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여주 파사성 2. 파사성으로 인도하는 파사산 숲길 3.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파사성 4. 파사성 남문터 5. 남문터 안쪽 6. 남문터 주변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여주의 산하 7. 계단처럼 펼쳐진 북쪽 성곽 8. 북쪽 성곽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여주의 산하 9. 파사성 북쪽 성곽 10. 파사성 정상 직전에서 바라본 북쪽 성곽과 남한강 11. 북쪽 성곽에서 바라본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 주변 12. 파사성 동북쪽 끝부분 (정상 옆) 13. 파사성의 지붕인 파사산 정상 (해발 230.4m) 14. 파사성 정상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양평 개군면, 양평읍 지역 15. 파사성 정상에서 바라본 양평 개군면, 지평면, 여주 대신면 지역 16. 파사성 동북쪽 끝에서 상자포리 마애불로 인도하는 계단길 1..

1. 단양 봉서정단성면 중심지 북부(하방리)에 자리한 단성면보건지소 앞에 2층 누각인 봉서정이 있다. 봉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남한강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왕년에 단양에서 잘 나갔던 존재이다. 허나 그가 부재중이던 시간이 무지하게 길었던 터라 단양이 외가 시골임에도 그의 존재는 처음이다. 봉서정은 1602년 단양군수 이준이 관아 누각으로 세웠다. 1764년에서 1769년까지 단양군수로 있던 조정세가 중수했으며, 1853년에서 1854년 사이에 군수 심원택이 중수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13번째 화첩인 구학첩에 봉서정과 옛 단양 고을의 모습이 등장한다. 허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단양군에서 지역의 역사성 회복을 명분으로 2013..

1. 여름 내음에 잠긴 단양적성 (북문터 주변)단성면 중심지(옛 단양읍내)의 오랜 뒷동산인 성재산 정상부에 단양적성(적성산성)이란 오래된 산성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신라를 크게 중흥시킨 진흥왕(재위 540~576)이 554년에 죽령을 넘어 고구려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는데, 그때 또는 그 이전(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의 둘레가 1,768척이며 성내에 큰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까지 이 지역을 지키는 요새로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적성이 깃든 성재산 바로 밑이 단양 고을의 중심지이다. 하여 조선 때도 고을을 지키는 용도로 어느 정도로 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양 고을은 읍성을 따로 갖추지 못했음)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버려져..

1. 단양적성 주차장에서 바라본 적성(적성산성)옛 단양 읍내였던 단성면 중심지(하방리, 상방리) 뒷쪽에는 성재산이란 320m급 뫼가 있다. 그 뫼 정상부에 적성산성 또는 단양적성이라 불리는 꽤 늙은 산성이 깃들여져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단성면과 적성면, 단양읍, 대강면 지역을 굽어본다. 단양적성은 신라 중기인 진흥왕 시절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산성 안에서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적성비란 늙은 비석이 나왔기 때문으로 그 비석을 통해 545~551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어림짐작일 뿐, 자세한 시기는 모르며, 그보다 더 이르게 봐야될지도 모른다. 만약 이르게 본다면 6세기가 아닌 4~5세기 정도 될 것이다. 그만큼 이곳은 무지하게 늙은 산성이다.산성의 둘레는 약 ..

1. 옛 단양읍내(현재 단성면 중심지)의 빛바랜 흑백 사진 (단성생활체육공원)충북 단양군은 본인의 외가 시골로 서울 다음으로 오래 산 동네이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몇년씩 살고 그런것은 절대로 아님, 방학과 명절, 일부 날에 여러 날씩 머문 것이 전부)현재 단양군의 중심지는 단양읍(신단양)이나 예전 중심지는 단성면으로 단성면이 단양읍이란 이름으로 단양군내를 다스렸다. 읍내도 제법 컸고, 외가 동네(북하리)하고도 가까워 종종 갔었는데, 너무 어렸을 적(1980년대)이라 기억나는 것도 거의 없다.1985년 충주댐 건설로 남한강에 접한 충주와 제천, 단양 지역이 적지 않게 수몰되는 아픔을 겪었다. 특히 단양군은 그 중심지인 단양읍내까지 수몰지가 되면서 중심지까지 강제로 강 상류로 옮겨야 했다. 하여 우리나라..
' 늦겨울 산사 나들이, 단양 구인사 ' ▲ 대조사전 광장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겨울 제국의 쌀쌀한 위엄 앞에 천하만물이 꽁꽁 몸을 사리던 2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 와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구인사는 이미 10여 년 전 연말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같은 겨울이지만 연 초에 가게 되었다. 그럼 왜 그곳을 다시 찾았을까?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땡겨서이다. 서울의 동쪽 관문, 청량리역에서 8시대에 출발하는 영동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영월(寧 越)에서 군내버스로 구인사로 진입하려고 했으나 여인네가 크게 지각을 하는 바람에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열차를 타면 영월읍내에서 구인사행 버스와 30분 이내로 시 간이 맞음) 그래서 별수 없이 9시대 열차를 타고 제천(提川)으로 이동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