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남쪽 밑에서 바라본 회인 사직단보은군 회인면의 중심지인 중앙리 서쪽 산자락에 사직단이 깃들여져 있다. 사직단은 '사'와 '직'에게 제를 지내는 제단으로 조선 때 전국 고을에 설치되었는데, 고약했던 왜정 시절에 대부분 파괴되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충북 같은 경우는 오로지 이곳 회인만 살아남았다. 이곳 사직단이 언제 처음 닦여졌는지는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회인현조에 '사직단은 고을 서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제단과 그에 딸린 건물들이 여럿 있었으나 이곳 역시 왜정의 고약한 손길로 인해 지금은 제단만 남아있다. 평탄한 대지에 한 변 길이가 5~6m 정도 되는 장방향 제단을 닦았으며, 왜정 시절에는 왜인들이 높이 1m의 방형 ..

1. 보은 오장환 생가보은군 회인면의 중심지인 중앙리 마을 북쪽 부분에 오장환의 생가와 문학관이 둥지를 틀고 있다. 오장환(1918~1951)은 보은 회인 출신의 시인으로 1918년에 아버지 오학근과 어머니 한학수 사이에서 4남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어린 시절 말이 별로 없는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하며, 대신 귀염성과 진실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회인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3학년까지 다니다가 경기도 안성에 있는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으며, 그곳을 졸업하여 1931년 4월 서울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휘문고보 시절에 옥천 출신인 시인 정지용에게 시를 배웠으며,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학교 교지인 '휘문'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 1933년 2월 발간된 '휘문' 임시호에 오장환의 첫 작품인 '아침'..

1. 회인면 중심지(중앙리)에서 바라본 매곡산회인면 중심지(중앙리) 동쪽에는 매곡산이란 낮은 뫼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이곳에는 신라 후기 산성 유적으로 여겨지는 늙은 산성터가 있는데,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회인, 회남 일대를 관리했다는 매곡성 자리로 보고 있다. 허나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며, 이곳 산성의 자세한 정보는 전하는 것이 없다. 참고로 후삼국 시절 매곡성 성주는 '공직'이란 사람으로 그는 후백제 견훤(진훤) 정권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고려로 넘어갔다. 그가 고려로 넘어가자 견훤이 너무 열받은 나머지 그의 자식들을 잡아와 그들의 다리 힘줄을 끊어놓았다고 한다. 2. 회인초등학교와 회인동헌내아 사이 골목길오른쪽(동쪽)에 있는 기와 담장 너머로 살짝 추녀를 보인 집이 회인동헌내아이다. 3...

1. 보은 회인 인산객사보은군 서쪽 부분에 자리한 회인면은 첩첩한 산주름에 푹 묻힌 산골 지역이다. 지금은 보은군 그늘에 있지만조선 후기까지 회인현이란 독자적인 고을로 중앙리가 그 중심지이다. (지금은 회인면의 중심지) 옛 회인 고을의 흔적으로 회인향교과 인산객사, 동헌내아, 사직단 등이 있으며, 중앙리 동쪽 산에는 매곡산성이라 불리는 늙은 산성터가 전한다. 중앙리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회인 인산객사는 회인고을의 객사이다. 객사 이름이 인산객사로 원래부터 그런 이름을 쓴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고을에서 가져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객사는 조정에서 나온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고 제왕을 상징하는 궐패(전패)를 봉안하여 고을 수령과 관속들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를 올리던 관아 건물이다. 이곳 객사는 정면 ..
' 새해맞이 충북 보은 나들이 ' ▲ 보은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사랑채 온갖 아쉬움 속에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밝았다. 올해는 제발 좋은 일이 많기를 애타게 소망하며 날씨가 최적화된 날을 택해 서울에서 고속/시외버스나 철도로 2시간 내 외 범위에서 새해 첫 답사지를 물색. 고르고 고른 끝에 보은(報恩)의 우당고택이 선정되 었다. 그곳이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명당(明堂)이라 하여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 문이다. 차디찬 기운이 가득한 이른 아침,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하여 청주시내와 미원을 거쳐 보은읍에 이르렀다. 보은 읍내는 마침 5일장이라 장을 보러온 노인들로 활기를 띠었는데 읍내 한복판 중앙4거리에서 관기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려 장안3거리 에 두 발을 내린다.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