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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면동 태봉근린공원 (월산대군 이정 태실)

우면동 한복판에는 태봉이란 조그만 언덕이 봉긋 솟아있다. 우면지구를 개발하면서 언덕 주변을 손질

해 태봉근린공원(태봉공원)으로 삼았는데, 그 언덕 정상에 태봉의 오랜 주인인 월산대군 태실이 조용

히 둥지를 틀고 있다.

 

2. 월산대군 태실로 이어지는 태봉 숲길

태봉 정상에 깃든 월산대군 태실로 인도하는 숲길은 수풀이 우거져서 그렇지 경사는 거의 느긋하다.

숲으로 들어서니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 공기부터가 다른데, 그 길을 2~3분 오르면 그 산길의 끝에

월산대군 태실이 모습을 비춘다.

 

3. 태봉의 무성한 숲속으로 (월산대군 태실 방향)

 

4. 서초구청에서 세운 태봉 표석 (월산대군 태실 숲길)

 

5. 월산대군 이정 태실

태봉 정상 양지바른 곳에 월산대군 이정 태실이 자리해 있다. 태실비와 석함 1기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으로 태실이란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는 공간이다. 탯줄을 버리지 않고 태항아리에 넣어 특별히

엄선된 명당자리에 봉안했는데, 조선의 군주는 총 27명, 그들의 아들과 딸까지 합치면 수백 명이 넘

으니 태실도 그만큼 많이 조성되었다. 허나 서울 지역 태실은 오직 월산대군 태실이 유일하다.

 

태실비는 난쟁이 반바지를 2번 접은 정도의 작은 크기로 비신과 비석 받침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 앞면에는 '월산군정태실'이라 쓰여있어 태실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으며, 뒷쪽에는 '천순6

년 5월18일입석(天順六年五月十八日 立石)'이라 쓰여있어 1462년 5월에 세웠음을 알려준다.

태항아리를 머금던 석함은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데, 안에 담긴 태항아리와 지석은 고약했던 왜정 시

절에 모두 털려 지금은 왜열도 아타카 콜렉션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그 항아리가 희소가치가 대단했

던지 왜열도의 어느 미술잡지에 세상에 딱 2개 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소개되기도 했다. <항아리

의 출처도 나와있음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현 우면동)'>

서울 유일의 태실이자 제자리에 원형대로 남은 태실이며, 조선 왕실의 안태 의식이 담긴 현장으로

2010년에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얻었다. 태실이 깃든 언덕은 나무가 무성한데, 이는 태실을 보

호하고자 태실이 깃든 봉우리를 금표로 삼아 속인들의 손길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다. 조선이 망한

이후에도 지역 사람들이 봉우리를 애지중지 지키면서 지금에 이른다.

 

태실의 주인공인 월산대군의 이름은 이정, 자는 자미, 호는 풍월정이다. 1454년 세조의 맏아들로 일

찍 죽은 덕종(추존된 묘호)과 소혜왕후 한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성종의 친형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할아버지인 세조의 귀여움을 받으며 궁궐에서 자랐다. 1460년에 월산군에 봉

해졌고 1468년 동생인 잘산군과 함께 현록대부가 되었다. 1469년 작은아버지인 예종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 1순위로 지목되었으나 한명회와 소혜왕후의 뜻으로 동생인 잘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성종이다.

성종은 형을 달래고자 1471년 월산대군으로 급을 올렸으며, 그해 3월 좌리공신 2등에 책봉해 전지와

노비, 구사 등을 넉넉히 주는 등의 성의를 보였으나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좌리공신이나 받아야 되는

자신의 처지에 열불이 나 자연으로 뛰쳐나가고 만다.

 

월산은 양화도(양화대교 주변) 북쪽 언덕에 있던 희우정을 수리해 망원정이라 했으며. 그곳에 살림을

차려 매일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팔자 좋은 삶을 누렸다.

그러다가 어머니(소혜왕후)가 병에 걸리자 입궐하여 극진히 간병을 했는데 너무 무리를 했는지 그만

1488년,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부인은 평양군 박중선의 딸로 소생은 없었으며, 첩

을 통해 아들 2명을 얻었다.

1473년까지 집에 별묘를 세워 아버지 덕종의 제사를 주도했으나 덕종이 종묘에 봉안되면서 월산군의

위치는 종실의 일부로 떨어지게 된다.

 

월산은 학문을 좋아해 왕족을 위한 종학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경사자집을 두루 섭렵했다. 성품은

침착결백했고, 술과 산수를 좋아했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속동문선에 그의

시가 여럿 실려 그의 시심을 보여주며, 저서는 풍월정집이 있다. 시호는 효문이다.

 

월산의 저택은 지금의 덕수궁(경운궁) 자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망친 선조와 신하들은

1593년 2월 서울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모두 파괴된 상태라 머물 곳이 여의치 않았다. 이에 선조는

크게 발작을 하며 거처를 찾으라고 다그쳤는데 다행히 월산의 저택이 멀쩡하게 살아있어 그곳을 임

시 궁궐로 삼고, 주변 집을 몰수해 궁역에 넣었다. 그것이 바로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이후

궁궐을 보수하면서 월산의 집은 철거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을 이루는 건물은 모두 고종 이후에 지어

졌다.

 

6. 가까이서 바라본 월산대군 태실비와 석함

 

7. 월산대군 태실비와 석함의 뒷모습

 

8. 월산대군 태실비와 석함의 옆 모습

태실이 자리한 곳은 태봉의 정상부로 숲에 꽁꽁 감싸여 있어 바깥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숲과

하늘, 그리고 태실 부속물이 보이는 것이 이곳의 전부이다.

 

9. 월산대군 태실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숲길 (남쪽 방향)

 

10. 태봉 북쪽 자락

태봉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태봉근린공원에서 올라가는 남쪽 길 외에 북쪽 자락에서 오르는 길도

있다. 하여 남쪽으로 올라가서 북쪽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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