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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추사유배지)

대정읍성(대정성지) 동문 안쪽에는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 유적이 있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 억울

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강제 유배되어 1848년까지 머물렀는데, 유배 초기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서 여러 해 신세를 지다가 추사의 열성 제자로 대정고을의 지주였던 강도순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강도순의 집이 바로 이곳이다.

추사는 이곳에서 지역 유생들과 백성들에게 학문과 서예, 유학을 가르쳐 제주도 지역 학문 발전에 크

게 이바지했으며, 차를 매우 좋아하여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와 평생 우정을 나눴다. (초의선사가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찾아왔음) 하여 제주도에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로 추앙을 받는다. 또한 이

곳에서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시켰으며, 그의 최고 명작인 완당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남겼

다.

 

추사가 떠난 이후, 강도순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경작지가 되었다가 1984년 강도순

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2010년 5월에는 제주추사관을 세워 김정희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가는 날이 문 닫는 날이라고 마침 내부공사중이라 제주추사관 내부

는 살피지 못했다.

 

2. 추사 김정희의 동상

 

3. 추사유배지 북쪽 마을 돌담길 (안성리)

 

4.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 관련 안내문

초의선사는 1843년 봄, 부인을 잃어 상심에 잠긴 추사를 위로하고자 바다를 건너 그의 유배지를 찾았

다. 훗날 초의가 쓴 '완당김공제문'에서 '제주에서 반년을 한지붕에서 지냈다'고 밝혀 그와의 끈끈한 우

정을 과시했다. (초의선사와 추사는 동갑임)

초의는 그의 유배지를 3번이나 찾아 장시간 머물렀으며, 매년 햇차를 보내주었다.

 

5. 추사유배지 강도순 집 대문(대문채)과 모두 풀어진 정낭

대문 앞에 제주도 스타일의 정낭이 있다. 정낭은 집주인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려주는 것으로 모두 아

래로 풀어져 있으면 집주인(주인 가족들)이 있다는 것이고, 1개가 걸쳐져 있으면 근방에 있다는 것, 3

개가 모두 걸쳐져 있으면 멀리 있어 바로 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6. 돌담에 둘러싸인 말방에(연자방아)

소나 말을 이용해 곡식의 이삭을 찧거나 빻는 제주도 스타일의 도구이다. 제주도 마을에는 보통 하나

씩 구비되어 마을 사람들이 이용했는데, 강도순 집에는 개인 소유의 연자방아가 별도로 있었다.

 

7. 옛날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내는 말방에(연자방아)

 

8. 쉐막

소를 기르는 외양간으로 제주도에서는 쉐막이라 부른다. 보통 대문 옆에 두었는데, 대문이 따로 없는

제주도 전통 가옥과 달리 강도순 집 같은 부잣집에는 대문이 있었다.

 

9. 안거리

강도순 가족이 살던 공간이다. 그는 추사의 열성 제자로 대정고을의 지주였는데, 그의 밭을 밟지 않고

는 마을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부유했던 인물이다. 그 덕분에 추사는 여기서 아주 편하게 지냈다.

 

10. 돗통시

돗통시는 제주도 스타일의 원초적 뒷간이다. 보통 집 구석에 두었는데, 아랫쪽에 돼지우리를 두고 그

위에 뒷간을 닦았다. 뒷간에서 볼일을 보면 밑에 있는 돼지가 그것을 냠냠 먹었으며, 그렇게 배설물을

처리하고 거기서 나온 퇴비를 경작지에 뿌렸다.

 

11. 사람들이 볼일을 보던 돗통시

추사도 여기서 원초적 볼일을 보았다. 아무리 신분이 높고 낮아도 화장실 앞에서는 모두 평등해진다.

 

12. 옆에서 바라본 돗통시와 재현된 돼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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