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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정몽주선생묘


' 용인 정몽주선생묘 여름 나들이 '

   

▲  정몽주 선생묘
◀ 저헌 이석형묘
▶ 정몽주 묘역 영모재
▼ 충렬서원

   

 


여름 제국이 절정에 치닫던 7월의 끝 무렵. 용인 능골에 자리한 정몽주선생묘를 찾았다. 이곳
은 학창시절부터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곳으로 계속해서 미루고 있다가 이번에 비로소 인연을
지었다. 도봉동(道峰洞) 누옥에서 거리가 제법 되지만 서울에서는 그런데로 가까운 곳으로 교
통편도 양호하여 넉넉잡아 3시간 이내면 충분히 접근이 가능하다.


♠  정몽주선생묘 입문

▲  정몽주 선생묘를 알리는 표석

능원초교(정몽주선생 묘역입구) 정류장에서 바로 동쪽에 있는 능원초교입구4거리로 나와서 4
거리를 건너 남쪽으로 가면 오산천에 걸린 포은교가 마중을 한다. 그 다리를 건너 5~6분 정도
가면 왼쪽(동쪽)에 정몽주 묘소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누워있는데, 여기서 왼쪽 길로 들어
서면 정몽주 신도비를 시작으로 그의 드넓은 묘역이 장대하게 펼쳐져 거의 왕릉을 연상케 한
다.


▲  정몽주 신도비(神道碑)

정몽주 묘역 대파노라마의 시작인 정몽주 신도비는 묘역과 함께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지형
상의 이유도 있지만 정몽주가 그렇게나 지키고자 했던 고려의 옛 국도(國都), 개경(開京)이
서쪽에 있어 후손들이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자 그렇게 배치를 한 것이다.

팔작지붕 비각 안에 담긴 신도비는 정몽주가 강제로 세상을 뜬지 300여 년이 지난 1699년에
세워졌다. 송시열(宋時烈)이 찬을 하고, 김수증(金壽增)이 글을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金壽
恒)이 전액(篆額)을 썼는데, 비석의 높이는 388cm, 비신(碑身)의 높이는 238cm이다. 비석이
나이를 예민하게 타다 보니 비신 뒷쪽의 글씨 상태가 영 고르지가 못하며, 비신 앞쪽에는
'皇
明 高麗守門下侍中 益陽郡 忠義伯 圃隱鄭先生 神道碑銘幷序<황명 고려수문하시중 익양군 충의
백 포은정선생 신도비명병서>'
라 쓰여 있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명나라로 정몽주가 죽던 시기는 명나라 초기이다. 그냥 '고려 수문하시
중(守門下侍中)~~'으로 시작하면 정말 깔끔하겠지만 비석 제작 당시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만연했던 시절이고, 그 꼴통 사대주의자들이 신도비를 담
당하면서 비석에도 명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우리의 장대한 역사와 강역을 아주 크게 말아먹은 우리의 최대 흑역사 조선, 그런 검은 시대
에 걸맞게 조선 위정자와 유학자들에게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 풍조가 아주 지독했으며, 그런
풍조는 무려 왜정 때까지 이어졌다.


▲  연안이씨 비각공원

정몽주 신도비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고운 피부의 비석들이 즐비한 연안이씨(延安李氏) 비각
공원이 나온다. 이들은 정몽주 묘역을 품고 있는 문수산(文秀山) 자락에 흩어진 연안이씨 선
조들의 묘비와 신도비의 내용을 번역하여 세운 것으로 10여 기의 비석이 공원을 이루고 있는
데, 그 끝에는 저헌 이석형의 신도비가 비각에 감싸인 채 장대한 세월을 머금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분명 정몽주의 영일(迎日) 정씨 묘역이 분명한데, 엉뚱하게도 연안이씨 집안의
비석이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이석형의 묘가
정몽주 묘와 성씨를 초월하며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꽤 신선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이석형이 정몽주의 증손녀에게 장가를 든 인연 때문이다.
이후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집안은 한집안처럼 가깝게 지냈고 두 집안의 무덤이 정몽주 묘역
주변에 서로 어울리며 자리해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倭政) 때 토지 소유권을 두고 다투다가
영일정씨가 승리하면서 연안이씨 무덤은 이석형과 일부 묘소를 제외하고 모두 문수산 남쪽으
로 이장되었다.
그렇다고 600년 넘게 지속된 두 집안의 정이 깨진 것은 아니다. 이석형의 묘는 아직 제자리
에 건재해 있고, 묘역 입구에 비각공원을 두는 등 여전히 허울 없이 지내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200m 정도 들어가면 이석형의 생가 연못에 세워졌던 계일정(戒溢亭)이 재
현되어 있다. 참고로 그의 생가는 서울 연지동(蓮池洞, 종로5가 북쪽)에 있었다.


▲  저헌 이석형(李石亨) 신도비 - 경기도 지방기념물 171호

정몽주 신도비와 마찬가지로 팔작지붕 비각(碑
閣)에 소중히 감싸인 이석형 신도비는 1624년
에 대리석으로 조성되었다. 원래 이석형묘 앞
에 있었으나 비각을 씌우면서 이곳으로 이전되
었다.
비문(碑文)은 후손인 이정구(李廷龜)가 지었고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
容)이 제자(題字)를 남겼는데, 비석의 높이는
270cm 정도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주름
선이 마치 토성의 띠처럼 생긴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져 있다.


◀  주름선이 멋드러진 이석형 신도비


▲  홍살문과 정몽주 묘역

▲  왕릉처럼 드넓은 정몽주 묘역의 위엄

정몽주 묘역은 상상 외로 무척 넓었다. 거의 조선 왕릉 수준으로 말이다. 내가 왕릉에 온 것
인지 고려 충신의 묘에 온 것인지 잠시 혼돈에 둘러싸인다. 허나 분명히 정몽주 묘역은 맞다.

그의 묘역이 이렇게 넓어진 것은 조선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비록 조선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잔인하게 없애긴 했지만 그만한 충신이 또 없다. 하여 신하들의 철저한 정
몽주 화(化)가 필요했던 터라 필요에 따라 죽였으면서 역시 필요에 따라 그를 띄워주고 묘역
에도 적지 않게 신경을 써준 것이다.
후손들은 조선 조정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씁쓸했을 것이요, 정몽주
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만, 죽은 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다.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자를 이리 볶고 저리 볶고 저들 편리에 따라 이용하는 것이다.

정몽주 외에도 고려의 많은 충신,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무신(武臣)인 최영(崔瑩)장군도 있지
만 명성은 아무래도 정몽주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최영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로 일컬어지던 큰 인물이지만 무(武)를 경시하고 유학을 중시하던 조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정몽주가 훨씬 구미가 당긴다.

정몽주 묘역이 얼마나 드넓은지 묘역을 알리는 표석에서 그의 묘까지는 거리가 약 400m에 이
른다. 게다가 그의 아들과 후손들 묘역이 주변에 잔뜩 포진해 있고, 묘역 서쪽은 싹 밀어버렸
다. 그래서 그만큼 넓어 보이며, 거의 조선 왕릉 뺨칠 정도이다. 이곳의 지명인 능골과 능원
리는 바로 이 묘역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다. 얼마나 능처럼 넓으면 지명에 능(陵)이 다 붙었
겠는가.


▲  경모사(敬慕祠, 왼쪽)와 모현당(慕賢堂, 오른쪽)
1980년 묘역 정비 때 새로 지은 것들이다.

▲  영모재(永慕齋)
조선 후기에 지어진 정몽주 묘역의 재실(齋室)이다.

▲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백로가(白鷺歌) 시비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  단심가(丹心歌) 시비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이방원(李芳遠)이 하여가(何如歌)로 은연중 반란에 협조해 줄 것을 청하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 묘 - 경기도 지방기념물 171호

▲  밑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  옆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정몽주 묘역에 들어서면 가운데 언덕에 정몽주묘가 큼지막하게 자리해 있고, 그 남쪽에 증손
녀 내외인 이석형 내외의 묘와 아들인 정종성 내외묘, 북쪽에는 정몽주의 후손들 묘가 잔뜩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석형(1415~1477)은 연안이씨 집안으로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이다. 이회림(李懷
林)의 아들로 생모는 박언(朴彦)의 딸이다.
1441년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에 합격했고, 1442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집현전부교리(集賢殿副校理)가 되어 14년
동안 집현전(集賢殿) 학사로 일했으며,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로 있던 1447년 문과 중시(重
試)에 붙어 왕명으로 북한산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했다.

1455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가 되었고,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던 1456년 6월 단종(端宗)
의 복위를 꾀하던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터지자 사육신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익산
(益山) 동헌(東軒)에 남긴 일로 대간(大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조(世祖)에게 오히려 칭찬을
들으며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승진되었다.
이어 판공주목사(判公州牧使)와 한성부윤(漢城府尹, 서울시장)이 되었으며, 1460년 세조의 특
명으로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왕의 관서(關西) 지방 순행을 도와 왕으로부터 서도주인(西道主
人)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듬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1466년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가 되어 호패법(號牌法)을 조사했고, 1468년 세조가 승하
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왕의 부음을 전했다.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470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승진,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했으며, 1471년
에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필법이 신묘하여 집현전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治平要覽),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
여했으며, 세조 때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 작업에 참여해 논어(論語)의 구결을 주관했다.
또한 불우한 백성들을 늘 보살폈으며, 말년에는 서울 연지동 집에 계일정을 지어 시문을 지으
며 자손들을 가르쳤다. 그는 계일(戒溢)정신이라 하여 분에 넘치는 것을 자손들에게 늘 경계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신선(神仙) 같다며 칭송했다.

남긴 저서로는 대학연의(大學衍義)와 고려사에서 권계(勸戒)를 덧붙인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
輯略) 21권과 저헌집(樗軒集)이 있다. 편저로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치평요람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석헌의 부인은 정몽주의 증손녀로 정보(鄭保)의 딸이다. 1445년 1월 아들인 이혼(李混)을
낳았는데, 산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딸을 잃은 슬픔에 눈물로
밤을 지새던 정보는 자신이 봐둔 묘자리에 딸을 안
장했는데, 이석형이 죽자 자연히 부인묘에
합장되어 당대의 명사(名士)이자 충신의 대명사인 정몽주 곁에 묻히게 된 것이다. 사연은 그
러한데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속설도 전해온다.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가 죽자, 그가 평소에 봐두던 정몽주묘 남쪽에 안장하기로 했다. 딸인
이석헌의 처(이하 정씨부인)는 그 자리가 매우 신통한 명당 자리임을 알고 자신의 아들과 손
자들을 위해 시댁에 좋은 일을 해주기로 하고, 간밤을 이용해 관을 넣을 자리에 물을 잔뜩 퍼
날라 부었다.
다음날 집안 사람들이 가보니 무덤에 물이 많은지라 그 자리를 버리고 다른 곳에 장지를 마련
해 안장했다. 아무리 명당이라도 물이 나오면 영 좋지 못한 터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보가 안
장된 이후, 친정 가족들에게 버려진 터를 우리 시댁에 주면 안되겠니 청하니 친정은 흔쾌히
그 자리를 주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속설임)

정몽주가 당대 명사이긴 하지만 그 후손들은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없었고, 마침 떠오르는
연안이씨 집안의 사위 내외를 정몽주묘 곁에 묻히는 영광을 부여함으로써 양 집안 간의 유대
감을 꾀했다. 하여 그 인연으로 두 집안은 오랜 동안 오순도순 지냈고, 서로의 집안 묘가 두
루 섞인 진풍경을 보인 것이다.
허나 왜정 때 두 집안 간의 무덤 자리를 두고 재판이 벌어졌고, 그 재판에서 영일정씨가 승소
하면서 정몽주묘역 일대는 99% 정씨 집안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연안이씨는 이석형과 일부
묘를 빼고 대부분 문수산 남쪽으로 옮겼으나 두 집안의 친목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석형묘는 정씨부인과 함께 묻힌 합장묘(合葬墓)로 이곳이 그렇게 기가 막힌 명당 자리라고
한다. 이석형 이후 집안에서 수십 명의 고위 관리가 배출되었고, 현대에 와서도 장관 3명을
배출했다. 그래서 명당에 관심있는 사람과 풍수지리가들이 자주 찾는다. 서쪽을 바라보며 자
리한 묘역은 전방이 확 트여 있고, 뒤쪽에는 문수산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어 문외한인 내가
봐도 착한 명당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 무덤은 영일정씨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연안이씨 정헌공파에서 관리하고 있다.

▲  앞에서 본 이석형묘 (봉분, 상석)

▲  고색의 때깔이 자욱한 이석형 묘표(墓表)

▲  고된 표정의 우측 문인석 2기

▲  좌측 문인석 2기


▲  뒷쪽에서 바라본 이석형묘와 전방 풍경

▲  정몽주묘에서 바라본 이석형묘

▲  이석형묘에서 바라본 정종성(鄭宗誠)과 죽산박씨 묘

원사(院事) 정종성(1374~?)은 정몽주의 맏아들로 고려 후기 9명의 효자 가운데 하나이다. 조
선 조정에서 정몽주 후손 달래기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했으며, 1437년
에 마지못해 벼슬을 받아 철원부사가 되었다.


♠  아 충신의 매운 얼이여..!! 충신의 영원한 성지(聖地)
정몽주선생묘(鄭夢周先生墓) -
경기도 지방기념물 1호

포은 정몽주(1337~1392)는 1337년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그
유명한 포은(圃隱)이며, 고려 중기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자 정운관(鄭云瓘)의 아들이다. 생모 이씨가 꿈에서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트렸는데, 이에 놀라 깨어난 뒤 바로 그를 낳았다고 하여 정몽란(鄭夢蘭)이라 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빼어났다고 하는데, 어깨 위에 7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처럼 벌
여져 있었다고 하며, 9살에 생모가 낮잠을 자다가 검은 용이 뜰에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는 꿈
에 놀라 급히 나가보니 배나무에 정몽란이 있었다. (위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설화임) 그래
서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바꿨고, 관례를 치른 이후에는 정몽주로 이름을 갈았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하에 들어가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학문에 정진했는데, 목은은 포
은에 대해 '학문은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 이
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칭찬을 했다.

1357년 감시(監試)에 붙었고, 1360년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과 수찬(修撰
), 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
사관(從事官)으로 따라가 고려의 그늘에 있던 동북 지역(길림성, 흑룡강성, 연해주 지역)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고, 전농시승(典農寺丞)과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성균박사(成均博士),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으며,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과(太常少卿
寶文閣應敎)와 성균직강(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 승진했다.

1372년 정몽주를 싫어했던 친원패거리의 의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
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당시 명은 고려를 크게 의식해 의도적으로 많은 무례를 범하면서
양국의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칫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가는 길도
험난해 풍랑으로 고생을 했는데, 힘들게 명나라 남경(南京)에 가니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
璋)이 태도를 달리하며 극진히 예우했다.
1376년 이인임(李仁任)의 배명친원(排明親元, 명나라를 멀리하고 원나라와 가깝게 지냄)을 반
대하다가 언양(彦陽, 울산 언양)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377년 나날이 극성을 부리는 왜구(倭寇)를 처리하고자 왜열도 규슈(九州)로 건너가 규수 지
역 지방 세력에게 왜구 단속을 요구했다. 이에 규슈 지방 세력은 흔쾌히 협조를 약조했고, 왜
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구출하여 그에게 인계했다. 그렇게 그들을 데리고 귀국하자
정몽주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급부상했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와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 전
법판서,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했고,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를 따라 전라도 지역의 왜구를 토벌했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남원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싹 쓸어버리고 상경하던
중, 전주(全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전주는 그의 선조들이 살던 곳이며, 전주이씨 일족
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오목대(梧木臺, ☞ 관련글 보기)에서 이씨 일족을 모아 거하게 잔치를 벌였는데, 여기서
대풍가(大風歌)를 크게 불렀다. 대풍가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에서 부른 시로 이를 통해 자신의 야망을 은근히 드러냈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했지만 정몽주만큼은 그 시의 의도를 파악
하고는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다.
그래서 그 자리를 나와 인근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서 우국시(憂國詩)를 읊으며 착잡한 마
음을 달랬다고 한다. 어쩌면 장차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되는 비극을 이때 예견했을지도 모
른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
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를 찾은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
었으며, 1388년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추진하자 이성계를 지지하며 정벌을 반대했
다.
통한스러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를 도와 우왕을 폐했고, 1389년
에는 그와 함께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까지 폐해 그들을 공민왕(恭愍王)의 후손이 아닌 신
돈(辛旽)의 후손으로 왜곡시키는 일에 동참했다. 또한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마지막 군주인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여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과 수문하시중(守門下
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 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
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 등의 다양한 관직과 작위를 받았다.

이토록 이성계와 행동을 같이하며 때로는 백로가의 뜻을 저버리고 이성계 패거리와 까마귀 짓
도 하면서 나름 나라의 개혁을 갈망했으나 이성계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자 고려를 뒤엎고 그
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의 예를 통해
군주가 별로면 갈아치우는 한이 있더라고 고려란 나라를 유지한 채, 개혁을 하자는 것인데,
이성계 패거리는 '고려는 이제 틀렸다. 다 갈아엎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의견
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함께 해온 이성계를 제거하여 고려 사직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고 기회를 노
렸다.

드디어 1392년 3월 때가 왔다. 공양왕의 세자(世子)인 왕석(王奭)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자 이성계가 그를 마중하러 황주(黃州)로 나갔다. 거기서 사냥을 벌이다가 그만 말에서 떨
어져 크게 다쳤는데, 정몽주는 크게 기뻐하며 대간(大諫)을 움직여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
개경에 있던 이성계 패거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정도전을 잡아 가두고 조
준과 남은(南誾) 등을 귀양 보냈다.
이성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상경하다가 벽란도(碧瀾渡)에서 하룻밤 쉬려고 했는데, 아들인 이
방원이 급히 찾아와 정몽주가 일을 벌이고 있음을 알리며 서둘러 상경하자고 했다. 정몽주에
대한 신뢰가 두텁던 이성계는 무슨 소리냐며 잔소리를 했으나 이방원이 계속 권하는 것이 심
상치가 않아 가마를 타고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정몽주의 대사는 그르치게 된다. 이때
그는 3일이나 밥을 먹지 않으며 기회가 사라졌음을 안타까워 했다.

이방원은 형세가 매우 위급하므로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이성계에게 제의했다. 이에 가족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바친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데,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
아 악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후세에 누가 이것을 변명하겠는가'
외치며 정몽주 제거를 모의
했다.
이때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정몽주에게 그 사실을 귀띔해
주자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찾아가 상황을 살폈다. 허나 이성계는 평소와 비슷하게 그를
대해주면서 정몽주는 지금 당장은 일을 벌이지 않겠지 싶은 방심을 하고 돌아간다.
이때 이방원이 주안상을 마련하여 그에게 술 1잔을 권했다. 포은은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정
도전과 핵심 패거리만 염두에 두었지 이방원은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설마 저 어린 것이 나
에게 무슨 짓을 하겠는가 싶었을 것이다.

이방원은 어느 정도 술을 주고 받자 지필묵(紙筆墨)을 꺼내 하여가(何如歌)를 선보이며, 그를
시험했다. 허나 시험 결과는 역시나였다.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을 하며 하여가를 무색케 만
든 것이다. 즉 포은은 이성계 패거리에게 더 이상 협조하지 않고 필요하면 죽음으로써 역모를
막겠다는 것이다.

이방원과 작별한 포은은 별다른 대비도 없이 귀가를 했다. 곧 다가올 저승사자를 눈치채지 못
했던 것이다. 정몽주 제거를 결심한 이방원은 서둘러 수하인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귀가하던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철퇴로 때려 죽였다. 그때 포은이 흘린 피가 마르지 않고 다리
에 남아있다고 하는데, 실상은 붉은색을 띠는 돌이지 그의 피가 아니다. (정몽주 띄워주기의
일환으로 윤색된 것임)
정몽주가 잔혹하게 살해되자 이성계는 크게 놀라며 이방원을 꾸짖자 그는 정몽주가 우리를 공
격하는데 어찌 가만 있겠냐며 항변을 했다. 이에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이성계는 왕을 찾
아가 정몽주가 모함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를 추종한 이들을 잡아 족치며 정몽주의 목을 개경
십자거리에 매달았다. 그리고 얼마 뒤 이성계는 그의 패거리와 함께 공양왕을 끌어내려 고려
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열었다.

정몽주는 시문에 뛰어나 단심가와 많은 한시를 남겼고,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글씨
와 작품들은 후손들이 정리하여 1439년에 간행된 포은집(圃隱集)에 담겨져 있다. 또한 지혜와
용기가 대단했고, 충효와 지조가 대단했으며, 학문을 좋아해 정도전과 함께 원나라에서 들어
온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키고 보급하여 동방성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노력으로 이때
부터 집에서 가묘(家廟) 등을 세워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겨났으며, 의창(義倉)을
세우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의 편리를 도모했다.

고려를 지키고자 나름 충신의 매운 얼을 드높였던 포은은 이성계 패거리에게 패해 역적이 되
었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면서 아들은 죄다 귀양 신세가 되었다. 그의 무덤 역시 개경
인근 풍덕군(豊德郡)에 대충 썼다.

1400년 조선의 3대 군주가 된 태종(太宗) 이방원은 그동안 뜨거운 맛으로 일관했던 정몽주 일
가에 대한 태조를 180도 달리하며, 후손을 달래주고 정몽주를 띄워주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
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괘씸하지만 다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그를
충신의 대명사로 드높인 것이다.
그래서 1401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했고, 이어서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으로 추봉했으며,
후손의 소망에 따라 묘를 옮길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또한 중종(中宗) 때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을 비롯한 수많은 서원에 배향되면서 대대손손 두둑한
제삿밥을 받으며 영원히 추앙을 받게 된다.

그들 야망에 도움이 안되어 때려죽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살만하니까 진정한 충신이자 성리학
의 시조라며 지나치게 띄워주는 태종의 이중적인 행태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태종
의 입장에서도 솔직히 정몽주 스타일 즉 군주에 대한 일편단심 충신을 열망했던 것이다. 조선
이 오래간다는 보장도 없고, 늘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에 정몽주 같은 충신이 나와 나라를 지
키고 망국(亡國)의 초라함을 달래달라는 주문이 담긴 것이다. 고려는 비록 망했지만 정몽주와
그를 포함한 3은(三隱)과 최영 등 많은 충신이 있기에 그 마지막은 외롭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신권(臣權)과 개혁을 강조하며, 자신을 한때 괴롭게 했던 정도전보다는 이미 없어진 정
몽주가 훨씬 이용하기가 좋았다. 그러니 죽은 정몽주를 이용해 그들 입맛에 맞게 요리한 것이
다.

풍덕군에 있던 정몽주묘는 1406년 후손들의 뜻으로 그의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기로 하고 운
구를 끌고 내려갔는데, 인근 수지 풍덕천(豊德川)에 이르자 명정(銘旌, 죽은 이의 품계, 관직
, 성씨를 기록한 기)이 갑자기 바람에 날라간 것이다. 명정을 쫓아가니 지금의 정몽주묘 자리
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연한 일도 아닌 것 같고, 그곳 자리도 좋아 보여 굳이
영천까지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무덤을 썼다고 전한다.
이후 정몽주의 아들과 손자를 비롯해 후손들이 모두 그의 곁에 묻히면서 이곳은 정몽주 일가
의 묘역이 되었고, 1517년 중종이 정몽주묘 주변 능골 일대를 후손들에게 내리면서 이곳에 완
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  이석형묘에서 바라본 정몽주묘

개경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정몽주묘는 거의 조선 왕족 묘에 버금가는 모습이다. 망주
석(望柱石) 1쌍과 상석(床石) 2기, 문인석 2쌍, 석양(石羊) 1쌍, 장명등(長明燈) 1기가 앞에
배치되어 있고, 봉분(封墳) 주위로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두고 묘
3면에 곡장(曲牆)이란 담장까지 둘러 묘의 품격과 장엄함을 높였다.
원래는 문인석 1쌍과 묘표, 상석, 봉분, 곡장이 전부였으나 1980년 이후 묘역을 크게 정비하
면서 후손들이 더 갖다 붙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와 하얀 피부의 석물이 어색하게
공존을 하게 되었다.


▲  난간석과 호석까지 갖춘 정몽주묘

▲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지붕돌이 인상적인 정몽주 묘표
묘표는 1517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 앞쪽에는 '高麗 守門下侍中 鄭夢周之墓'라
쓰여 있어 고려를 위해 산화한 그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

▲  우측 문인석

▲  좌측 문인석

고색의 때가 만연해 문인석 1쌍은 키가 작다. 표정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정몽주의 심정과 표
정을 상징하듯 꽤 우울해 보인다. 반면 그 옆에는 근래에 세운 하얀 피부의 매끈한 문인석이
서 있는데, 키도 크고 표정도 매우 긍정적이다. 마치 정몽주를 없애고 나라를 뒤엎으며 야망
을 실현한 이성계와 이방원의 흐뭇한 표정 같은. 문인석을 세우더라도 좀 근엄한 표정이 좋았
을 것인데, 그 점이 아쉽다.


▲  정몽주묘에서 바라본 작은 천하

▲  북쪽에서 바라본 정몽주묘와 멋드러진 소나무의 위엄

▲  설곡 정보(雪谷 鄭保)와 밀양박씨 내외묘

정몽주묘 북쪽에는 후손들의 무덤이 산기슭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그중에는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의 묘가 있다.
정보는 원사 정종성의 아들로 생몰시기는 전하지 않는데, 경상도 예안(禮安)현감과 사헌부 감
찰을 지냈다. 1456년 사육신 사건이 터지자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포항 연일로 유배되었
으며, 다시 산청(山淸)으로 옮겨져 거기서 어느 해 4월 20일에 생을 마감했다.

봉분은 원래 부부가 따로 썼는데, 1982년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기면서 하나로 합쳤으며, 문
인석 2쌍과 묘표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하다.

▲  고색의 미가 담긴 설곡 정보 묘표

▲  봉분 옆에 새로 만든 정보의 새 묘표


▲  정충전(鄭忠傳)과 전주이씨 내외묘
정충전은 정몽주의 7세손으로 1606년 식년시(式年試) 2등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가 되었으나
그 외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다.

▲  선죽교 앞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

작렬하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의 핍박에 맞서며 정몽주 묘역을 둘러보고 충렬서원으로 길을 옮
겼다. 묘역으로 갈 때는 포은교를 건너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선죽교란 다리를 통해 오포로로
나왔다. 선죽교는 포은교 서쪽 90m 지점에 있는 다리로 능원초교(정몽주선생묘역입구) 정류장
바로 뒷쪽이다.
선죽교라고 해서 개성에 있는 그곳을 옮기거나 본을 따서 만든 것은 아니며, 그냥 흔한 하천
다리로 정몽주 묘역 입구라서 그에 걸맞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 복잡한 의미 부여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선죽교 북단에는 검은 주근깨가 자욱한 늙은 하마비가 서 있어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하
마비란 하마 서식지가 아니라 대소인원(大小人員) 모두 이곳 앞에서는 말에서 내리라는 추상
같은 뜻이다. 보통 궁궐, 관아, 향교, 서원, 왕릉. 사당, 고위 관료의 묘역 입구에 세우는데,
정몽주 묘역도 그에 해당되어 하마비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곳이 정몽주묘와 충렬서원의 중간
지점이라 이곳에 비석을 세운 모양인데, 여기서 묘와 서원이 제법 거리가 되어(묘는 도보 15
분 거리)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 가능성도 있다.

말을 타고 오가는 이들을 귀찮게 했던 하마비, 허나 이제는 하마비의 눈치를 보며 말이나 차
량에서 내릴 필요는 없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의 권위도 이미 상실된 상태이며, 이제는 지
나가는 이들이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나도 그의 존재를 여기서
처음 알았다.


▲  능원리 느티나무(용인시 보호수 70호)와 정한영 효자비

▲  정한영 효자비(鄭漢永 孝子碑)

포은교와 충렬서원입구 사이에는 늙은 느티나무와 정한영 효자비가 있다. 이곳 느티나무는 나
이가 약 270년 정도로 1988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의 높이는 19.5m, 둘레 4.5m로 좌우로
가지가 길게 뻗어 있어 그늘의 면적이 제법 된다. 그 시원한 그늘 밑에 정한영 효자비가 둥지
를 틀었다.

정한영(1862~1947)은 정몽주의 19대 손으로 호는 모은(慕隱)이다. 이곳 능원리 출신으로 성품
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묘 밑인 지금의 자리에 여막(廬幕)을 짓
고 3년 동안이나 그 힘든 시묘살이를 했다.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기름진 음식을 입에 대지 않
았으며, 오로지 미음과 채소로 연명했다. 또한 부모가 준 거라면서 머리는 물론 손/발톱도 전
혀 깎지 않았다.
그 효행을 기리고자 유림에서는 이곳에 효자비를 세웠으며, 비석의 지명(誌銘)은 김세기가 쓰
고, 행장기(行狀記)는 김학열이 썼다.

* 정몽주선생묘와 저헌 이석형묘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3 (능곡로
  45)


♠  정몽주를 배향한 오래된 서원 - 충렬서원(忠烈書院)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호

느티나무와 효자비를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충렬서원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그
의 지시를 따라 오른쪽 골목길(충렬로)로 3분 정도 들어가면 그 끝 양지바른 곳에 충렬서원이
자리해 있다.

충렬서원은 1576년 이계(李棨)를 비롯한 지역 유림들이 용인에 잠든 정몽주와 조광조(趙光祖)
를 배향하고자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역 중간인 죽전(용인 수지구 죽전동)에 세운 것으로 처음
에는 죽전서원(竹田書院)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5년 경기도관찰사 이정구(李廷龜)가 용인현감 정종전(鄭從善) 등
과 협의하여 정몽주묘와 가까운 곳에 서원을 중건했다. 공사는 무려 3년이 걸렸으며, 사우 3
칸과 동/서재 2칸, 문루 3칸을 지어 구색을 맞추었고, 조광조의 위패를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으로 옮기면서 완전히 정몽주를 위한 서원이 되었다.

1609년 광해군은 충렬(忠烈)이란 사액을 내려 이때부터 충렬서원이라 불렸으며, 설곡 정보와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을 추가로 배향했다. 1706년 정몽주의 후손인 정제두(鄭齊斗)와 정
찬조(鄭纘祖) 등이 유림의 협조를 받아 옛터에서 조금 서쪽인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정리 사업으로 철거되었으며, 1911년 유림에서 사우를
복원하고, 1956년 강당(講堂)을 복원했다. 또한 1972년 사당을 전면 보수하고 강당과 내삼문
(內三門)을 중건했으며, 1975년 홍살문과 외삼문(外三門)을 만들었다.

이 서원의 특징이라면 교육보다는 제사의 기능을 더 강조했다는 것이다. 강당을 앞에 두고 사
당을 뒤에 두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제사를 지낼 때는 강당까지 몽땅 제사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  차갑게 생긴 붉은 피부의 홍살문

▲  굳게 입을 닫은 외삼문

▲  많이 한가해진 강당

▲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당

이곳은 속세에 활짝 문을 열고 있으나 내가 갔을 때는 서원 내부 사정으로 태극마크가 그려진
내삼문은 굳게 입을 닫고 있었다. 하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돌담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보
는 선에서 서원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정몽주묘역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충렬서원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118-1 (충렬로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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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7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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