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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보석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금산 보석사 ~~~
금산 보석사
 


겨울이 무심히 깊어가던 1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금산 보석사를 찾았다. 햇님이 막 출근
하던 7시에 건대입구역(2/7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서울을
벗어났는데, 다람쥐 챗바퀴 같은 일상과 내 인생의 99.9%를 머물렀던 서울을 잠시라도 벗
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것만큼 마음 설레는 것은 없다.

일행의 차를 타고 2시간 정도를 달려 충북 청주(淸州)의 어느 고찰을 첫 답사지로 둘러본
다음 1시간을 더 달려 인삼의 고장인 충남 금산군(錦山郡)으로 들어섰다.
금산에 왔으니 인삼(人蔘)은 구경하고 가야 후회가 없겠지. 하여 금산읍내에 있는 인삼국
제시장에서 조촐히 몸보신도 할 겸 인삼갈비탕으로 점심을 섭취했는데, 인삼이 든 갈비탕
을 먹어서 그럴까? (인삼은 별로 들어있지 않았지만 생각 외로 가격은 저렴했음;) 장거리
이동과 추위, 식곤증으로 적지 않게 지친 몸에 잠시나마 화색이 도는 것 같다. 그 기세로
이번 나들이의 2번째 메뉴로 금산읍내에서 20리 남짓 떨어진 보석사를 찾았다.


♠  진악산 보석사(眞樂山 寶石寺) 입문

▲  보석사 일주문(一柱門)

보석사는 20대의 한복판에 첫 인연을 지었다. 그 이후 10여 년 만에 이렇게 2번째 인연을 짓
게 되었는데, 그때도 겨울의 한복판이었고 이번에도 한겨울이다. 즉 겨울에만 이상하게 인연
이 닿아서 보석사의 겨울 풍경만 다시 복습하게 된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맞배지붕을 지닌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예전
에는 현판이 없었는데 그새 '진악산 보석사'라 쓰인 현판이 새로 돋아나 이곳의 정체를 속세
에 알린다.


▲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23호

일주문을 지나면 전나무숲길이 시작되면서 의병승장비를 머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모습을
비춘다.
이 비석은 1840년 조선 조정에서 임진왜란 시절 토왜(討倭)에 힘쓰다가 전사한 영규대사(靈圭
大師)를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높이는 4m이다. '의병승장'이란 바로 영규대사를 말하는 것으
로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 비문(碑文)을 짓고, 금산군수 조취영(趙冣永)이 글씨를 썼는데,
비석 앞에 큼지막하게 쓰인 '의병승장(義兵僧將)' 4자는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가 썼
다.
비석 왼쪽 옆구리에는 창건화주(創建化主) 낙봉대인(樂峯大仁) 등 비석을 세울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 옆구리에는 김병주가 '의병승장' 글씨를 쓴 사실이 기
록되어 있다.

1940년에 어느 개념 없는 왜인 경찰이 애궂은 이 비석에 해코지를 하여 비각을 부시고 '의병
승장' 글씨를 망가뜨려 땅에 묻은 것을 1945년에 정요신(鄭堯臣) 등 지역 사람들이 찾아내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비석은 다시 일어났으나 그때의 휴유증으로 글씨가 크게 훼손된 상태라
심히 안타까움을 준다.

▲  비각에 담긴 의병승장비

▲  비각 뒷쪽에 자리한 여러 비석들


▲  보석사 전나무숲길 ①

일주문에서 은행나무 전까지 전나무 숲길이 싱그럽게 펼쳐져 있다.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
은 전나무들이 고품격의 그늘과 숲내음을 베풀고 있는데, 그들이 불어주는 내음이 온갖 번뇌
로 정신이 없는 머리와 마음을 차분하게 다듬어준다.


▲  보석사 전나무숲길 ② 은행나무 방향

▲  경내 직전에 옹기종기 모인 부도탑들
고색이 낀 이들은 조선 후기 승탑(僧塔)들로 석종형(石鐘形) 승탑과
지붕돌을 지닌 승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  경내를 가리고 있는 돌담과 범종루(梵鍾樓)

보석사는 바깥에서 경내가 보이지 않게끔 담장을 꽁꽁 둘러 혹시 모를 좋지 않은 기운을 경계
한다. 경내와 바깥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범종루 밑도리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되는데, 차
량 접근을 위해 뚫어놓은 동쪽 문으로 들어서도 된다.


▲  선원(禪院)으로 쓰이는 보석사 심검당(尋劍堂)

▲  말라버린 동그란 석조(石槽)

진악산이 베푼 물이 날개짓을 하는 극락조(極樂鳥)의 작은 입을 통해 석조를 가득 채우고 있
어야 되거늘 한겨울이라 물이 완전 말라버렸다. 그러다보니 극락조는 실업자 신세가 되어 멍
한 모습으로 석조를 바라본다. 물을 뱉어내지 않으면 저 극락조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석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금산 지역의 명산(名山)으로 추앙을 받는 진악산(732m) 남쪽 자락에 이름도 꽤 있어 보이는
보석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후기인 885년에 조구대사(祖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시절, 절 앞산에
금광이 있었는데, 거기서 금을 캐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며, 그 연유로 보석사란 간판을 달
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9세기 말에 창건되었는지는 의심이 가지만 경내 앞에 1,000년 이상을
헤아리는 늙은 은행나무가 있어 창건시기는 그런데로 맞는 듯 싶다.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6세기 후기에 영규대사가 이곳에 머물며 도를
닦았으며,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조헌(趙憲)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에게 공격을 당한
왜군이 화풀이로 이곳을 불질러버렸다.

이후 17세기에 중건되었으며,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지원으로 중창되어 왕실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1912년에는 전국 31본산(本山)의 하나로 전북 지역 33개 사찰을 관리하기도 했으며, 강원(講
院)까지 갖추어 많은 학승(學僧)을 배출하기도 했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31본산에서 밀
려나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그늘에 묻히게 되었다. (금산 땅은 원래 전북에 속해 있었으나
1963년에 충남으로 넘어감)
 
아담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의선각, 산신각, 요사, 심검당, 범종루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절의 이름 유래가 되었던 금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보석처럼 비싼 돌도
이제 하나도 없지만 금산의 대표적인 늙은 절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장대한 은행나무와 대웅
전, 목조석가여래3존좌상, 의병승장비, 의선각 등의 보석 같은 지방문화재를 지니고 있어 보
석사란 이름이 전혀 아깝지가 않다. 특히 은행나무는 이곳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로 추
정 나이는 무려 1,000년 이상, 40m의 큰 키를 자랑한다.

* 보석사 소재지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11 (보석사1길 30, ☎ 041-753-1523)


♠  보석사 둘러보기

▲  보석사 대웅전(大雄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43호

보석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식 맞배지붕 집이다. 돌로
높이 다진 석축 위에 아담하게 들어앉아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명성황후의 지원으로 1882년에 재건되었다. 그때 지붕에 넣은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어 그
내용을 담은 안내문이 앞에 마련되어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존좌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214호

대웅전은 보석사의 보물 창고 같은 곳이니 내부를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불단에는 탄탄한 금동 피부를 지닌 목조석가여래3존좌상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들을 맞
이하고 있다. 이들은 단정한 인상과 균형 잡힌 신체로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불상으
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성 관련 복장(腹臟)유물이
나 문서 등이 없어 자세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17~18세기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
여래상은 오른쪽 어깨를 살포시 덮은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법의를 입고 있다.
석가여래상 좌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있는데, 손에 연꽃
가지를 들고 있으며, 문수보살 배 부분과 양 무릎에는 꽃무늬 장식 등이 있다. 그리고 그들
뒤로 비슷한 연배로 여겨지는 후불탱이 고색의 내음을 드러내며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법당 수호를 책임지는 호법신(護法神)들이 빼곡히
담겨진 신중탱(神衆幀)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기허당(騎虛堂)
기허당은 예전 진영각(眞影閣)으로 절을 세운 조구대사와 영규대사(기허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예전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서산대사(西山大師),
영규대사의 진영이 있었으나 모두 불의의 도난을 당하여 봉안 주체를
조구대사, 영규대사로 변경하고 새로 진영을 마련했다.

▲  영규대사(왼쪽)의 진영과 조구대사의 진영(오른쪽)

영규대사는 그의 진영이 여럿 남아있어서 그의 생전의 모습이라 여겨지지만 조구대사는 기록
도 매우 부실하여 생전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하여 막연히 미남형으로 그려놓았다. 그래도
절 창건자인데 너무 추남처럼 그리면 좀 그렇겠지.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좋은 대상은 좋게
표현하고, 나쁜 대상은 좋지 않게 그린다. (악귀들은 다 괴물처럼 표현되고, 선하거나 친한
존재들은 모두 미남, 미인으로 표현됨)


▲  보석사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맞배지붕을 지닌 1칸짜리 산신각이 있다.
이름 그대로 산신의 거처로 건물의 높이가 낮아서 현판과 풍경물고기가
머리에 닿을 정도이다.

▲  산신각 산신탱

산신탱에는 하얀 수염의 산신 할배를 중심으로 동자 2명, 호랑이, 소나무, 산, 폭포 등이 담
겨져 있다. 다른 산신탱과 달리 호랑이가 2마리나 있어 다른 산신들보다 장사가 잘되는 모양
이다. 노동법 개정으로 호랑이들 급여도 만만치 않을텐데 말이다.


▲  나와 같은 눈 높이에 있는 산신각 풍경물고기

풍경물고기는 보통 손이 닿지도 않을 높은 위치에 매달려 있어 그야말로 그림의 풍경물고기였
다. 허나 이곳은 높이를 낮추어 바로 내 눈높이에서 딸랑딸랑 풍경 소리를 내고 있어 그를 직
접 만져볼 수도 있고 툭툭 치며 소리를 유발시킬 수도 있다.
풍경(바람방울) 밑에 달린 물고기는 푸른 하늘을 그의 바다로 삼으며 몸을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는데, 그의 눈을 보면 번쩍 떠있다. 이는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처럼 열심히 수행하라는 뜻
이다. 또한 화재를 막고자 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  의선각(毅禪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29호

대웅전 맞은편에는 'ㄱ'자 모습의 의선각이 있다. 이곳은 영규대사가 머물며 수련을 하던 곳
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9세기에 중건했다. 건물에게 씌워진 '의선'은 굳은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는 뜻으로 조선 조정이 영규대사에게 내린 이름이다.
의선각 현판은 창녕위 김병주가 쓴 것이며 현재는 요사 겸 선방으로 쓰이고 있는데,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의연한 모습을 지닌 의선각 현판의 위엄

▲  경내에서 바라본 보석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365호

▲  앞에서 바라본 보석사의 자연산 보석, 은행나무

보석사에 왔다면 대웅전 내부와 더불어 꼭 살펴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이곳의 자연산
보석인 은행나무이다.
경내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이 큰 나무는 추정 나이가 무려 1,000년 이상을 헤아린다.
높이 40m(어떤 자료에는 34m), 나무둘레 10.72m(11m)로 이 땅의 은행나무 중 가장 지존으로
꼽히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은행나무(☞ 관련글 보기) 다음 수준으로 덩치가 크다.

보석사를 세운 조구대사가 제자 5명과 함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둥글게 6
그루를 심었다고 하며 그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점차 하나로 합쳐졌다고 전한다. 나무의 나
이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구대사의 창건시기와 그런데로 맞아떨어져 절의 신라 말기 창건설을
그런데로 뒷받침해준다.

나무가 너무 늙다 보니 위로 뻗은 가지가 땅으로 내려왔고, 다시 거기서 가지가 자라나 하늘
로 오르고 있다. 뿌리는 100여 평의 땅속에 단단히 퍼져 있으며, 뿌리에서 2~3m 높이에 싹이
수없이 돋아나 있어 그의 뜨겁고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천하를 그의 그늘로 모두 덮
어버릴 정도로 장대한 수형(樹形)을 자랑해 보석사 경내가 거의 그늘에 묻혀있다고 해도 과언
은 아니다.
너무 오래 살아서일까? 세상에 뭐그리도 걱정이 많은지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미리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심지어는 24시간을 운다고도 하는데, 1945년 광복
과 6.25전쟁 때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하여 마을을 지키는 신성한 존재로 오랫동안 애지
중지되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15일(경칩)에 보석사 승려와 석동리 마을 주민들이 은행나무
에 대신제를 지낸다.


▲  은행나무 그늘에 세워진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표석
표석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은행나무 앞에서는 일개 작은 자갈일 뿐이다.

▲  기린암(麒麟巖)

은행나무 옆에는 푸른 이끼 옷은 입은 기린암이란 바위가 있다. 여기서 기린(麒麟)은 목이 긴
상상 속의 상서로운 동물로 이곳 은행나무를 기린으로 표현한 듯 싶다. 또렷하게 새겨진 기린
암 바위글씨 밑에는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이름 3자가 빼곡히 적혀있다.


▲  보석사 옆구리를 지나는 계곡 (보석사계곡)
지금은 겨울 제국(帝國)의 눈치를 보며 바짝 엎드려 있지만 소쩍새가 우는
그때가 되면 겨울이 씌워놓은 것들을 모두 박차며 일어설 것이다.

▲  보석사를 뒤로하며 (전나무숲길)

은행나무를 끝으로 오래간만에 찾은 보석사 복습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예전에는 계곡을
따라 진악산을 아주 조금 올라가긴 했으나 남쪽 길이 한참이라 절만 살펴봤다. 다음에 만약
인연이 된다면 늦가을에 찾아와 황금색 은행잎을 휘날리는 은행나무를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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