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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탑사 유리보전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고려 때 조성된 약사여래상의 공간이다. 약사여래

상은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로 그 바위에 집을 씌웠는데, 유리보전은 약사여래의 거처인 약사전의 별

칭이다.

 

2. 영탑사 약사여래상 (마애약사여래상)

유리보전에 소중히 들어있는 약사여래상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높이 3.5m 정도로 고려 후기

에 무학대사가 영탑사를 둘러보다가 경내 주변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빛을 내는 것을 보고 그 바위

에 불상을 새겨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고 전한다.

 

불상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을 표현했으며, 얼굴은 윗부분이 넓고, 밑부분이 갸름하여 신체

에 비해 큰 편이다. 눈과 코, 입은 길고 큼직하며 다소 서투르게 표현되어 전반적으로 둔한 모습인데,

이런 형태의 석불은 고려 때 충청도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석불 양식이라고 한다.

몸은 꽤 단단해 보이나 조금은 움츠린 것 같으며, 무릎 또한 높고 넓어서 얼굴과 함께 둔중함을 나타

낸다. 옷은 양 어깨에 걸치고 있는데 안에는 Y자형의 속옷이 표현되었다. 굵은 선으로 새긴 옷주름은

마멸이 심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둔중하면서도 친근미가 느껴지는 고려 때 지방화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석불로 석불과

그에게 자리를 내준 바위가 유리보전 내에 들어있다.

 

3. 큼직한 바위에 깃들여진 유리보전 약사여래상 (마애약사여래상)

 

4. 유리보전 약사여래상과 그에게 공간을 내어준 바위

 

5. 유리보전에서 바라본 적막한 영탑사 경내 (대웅전, 종무소 등)

 

6. 영탑사 경내에서 의두암으로 인도하는 산길

영탑사에서 북쪽으로 난 산길을 조금 들어가면 의두암이 있다. 내포문화숲길이 이 숲길의 신세를 지

며,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이 진하다.

 

7. 의두암

의두암은 높이 4m에 3층 구조를 지닌 크고 견고한 바위이다. 그 바위 피부에 예서체 스타일의 '의두

암' 바위글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글씨를 남긴 사람은 운양 김윤식(1835~1922)이다.

그는 1887년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에 반대하며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모의하다가 면천 고을로 유배

되어 여기서 5년 6개월을 머물렀다. 처음에는 순성면 양유리 앵두샘마을에서 기거하다가 영탑사 아

래 절골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는 거의 매일 이곳에 올라 임금님이 있는 북쪽 서울을 바라보면서 죄

를 짓고 유배온 자신을 한탄했다. 물론 한탄만 한 것은 아니며, 지역 선비와 유지들과 여기서 시문도

짓고, 활도 쐈으며, 곡차 1잔의 여유도 누렸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 앉으면 멀리까지 보이는데, 구름이 없는 쾌청한 날에는 아미산, 다불산 사이로

리 서울의 산들과 강화도 마니산까지 모두 보였다고 한다. (정말 보였을까?) 그는 이 바위를 각별

히 아끼며 이름까지 지어주었는데, 바위 하단에는 진의강, 중단에는 적취대, 꼭대기는 의두암이라

했다. 또한 의두암 좌우로 거석이 호위하듯 서 있는데, 좌측 바위를 구선암, 우측 바위를 두타암이
했다.

의두암이란 이름은 북두칠성에 의지한다는 것으로 북두칠성이 있는 북쪽은 임금을 의미한다. 하여

임금을 사모하고 의지한다는 뜻이 되겠다.

 

1888년 7월 4일 김윤식은 석공 2명을 불러 바위 피부에 의두암 3자를 새기게 하여 자신의 흔적을

남겼는데, 글씨 크기는 가로 약 90cm, 세로 약 29cm이며, 전체 크기는 가로 약 420cm, 세로 약

150cm 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인도정일○○(人道正一○○)'이라 쓰인 명문이 있다.

 

8. 김윤식이 남긴 시 '의두암(북두에 의지한 바위)'

 

9. 의두암 윗도리에 선명하고 정연하게 새겨진 의두암 바위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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