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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면동 형촌 회화나무

월산대군 이정 태실이 깃든 태봉 북쪽에는 형촌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우면산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풍양조씨가 1740년대에 들어와 닦은 마을로 그 시절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가시내꿀(또는 샛

말)이라 불렀는데, 그것을 한자로 표시해 형촌이 되었다.

풍양조씨의 집성촌으로 계속 이어오다가 1963년 경기도 시흥군에서 서울로 편입되었으며, 강남 개발

이후 마을 개량 사업을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개량 사업으로 인해 주민 절반 이상이 마을을 떠났고 그

틈을 타 외지인들이 대거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토박이 주민의 주택과 외지인과 졸부들의 저택, 빌라

가 공존하는 어색한 현장이 되었다.

 

형촌에는 늙은 보호수 2그루(회화나무와 돌배나무)와 석불, 성정승묘, 우면산 자연생태공원 등의 명

소가 있는데,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이곳 회화나무는 약 240년 묵은 나무로 높이 12m, 둘레 280cm

이다. (2000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220년)

골목길 중앙에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주택들이 바짝 붙어 있어 나무의 생육 공간은 넉넉치 못하며,

마을의 오랜 내력을 알려주는 존재인만큼 예우 차원에서 나무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 마음 편히 살게

해주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사람들의 욕심이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하여 골목길 중앙과 집들 사

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나무와 사람, 차량 서로가 불편하게 되었다.

 

2. 형촌 회화나무 표석 (서초구청에서 설치함)

 

3. 남쪽에서 바라본 형촌 회화나무

속인들의 집이 나무와 바짝 붙어있어 생육 환경이 그리 좋지는 못하다.

 

4. 우면동 석불 (동자석미륵)

형촌 회화나무 북쪽 그늘에는 조그만 석불이 우두커니 서 있다. 이곳에서는 마을을 지키는 신령한 힘

을 지닌 미륵불, 또는 어린이처럼 키가 작아서 동자상미륵이라 부르며 신성시했는데, 예전에는 그에

게 동제를 올렸다.

허나 토박이 주민들이 많이 빠져 나가고 우면동의 오랜 무형자산인 우면두레도 희미해진 상태라 그

에 대한 열렬한 숭상심도 크게 떨어진 실정이다. 하여 회화나무의 밑도리나 뚫어지라 바라보며 떨어

지는 나뭇잎이나 맞아야 되는 우울한 신세가 되었다. 만약 그에 대한 숭상이 여전했다면 그를 위한

집을 세우던지 무슨 배려가 있었을 터인데 그런 것은 없다. 그러니 석불은 나무에 계속 의존하고 있

다.

 

석불의 높이는 1m 정도로 그나마 밑도리는 땅 속에 묻혀있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

으나 나무 밑도리를 바라보게 배치한 것도 이상하며 그의 밑도리도 모두 끄집어내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 앞에 섰으면 좋겠는데, 마을 사람들이나 서초구청, 서울시에서 그럴 의지까지는 없는 모양이다.

그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얼마나 울었길래 얼굴이 죄다 지워진 것일까? 그저

얼굴과 귀의 윤곽만 확인이 가능하다. 머리에는 돌갓을 쓰고 있는데 고려와 조선의 많은 미륵불들이

돌갓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불로 조성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성 시기는 조선 너머까지는 갈 것 같지는 않고 형촌마을이 형성된 1740년대 이후 마을 수호신으로

세웠을 가능성도 있으나 얼굴이 저 지경이 된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불우한 시간을 보내며 방치되어

있던 것을 이곳으로 가져와 마을 수호신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5. 회화나무의 밑도리만 뚫어지라 바라보는 우면동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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