이 넘는 늙은 글씨이지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정함을 과시한다.

 

9. 이후원묘 해치석

이후원묘의 특별한 옵션, 해치석은 아주 작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상석 앞에 2기가 있다. 네모난 바닥
돌 위에
귀엽게도 앉아있는 해치는 상상 속의 동물로 광화문 앞에도 커다란 해치석(해태석)이 있는
데, 얼굴과 이빨,
귀, 뒷다리, 꼬랑지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서쪽 해치상의 두 눈은 장대한 세월에게 제대로 얻어맞은듯 멍이 부었고 코는 깎여나가 흔적만 남았
다. 아마
도 그의 코를 갈아 그 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거나 시험에 붙는다는 유언비어가 있었던 듯
싶다. 그래도 코
를 제외한 나머지는 잘 남아있으며, 동쪽 해치상은 눈과 코가 모두 멀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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