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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동~덕수궁돌담길 산책


'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나들이 '

▲  덕수궁 돌담길 (서울특별시청 서소문청사 앞길)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정동(貞洞)이란 고즈넉한 동
네가 뉘어져 있다.
정동은 서울 도심의 주요 명소이자 서울 근대문화유산의 대표 성지(聖地)로 덕수궁 돌담
길과 정동길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데, 꽤 번잡한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지만 나무를 머
금은 공간이 많아서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게다가 조선부터 현대까지 600년
이상의 장대한 시간이 녹아든 현장으로 역사, 문화의 향기도 정말 그윽하다. 바로 그 매
력 때문에 오랫동안 천하 사람들의 나들이, 답사 명소로 격한 사랑을 받아왔으며, 나 또
한 이곳에 퐁당퐁당 빠져 종종 발걸음을 하고 있다.


♠  정동 회화나무,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유관순 우물

▲  정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3호

늦가을이 익어가던 11월의 첫 무렵, 오랫만에 정동을 찾았다. 이번에는 정동4거리(5호선 서대
문역과 서울역사박물관 중간)에서 정동길로 접근했는데, 그 길을 3~4분 정도 들어가면 야무지
게 자라난 회화나무 1그루가 마중을 나온다. 그가 정동의 오랜 터줏대감인 정동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는 정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570년 정도 묵었다. (1976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520년) 서울 도심부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나무로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대자연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17m, 둘레 5.16m의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
했는데, 그 기세는 정동길을 뒤덮을 정도이다. 하지만 고된 세월에 지쳤을까? 아니면 하늘이
두려운 것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다소 구부러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가 워낙 나이가 많고 수시로 오가는 차량들이 내뱉은 고약한 기운에 매일 시달리면서 한
때 수세가 많이 기울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캐나다가 대사관(大使館) 건물을 신축했는
데, 그 대사관이 자칫 나무를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었으나 캐나다 양이(洋夷)들이 기특하게도
나무를 배려하여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깨어있는 모
습을 보여주면서 나무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  정동 회화나무와 캐나다대사관(왼쪽 건물)
정동의 이름 유래가 된 정릉(貞陵)부터 많은 것들이 창밖에 이슬처럼 정동을
스쳐갔지만 오직 회화나무만이 그 장대한 세월을 극복하며
정동을 지켰다.

▲  정동 회화나무 주변 정동길
회화나무의 그늘 맛을 먹고 자란 정동길, 정동길의 늦가을 풍경은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로 명성이 높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 국가 등록문화재 3호


정동 회화나무를 지나면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두룬 이화여고가 모습을 비춘다. 정문 옆에는 붉
은 피부를 지닌 늙은 3층 건물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이화학당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심
슨기념관이다.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 건평 129.5평의 벽돌 건축물로 언더우드
가 세웠던 '예수교학당' 자리이다. 이화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근대 건축물로 조선에 머
물던 미국 사람 심슨(Sarah J. Simpson)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었는데, 그를 기리
고자 그의 이름을 따서 심슨기념관(씸손기념관)이라 했다.
건물 동쪽에는 '씸손기념관'이라 쓰인 동판이 있으며 1961년과 2006년에 보수했다. 이후 내부
를 손질해 이화학당백주년 기념관으로 삼았다가 이화학당(이화여중고)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화~토요일 10~17시, 월요일과 휴일은 휴관)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 5월,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 여사(Mrs. Marry F. Scranton)가 세
운 이 땅 최초의 여자학교이다. 그는 조선에 여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
교사와 현 이화여고 본관 뒷편 언덕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살피다가 그해 10월 배밭 6,120평
을 구입했다. <현재 정동 32번지 일대>
그 안에 있던 집을 모두 부시고 새로운 한옥을 착공하려고 하니 마침 선교부로부터 예산 지원
이 어렵다는 통보가 날라왔다. 하여 미국 각지에 원조를 요청하여 겨우 3,700달러의 기부금을
모아 건물을 완성했다. 처음 학교 건물은 'ㄷ'자 모양의 195.5칸에 큰 한옥으로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시 서울 사람들은 그 건물을 양국관(洋國館)이라 불렀다.

그 시절 조선은 여자들 교육에는 매우 인색했다. 그래서 스크랜톤은 조선의 그런 현실을 생각
해 6명을 생각했으나 겨우 1명이 지원하는데 그쳤다. 그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면서 이화학당
의 서막은 열리게 된다.
초창기 학당에 들어온 여학생들은 이름이 없어 영어로 편의상 '1st', '2nd', '3rd' 등으로 불
렀는데, 학생이 점차 증가하면서 서수(序數)로는 적당치가 않아 '수산나','델리아' 등의 세례
명을 붙여주었다.

▲  이화여고 뜨락에 세워진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표석

▲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톤 여사의
흉상


1887년 고종은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에서 '이화학당'이
란 이름을 내렸다. '이화'란 이름은 부근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이란 정자에서 따왔다는 설과
이곳이 원래 배밭이었으므로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897년 학생수가 40명을 넘자 페인(J.O Paine) 학당장(學堂長)은 기존 한옥을 부시고 2층짜리
양관인 메인홀(Main Hall)을 지어 1900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메인홀은 'T'자형으로 900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었다.
바로 이웃에 자리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메인홀을 두고 '서울 장안에서 가장 전
망이 좋은 집'이라며 찬양을 했는데, 그 건물은 6.25시절에 파괴되어 사라졌다. 하여 1970년
그 뒤쪽에 이화여고 본관을 세웠으며, 메인홀터에는 '한국 여성 신문화의 발상지'란 표석과
스크랜톤 부인의 흉상을 세웠다.

1899년 5월 학당에서 여학생을 이끌고 창의문(彰義門) 밖 세검정(洗劍亭)으로 소풍을 갔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한다. 그 당시 그들의 소풍은 500년에 처음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  굳게 닫힌 유관순우물

이화학당하면 유관순(柳寬順) 누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
는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고등과 학생 5명과 몰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운동에 참
여했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고향인 천안 병
천으로 내려가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관했으나 왜경에 체포되어 1920년 서대문형
무소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獄舍)하고 만다.

심슨기념관 뒤쪽에는 굳게 입을 닫은 동그란 조선 후기 우물이 있다. 학교에서는 그 우물을 '
유관순우물'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데, 원래는 정동 사람들이 쓰던 우물이었으나 이화학당
이 들어서면서 학당 소유가 되었다. 댕기머리 여학생들이 여기서 물을 길어 식수용으로 쓰거
나 빨래를 했으며, 유관순 누님 역시 이곳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상
징적인 인물이라 그의 이름을 따서 '유관순우물'이라 했다.

지금은 죽은 우물로 뚜껑이 닫혀져 있어 물이 콸콸 치솟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유관순우물과 은행나무
한참 녹음(綠陰)에 젖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우관순우물에 그늘을 드리우며 수채화처럼 고
운 풍경을 자아낸다. 나무의 나이는 약 100년
정도로 여겨진다.


▲  늦가을에 의해 노란 머리가 되버린 이화학당 사주문(四住門)과
하마비(下馬碑)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다녔을 기와집 사주문, 지금은 문 옆에 넓은 교문이 닦
여져 있어 후문으로 물러나 있다.
사주문은 이화학당의 옛 정문으로 1923년에 전통 한옥의 사주문 형태로 지어졌다. 지금의 자
리로 이전되면서 왜식(倭式)으로 변형된 것을 1954년에 졸업생들의 흔쾌한 후원금으로 팔작지
붕 기와문으로 교체했다. 그러다가 1999년 8월 원래의 대들보와 상도리, 망와 등 일부를 사용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문 좌우로 기와를 머리에 인 돌담이 정겹게 펼쳐져 있고 문 옆에는 조그만 비석이 세워져 있
는데, 그 비석은 아무나 세울 수 없었던 콧대 높은 하마비이다.

하마비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란 뜻이다. 조선시대 국립중등교육 기관인 향교(鄕校) 앞에 하마비가 있는
것은 보았어도 신식 학교에 그것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아마도 제왕이 친히 이름을 내리
며 관심을 보인 여학교라 학교 주변 단속도 할 겸, 비석을 내린 모양이다. 이화학당은 제왕이
이름도 내려주고 하마비까지 달아준 정말로 특별한 여학교였던 것이다.

* 심슨기념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2-1 (정동길 26, ☎ 02-2175-1964)
* 이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이화학당 교문 안쪽에 누워있는 손탁호텔터 표석

이화학당 부근에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Sontag Hotel)이 있었다. 이 호텔은
러시아 사람인 손탁(孫澤, Miss Sontag)이 세웠는데, 그가 32살이던 1885년 동생의 남편인 초
대 러시아공사 베베르(Waeber. K)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1895년 친러파를 중심으로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결성되었는데, 그들은 손탁 집에 모여서
고종을 경복궁(景福宮)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데려오는 계획을 논의했다. 손탁과 베베르는 그
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끌어냈고, 그 공으로 손탁은 고종으로부터 왕실의
부속건물인 기포드(D.L. Gifford) 선교사의 한옥을 하사 받게 된다.
손탁은 자신이 쓰던 건물을 클럽으로 개조하여 외교관들의 사교장으로 만들었으며 정동구락부
의 호스티스(여주인)가 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에는 외국인을 위한 호텔이 없는지라 조정에서 1902년 2층 규모의 양관을 만들어
고종의 이쁨을 얻은 손탁에게 경영권을 주었다. 그 양관이 바로 손탁호텔<손탁빈관(孫澤賓館)
>로 내부를 서양풍으로 꾸몄다.
조선 정치가와 사업가, 서양 애들, 청나라 애들, 왜국 애들 등 다양한 사람이 이용했으며, 그
들의 숙식 및 모임 장소로 크게 호황을 누렸다. 러일전쟁 때는 영국 수상으로 유명한 처칠이
하룻밤을 묵었고, 1905년 11월에는 이토히로부미가 머물며 을사조약 체결을 위한 행동을 전개
하기도 했다.

손탁호텔은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쓰였고, 1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과 주방, 식당, 커피샵을 갖
추고 있었는데, 특히 커피샵과 서양요리 식당은 이 땅 최초로 의미가 깊으며 외교관들을 모아
놓고 서양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여 이 땅에 처음으로 서양 영화를 소개한 현장으로 보는 견해
도 있다.

손탁은 러시아말과 조선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에도 능통해 고종 황제의 통역관으로 활동하
기도 했으며, 조선에서 24년을 머물다가 1909년 조선에서 번 막대한 재산을 싸들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의 나라인 러시아가 망했기 때문이다.
왜인 기구찌가 쓴 '한말에 등장한 여성'에서 손탁이 조선에 왔을 때는 선망 받는 30세의 꽃같
은 미모였는데, 떠날 때는 아름답던 얼굴이 파란과 비통으로 시들어 볼품이 없다고 적었다.

러시아로 돌아간 손탁은 별장을 지어 재산을 관리하려고 했는데, 동생의 권유로 재산 대부분
을 러시아은행에 예금하고 나머지는 러시아 기업에 투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
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고, 소련공산정권은 손탁의 돈을 모두 몰수해버렸다. 하여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은 손탁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을 뼈저리게 느끼며, 1925년 71세의 나이로 혼인
도 하지 못한 노처녀 상태로 사망하고 말았다.

손탁이 떠난 이후 손탁호텔은 미국인이 관리하다가 그 자리에 감리교학교가 들어섰으며, 1917
년 이화학당이 미국감리교회에서 모금한 23,060달러로 손탁호텔을 인수해 기숙사로 사용했다.
허나 1922년 호텔을 철거하여 그 자리에 프라이홀(Frey Hall)을 세움으로써 손탁호텔의 역사
는 끊기고 만다.


♠  구 러시아공사관터, 정동교회

▲  구 러시아공사관 - 사적 253호
(정동공원에서 바라본 3층 전망탑)


이화학당 교문 맞은편 길로 조금 들어서면 그 길의 끝 언덕 위에 하얀 피부의 날씬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그가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우울한 현장, 러시아공사관터 3층 전망탑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일찍이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프랑스를 이용해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으로 러시아를 막아
볼 생각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884년 러시아와 수교를 맺었는데, 그때 조선
측 대표는 김병시(金炳始), 러시아측 대표는 베베르(K. Waeber)였다.

조선은 1888년 덕수궁(경운궁)의 후원인 상림원(上林園) 일대를 공사관 자리로 제공했다. 러
시아는 그곳을 밀어버리고 공사관과 정교회<正敎會, 동방교회(東方敎會), 1900년에 지어짐>를
세워 서울 속에 조그만 러시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공사관은 1888년 공사에 들어가 1890년 8월 완성을 보았는데, 스위스계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Sabatine)이 설계했다. 르네상스식 벽돌조 건물로 공사관 본관은 'H'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는
데,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고 각
각 면에 출입문을 내었으며, 북쪽 끝 모서리에 3층 전망탑을 두었다. 그리고 공사관 초입에 4
면이 아치로 된 개선문 형태의 정문을 두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간단히 줄여 아관(俄館)이라고 하는데, 러시아를 가차자(假借字) 표현으로 아
라사(俄羅斯)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전망탑(탑)을 비롯해 공사관에 딸린 건물이 여럿 있었으나 왜정(倭政) 때 상당수 파괴되었으
며, 6.25 때 탑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이 모두 박살이 났다. 탑 역시 그때 무거운 상처를 입어
기우뚱거린 것을 1973년에 복원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면적은 65.2평으로 1981년 탑 동북쪽에서 지하실과 20.3m의 비밀통로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과 이웃한 미국공사관으로 속히 줄행랑을 치
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덕수궁이 황궁이 된 1897년 이후, 그 주변에 흩어진 여러 나
라 공사관과 영사관을 잇는 작은 통로를 닦아놓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그 통로는 1945년 무렵
까지 대부분 남아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모두 끊어진 상태이다.


▲  뒤쪽(북쪽)에서 바라본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우리가 보잘것없는 이 하얀 탑에 주목을 해야 되는 이유는 바로 1896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
의 우울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1895년 왜가 저지른 을미사변(乙未事變) 사건으로 고종은 왜를 극히 불신하며 경복궁에서 불
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친러파였던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 이윤용(
李允用) 등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신임공사 스페이어, 손탁과 함께 고종의 파천계획을 모의
하게 된다.
그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귀비(嚴貴妃)를 통해 왕에게 접근, 친일패거리들이 왕의 폐위를
꾸미고 있으니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고종이 흔쾌히 승낙
하며 베베르와 스페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베르는 1896년 2월 공사관 수비를 이유로 인천에 머물던 러시아군함에서 포 1문과 군사 120
명을 소환하여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준비가 끝나자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태자(
순종)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살짝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불이 나게
도망쳤다. 이 사건을 바로 4글자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그렇게 러시아공사관에 샛방을 튼 고종은 왜와 친했던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을 단죄했다.
그래서 김홍집, 어윤중(魚允中)을 처단하고, 김윤식(金允植)을 제주도로 귀양보내니 이에 염
통이 쫄깃해진 유길준(兪吉濬) 등 10여 명의 고위관리들은 왜열도로 줄행랑을 쳤다.
친일내각을 도려내자 친러패거리인 이범진, 박정양(朴定陽),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친러내각
이 들어섰다. 그들은 친일파를 역적으로 간주, 단발령(斷髮令)을 보류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
혁(乙未改革)을 폐지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을 머물렀는데, 가까운 서대문(西大門)은 임시로 폐
쇄되었고, 정동 일대는 백성들의 통행을 일절 금했다.

▲  옆(서쪽)에서 바라본 전망탑

▲  러시아공사관터 북쪽 부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얹혀사는 동안 어전회의는 무도실에서 했으며, 대신들은 공사관 대회
의실에서 병풍으로 칸막이를 삼아 일을 보았는데 부서별로 회의를 할 때마다 병풍을 이리저리
옮겼다.
고종은 2층 만찬실을 거처로 삼았는데, 만찬실 벽에는 꽃무늬 융단이 걸려있고 천정 가운데에
7가지 촛불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동쪽 벽에는 소파 모양의 용상(龍
床)이 있었고 그 앞에는 호피(虎皮) 1장이 깔려 있었으며, 거실 서쪽 벽에는 왕의 침대가 있
고,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만찬실 주변 측실(側室)에는 상궁(尙宮)과 궁녀가 거처하여 왕의 시중을 들었는데, 궁녀들은
방이 따로 없어 공사관 복도에서 칸을 설치하여 지냈다.

만찬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포 1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정문에서 현
관에 이르는 길에는 러시아군 100명이 수비했다. 그리고 정문 밖에는 칼을 찬 조선군이 길목
을 지켰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는 고종이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했으며, 명성황후의 제단까
지 마련해주는 등 왕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서 긁어주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에 더욱 친밀을
보이면서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퍼주게 되며, 그로 인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지
게 된다.


▲  러시아공사관터 동쪽 부분
주름진 공사관터 동쪽 끝에 지하 비밀통로가 있다. 이 통로는 미국공사관
(현 미국대사관저)과 이어져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형편없이 깨지자 승리한 왜는 러시아공사관을 접수하여 러시아
공사(公使)와 러시아군 80명, 공사 직원을 죄다 러시아로 추방했으며, 인근 프랑스공사관에서
잠시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왜와 러시아가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러시아영사관으로 쓰였으며, 1945년 이후 소련
영사관이 되었다. 허나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니콜라이 영사가 북한으로 추방되면
서 다시 빈집이 되고 만다.
이후 6.25전쟁으로 전망탑을 빼고 싹 파괴되었고, 1973년 전망탑을 복원하면서 암울했던 근대
사를 나무로 덮으려는 듯, 수양버들 등의 나무를 잔뜩 심어 정동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2009
년 독특한 모습의 하얀 피부의 정자를 공원 한복판에 닦아 지금에 이른다. (정동야행 축제 때
는 음악회 장소로 많이 쓰임)

러시아와 재수교 이후 그것들은 이곳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요구는 보기 좋
게 묵살되었다. 전망탑에서 남쪽으로 1리 남짓 떨어진 정동교회 뒤쪽에 러시아대사관이 이미
자리해 있어 그 땅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80년 가까이 홀로 제자리를 지키고 선 하얀 피부의 3층 전망탑, 근대사의 거센 소용돌이의 현
장으로 지금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바로 동쪽 옆으로 높이 담장을 두룬 미국대사관
(대사관저)이 들어앉아 있고 그곳을 지키고자 전/의경들이 항시 주둔해 있어 마치 1896년 그
현장이 재현이라도 된 듯,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 구 러시아공사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3


▲  정동교회(貞洞敎會) - 사적 256호

이화학당 교문에서 덕수궁 방면으로 3분 정도 가면 고색이 창연한 붉은 피부의 교회가 마중을
한다. 그가 이 땅에서 가장 늙은 교회인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이다.

정동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1898년에 세운 것
으로 1887년 10월 지금의 한국은행본점 부근에 마련된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 공부방에서 비
롯되었다.
이후 교인 수가 200명이 넘어서자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게 되었
는데, (그 시절에는 남녀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봤음) 아펜젤러는 500명 규모의 큰
서양식 예배당을 제안, 이를 실현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을 했다. 또한 교인들도 자체적
으로 돈을 걷어 8,000달러의 거금을 마련했다.

새 교회는 선교사 스크랜튼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의 한옥을 헐고 1895년 9월 9일 정초
식(定礎式)을 했는데,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축사를 했다. 교회 설계는 왜인 요시
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했으며, 심의섭(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1896년 12월에 지붕을
올리고 1897년 12월 26일 교회 봉헌식을 가졌으나 최종 완공은 1898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
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이 교회는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로 구경꾼
들로 가득했으며, 이 땅 최초의 교회란 뜻에서 'high church'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독립협회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서재
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 이름만 들어도 귀에 부쩍 익은 사람들이 이
곳의 교인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풀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정동교회

▲  정동교회의 뒷모습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를 경운궁에 집어넣고자 매입대금 34,000원 가운데 계약금 1
만원을 지불했다. 허나 나머지를 내놓지 않자 이에 뿔이 난 미국공사 알렌이 1901년 5월 나머
지 금액을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입 작업이 무산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115평 규모의 십자형(十字形)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하지 못해 1926년
에 양쪽 날개 부분을 확장하여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면서 175평으로 넓어졌으며, 건물의
모양도 직사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서 구입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6.25 때 교회 건물 절반이 박살이 났으며, 파이프오르간도 이때 파괴되었다. 서울 수복 이후
바로 '예배당중수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0년 11월 23일에 복원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
벽돌이 풍화되고 문짝이 망가지면서 교회를 새로 지어야 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오면서 철거
위기에 놓이게 된다. 허나 교단의 내분으로 차일피일 시일만 보내다가 197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뜨락에 세워진 감리교회 조선 선교(宣敎) 50주년 기념비

정동교회는 다갈색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곳곳에 아치형 창문을 두어 고딕 양식의 단순화된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을 다듬어서 반듯하게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
의 솜씨가 다소 배여있다.
마치 서구의 어느 늙은 교회로 뚝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하루가 멀다 하고 솟아나는 으리으리
한 교회나 성당과 달리 소박한 모습에 아늑하고 정겨운 느낌이며, 비록 나와는 전혀 맞지 않
은 종교의 중심 현장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저 안에 들어가 잠시 묵상에 잠겨보고 싶은
곳이다. 평일 낮과 토요일, 휴일에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가 열
린다.

* 정동제일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3 (정동길 46, ☎ 02-753-0001)


  배재학당 동관(培材學堂 東館) - 서울 지방기념물 16호

▲  정면에서 바라본 배재학당 동관

정동교회에서 서소문 쪽으로 넘어가면 고개 정상부(서울시립미술관 서쪽)에 붉은 피부로 이루
어진 옛 배재학당 동관이 마중을 한다.
이 건물은 1916년에 지어진 것으로 100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녔음에도 키다리 빌딩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 옆에는 배재학원 소속의 배재정동빌딩이 높이 솟아있음)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발상지이자 이 땅 최초로 벽돌로 지어진 학교 건물로 배재중
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대전)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서울에 들어와 스크랜턴의 집을 사들여 1885년 8월, 학생 2명을 모아 가르치면서 배재학당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고종은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으로 '배재학당'
이란 이름을 하사했으며 그해 본관(1887년)이 지어졌다.

아펜젤러는 학당의 설립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
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그는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이라 쓴 학당훈(訓)을 내걸며 일반적인 교육 외
에 연설회, 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교육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
된 인쇄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인쇄시설이다.

학생수가 계속 늘자 1916년 동관을 지었고, 1923년에 서관을, 1933년 대강당을 차례대로 지어
올려 제법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들 건물은 조선인 건축가 심의석이 지었다.
1984년 한참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강동구 고덕동(高德洞)으로 중고등학교 모두를 옮겼으며
동관만 제자리에 두어 옛 자리를 추억하는 용도로 삼았다. 서관은 고덕동으로 가져왔으나 대
강당과 본관 등은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배재공원을 닦았다.


▲  배재학당 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의 뒷모습

동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교실로 주로 이용되었다.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남아있고, 외장 및 치장 쌓기 벽돌구조도 뛰어나며 건물의 형태도 휼륭해
이 땅의 근대건축의 주요 지표로 삼을 정도이다.

학교가 강 건너로 가버린 이후, 빈 채로 두었다가 내부를 손질하여 2008년 7월 24일 배재학당
의 역사를 집대성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삼았다. 지하 1층에 사무실을 겸한 학예연구실
을 두었고, 1층에는 체험교실과 상설전시실1, 특별전시실을, 2층에는 상설전시실2, 기획전시
실을, 그리고 3층에는 세미나실과 회의실을 두었다. 이중 1,2층만 관람이 가능하며 1930년대
배재학당 교실을 재현하여 배재학당의 140년 역사를 유감없이 뿜어내고 있다.

배재정동빌딩 주변에는 1896년에 세워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옛터를 알리는 표석과 신
교육(新敎育) 발상지를 강조하는 표석이 있으며 배재 학생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졸업사진의
단골 촬영지로도 활약했던 늙은 향나무가 옛 교정을 지킨다.


▲  오랜 세월 배재학당을 지켜왔던 향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호

배재학당 향나무는 약 580년 숙성된 나무로 앞서 정동 회화나무보다 10년 정도 늙었다. <1972
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525년> 높이는 16.5m로 동관과 키가 비슷하며
둘레는 2.25m로 높이에 비해 날씬하다.
왜정 때 활약했던 시인 김소월(金素月)이 좋아했던 나무라고 전하는데, 미국 하버드대 매캔교
수가 1960년대 평화봉사단원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우연히 접한 소월의 주옥 같은 시에 완전
히 퐁당퐁당 빠져들었다. 하여 그의 시를 통해 한국 문학을 공부했으며 소월과 인연이 깊다는
이 향나무의 사연을 전해 듣고 그가 죽지 않도록 보살폈다.

또한 믿거나 말거나 전설도 한 토막 전해오고 있는데, 나무 상부에 박힌 못은 임진왜란 시절
에 서울을 점령한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말을 묶고자 박았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가 훤칠
하지만 그때(1592년)는 기껏해야 140살 정도의 키도 작았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겠다. 허나
이 역시 부질없는 전설일 뿐이다. (고약한 왜정이 배재학당의 기운을 누르고자 향나무에 그런
말도 안되는 전설을 붙인 것으로 여겨짐)


▲  옛 배재학당의 본관 벽돌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1887년 배재학당 본관을 지을 때 투입된 붉은 벽돌이다. 본관을 밀어버리면서
벽돌 일부를 남겨 이렇게 박물관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마침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의 빗장이 활짝 열려 있어 안으로 흔쾌히 들어가보았다. 금지된 구
역을 제외한 개방된 구역을 모두 기웃거려 보았는데, 촬영금지를 알리는 딱딱한 문구가 도처
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어 새가슴 마냥 극히 일부만 사진에 담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담고
싶지만 지나친 욕심은 늘 탈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가끔씩 새가슴이 되는 것도 괜찮다.


▲  고종이 1887년에 내린 배재학당 현판의 위엄
명필로 유명했던 정학교(丁學敎)가 고종의 어명을 받아 쓴 것으로 김윤식(金允植)이
학교에 전달했다. 아펜젤러는 이를 매우 감사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학교 간판으로 삼았다.

▲  1963년 광복절에 박정희 정권이 이 땅의 근대교육에 크게 기여한
아펜젤러에게 내린 문화훈장증(文化勳章證)

▲  1963년 광복절에 박정희 정권이 아펜젤러에게 내린
문화훈장 국민장 훈장증과 훈장

▲  배재학당 옛터의 싱그러운 변신, 배재공원

배재학당 동관과 러시아대사관 사이에는 배재공원이 달달하게 자리해 있다. 이곳은 옛 배재학
당 자리로 학교가 강동으로 이전되자 본관 등을 밀어버리고 동관 북쪽에 아담하게 공원을 닦
아 옛 정동 시절을 아련히 추억하고 있다.
공원의 동서 폭은 100m 정도로 조촐한 규모이나 회색빛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로 주변 직
장인들이 많이 의지하러 오며, 늦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정동은 도심 한복판에 박혀있지만 배재공원, 정동공원 등의 공원이 있고 덕수궁(경운궁)과 미
국대사관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게다가 정동 회화나무, 배재학당 향나무 등 500년 이상 묵
은 나무를 중심으로 가로수도 많이 심어져 있어 비록 높은 빌딩이 주변에 즐비해 도심 분위기
는 어쩔 수 없지만 번잡한 분위기는 그리 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한제국 시절과 현대, 그리고
자연이 적절히 섞인 조그만 도시나 별천지라고나 할까? 그것이 정동의 강한 매력이다.

* 배재학당 동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5 (서소문로11길 19, ☎ 02-319-5578)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배재공원

▲  늦가을 누님이 살짝 다녀간 서울시립미술관 진입로

정동교회 앞 분수대 교차로에서 박석이 입혀진 숲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옛 대법원(大法院
) 건물에 둥지를 튼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한참 때는 특별전 초청권이나 공짜표를 어디선가
구하여 여인네들과 자주 찾곤 하였는데 이제는 언제 시립미술관을 스쳤는지 기억 조차 희미하
다.

이렇게 하여 정동 늦가을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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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0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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