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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산사 나들이 ~ 남해 용문사(龍門寺) '
남해 호구산
▲  용문사를 품고 있는 호구산(虎丘山, 617m)


겨울의 제국(帝國)이 강한 패기를 보이며 가을을 몰아내던 11월 끝자락에 경남 남해를 찾았다.
우선은 노량포구에 있는 남해대교와 이순신 장군이 처음 안장되었던 충렬사(忠烈祠)를 둘러보
고 남해대교 남단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남해읍(南海邑)으로 이동했다.

남해터미널에 이르니 용문사를 거쳐 가천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대기하고 있어서 바로 표를 구
입하고 그 버스에 나를 담았다.
가천행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를 달려 용문사 밑에 자리한 용소리(龍沼里)에 발을 내린다. 이
곳은 절 밑에 둥지를 튼 마을로 마을 남쪽에는 쪽빛을 띈 남해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
여 속세에 찌든 마음을 시원하게 씻겨준다.

용소리에서 내린 것까지는 좋으나 정작 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같
이 내린 노공(老公)에게 문의하니 바로 서쪽으로 보이는 고개에 길이 있다고 그런다. 마침 버
스에서 내린 곳에서 산으로 가는 길이 있어 이 길로 가도 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그런다. 그
래서 고개까지 안가고 바로 마을에서 올라갔다.

마을을 벗어나 계단식 논을 여럿 지나니 고개에서 시작된 길과 만난다. 여기까지는 대략 10분
정도 걸렸다.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면 하얀 피부의 석장승 1쌍이 미리 나와 마
중을 한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절 수호이다. 그들을 지나 5분 가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남쪽
아래로 주차장이 바라보인다.

일주문을 지나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길의 경사가 조금 급해진다. 경내에 이르기까지 중간중
간에 부도(浮屠)의 무리와 남근석 등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주며, 길 우측으로 청정한 용문사
계곡이 바다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허나 가을 가뭄이 극성이라 수량은 답답할 정도며 겨울의
제국이 도래하고 있는 시절이라 나무들 모두 우수에 젖으며 몸을 사리고 있다.

일주문에서 10분 정도 발품을 팔면 드디어 내부를 제대로 가린 용문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우
선은 절을 지키는 오랜 장승의 거처인 조그만 기와집과 천왕교(天王橋)란 돌다리가 있는데 이
들 바로 우측에 돌을 높이 쌓고 터를 다진 곳에 절이 둥지를 텄다. 기와집에서 경내까지는 다
리를 건너서 경내로 가도 되고 조금은 돌아가지만 수레길을 이용해도 된다.

경내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용문사의 내력(來歷)을 간추려 짚어보도록 하자.


▲  꽉 차게 들어선 용문사

* 지장도량(地藏道場) 용문사의 내력
용문사는 남해에서 가장 큰 절로 호구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안겨있다. 호구산(虎丘山, 617m)
은 호랑이가 누워있는 모습의 산으로 절을 끼고 바다로 흐르는 용문사 계곡은 남해 제일의 계
곡으로 일컬어진다. 용문사를 후광으로 속세에 조금씩 알려진 호구산은 남해군 지정 군립공원
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은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남해의 명산(名山)인 금산(錦山)에 세웠다는 보광
사(普光寺)의 후신(後身)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 이를
증명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한 창건 이후 1660년까지 이렇다 할 내력이 전해오지 않는 점
도 절의 내력에 상당한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본격적으로 절의 사적(事績)이 전하는 것은 1660년이다. 그 당시 절은 남해읍에 있었는데, 남
해향교(南海鄕校)와 마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불교를 싫어하던 남해 유생들이 절을 다른 곳으
로 옮기라고 징징거리자 그들의 징징거림에 귀가 따갑던 백월당(白月堂)은 용소마을 위쪽, 지
금의 자리로 절을 옮겨 용문사라 했다고 한다. 용문사란 이름은 절 아래쪽에 있는 용연(龍淵)
위에 둥지를 텄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1661년 탐진당(探眞堂)과 적묵당(寂默堂)을 세웠는데, 세우고 보니 이곳이 터가 너무 좋던 것
이다. 그래서 1666년 읍내에 남아있던 대웅전과 봉서루를 죄다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1708
년 부속암자인 염불암(念佛庵)을 중창했으며 관음암(觀音庵)과 백운암(白雲庵)을 고을 사람들
의 발원으로 세웠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숙종(肅宗) 임금은 임진왜란 때 용문사 승려가 승군(僧軍)에 참여하여 왜군과 싸운 점을 크게
치하하며 이곳을 나라의 수국사(守國寺)로 정하고 왕실(王室)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당(祝願
堂)을 세웠다. 또한 연옥등(蓮玉燈) 2개와 촉대 1개를 하사했는데 왜정(倭政) 때 그것에 군침
을 흘린 왜인들이 훔쳐갔다.
어쨌든 왕실과의 인연에 힘입어 남해 제일의 사찰로 성장했으며, 그 이후로 별탈없이 지내 지
금에 이른다. 왜정 때는 용성(龍城)이 이곳 백운선원(白雲禪院)에 1년 가량 머물기도 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영산전, 용화전, 적묵당, 요사, 봉서루, 천왕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446호인 괘불탱을 위시하여 대웅
전과 명부전, 천왕각, 용화전석불, 목조지장시왕상, 목조(구유), 부도군, 건륭25년명운판, 목
조아미타3존불좌상, 동종 등 무려 20여 점의 지방문화재를 품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용문
사 승려가 사용했던 삼혈포(三穴砲), 축원당에 걸어두었던 궁중매듭인 번(幡), 경릉관(敬陵官)
과 익릉관(翼陵官)이 발급한 수국사금패(守國寺禁牌)가 전하고 있다. 용문사의 유일한 국가지
정문화재인 괘불탱(掛佛幀)은 사월초파일이나 절 행사 때만 구경할 수 있으며, 금패와 번, 삼
혈포는 관람이 어렵다.

호구산 남쪽 자락 깊숙한 곳에 둥지를 트고 있어 아늑하고 호젓한 산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누
릴 수 있으며, 남해바다가 가까이에 바라보여 마음마저 시원하게 해준다. 속세를 잠시 등지거
나 마음을 싹 정화하고 싶을 때 안기고 싶은 절로 예로부터 지장도량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경내 뒤쪽에는 남해자생식물단지가 있어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바다의 푸른 물결처
럼 펼쳐진 차밭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 용문사 찾아가기 (2012년 11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남해행 직행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수원터미널에서 1일 2회, 대전복합(동부)터미널에서 1일 3회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에서 남해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나며, 진주에서는 20~40분 간격
  으로 떠난다. (마산/창원에서는 1일 10회 정도 운행)
* 남해터미널에서 이동 경유 남면, 가천방면 군내버스(1일 9회 운행)를 타고 용문사입구(미국
  마을)에서 도보 30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남해고속도로 → 진교/하동 나들목을 나와서 남해방면 → 남해대교 → 남해읍 → 신전3거리
에서 우회전 → 용소리 → 용문사입구/미국마을에서 우회전 → 용문사
② 남해고속도로 → 사천나들목을 나와서 삼천포 방면 3번 국도 → 삼천포시내 → 삼천포/늑도
대교 → 창선면 → 창선대교를 건너 우회전 → 이동(무림)에서 미조방면 좌회전 → 신전3거리
에서 우회전 → 용소리 → 용문사입구/미국마을에서 우회전 → 용문사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용문사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행복한 미소'란 이름의 정규 프로그램과 그냥 자유롭게
  하루 머물다가는 휴식형 2가지가 있다. 행복한 미소는 사찰 예절과 차담(茶啖), 바다 산책,
  저녁/새벽/사시 예불 등을 한다. 휴식형은 요일에 상관 없이 언제든 찾아와 1박 2일 머물다
  가는 것으로 공양시간과 예불시간, 취침/기상 시간 정도만 지키면 된다. 행복한 미소는 5만
  원, 휴식은 1박2일에 4만원이다. (자세한건 용문사 홈페이지와 전화로 문의 요망)
* 용문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하거나 바로 밑에 있는 석장승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 055-862-4425)


♠  용문사 가는 길 (석장승 ~ 일주문 ~ 부도군)

▲  절에서 멀리감치 나와 중생을 맞이하는 석장승 1쌍
그들의 검문을 통과하면 속세에서 그저 멀어만 보이는 산중의 절집,
용문사가 그만큼 가까워진다.

▲  늦가을의 끝을 잡은 용문사 가는 길
추운 북쪽과 달리 따뜻한 남국(南國)의 땅이라 늦가을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다.

▲  용문사 일주문(一柱門)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이 없다. 속세의 어느 존재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주문은
중생을 걱정하는 부처의 마음이다. 인간들이 일주문의 마음의 절반만 따라한다면 이 세상은 그
런데로 아름다울텐데 인간이란 짐승과 신(神)의 중간에 들어앉은 어정쩡한 존재라 그러지를 못
한다. 그런 주제에 만물의 영장을 칭하며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악을 행하니 그러다 자
연의 대보복을 제대로 받을 것이다.


▲  이것은 무엇인고? ㅋㅋㅋ

일주문을 지나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 중간에 낯이 많이 익은 묘한 돌을 보게 된다. 바로 남
근석이다. 마치 그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솟은 남근석은 정말 그대로의 모습으로 화석(化石)
으로 굳은 것 같아 절을 찾은 중생들의 관심을 제대로 끈다. 이런 돌은 옛날부터 성기신앙(性器
信仰)의 대상물로서 금욕(禁慾)을 중시하는 절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이 무척 이채롭다. 절에
득남(得男)을 기원하러 다니던 여인네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던 이 돌은 오늘도 남녀노소
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리를 지킨다.


▲  용문사의 오랜 역사가 담긴 부도군(浮屠群)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5호

남근석을 지나 2분 정도 오르면 오른쪽 높은 곳에 터를 닦은 승탑(僧塔, 부도)의 보금자리가 보
인다. 이들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지어진 석종형(石鐘形)부도가 주
를 이루는데, 한결같이 작고 소박한 모습으로 주변과 잘 어우러진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  바위에 새겨진 바위글씨와 위에 심어진 비석


♠  용문사 장승 ~ 천왕각 ~ 봉서루
▲  장승의 조촐한 보금자리

경내로 인도하는 천왕교 좌측에는 조금은 낡아보이는 1칸 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그 안에
는 나무로 만든 오랜 장승이 서 있는데, 이 건물은 바로 그를 위한 거처이다. 건물 곁에는 요상
하게 생긴 돌이 하나 놓여져 있는데, 아마도 남근석인듯 싶다.

이 장승은 용문사가 이곳에 뿌리를 1661년 이후
에 절을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천왕각 입구에 세
운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서 돌로 만든 것 보다
는 건강은 조금 좋지 않지만 건물 안에 갇힌 모
습이 너무 답답하고 안스럽다. 그의 건강을 위
해서인지 그에게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문에 창
살까지 만들어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모습이다.

장승 주위로 중생들이 던지고 간 동전과 1,000
원짜리 지폐가 수두룩한데, 절에서 오랫동안 수
거를 하지 않아서 지폐고 동전이고 다들 상태가
안좋다. 장승은 안에 있는 것 보다는 아까전 석
장승처럼 밖에 서 있어야 자세와 위엄이 나오는
법이다. 그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두는
것 보다는 밖으로 빼서 햇살이라도 받게 해주
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절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저렇게 가뒀으니 절에 놀러온 악
기(惡氣)를 어떻게 쫓아서 막겠는가..?


▲  천왕각(天王閣)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150호

천왕교를 건너면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인 천왕문(天王門)이 중생을 맞는다. 그런데 여기서
는 특이하게도 문이라고 하지 않고 각이라 칭하여 천왕각이라 부른다. 허나 그렇게 부른다고 해
서 천왕문과 크게 다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명칭만 '각(閣)'으로 했을 뿐이다. 이 문은 1702
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천왕은 인도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나중에 부처의 경호원으로 영입되었다. 보통은 악귀를 발
로 짓밟고 있는 모습이지만 이곳은 악귀(惡鬼) 대신 부정한 양반이나 관리를 보기 좋게 밟고 있
어 눈길을 끈다. 그 이유는 절이 읍내에서 이곳으로 밀려나게 만든 양반(향교 유생들)과 관리들
의 대한 감정, 그리고 절을 찾는 중생 대부분은 지배층의 수탈을 받는 백성들이라 양반으로 대
체한 것이다.

▲  천왕각을 지키는 목조(木造)사천왕상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8호

왼쪽부터 비파를 든 지국천왕(持國天王), 칼을 든 증장천왕(增長天王), 여의주를 들고 있는 광
목천왕(廣目天王), 삼지창을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지국천왕의 표정은 온후해 보이며, 나
머지는 장비(張飛) 마냥 눈을 크게 부릅 떴을 뿐 오금이 저릴 정도의 무서움보다는 익살스러움
이 강하게 배여난 표정이다.
이들은 천왕각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목조 사천왕으로 그들이 시원하게 밟아주고 있는 양반(
지배층)의 모습도 사진에 담았어야 했는데, 사천왕에게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러지를 못해 못
내 아쉽다.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들을 도탄에 밀어넣으며 자기네들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이 땅
의 쓰레기 권력자들을 으스러지게 밟아주었으면 좋으련만..


▲  용문사 봉서루(鳳棲樓)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94호

천왕각을 지나면 길은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다시금 다리를 건너게 한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속세의 번뇌를 말끔히 계곡에 흘러보내라는 의미이다. 허나 계곡의 수량이
별로 없으니 번뇌가 남해바다 멀리 떠내려 갈 수 있을련지 모르겠다.

계곡을 건너면 계단이 나오면서 육중한 모습의 길쭉한 누각이 중생의 눈을 압도한다. 바로 봉황
이 산다는 뜻의 봉서루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에 이르는 용문사에서 가장 큰 건물로 1720년에
지어져 1833년에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절의 강당(講堂) 역할을 하고 있으며, 경내가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단단히 가리고 있어 경내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며, 1층 동쪽에는 종무소(宗
務所)가 자리해 있다. 봉서루의 중앙 아랫도리를 거쳐 경내로 올라가도 되고 종무소를 거쳐 진
입해도 된다.


▲  용문사 목조(木槽, 구유)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7호

봉서루 1층 왼쪽에는 거대한 나무 통이 누워있어 경내로 향한 눈길을 잠시 돌리게 만든다. 바로
구유(구시통)라 불리는 목조이다. 얼핏 보면 말이나 소, 돼지가 밥을 먹을 때 사용하는 나무통
으로 오인 할 수 있다. 허나 이 통은 사람들이 먹을 밥을 담던 밥통으로 1,000명분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이 저 통에서 밥을 먹었다고 하며, 그 이후에는 불사(佛
事)나 법회 때 사용했다.
구유 가운데 바닥에는 통을 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5.5cm 크기의 원공이 뚫려있으며, 절이 한참
잘나가던 시절(지금도 잘 나가고 있음)의 소중한 보물로 이제는 밥풀 대신 먼지만이 수북해 아
련히 옛날을 그리워한다.


▲  중생의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는 옥계수로 가득한 석조(石槽)
파란 바가지에 물을 담아 입에 넣으면 마음의 떼가 싹 내려간 듯,
목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부른다,


♠  용문사 대웅전(大雄殿)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85호

봉서루를 들어서면 대웅전과 부속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얀 돌이 정갈하게 깔린 대웅전 뜨
락을 중심으로 북쪽에 대웅전이 위엄을 갖추고 있고, 적묵당(寂默堂)과 요사(寮舍)가 그 좌우를
메운다. 또한 대웅전 좌우로 영산전과 명부전, 용화전, 칠성각 등이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을
정도로 가득히 들어서 포근함이 일 정도이다.

용문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봉황이 시원스레 날개
짓을 하는 것 같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기둥의 머리부분인 주두(
柱頭) 마다 용머리가 달려있어 웅장하고 화려함을 더해주며, 기둥과 문짝에는 고색의 떼가 가득
하여 중후한 멋을 선사한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법당 건축으로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목조아미타3존불과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77호인 동종(銅鍾)이 있으며, 대웅전 중앙 계단 좌우
로 괘불을 걸 때 사용하는 2쌍의 석주(石柱)가 심어져 있다. 이들 석주는 17~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대웅전 목조아미타3존불좌상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46호
그 뒤쪽에 영산회상탱화(靈山會上幀畵)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47호

대웅전 우측 문으로 내부를 들어서니 현란한 아미타3존불좌상과 여러 불화(佛畵)가 눈을 부시게
만든다. 불단(佛壇)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은 17세기 불상으로 다른 데이터에는 석가3존불로 나
오는데 반해, 문화재청에는 아미타3존불로 나와있다. 아미타불로 나온 것은 아마도 그의 수인(
手印)이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석가불(釋迦佛)이 아미
타수인을 취한 것은 조선시대 불상에서 흔히 나타난다. 이들 불상에는 복장공(腹臟空)이 열려있
으며, 그 안에 들어있던 복장유물은 거의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온후한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
하는 가운데 본존불(本尊佛) 좌우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
賢菩薩)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자리를 지킨다.

그들 뒤로 든든하게 자리한 후불탱화(後佛幀畵)는 석가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장
면을 그린 영산회상탱화이다. 1897년에 그려진 것으로 문성(文性)을 비롯하여 연호 봉선(蓮湖奉
宣), 연파 화인(蓮波華印), 범해 두안(帆海斗岸), 장원(章元), 태일(太一), 문형(文炯), 영주(
永柱), 상조(尙祚), 긍엽(亘燁) 등 남부지방에서 활약했던 화승(畵僧)들이 대거 참여했다.


▲  대웅전 우측 벽의 건양2년신중탱화(建陽二年神衆幀畵)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53호

1897년(건양 2년, 여기서 건양은 고종의 연호)에 그려진 것으로 후불탱화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
이 그렸다. 무기를 갖춘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12신이 배치되었고, 위쪽에 범천(梵天)과 제석천(
帝釋天)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동(天童), 천녀(天女)가 자리해 있다.


▲  대웅전 좌측 벽의 삼장보살탱화(三藏菩薩幀畵)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352호

후불탱화와 더불어 1897년에 그려진 것으로 중앙에 천장보살(天藏菩薩)을 두고, 좌우에 지지보
살(持地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배치했다. 삼장탱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불화로 지장보
살을 받드는 지장신앙(地藏信仰)이 유행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  대웅전 주변

▲  용문사 명부전(冥府殿)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151호

대웅전 바로 좌측에는 맞배지붕의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확한 건축 시기는 전해지는 것이 없
으나 19세기 이후로 여겨지며, 지장보살을 비롯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10왕상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과 목조시왕상은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26호이다.


▲  용문사 용화전(龍華殿)

▲  용화전에 봉안된 용문사 석불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8호

명부전 뒤쪽에는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용화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유난히도 하얀 불상이 봉
안되어있다. 이 불상은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며 17세기 후반에 지금의 절을 짓다가 땅 속에
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하얗게 도배를 하여 백불(白佛)로 만들면서 원래의 모습을 확인
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허나 불상의 양식을 보아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진다.
거의 네모에 가까운 얼굴에는 따로 미소는 드리워있지 않으며, 표정은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듯,
다소 멀뚱해 보인다. 볼에 살이 많으며, 머리에는 근래에 얹힌 보관(寶冠)을 얹혔다. 머리칼은
하얀 몸과 달리 검은색을 칠했다. 왼손에는 연꽃모양의 동그란 병을 들고 있는데, 예로부터 미
륵보살로 일컬어졌으나, 보관이나 왼손에 든 병을 통해 관음보살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  봉서루 뒤쪽에 심어진 석대(石臺)
석대에 고인 물에는 낙엽 몇몇이 의지하여 인생의 마지막을 지낸다.
석대의 물은 저들의 인생을 정리하는 블랙홀인가 보다.

▲  적묵당 뒤쪽의 영산전(靈山殿)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칸(가운데칸)에 하나 뿐이다.
양쪽 칸은 벽으로 막아 조그만 창문을 낸 특이한 모습이다.

▲  차밭을 뒤로하며 경내를 굽어보는 칠성각(七星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칠성각은 영산전처럼 근래에 지어졌다. 꼭 닫힌 내부에는 칠
성탱화와 산신탱화, 독성탱화가 걸려있으며, 이들은 각각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칠성신)와 산
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가 그려져 있다. 그중에서 독성탱화와 산신탱화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각각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410호411호로 지정되었다.


♠  용문사의 또 다른 볼거리 ~ 남해자생식물단지

▲  용문사 뒤쪽에 넓게 터를 닦은 남해자생식물단지

용문사를 둘러보고 있으면 경내 뒤쪽으로 푸른 물결이 넘쳐 흐르는 차밭이 보일 것이다. 처음에
는 절에서 관리하고 가꾸는 차밭으로 여겼는데, 그 서쪽에도 무슨 식물원 같은 곳이 있다. 이들
은 바로 남해군에서 2007년에 조성한 남해자생식물단지이다. 왜 절 뒤쪽에 터를 닦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아마도 절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덕분에 새로운 볼거리가 생겨
절을 찾은 중생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가득 누리게 한다. 용문사 입장에서는 그리 손해보는
것은 아니다. 볼거리가 하나 생겼으니 말이다.

식물단지는 약용식물원과 자생식물원, 삼자원(三子園)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자원에는 남해의
3자인 비자(榧子), 치자(梔子), 유자(柚子)가 가득 자리를 메운다. 여름이나 가을에 왔다면 식
물단지에 깃들여진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텐데, 겨울의 제국이 도래하는 시점에 찾아
오는 통에 차밭과 삼자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벌거숭이가 되었다.


▲  보성 차밭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남해자생식물원 차밭

▲  자생식물원

▲  중생들이 쌓아놓은 무수한 돌탑들

남해자생식물원을 지나면 바로 용문사의 부속암자인 백련암(白蓮庵)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은
그다지 구미가 땡기지 않아 가지 않았고, 그곳으로 넘어가는 계곡 다리 부근에 무수히 널린 돌
탑만을 사진에 담아 발길을 돌렸다.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이들 돌탑에는 중생의 조촐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아무렇게나 생
긴 돌로 쌓은 멋없는 탑이지만, 그들의 소망을 하나씩 품으며, 겨울의 시련을 견디는 그들이야
말로 정녕 아름답고 거룩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겉멋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  용문사를 뒤로하며 ~

▲  용문사 주차장 동쪽에 자리한 호수
호구산에서 용문사를 거쳐 바다로 흘러가는 계곡물을 모아놓은 호수이다.
호수 주변으로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 삼아 자신의 초췌해진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용문사와 남해자생식물원을 정신없이 둘러보니 거의 2시간에 시간이 흠뻑 흘러갔다. 이제 용문
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며, 다시 속세로 길을 돌린다. 내가 있어야 될 것은 절이 아닌 아비
규환의 속세이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달리 일주문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호젓한
산길로 겨울의 제국 앞에 나무들이 앞다투어 벌벌 긴다. 그들을 보니 '이제 올해도 저물었구나~
곧 나이 1살이 누적되겠군' 생각이 잔뜩 일어나 우울한 마음을 한층 더해준다. 산길에는 귀를
접고 처량히 누운 낙엽이 인생의 부질없음을 보여준다.

산길을 5분 정도 내려가면 수레 하나 없는 썰렁한 주차장이 나타난다. 수레로 경내까지 오를 수
있지만 남해 제일의 관광지다 보니 이곳에 따로 주차장을 두었다. 피서철과 휴일에는 이곳도 수
레들로 넘쳐날 것이다. 주차장에서는 쪽빛의 남해바다가 시원스레 바라보여 아까전의 우울함을
어느 정도나마 털어주며, 주차장 한쪽에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지는 선비의 동상이 하나 있는데,
누구의 동상인지는 모르겠다.


▲  용문사 주차장 너머로 보이는 남해바다

▲  속세로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본 남해바다

▲  이국적인 분위기의 미국마을 ▼

용문사 주차장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이국적인 분위기의 마을이 나타난다. 길을 중심으로 좌우
에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이국적인 집들, 바로 미국마을(American Village, 예전에는 '아메리칸
빌리지'라고 불렸음)이다. 남해 동쪽 물건리에 있는 독일마을과 더불어 남해군에서 조성한 이국
적인 마을로 재미교포를 위해 조성한 것이다. 

이 마을은 미국식 가옥 21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당수 민박을 겸하고 있으며, 호구산과 용
문사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정면에는 논과 함께 남해바다가 바라보이는 배산임수(背山
臨水)의 자리에 터를 닦아 꽤 아늑하고 탐이 나는 마을이다. 마을 주민 상당수는 재미교포나 외
지인으로 나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 이런 곳에 집 하나 마련하여 살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  바다와 모래의 속삭이는 소리만이 가득한 용소리 해변

미국마을에서 남해바다는 눈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로 도로에서 3분 정도만 들어가면 바로 바다
앞이다. 바다 파도가 살며시 모래를 어루만지며 서로의 정을 속삭이는 현장으로 나의 발자국 소
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다.


▲  썰물로 모습을 진하게 드러낸 남해 갯벌

▲  비단처럼 곱다는 금산(錦山)이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  금평 앞바다에서 바라본 호구산의 위엄
좌우로 길게 누운 모습이 누워있는 호랑이를 좀 닮은 것 같다.
이렇게 하여 남해 용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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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1월 2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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