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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겨울 나들이 (연북정, 제주올레길18코스, 불탑사)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연북정, 제주올레길18코스, 불탑사)

조천 앞바다 (제주해협)

▲  조천 앞바다

제주올레길18코스 제주 불탑사5층석탑

▲  제주올레길18코스

▲  불탑사5층석탑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濟州島), 그곳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불과 1시간이면 닿
는 곳이나 2005년 여름 한라산(漢拏山) 이후, 이상하게도 오랜 세월 손과 마음이 가지를
않았다. 이러다가 제주도란 존재를 새카맣게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새해 벽두에 겨울 제
국의 핍박도 잠시 피해볼 겸, 사흘 일정으로 따뜻한 그곳에 나를 던져놓았다.

김포공항에서 이른 아침 비행기로 제주도(제주국제공항)로 넘어가 제주시내 서부에서 서
일주도로를 따라 여러 미답처(未踏處)를 흔쾌히 지워가며 서귀포 시내로 이동했다. 하루
를 꽉꽉 채우며 일정을 짜니 이 구간에서 이틀을 소비했는데, 마지막 날에는 천지연폭포
입구에 떠있는 새섬을 아침거리로 둘러보고 동일주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점심거리로 제주도의 시조인 3신인(三神人)의 혼인 설화가 깃든 온평리의 혼인지(婚姻池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조천읍(朝天邑)으로 이동했는데, 본글은 바로 조천읍에서부
터 시작된다. (첫날과 둘째 날, 새섬과 혼인지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조천포구 둘러보기 (연북정, 조천진터)

▲  조천비석거리 - 제주도 지방기념물 31호

조천읍내 중심인 조천환승정류장에서 연북정으로 인도하는 조함해안로를 2~3분 정도 들어가면
검은 피부의 비석들이 우루루 나와 마중을 한다. 그들이 조천비석거리로 이름 그대로 비석이
늘어선 거리인데, 모두 9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7기가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나머지 2기는 20세기 이후 비석들)

비석의 주인공은 제주목사 김수익(金壽翼, 1600~1673)과 이원달(李源達, 1783~1857), 채동건
(蔡東健, 1809~1880), 백희수(白希洙, ?~?), 이의식(李宜植, 1848년에 재직함), 제주판관 김
응빈(金膺斌, 1846~1928) 등으로 이 땅에 흔한 관리들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
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비석 뒷면이 다들 아작나면서 비석의 건립 연대는 알 수가
없으며, 비석 6기는 대머리 스타일, 나머지 3기는 지붕돌 머리로 지붕돌 비석은 빗돌 부분을
감실(龕室)처럼 만들고 그 안에 빗돌이 따스하게 안겨져 있다.

관리들이 이곳을 통해 육지를 오가다 보니 여기에 그들의 비석을 세웠는데 (인근 화북포구도
비슷한 이유로 선정비가 많이 세워졌음;) 의미는 참 좋은 선정비이나 그 비석을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저들에게 묻고 싶다. 아마도 상당수는 고개를 떨구겠지. 딱
히 공적도 없으면서 백성들을 들들 볶아 비석을 세우거나 돈 떼먹기용으로 비석을 남발한 관
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 조천비석거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3470 (조함해안로 26)


▲  평화로운 모습의 조천포구

조천비석거리 서쪽에는 제주해협을 향해 가슴을 연 조천포구(조천항)가 펼쳐져 있다. 지금이
야 조그만 어항(漁港)으로 머물러 있지만 화북(禾北)포구와 함께 대한제국 시절까지 제주도와
육지를 잇던 포구로 바쁘게 살았던 제주도의 대표 관문이다. 조정에서 보낸 관리와 육지 사람
들이 이곳과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도를 오갔으며, 제주도 사람들도 이 포구로 육지와 다른 세
상으로 나갔다.
조천이란 이름은 천자(天子)의 나라에 조회하러 간다는 뜻으로 그 천자란 제주도를 다스렸던
고려와 조선을 뜻한다. 조정에서 보낸 관리와 왕명(王命)이 이곳을 통해 제주도로 들어왔으며
, 그 중요한 현장에 조천진성과 나를 이곳으로 부른 연북정이 있다.


▲  조천진성(朝天鎭城) - 제주도 지방기념물 68호

조천진성(조천진)은 제주도의 특산물인 현무암으로 다져진 단단한 성곽으로 연북정을 품으며
제주해협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제주도에 설치된 9개 진성(鎭城) 중
하나인데, 포구 관리와 수비를 담당했다.
1374년에 조천관(朝天館)이 세워졌으며, 1590년 제주목사 이옥(李沃)이 중수하여 둘레 428척,
높이 9척, 성문 1개를 지닌 성곽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후 초루(礁樓)와 객사(客舍), 청
사(廳舍), 군기고(軍器庫), 포사(砲舍) 등이 세워졌으며, 조방장(助防將) 1명을 중심으로 치
총(雉摠) 2명, 성정군(城丁軍) 92명, 유직군(留直軍) 103명, 서기(書記) 12명이 배치되었고,
사후선(伺候船) 1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 연북정을 제외한 시설물은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모두 지워
져 연북정과 성곽만 겨우 남아있다. 성곽은 거의 잘 남아있으며, 성곽 동쪽에 동문터가 있고
북쪽은 북쪽은 바다와 접해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의 둘레는 128m, 외벽 높이 2.2~4.3m, 상부 폭 1.6~3.1m 정도이며, 2017~
2018년에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성곽을 손질했다.

흔히 연북정만 알려져 있으나 그는 엄연한 조천진성의 망루이자 시설물이며, 조천진성과 연북
정은 하나의 몸이나 다름이 없다. 나도 연북정만 생각했지 조천진성의 존재는 생각도 못했다.


▲  조천진성 발굴 현장 (2018년)
이곳의 숨겨진 이야기를 캐내려는 굳은 집념으로 성곽 내부를 싹 뒤집어
조사를 벌이고 있다.

▲  연북정(戀北亭) -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3호

조천진성 성곽(城郭) 위에 기단을 다지고 높이 들어앉은 연북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정자이다. 정자 안에는 마루가 있으며, 사방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기둥의 배열과 건축
재료, 배열 방법은 제주도 주택과 비슷하다.
제주목사 이옥이 1590년 조천진성을 중수하면서 조천관을 중창해 쌍벽정(雙璧亭)이라 했으며,
그 쌍벽정이 1599년 중수되면서 연북정으로 이름이 갈렸다.

제주도는 조선 때 유배지<流配地, 귀양지>로 인기가 높았는데, 유배를 온 관리들이 연북정에
올라 육지에서 기쁜 소식(서울로 돌아오라는 제왕의 조서)이 날라 오기를 애타게 고대하며 북
쪽(서울)에 있는 임금을 그리워했다. (한편으로는 격하게 원망했을 듯) 그 연유로 연북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천진의 망루 역할을 했으며 평소에는 제주목사 등의 높은 관리와 지역 양반들이 유흥을 즐
기거나 유배자들이 바다 너머를 바라보며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제주도에 가면 이 연북정은 꼭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서 이렇게 들리게 되었는데, 조금은 각박
한 성곽 계단을 오르면 연북정에 이르게 된다. 정자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여기서 바라
보는 조망과 바닷바람 맛이 일품이다. 또한 제주올레길18코스가 연북정 옆구리를 지나가 예전
보다는 찾는 이가 좀 늘었다.


▲  연북정 현판의 위엄

하얀 피부 현판에 짙은 검은색으로 연북정 3자가 쓰여있다. 북(北)자는 마치 '터지(址)'처럼
보이며, 연(戀)은 가운데 '言'이 너무 격하게 솟아나 제자리로 속히 돌아가고 싶은 유배자들
의 마음과 자신들의 밥줄을 쥐고 있는 제왕에 대한 연모(한편으로는 원망)의 마음이 활활 타
오른 듯한 모습이다.

* 연북정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90


▲  연북정의 옆 모습

▲  연북정에서 바라본 조천포구와 원당봉

저 멀리 아른거리는 산이 원당봉(원당오름)이다. 조천에서 제주올레길을 따라 무려 저곳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다행히 일몰 직전에 도착해 원당봉에 깃든 불탑사5층석탑까지 싹
둘러보고 기분 좋게 나들이를 마무리 지었다.


▲  서쪽에서 바라본 조천진성
오른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연북정이다.

▲  두말치물

연북정 서쪽 해안에는 용천수가 치솟는 두말치물이라는 큰 샘터가 있다. 용천수란 빗물이 지
하로 스며들어 대수층(帶水層)을 따라 흐르다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바깥으로 나오
는 물로 그 틈새가 해안 지역에 많이 나타나 호랑이가 담배를 태우기 이전부터 그 주변에 마
을이 형성되었다. 제주도는 까칠한 현무암 피부라 비가 내리면 거의 지하로 내려가 물 문제가
늘 컸는데, 그 문제를 이런 샘터들이 해결해준 것이다.

두말치물은 물을 1번 뜨면 2말을 뜰 수 있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그만큼 물이 풍부했다. 용
천수가 솟는 주위로 현무암으로 둑을 다져 바다와 경계를 그었는데, 지금도 물은 넉넉히 나오
고 있으나 상수도 시설에 밀려 거의 이용하지 않아 이제는 동네 명소나 옛날 유물 같은 신세
가 되어 버렸다. 사람도 그렇고 사물이나 건물이나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은 참으로 쓸쓸해 보
인다.


▲  두말치물에서 바라본 조천진성과 연북정


♠  제주올레길18코스 거닐기

▲  제주올레길18코스 조천리 해안 구간

제주올레길18코스는 조천만세동산에서 제주시내 간세라운지까지 이어지는 19.8km의 긴 올레길
이다. 이 코스에는 조천만세동산과 연북정, 닭머르, 불탑사, 사라봉 등의 명소가 있으며. 읍
내(조천읍)와 포구, 해안마을, 바다, 산, 들녘, 도시 한복판을 두루 거쳐 제주도의 다양한 모
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나는 18코스 구간 중 약 ⅓ 정도인 연북정~삼양해수욕장 구간만 거닐었
는데, 코스를 이리 짠 것은 연북정과 불탑사5층석탑을 모두 잡기 위함이다.
연북정에 이른 시간은 거의 15시, 일몰까지는 2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아 서둘기는 했으나 전
투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아닌 듯. 한편으로는 여유롭게 할 것은 다하면서 움직였다.


▲  조천리 황씨종손(黃氏宗孫) 가옥 - 제주도 민속문화재 4-5호

올레길에 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상한 기와집이 살짝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에 이끌려
가보니 조천리 황씨종손 가옥을 알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나를 이곳으로 부르기는 했으
나 사람이 사는 집이라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현무암으로 다진 제주도 스타일의 담장이
높이 둘러져 있어 아무리 까치발을 하여도 그 속살을 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월담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입을 봉한 대문과 담장만 둘러보고 바로 물러났다.

이 가옥은 네모난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 자리한 안거리(안채), 북쪽의 밖거리, 서쪽의 모커
리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동쪽에 대문을 지닌 문간거리(문간채)가 있다.
4칸 규모의 안거리는 16세기에 지어졌다고 전하며, 3m(약 10척)가 넘는 상방의 주칸은 제사를
지내는 종가(宗家)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뒤 공간과 연결된 2칸의 뒷낭간은 집안의 사적인 공
간이며, 3칸짜리 밖거리는 1940년에 지어졌다. 밖거리는 머릿방과 협문이 있는데, 이는 대한
제국 이후 제주도 상류 주택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집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제주도 상
류 기와집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조천리 황씨종손 가옥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373 (조천9길 7)

황씨종손가옥과 멀지 않은 올레길 주변에 수륙
물이란 용천수 샘터가 있다. 샘터 주변을 돌담
으로 둘러 동네 여인들의 목욕 공간으로 만들
었는데, 아들을 얻지 못한 여인들이 자식을 점
지해줄 것을 빌던 곳으로 그 연유로 수덕물이
라 불리기도 한다.
허나 지금은 식수는 커녕 목욕 장소로도 거의
쓰이지 않아 한가로운 모습이며, 사진 중앙에
움푹 들어간 곳에서 용천수가 쏟아져 나와 찾
는 사람 거의 없는 수륙물을 늘 채워준다.

▲  조천리 수륙물(수덕물)

▲  제주올레길18코스 죽도 동쪽 구간
(신촌리 방향)

▲  제주올레길18코스 죽도 동쪽 구간
(조천리 방향)

조천리 구간을 지나면 바다와 땅이 뒤엉킨 곳이 나온다. 그곳의 중심에는 '죽도'란 섬이 있는
데, 남북으로 500m 정도 되는 작은 섬으로 동과 서, 남쪽이 둑방길로 제주도와 단단하게 이어
져 있다. 제주올레길18코스가 그런 죽도의 한복판을 지나가며, 섬 남쪽에 집 몇 채가 있을 뿐
대부분이 경작지와 주름진 바위 해변이다.


▲  지그재그 이어진 제주올레길 18코스 죽도 동쪽 구간

▲  제주해협을 향해 작게 입을 벌린 신촌포구 방파제

▲  신촌리 앞바다
저 까마득한 수평선 너머로 육지가 있다. 그곳이 혹시 보일까 싶어서 눈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살펴보았으나 역시나 거리 때문에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솔직히 보일 수가 없음)

▲  닭머르 해변

신촌리 마을을 지나면 닭머르란 해안이 나온다. 닭이 흙을 파헤치고 그 안에 들어앉은 모습처
럼 생겼다고 해서 닭머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기암괴석이 쭉 늘어서 있고 물고기들이
많아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해변 정상에는 정자가 닦여져 있는데, 저곳까지 가는 것이 도
리가 되겠으나 원당봉까지 갈 길이 멀어 쿨하게 통과해버렸다.

이 날은 아침에는 날씨가 청명했는데 조천에 이른 직후부터 잔뜩 흐려졌다. 바다 또한 흥분기
를 보여 거친 파도로 해변을 마구 때려대고 제주도 특유의 바람까지 거세어 체감 날씨는 겨울
이상이었다. 제주도가 따스한 남쪽이라고 하나 바다 바람이 그 따스함을 크게 떨어트린다. 하
여 해변이나 한라산 나들이 때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만 뒷탈이 없다.


▲  닭머르 해변을 거세게 쪼아대는 바다

▲  서쪽에서 바라본 닭머르 해변과 정자

제주올레길18코스 구간 중 신촌리 어촌계 탈의장에서 닭머르입구 구간(1.8km)은 해안누리길의
일원인 '닭머르길'이란 간판도 지니고 있다.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에서 선정한 걷기 좋
은 해안길의 일원으로 여기서 '문서천'이란 개천을 따라 5~6분 들어가면 습지 형태의 남생이
못이 있는데, 닭머르에 왔다면 그 습지도 같이 둘러보면 여로(旅路)가 더욱 살찔 것이나 나는
일몰 시간의 압박으로 닭머르만 총알처럼 지나가 버려 남생이못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핑계이
긴 하지만 언제나 시간이 문제이다.


▲  닭머르 서쪽 해변

▲  점점 멀어지는 닭머르

▲  시비코지 주변 해변

▲  들판과 억새밭을 지나는 제주올레길18코스 (시비코지 남쪽)

조천부터 계속 바다를 따라 다녔던 제주올레길18코스는 시비코지 이후부터 잠시 바다를 버리
고 내륙으로 빠진다. 올레길 주변에는 현무암 돌담으로 구획된 밭들이 정겹게들 펼쳐져 있고
누렇게 뜬 억새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나를 반긴다.


▲  들판 사이를 지나는 제주올레길18코스 (시비코지 남쪽)


♠  이 땅에서 유일한 늙은 현무암 탑을 지닌 곳
원당봉 불탑사(元堂峰 佛塔寺)

▲  맞배지붕을 지닌 불탑사 사천왕문(四天王門)

들판을 달리던 제주올레길18코스는 원당봉(171m) 자락으로 들어가 불탑사 앞으로 나를 인도한
다.
삼양동 동쪽에 낮게 솟은 원당봉(원당오름)은 겉으로 보면 꽤 평화로운 모습이나 그는 측화산
(側火山) 출신이다. 즉 용암을 내뿜던 무시무시한 화산이었다. 그는 7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뫼로 왕년에는 용암과 화산재를 요란하게 내뱉었으나 몸이 노화되면서 한라산처럼 죽은 화산
이 되었다. 정상부에 있던 분화구는 물이 고여 습지가 되었으며, 이 습지를 '거북못'이라 불
렀는데, 근래에 연못으로 바뀌어 이곳이 먼 옛날 화산의 입이었음을 살짝 귀띔한다.
원당봉이란 이름은 몽골(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가 세운 원당사란 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
선 때는 원당악(元堂岳)이라 불렸으며, 정상부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어 이를 원당봉수라 하
였다.

원래 이번 나들이에서 불탑사와 원당봉을 제일 처음 찾아가 그 정상까지 가려고 했으나 코스
가 반대로 바뀌면서 마지막 답사지가 되었다. 또한 일몰 직전에 도착하여 원당봉 정상부는 가
지도 못하고 불탑사만 둘러보고 빠져 나와 다소 아쉽다. 허나 인연이 그것 밖에 안되는 것을
어찌하리요. 나머지 부분은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쿨하게 넘겼다.


▲  불탑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불탑사의 중심 건물(법당)이다.


원당봉 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불탑사는 14세기 중반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창건설
화에 따르면 몽골(원나라)의 제왕인 순제(順帝)가 아들이 없어 무척 애태우던 중, 꿈 속에서
승려가 나타나
'북두의 명맥이 비친 삼첩칠봉(三疊七峰)의 터를 찾아 절과 탑을 세워 기도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하여 신하들을 닥달하여 천하를 수소문해 제주도 동북 해변에서 그 삼첩칠봉을 찾았고, 그곳
에 탑과 절을 세워 사람을 보내 기도를 하니 마침내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순제의 2번째 황후가 그 유명한 기황후로 이 양반이 행주기씨 집안이자 친원(親元) 패거리의
핵심인 기철(奇轍)의 여동생이다. 몽골에 공녀(貢女)로 들어갔으나 고려 출신 환관이자 기황
후와 같은 지역 사람인 박불화(朴不花, ?~1364)의 도움으로 궁궐로 들어갔고, 순제의 총애까
지 받게 되어 아들까지 낳게 된다. 그 기세를 몰아 순제를 현혹시켜 기존 황후(皇后)를 내쫓
고 자신이 황후에 올랐으며, 권력까지 손에 쥐어 몽골을 통치했다.
순제가 아들을 얻고자 제주도 원당봉에 절을 세운 것은 기황후의 득남을 기원하고자 그리 한
것으로 여겨진다. 순제는 이미 건장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기황후의 모함을
받아 크게 고통을 받았음) 어쨌든 아들을 얻자 기황후가 원당사를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절 제주도는 몽골이 설치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원당사는 현재 불탑사와 맞은편 원당사 자리까지 아우른 규모로 법화사(法華寺), 수정사(水精
寺)와 함께 제주도의 대표적인 절이었다. 조선 중기까지 무탈하게 있었으나 숙종(肅宗) 시절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제주도에 있던 절과 당집을 대거 정리하면서 파괴되고 만다. 그
시절 제주도에는 당(堂) 오백, 절 오백이 있었다고 전해 그만큼 무속신앙과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유교와 성리학(性理學) 사상이 뼛속까지 파고든 이형상의 눈에 곱게 보일 턱
이 없었다.
조선 후기에 재건되었으나 3번이나 불을 만나 쓰러졌으며, 1914년에 비구니 안봉려관(安蓬廬
觀)이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불탑사로 갈았다. 이후 1949년 4.3사건 때 파괴되었다가 1950년
대에 승려 이경호가 재건했고, 승려 양일현이 중창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심우당, 사천왕문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그 흔한 일주문
(一柱門)을 아직 갖추지 못해 사천왕문이 절의 정문 역할을 도맡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현무암 피부의 5층석탑이 있으며, 발굴조사로 발견된 옛 원당사 시절의 금당터
와 요사터가 있다. 절 남쪽에는 불탑사의 옛 이름을 취한 원당사가 있으며, 제주올레길18코스
가 절 앞을 지나간다.

* 불탑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1동 696 (원당로16길 41, ☎ 064-755-9283)


▲  불탑사 5층석탑 - 보물 1187호

대웅전 뜨락에는 불탑사의 꿀단지이자 상징물인 5층석탑이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딱 하나
밖에 없는 오래된 현무암 탑이자 제주도에서 가장 늙은 탑으로 불탑사란 이름은 바로 이 탑에
서 비롯되었다.
제주도에 걸맞게 현무암으로 닦여진 시커먼 피부의 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과 5층 탑신(塔身
), 머리장식을 지니고 있는데, 기단은 뒷면을 뺀 3면에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으며, 무늬의
바닥선이 꽃무늬처럼 솟아나도록 조각했다. 1층 탑신 남쪽 면에는 감실(龕室)을 두었고, 지붕
돌은 윗면의 경사가 크지는 않으나 네 귀퉁이가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으며, 꼭대기에 올려
진 머리장식은 아래의 돌과 그 재료가 달라서 후대에 별도로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인 탑 모습이 조형성이 적고 무겁게 보인다고 하여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
며, 불탑사 창건설화에 탑이 등장하는데 그 탑이 이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시대가 비슷하므
로 그런데로 맞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천하의 유일한 늙은 현무암 탑으로 제주도 지방유형문
화재 1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나 1993년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  검은 피부가 매력적인 불탑사 5층석탑 (정면에서 본 모습)

▲  옛 원당사의 요사(寮舍)터

불탑사 경내를 싹 뒤집어 발굴조사를 했을 때, 여기서 건물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독립 기초
가 나왔다. 이곳은 요사(요사채)터로 여겨지며, 기단석과 주춧돌을 수습해 저 밑에 고이 묻고
그 위에 곱게 잔디를 입혔다.


▲  옛 원당사의 금당(金堂, 법당)터
건물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독립 기초와 요사채터와 연결된 계단이 발굴되었다.
이곳 역시 주춧돌을 묻고 그 위에 잔디를 입혔다.

▲  서쪽에서 바라본 옛 원당사의 금당터

불탑사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이곳을 끝으로 제주도 나들이는 모두 마무리가 되
었으며, 계획한 답사지는 3곳을 제외하고 모두 발자국을 남겼다. 알차고 보람차게 여로를 마
무리 지으니 마음이 뿌듯했으나 한편으로는 '벌써 제자리로 돌아가야 되나?' 싶어 아쉬운 마
음도 실로 컸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를 더 머물고 싶었으나 이번 나들이는 계획대로 여기서
쿨하게 정리했다. 제주도는 바다를 건너거나 하늘을 넘어야 되는 부담감이 있어서 그렇지 언
제든 찾을 수 있는 곳이니 다음 인연을 기다리면 된다.

제주올레길18코스를 마저 타고 삼양동 시내로 내려왔으나 너무 아쉬운 마음에 삼양해수욕장을
저녁거리로 둘러볼까 했다. 허나 바닷바람도 차고 몸도 지쳐서 시내버스를 타고 제주국제공항
으로 넘어갔다.
공항에 들어서니 서울이나 부산, 광주 등 육지로 가려는 사람들과 외국 방면 사람들로 북새통
을 이룬다. 예약한 비행기표를 발권받아 탑승 수속을 밟고 비행기 기다리는 곳에서 제주도 감
귤 초콜렛 2상자를 기념품으로 구입했다.
시간이 되자 김포공항으로 가는 티웨이(T-Way)항공 비행기에 나를 담았는데, 비행기가 탑승동
에 몸을 대지 않고 활주로에서 대기하고 있어서 그곳으로 인도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2~3분 정
도를 가서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예정시간보다 30분 늦게 제주공항을 출발했고, 50분 정도를 날다가 서울의 하늘 관
문인 김포공항에 가뿐하게 착륙했다. 사흘 만에 서울 공기를 다시 맡으니 확실히 차긴 차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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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8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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