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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 함양 상림공원(上林公園) ~~~

함양공원 산책로

▲  상림공원 산책로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 상림공원 연지

▲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

▲  연지를 가득 메운 홍련(紅蓮)


♠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인공림(人工林), 최치원(崔致遠)이
함양 땅에 남긴 크고 아름다운 선물 ~ 함양 상림공원(上林公園)
<함양 상림 (천연기념물 154호)>

▲  상림 표석

▲  녹음이 깃든 상림 산책로

함양읍내 서북쪽에는 함양(咸陽) 고을이 자랑하는 상림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인 상림(上林) 일대로 넓이는 6만여 평, 숲의 길이는 1.6km, 폭은 80~200m에 달한다. '고
향은 잊어도 상림은 잊지 못한다'는 함양 사람들의 소중한 휴식처이자 마음의 고향이며, 함양의
젖줄인 위천(渭川)이 늘 어루만져주어 오랜 세월을 걸쳐 지금까지도 푸르름을 간직한다.

상림은 신라 후기 대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 ?)이 조성했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
로 근래에 최치원공원이란 이름도 지니게 되었음) 그는 12세에 부친의 등살에 못이겨 당나라로
건너가 6년 동안 공부에 파묻힌 끝에 18세에 외국인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
황소(黃巢)의 난 때는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이름 석자를 천하에 떨치며, 당나
라에서 무척이나 전성기를 누렸으나 885년 이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진성여왕(眞聖女王)의
소환을 받아 신라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리며 기울어진 나라를 다
시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했으나, 망조(亡兆)가 단단히 든 나라의 현실에 실망하여 외직(外職)을
자처하게 된다.

지금의 함양인 천령군(天嶺郡) 태수로 부임한 그는 고을을 살피다가 홍수에 크게 취약함을 발견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함양은 분지(盆地)를 이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를 위천이 관통하여 흐르
고 있어 홍수의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던 것이다. 실제로도 자주 홍수가 터져 고을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을 동원해 강물의 줄기를 지금의 위치로 만들고 둑을 쌓
았으며, 둑에는 나무를 가득 심어 호안림(護岸林)을 조성하여 대관림(大館林)이라 하니 그게 바
로 상림이다.
숲이 무성해지면서 홍수의 피해는 크게 줄었으나, 위천의 흐름보다 더 두려운 세월의 장대한 흐
름 속에 숲의 가운데 부분이 휩쓸려 파괴되면서 상림과 하림(下林)으로 나눠졌으며, 그나마 하
림은 거의 사라지고(일부 복원됨) 상림만 남아있다.

이곳에는 120여 종에 달하는 나무들로 수해(樹海)를 이루는 상림은 숲이 얼마나 무성한지 정말
정글이 따로 없으며 여름 제국(帝國)의 강렬한 햇빛도 고개를 숙인다. 숲 그늘에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면 정말 신선(神仙)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여름의 눈치와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는 해
방된 곳이다. 그리고 위천의 물줄기가 숲의 옆구리를 부드럽게 지나가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
지 않는다는 상림의 시냇물은 녹음벽수(綠陰碧水)를 이루어 공원 곳곳을 누벼 여름 제국의 침범
을 경계한다.

1,100년의 오랜 숙성을 지닌 숲이지만 정작 초창기에 심어지거나 600년 이상 묵은 나무는 없다.
처음 심어진 나무의 후손들이 조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숲을 손질할 때 수명이 다되거나 비
리비리한 나무를 뽑아내고 새로운 나무를 심으면서 여러 차례 물갈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함양의 제일 가는 경승지이자 풍치림(風致林)으로 봄의 신록(新綠), 여름의 녹음(綠陰),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이 아름다워 읍내 사람은 물론 외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앞다투어 찾아오는
전국적인 명소이다. 함양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드넓은 공원에는 함화루와 사운정, 화수정, 초선정 등의 온갖 누각과 정자가 있어 나그네의 지
친 발을 쉬게 해주며 최치원선생신도비, 이은리석불, 대원군척화비, 읍내에서 옮겨온 비석군(碑
石群) 등의 오랜 문화유산이 곳곳에 숨어있어 보물찾기를 하듯 공원을 둘러보면 더욱 영양가 높
은 나들이가 될 것이다.
게다가 함양이 낳은 인물들의 흉상(胸像)이 담긴 역사인물공원이 위천 변에 조성되어 또다른 볼
거리를 제공하고 있고, 공원 동쪽에는 1만여 평에 거대한 연지(蓮池)가 있어 여름의 제국시절에
는 연꽃의 화려한 향연이 아낌없이 펼쳐진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상림공원의 산책로는 대체로 위천 둑방길(숲 서쪽), 숲길, 연지와 맞닿은
숲 동쪽 길 등 3가지가 있다. 공원에 자리한 문화유산은 대부분 숲길에 있으며, 위천 둑방길을
따라가라면 역사인물공원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숲 동쪽 길은 연지와 살을 대고 있어 연꽃의
향기가 그윽하다.
그럼 지금부터 녹음이 깃들여진 상림공원을 구석구석 살펴보도록 하자.

※ 함양 상림공원 찾아가기 (2012년 7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함양행 직행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함양행 직행버스가 1일 4회 떠난다.
* 인천과 수원에서 함양행 직행버스가 1일 6~7회 다닌다.
* 부산(사상), 대구(서부), 광주, 대전(동부), 전주, 남원, 진주, 마산(창원)에서 함양행 직행
  버스 이용
* 함양터미널을 나오면 왼쪽으로 터미널4거리이다. 여기서 읍내로 이어지는 왼쪽 길(고운로)을
  따라 1km 직진하면 함양3교4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 둑방길(동위천1길)을 따라 500m 정도 가
  면 상림공원이다. 택시로 가면 4~5분 정도 걸린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대전~통영고속도로 → 함양분기점에서 88올림픽고속도로 광주 방면 → 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함양터미널4거리에서 읍내로 직진 → 함양3교에서 우회전 → 상림공원
② 88올림픽고속도로 → 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함양터미널4거리에서 읍내로 직진 →
   함양3교에서 우회전 → 상림공원

★ 상림공원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료는 없음 (주차공간은 120대 정도)
* 공원 동쪽에는 1만여 평 규모의 연지가 있다.
*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대덕리


♠  상림공원 남쪽 둘러보기

▲  함양 척화비(斥和碑)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264호

공원을 알리는 표석을 지나 상림 속으로 발을 들이면 제일 먼저 삼척동자도 줄줄 외고 다닌다는
척화비가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심란하게 만든다. 멀뚱히 서 있는 이 비석은 높이 1.1m로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우둔하고 부질없는 쇄국정책의 메세지가 짙게 담겨져 있다.
나라의 문을 꼭꼭 닫아걸던 대원군은 병인양요(1866, 丙寅洋擾)와 신미양요(1871, 辛未洋擾)에
서 프랑스와 미국을 격퇴한(간신히 격퇴한 수준임...) 자신감의 표현으로 쇄국책을 더욱 고취시
키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석의 내용은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양이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다. 화친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吾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
 (우리의 만대 자손들에게 경고한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우다)

대원군의 졸작인 척화비는 왜정(倭政) 때 왜인들이 땅바닥에 넘어뜨리거나 부셔버렸는데, 상림
에 세워진 함양 척화비는 온전한 모습으로 자빠져 있던 탓에 상태가 양호하다. 낮은 받침돌 위
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반달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그리 유쾌한 비석은 아
니다. 척화비 부근에는 조선 고종 때 함양 고을의 19명의 선비가 세운 초선정(招仙亭)이 있다.


▲  공원을 지키는 호법대신(護法大神) 장승
익살스런 장승의 모습에 상림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악귀는
그를 보고는 자신의 소임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  공원 동쪽 길 ~ 개울 너머로 꽃무릇의 넓은 세상이 펼쳐져 있다.
꽃무릇 군락지는 여름을 장식하는 연꽃에 뒤를 이어 가을에 절정을 이룬다.

▲  장차 다가올 가을을 가슴 깊이 품으며 여름 제국의 시련을 견디는
꽃무릇 군락지

▲  상림 산책로(숲길) - 한더위에 거닐면 땀이 나 살려라 도망을 친다.
그만큼 시원한 기운이 산책로를 거니는 나그네를 휘감는다.

▲  함화루(咸化樓)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58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척화비에서 좌측길로 가면 숲 한복판에 자리한 드넓은 잔디광장이 나온다. 이곳에는 야외강당인
다볕당이 자리해 있는데 다볕당은 함양(咸陽)을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함(咸)은 '모두','다
'의 뜻이, 양(陽)은 '볕'이란 뜻이 있음>

다볕당 북쪽에는 고색이 짙은 2층 누각 함화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누각은 원래 함양읍성
의 남문(南門)이었는데, 원래 이름은 큰 산인 지리산(智異山)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악루(望嶽樓
)였다. 왜정에 의해 읍성(邑城)이 파괴되고 망악루도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던 중, 1932년 함양
읍에 살던 노덕영(盧悳泳)이 구입하여 지금에 자리로 옮겨 함화루로 이름을 갈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성문(城門) 시절에는 벽과 문짝이 있었으나 모두 사라
지고 기둥에서 그 흔적을 아련히 더듬어 볼 수 있다. 지금은 공원을 수식하는 누각으로 내가 갔
을 당시는 몸을 가리고 한참 몸단장 중이었다. 그래서 문화재청 사진으로 대신한다.


▲  함화루 좌측에 자리한 약수터

▲  이은리석불(吏隱里石佛)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32호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이은리 석불은 아랫도리와 두 팔을 잃은 가련한 상태로 나그네로 하여
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 불상은 1950년경 함양읍 이은리 하천에서 발견된 것으로 부
근에 망가사(望迦寺)란 절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절의 유물로 여겨진다.
그를 받들던 절은 자연의 거친 흐름 속에 모조리 휩쓸려 사라지고 집을 잃은 석불은 자연의 짓
궂은 장난에 생매장을 당하면서 함양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잊혀졌다. 허나 어떻게든 살고자 바깥
세상으로 가까스로 살을 드러내 구조를 청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세월과 자연의 괴롭힘이 상당했던 듯, 아랫도리
와 두 팔은 떨어져 나갔다. 허나 다른 부분은
그다지 파손되지 않아 고려 불상의 아름다움을
은은히 드러낸다. 그는 광배(光背)와 대좌(臺座
)를 갖추고 있으며, 타원형의 큰 광배에는 머리
주변의 연화문으로 된 두광(頭光)과 몸통 주변
의 당초(唐草)무늬가 새겨진 신광(身光)이 그를
수식한다.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은 아
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하기만 하다. 두 눈은
지그시 감고 있으며 입술에는 엷은 미소가 드리
워져 있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두 귀는 길쭉하여 얼굴에 비해 다소 빈
약해 보이는 어깨에 닿는다.
몸통에는 법의가 'U'자형으로 주름을 이루며 두
텁게 묘사되어 있다. 대좌는 거의 자연석 그대
로의 모습으로 별다른 꾸밈은 없다.

◀  이은리 석불의 뒷모습


♠  상림공원 둘러보기 (북쪽 부분)

▲  나그네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상림약수터

▲  사운정(思雲亭)

사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힌 단촐한 모습으로 1906년에 박정규와 김득창 등
함양 지역 유림들이 최치원을 추모하며 사모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모현정(慕賢亭)
이라 했다가 나중에 사운정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깊숙한 숲속에 자리하여 한더위에도 시원하다.


▲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文昌侯 崔致遠 神道碑)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75호

사운정 우측에는 최치원 신도비가 자리해 있다. 이 비석은 최치원의 공덕을 기리고자 1923년에
후손인 최순현(崔旬鉉)이 세운 것으로 겨우 9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
고 있다.
비석의 구조는 귀부(龜趺) 위에 비석의 주인공을 적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자아낸 이수(螭首)를 두었다. 귀부의 용머리는 무슨 좋
은 일이라도 있는지 표정이 귀엽고 해맑아 보인다. 혹 내가 와서 반가운 것은 아닐까? 그럴 리
는 없겠지만..
푸른 빛을 띈 비신은 별로 오래되진 않았지만 고색의 때가 군데군데 끼어있어 비석의 품격을 드
높인다. 비석의 높이는 3m, 폭은 1.5m이다.


▲  여러 명이 앉을 정도로 넓은 마당바위
높이가 낮고 뚜껑돌이 길쭉한 고인돌(지석묘)로도 보인다.

▲  상림 구석구석을 흐르는 시냇물이 3거리를 이루며 각자의
방향으로 졸졸졸 길을 재촉한다.

▲  역사인물공원(歷史人物公園) 입구

여기서 표석의 안내를 받아 왼쪽 길로 가면 역사인물공원이 나온다. 위천 변에 터를 닦은 공원
으로 함양 출신 역사인물의 흉상과 함양 각지에서 가져온 오래된 비석들로 이루어져 있다.

▲  역사인물공원 우측(위천 쪽)에 자리한 오래된 비석들

남북으로 2열 종대로 늘어선 비석들은 함양군수와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의 선정비(善政碑)/ 불
망비(不忘碑)이다. 이들 중 정말로 백성들을 살피며 선정(善政)을 베푼 위정자도 있겠지만 대부
분은 이렇다 할 치적도 없는데도 과시나 조세 징수를 위해 만든 형식적인 비석일 것이다.

◀  열녀학생임술증처 유인밀양박씨지려(烈女學
生林述曾妻 孺人密陽朴氏之閭)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240호
비석군 좌측에는 돌로 만든 일종의 비각(碑閣)
안에 담긴 비석 하나가 따로 자리를 하고 있다.
뭔가 특별해 보이는 비석, 그 옆에 안내문을 보
니 무려 16글자의 긴 이름을 지닌 정려비(旌閭
碑)이다. 정려비는 효자와 열녀(烈女), 충신을
기리고자 국가가 내린 비석으로 이 비는 열녀
밀양박씨를 기리고자 세워진 것이다.
임술증(울진임씨)의 부인 밀양박씨는 열부(烈婦
)로 명성이 자자했던 여인으로 연암 박지원(燕
巖 朴趾源)이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내며 물
레방아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1793년에 그를 주
인공으로 한 한문소설 '박열부전(朴烈婦傳)'을
썼다. 그녀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박지원
이 박열부전을 쓰던 시기에만 함양군수 윤광석(
尹光碩), 산청현감 이면제(李勉齊), 선비 이학전
(李學傳), 벽송사(碧松寺) 승려 응윤(應允) 등이
그를 모델로 한 '박열부전'을 썼다.

같은 시대에 박씨부인에 대한 사실적 내용을 유학자의 입장과 관리의 입장, 승려의 입장에서 각
각 기술한 것으로 유학적이고 실존적인 시대상황을 평가하는 글들로 분석되고 있어 국문학적 의
미가 크다.
이 비석은 1797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정여창(鄭汝昌)의 7대손인 정덕제(鄭德濟)가 썼
으며, 2번이나 비석을 옮긴 기록이 비석에 쓰여져 있다. 1932년에 함양읍 백연리로 이전되었다
가 근래에 역사인물공원으로 이전되었으며, 후손들이 정성스레 닦고 문지르며 관리를 하고 있어
비석의 건강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  역사인물공원 좌측에 자리한 역사인물 11위의 흉상(胸像)

공원 좌측에는 함양과 인연이 깊은 역사 인물 11위의 흉상이 자리한다. 5위의 흉상이 2줄을 이
루며 맞은편의 흉상을 바라보며 있으며, 가장 좌측 회장자리에는 상림공원을 만든 최치원의 흉
상이 있다. 그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에 활약했던 정여창, 김종직(金宗直), 박지원, 유호인(兪好
仁)등의 흉상이 자리를 지킨다.


▲  공원 최북단에 자리한 물레방아

공원 최북단에 자리한 물레방아 자리에는 공원 상가가 있었다. 그러다가 정비를 벌이면서 상가
는 모두 갈아엎었고 1998년 함양 고을을 상징하는 물레방앗간을 지어 우리의 옛 향수를 선사한
다.

함양은 우리나라 물레방아의 고향으로 함양 북쪽에 있는 안의 용추계곡이 그의 탄생지이다. 청
나라에 사신으로 간 박지원으로 그곳에서 물레방아를 접하고 신선한 충격에 빠졌다. 그래서 그
도안과 사용방법을 익혀 귀국을 했는데, 귀국 이후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자 안의 북쪽 용추계곡
에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를 만들어 시범서비스에 들어갔다.
물레방아 서비스가 큰 호응을 얻자 전국으로 보급하여 마을마다 물레방아가 없는 곳이 없을 정
도가 된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던 공간으로도 많이 애용되던 물레방앗간은 기계문명에 밀려 이
제는 귀한 몸이 되었다.


♠  상림공원 둘러보기 (동쪽 부분)

상림 동쪽의 상동마을은 옛부터 연꽃밭을 뜻하는 연밭머리라 불려 옛날부터 연꽃의 보금자리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함양군은 이를 근거로 상림 동쪽에 66,000㎡에 달하는 연지(蓮池)를 만들고
백련과 홍련, 황련(黃蓮), 분홍련, 수련을 심어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안그래도 아름답고
장쾌한 상림을 더욱 아름답게 수식하여 상림의 이름 2자를 천하에 떨치고 있으며, 연꽃의 절정
기인 여름에는 연꽃의 즐거운 향연으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1년 가까운 와신상담을 거쳐 화사한 꽃잎을 펼쳐보인 연꽃의 아름다운 물결, 마치 심청(沈淸)이
나올 것 같은 연꽃의 자태는 뭇 사내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앙증맞게 생긴 연잎에는 개
구리들이 열심히 뛰어 놀며, 여름 제국이 내린 빗방울이 잎에 신비롭게 고여 있다. 사람키만큼
이나 자란 연들은 비오는 날 우산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다. 연지 남쪽에는 서양 수중식물을 풀
어놓은 연못이 있다.


▲  홍련지(紅蓮池)와 백련지(白蓮池) 사이에 자리한 연못 ~
서양 수중식물의 보금자리이다. ▼



▲  앙증맞은 모습의 엘리사이나

▲  연못에 베풀어진 징검다리 - 아장아장 징검다리를 걷는 순간
철모르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  상림만큼이나 무성하게 자란 연 사이로 놓여진 흙길

내 키만큼이나 자란 연들로 흙길은 거의 연터널을 이룬다. 연들이 너무 커서 그 길로 들어서기
가 겁난다. 내가 저 길로 들어서다가 자칫 커다란 연들에 휩싸여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  품종보호를 위해 출입이 통제된 흙길

▲  거대한 백련(白蓮)의 하얀 물결 - 백련지

▲  상림에서 불어오는 숲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는 백련

▲  백련 사이를 거니는 흙길

▲  장대한 홍련(紅蓮)의 물결 ~ 홍련지 ▼



▲  연분홍 단장을 한 홍련 ~ 저기서 어여쁜 심청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뭇 사내의 마음을 콩닥거리게 만든다.

▲  무슨 근심이 있는지 꽃잎을 굳게 오므린 홍련

▲  연지로 떨어지지 못하고 커다란 연잎에 고인 빗물 덩어리
연잎에 머물며 투명의 덩어리를 이룬 빗물이 무거운지 연잎이 조금 기울어진 것 같다.
잎을 움직여 물방울을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그 광경이 정말로 신비롭다.

▲  연지와 맞닿은 상림 동쪽 산책로


♠  서울에서 머나먼 곳에서 만난 조선 왕족의 묘역, 한남군묘(漢南君墓)
-
경남 지방기념물 165호

▲  한남군 묘역 (앞에서 본 모습)

▲  한남군 묘역 (뒤에서 본 모습)

상림 동쪽 한남군고개라 불리는 산자락에 엉뚱하게도 조선 왕족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바로 세
종의 아들인 한남군의 묘역이다.(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세종왕자 한남군묘역') 그의 무덤은 연
지 동쪽 도로에서 동쪽 산자락을 유심히 바라보면 어렵지 않게 바라보이는데, 석물이 유난히도
많은 무덤이 바로 그의 유택(幽宅)이다. 그럼 어째서 조선 왕족의 묘가 서울에서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있게 된 것일까?

한남군(1429~1457)은 세종(世宗)의 12남으로 혜빈 양씨(惠嬪 楊氏)의 소생이다. 자는 군옥(君玉
), 이름은 어(於)이며, 시호는 정도공(貞悼公)이다. 1441년에 세종 내외가 온수현(溫水縣, 충남
아산시내) 가마곡(加磨谷)에 행차하였을 때 궁궐 수비를 관장한 공으로 한남군에 봉해졌다.

1455년 그의 2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인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재위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품고 4째 형인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혜빈양씨, 영풍군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려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금산(錦山)으로 유배되고 만다. 그 뒤 아산(牙山)을 거쳐 함양 새우
섬(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한남마을)으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1457년 5월 을유일(乙酉日)에 세조
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마시고 쓰러지고 만다.

지금의 무덤은 1557년(명종 12년)에 조성된 것으로 상석(床石)과 망주석(望柱石) 4기, 문인석(
文人石) 2기, 동자상(童子像) 2기가 무덤을 지킨다. 조선 중기 왕족의 묘제(墓制)를 잘 보여주
고 있으며, 근래에 묘역 앞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  한남군 묘역을 지키는 동자석 2기

그가 묻힌 봉분(封墳)은 조그만 석축 위에 쌓은 것으로 그 앞에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碑
石)이 서 있는데, '한남군 정도공 휘어지묘(漢南君 貞悼公 諱於之墓)'라 쓰여있다. 이 비석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원래의 비석은 봉분 우측으로 옮겨져 봉분을 바라본다. 아마도 노후한 비석
의 건강이 썩 좋지 못해 그리한 듯 싶다.
묘비 앞에는 제물을 올리는 상석이 누워있으며, 그 좌우에는 다소 훼손이 심한 동자상 2기가 서
로를 마주보고 있다.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자연의 짖궂은 장난 앞에 형체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좌측 동자상의 얼굴에는 동자상이란 이름 그대로 천진난만함과 귀여움이 묻어나 보인다. 우측의
동자상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데 자신의 몰골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자연과 세월, 세상에
대한 불만을 표하는 듯하다.


▲  묘역을 밝히던 옛 장명등(長明燈)의 흔적

무덤을 둘러보고 있으면 뭔가 허전함이 밀려올 것이다. 바로 장명등이 없기 때문이다. 장명등은
현재 석등(石燈)이 꽂혀있던 구멍과 바닥돌만 덩그러니 남아있는데, 마치 이가 빠진 듯 시려보
이는 구멍에는 빗물만이 가득하여 그 허전함을 달래줄 뿐이다. 나머지 석물은 그래도 살아남아
무덤을 지키는데 장명등은 어느 귀신에 잡혀갔는지 알 길이 없다.

▲  묘역 우측의 문인석과 망주석

▲  묘역 좌측의 문인석과 망주석

묘역 좌우에는 문인석 2기와 망주석 4기가 자리한다. 고색의 때를 가득 뒤집어쓴 문인석은 그런
데로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데, 그의 표정에는 멀뚱하면서도 여유로움이 묻어나 보인다. 문인석
옆에는 특이하게도 망주석이 2기씩 자리해 있는데, 몽당연필처럼 매우 조그마한 망주석이 원래
의 것으로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저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옆에 하얀 피부의 늘씬한 망주석
을 세워 노쇠한 선배를 거든다.


▲  봉분 우측에 자리한 옛 묘비
수백 년 세월의 때와 상처가 가득 입혀져 근래에 봉분 우측으로 옮기고
새로운 묘비를 만들어 그 자리를 대신한다.

▲  묘역 앞쪽에 자리한 신도비(神道碑)

▲  솔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는 한남군 묘역으로 오르는 산길

한남군 묘역을 끝으로 오랜만에 찾은 함양 상림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단풍으로 곱게 치장을 한 늦가을 풍경을 꼭 보고 싶다.

* 한남군묘역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교리 산7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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