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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타사 단하각

미타사 경내 뒤쪽(서쪽) 언덕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엄연한 낙산의 일부로 지금은 경동고

등학교가 바로 그 위에 터를 닦아 숲의 농도는 다소 엷어졌다. 언덕은 조금 가파른 편이라 돌로 여러

단의 석축을 다지고 계단을 놓았는데, 그 계단의 거의 끝에 단하각이란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경

내를 굽어보고 있다.

 

단하각은 산신각의 다른 이름으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미 삼성각에 늙은 산신도가 있지만 하

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닦고 새 산신도를 파서 봉안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북

쪽 계단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5층석탑이 있다.

 

2. 단하각 산신탱

단하각을 세우면서 새로 마련한 탱화로 산신과 그의 부하인 호랑이, 동자, 그리고 산신의 활동무대인

산과 소나무,폭포, 하늘 등이 담겨져 있다.

 

3. 미타사5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구석진 곳에 고색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5층석탑이 있다. 주변

이 나무와 수풀로 가득해 이곳만큼은 정말 산사의 석탑 같은 분위기인데, 그는 무려 거의 1,000년 전

인 1,047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만약 맞다면 서울 토박이 탑(외지에서 옮겨온 것은 제외)

중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허나 생김새를 봐서는 딱히 1,000년 가까이 숙성된 탑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고려 때 탑은 분명

한 듯 싶으며, 아직까지는 많은 것이 아리송해 한참이나 후배인 19~20세기 탱화들도 거뜬히 받은 지

방문화재의 지위 조차도 얻지 못했다. 허나 이 탑으로 인해 미타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열

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탑골이 되었고, 보문사와 미타사가 탑골승방이란 이

름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을 얹혔는데 3층까지는 고색의 때가

진하며, 옥개석과 탑신 일부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형님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이 좀 있을 뿐, 대

체로 무난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어설프게 얹혀놓은 2층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너무 흰색이라

근래 새로 올렸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윗도리가 떨어져 나가서 새로 붙인 것인지 아니면 원래 3층이

었으나 2층과 머리장식을 더 붙여서 5층으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4. 숲에 감싸여 홀로 고독을 즐기는 미타사5층석탑

이곳은 미타사 경내 바로 윗쪽으로 대웅전과 삼성각에서 계단을 오르면 바로 이어진다. 허나 경내에

서 가장 구석진 곳이라 여기까지는 사람들이 잘 올라오지 않는다.

 

5. 미타사 경내(대웅전, 삼성각)에서 단하각,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각박한 경사를 조금이나마 순화시키고자 계단길을 냈으나 그 계단 조차도 경사가 좀 있는 편이다. 하

여 계단통행 때 주의가 필요하다.

 

6. 삼성각 옆에서 바라본 미타사 경내와 보문아이파크아파트

 

7. 미타사 지장시왕도

미타사의 법당인 대웅전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가 4점 들어있다. (삼성각에 3점, 불이문에 1

점이 있음)

대웅전에 깃든 늙은 탱화의 일원인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과 명부(저승)의 시왕 등 명부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는데, 계유생(癸酉生, 1813년) 이씨 부인이 부모와 남편인 정축생(丁丑生, 1817년) 남씨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돈을 내어 만든 것으로 아쉽게도 제작 시기와 최초 봉안지가 화기에 나와있지 않

다. 허나 1873년에 조성된 신중도 제작에 참여한 포화 정수, 수산당 부윤 등이 제작에 나섰고, 신중

도와 양식과 화풍이 비슷해 그와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붙여 그렸는

데 여러 곳이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불량한 부분이 조금 있다.

그림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녹색 두광과 금색 신광을 지니며 연화대좌 위에 돋보이게 앉아있고, 그

좌우로 시왕이 지장보살을 바라보고 있으며, 판관과 사자, 천녀, 동자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지장보

살 밑에는 2명의 동자상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 동자는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선악동자로 하얀 꽃

으로 머리를 장식했고, 윗도리는 맨살을 좀 드러냈으며,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

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등장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은 느낌

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19세기 수도권과 경남에서 유행하던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선악동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동자상은 경기도 화승들이 즐겨 그리던 형식이라 수도권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8. 미타사 신중도

대웅전 북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있다. 신중도란 호법신중을 담은 그림으로 1873

년 4월 포화당 정수를 증명으로 하고 경선당 응석이 출초를 했으며, 동화당과 두흠, 만파당 돈조, 봉

흡 등이 같이 제작했다.

그림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붙어 제작했으며 가로

로 긴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범천과 제석천, 천부중을, 하단에는 위태천과 천룡팔부를, 하단

중앙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천부8부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윗쪽에는 하늘을 상징

하는 공간을 두고 구름처리를 했으며, 인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둥글다. 채색은 다홍 계통의 적색, 녹

색, 청색을 사용하여 색깔의 조화도 괜찮은 편이다.

 

이 신중도는 19세기 후반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선당 응석의 작품으로 수도권에서는 이 초본

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널리 유행했다.

 

9. 대웅전 석가여래삼존상과 아미타후불도

대웅전 불단에는 잘생긴 석가여래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바로 그 뒷쪽에 색

채가 고운 아미타후불도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데, 석가여래삼존상 뒤에 석가여래도

아니고 아미타불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미타후불도가 걸려있는 점이 이채롭다.

아무래도 절 이름이 '아미타불'의 줄임말(미타)에서 비롯되었고 따로 아미타불의 거처를 마련하기도

여의치 않아서 이곳에 둔 모양이다.

 

이 아미타후불도는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센스 부족으로 화

기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금

강역사 등이 빼곡히 모여 정모를 벌이고 있는 일종의 아미타극락회상도로 그림 중앙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삼존상이 낮은 불단에 마련된 연꽃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 금강역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은 평상에 편하

게 앉아 있는데, 이는 다른 탱화와 확연히 틀리다. (다른 탱화의 사천왕은 모두 서 있음)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아미타삼존상의 모습, 그리고 평

상에 앉은 사천왕의 등장은 경북 예천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그

예가 별로 없다고 한다.

 

10. 미타사 감로도

대웅전 남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아주 복잡한 그림이 있다. 바로 감로도(감로

왕도)이다. 감로도는 이름 그대로 '맛있는 이슬'이란 뜻으로 여기서 맛있는 이슬이란 중생들에게 감로

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파란만장한 스타일의 그림이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림 해석이 어려워 거의 암이 걸릴 지경

인데, 주로 죽은 사람들, 즉 영가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영가들의 위패나 영정을 두기 마련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대체로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가 아귀도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

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물어 답을 듣는 것으로 그림 상단에는 아미타삼존과 7여래,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 등을 담았다. 그리고 중단에는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

법과 절차, 아귀가 공양을 먹는 장면, 의식을 주재하는 사람이 불덕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 성현 등

이 그려져 있으며, 하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 감로도는 1918년에 고산축연 등이 그린 것으로 다소 질이 떨어지는 합성연료를 사용한 탓에 밝

은 주홍색이 선명하다. 명암법의 일종으로 넓게 칠하는 요철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서양 화법을 반

영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인근에 있는 청룡사(1868년) 감로도와 개운사(1883년), 옥수동 미타사

(1887년), 봉원사(1905) 감로도와 비교할만하며,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와 아귀의 규모가 줄어

든 점은 그 시절 감로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쨌든 19세기 수도권에서 유행하던 감로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과 세부 묘사

가 정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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