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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龍淵寺) '
용연사 석조계단
▲  용연사 석조계단


 

겨울 제국(帝國)의 기세가 슬슬 꺾이던 3월 첫무렵에 대구 지역의 오랜 고찰, 용연사를 찾
았다.

서울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달려 대구역에 도착, 대구지하철 1호선을 타
고 서쪽 종점인 대곡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용연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야 되는데 배차간
격이 참 아름다운 수준이라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다행히 대기 10분 만에 그곳으로 들어가
는 달성5번 시내버스(대곡역↔용연사↔현풍,유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옛 지기를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우며 그 버스를 타고 화원읍, 반송리를 지나 비
슬산 북쪽 골짜리에 자리한 용연사 주차장에 두 발을 내리니 곧바로 용연사 매표소가 흐뭇
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엥 여기도 입장료를 받았었나?'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매표소
아줌마가 직업 본능에 따라 밖으로 나와 돈 받을 준비를 갖춘다. 그때 버스에서 같이 내린
아줌마 신도가 있었는데, 그의 뒤를 바짝 뒤쫓으니 나를 같은 신도라 여기고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매표소에 적힌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1,500원..

매표소를 무사히 지나 7분 정도 오르면 비슬산 계곡물이 한데 모인 용연지(龍淵池)가 나타
나고 이어 일주문도 얼굴을 드러낸다.


♠  용연사 입문 (일주문, 천왕문)

▲  용연사 일주문인 자운문(紫雲門)

용연지를 지나면 수레들의 쉼터인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중간에는 고색이 깃든 일주문(一柱
門)이 뿌리를 내렸는데, 4발 수레들에게 둘러싸여 약간은 뒷전으로 밀려난 인상이다. 다른 절은
거의 일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게 하지만 여기는 일주문 옆에 수레길을 내고 그로 인해 문이
옆으로 상당히 밀려난 형세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이 아닌 수레길로 경내를 오간다.

절의 일주문은 보통 일주문이라 불리지만 이곳 일주문은 특별히 붉은 구름이란 뜻의 자운문이란
어여쁜 이름을 지니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지붕은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하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 부분이 현저히 커서 공포와 지붕 등 문의 윗부분이 문 높이의
거의 60%를 차지하고 있어 다소 육중해 보인다. 지붕을 받치는 문 기둥은 그런데로 굵직함을 지
녔지만 커다란 윗도리 때문에 오랜 세월 어찌 저들을 받쳤을까? 걱정이 들 정도이다. 공포와 평
방(平枋)에는 단청이 채색되어 있으나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퇴색했다.

▲  적멸보궁, 석조계단 입구

▲  경내로 인도하는 극락교. 다리를 건너면
용연사 경내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용연사 문화유산 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가 있다. 내가 나타나니 해설사
아저씨가 모습을 비추며 용연사 안내문을 하나 건네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며 길을 재촉하니 길은 이내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로 가면
석조계단(적멸보궁), 오른쪽은 경내로 우선은 경내부터 살피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갔다.

경내 직전에는 계곡에 걸린 극락교(極樂橋)란 다리가 있다. 여기서 절의 주문에 따라 속세의 온
갖 기운과 번뇌를 내려놓고 경내로 임하면 되는데,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천왕문(天王門)
이 나타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온몸을 가리며 보수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
서 천왕문은 이용하지 못하고 그 옆으로 우회하여 들어갔다.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검문을 거치면 바로 2층 규모의
안양루(安養樓)가 나온다. 안양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
(四物)이 담겨져 있는데, 보광루(寶光樓)라 불린 것을 근래에 안양루로 이름을 갈았다.


▲  천왕문 밑에 자리한 둥그런 석조

▲  절에 왠 악어?

천왕문 밑에는 둥그런 석조(石槽)가 있는데 샘물 대신 먼지만 가득한 거의 죽은 샘터이다. 그런
데 그런 석조 옆에는 생뚱맞게도 악어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자비(慈悲)와 평화를 강조하는
절집에 왠 무시무시한 악어상이 있는 것일까? 악어와 관련된 불교 설화는 딱히 들어본 적도 없
고. 그렇다고 용연사 주변에 악어 서식지나 관련 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
도나 소승불교가 전파된 동남아에 악어가 있으니 그곳에 혹 관련 설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
중에 해설사에게 문의를 했다.
그 답변에 따르면 이 악어상은 어느 신도의 집 정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년 전에 절에
기증을 했는데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 이 자리에 두었다는 것이다. 사연이 생각 외로 정말 엉뚱
하다. 신도가 준 것이니 차마 안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내에 두기에도 조화롭지 않으니 혹
여 찾아올지 모르는 화마(火魔)와 나쁜 기운이나 막으라고 천왕문 밑에 둔 듯 싶다.

그럼 여기서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용연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안양루의 뒷모습

▲  극락전과 뜨락

※ 비슬산 북쪽에 포근히 안긴 고찰, 비슬산 용연사(琵瑟山 龍淵寺)
팔공산(八公山)과 더불어 대구를 크게 보듬은 비슬산(琵瑟山)에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 많은
데, 그중에서 북쪽 계곡에 안긴 용연사가 단연 갑(甲)이다. <유가사는 을(乙) 정도>

용연사는 후삼국시대의 한복판인 912년<신라 신덕왕(神德王) 원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
했다고 전한다. 보양은 청도에 운문사(雲門寺)를 세운 인물로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
고 귀국하는 길에 서해바다 용이 용궁(龍宮)으로 초청해 그를 대접했다.
용은 자신의 아들인 이목(璃目)을 딸려 그를 호위케 했는데, 마침 나라에는 가뭄이 극성이라 보
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설화이지만 그 연유로 절 이름
에 용(龍)이 들어간 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까지 내세우며 창건설화를 그럴싸하게 지어냈지만 정작 창건 이후 조선 초기까
지 이렇다 할 바퀴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다만 극락전 앞에 고려 때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고려 때부터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띔해준다.

절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419년으로 그때 승려 천일(天日)이 망해가던 용
연사의 모습이 슬픈 마음이 솟구쳐 크게 중창을 했다고 한다. 허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603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인잠(印岑)과 탄옥(坦玉), 경천(敬天)에게 명해
다시 짓도록 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해 5동이었고 거주하는 승려는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1650년 어느 날 저녁, 난데없이 별똥이 떨어져 대웅전과 요사가 불에 탔으며, 이듬해 일언(一彦
)과 학신(學信)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세웠다. 1653년에는 홍묵(弘黙)이 대웅전
을,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 일주(一珠)가 만월루(滿月樓)를 세웠으며, 1661년
까지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 관음전(觀音殿), 반상료(返常寮), 명월당(明月堂), 향
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두월료(斗月寮) 등을 지었다. 또한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18세
기 초까지 사리각(舍利閣), 천왕문, 응진전, 영류당(詠流堂), 일주문, 명부전 등이 건립되어 무
려 200칸의 규모를 지닌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이야 팔공산 동화사(桐華寺)가 대구 지역
사찰의 으뜸이지만 그때는 오히려 동화사가 용연사의 말사(末寺)였다.

1673년에는 임진왜란 때 통도사(通度寺)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옮긴 부처의 사리를 다시 통도
사로 가져오면서 그중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고 사리를 담을 사리탑(舍利塔)과 석조계단(石造戒
壇)을 만들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 1676년(숙종 2년) 권해(權瑎, 1648-1723)가 쓴 '파사교주
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 이란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1708년 사리탑을 중수했고, 1715년 찬화(粲和)가 대웅전과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丹靑)을
새롭게 입혔다. 중수를 마치자 1722년 홍문관(弘文館) 교리(狡吏)인 임수간에게 청해 중수비를
세웠는데, 그 중수비에 의하면 당시에는 부속 암자로 명적암과 은적암, 보리암과 법장암이 있었
으며, 절 계곡에 용문교과 천태교 등 5개의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허나 1726년 1월 불이 나
서 대웅전과 다수 건물이 소실되었고, 1728년에 중건을 했는데, 이때 법당 이름이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갈린 듯 싶다.


이렇게 대구 굴지의 사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용연사는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
으로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면서 처지가 서로 뒤바뀌고 만다. 이후 1934년 석가사리
탑을 수리하면서 탑 주위에 석주(石柱)를 둘렀으며, 그 이후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영산전과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등 약 16~17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로 지정된 석조계단과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과 복장
유물 등 보물 2점과 3층석탑과 극락전 등 지방문화재 2점을 지녔다. 그리고 부속 암자로는 은적
암(隱寂庵)과 명적암(明寂庵), 광선암(廣仙庵)을 거느리고 있다.

대구의 남쪽 지붕인 비슬산 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틀었고,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기
운 또한 청정하며, 티끌 없이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며 청정한 기운을 돕는다. 시내와도
멀리감치 거리를 두고 있고, 산새의 지저귐과 바람의 소리가 잔잔하게 경내를 감싸며 산바람에
흥분한 풍경물고기가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풀어 산사의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용연사에서 비슬산을 거쳐 유가사나 비슬산휴양림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정상까지는 4시간 정
도 걸린다.

※ 용연사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달성2번,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탄다. 달성2번은 지선
  이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반드시 용연사행(1일 8회)을 확인하고 타야 된다. 잘못탈 경우 엉뚱
  한 곳으로 강제투어를 당할 수 있다.
  달성5번은 용연사를 경유하여 현풍, 유가사(瑜伽寺)까지 다니며 1일 10회 다닌다. 또한 주말
  과 휴일에는 600번 버스 일부가 '대곡역~용연사~비슬산휴양림~유가사' 구간을 1일 10회 운행
  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일주문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① 구마고속도로 → 화원옥포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반송리 → 용연사
② 대구시내 → 화원 → 간경교에서 좌회전 (또는 화원에서 명곡지구를 거쳐 명곡로 경유) →
   반송리 → 용연사

★ 용연사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5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 청소년 1,200원 (단체 800원) / 어린이
  800원 (단체 400원)
* 용연사 점심공양은 맛이 제법 좋다. 공양시간은 12~13시이며, 음력 초하루나 석가탄신일, 기
  타 절 행사가 있을 때는 연장될 수 있다.
* 용연사 관광안내소에서 문화유산해설사의 용연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10시부터 18시까지(겨울 17시) 근무하며, 설과 추석 연휴에는 쉰다. (근무 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82 (용연사길 260 ☎ 053-616-8846)


♠  용연사 극락전 주변 둘러보기

▲  요사채와 삼성각

경내 중앙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이 뜨락을 굽어보며 좌우로 삼성각과 영산전을 거느리고 있
고, 뜨락에는 3층석탑이 서 있다. 뜨락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종무소, 요사채, 안양루가 포근히
감싸는 형태로 법당 하나에 탑이 하나인 이른바 1금당 1탑 형식의 가람배치를 취했다.


▲  용연사 극락전(極樂殿)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41호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53년에 지어졌다. 1726년 화재로 무너진 것
을 1728년에 중건했는데, 이때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간판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규모는 그리 크진 않지만 좌우로 반토막 크기의 영산전과 삼성각을 거느리고 있어 중심 건물로
서의 기품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건물의 가운데 어칸을 협칸보다 넓게 잡았으며,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얹히고 전면에 운각과 용을 장식해 아름다움을 끌어올렸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 - 보물 1813호

극락전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리며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이들은 1655년에 당시 유명한 조각승이던
도우(道祐)가 만든 것으로 근래에 아미타불 뱃속에서 후령통과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 복장전
적(腹臟典籍) 등 발원문 8점과 후령통 3점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불상 조성 시기와 조성 주체, 제작자 등이 속시원히 밝혀져 17세기 불상 연
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1762년에 작성된 중수개금기까지 딸려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올해(2014년) 1월 20일 아미타불과 복장유물이 한 덩어리로 국가지정 보물 1813호로 단
번에 승진되었다.
 
보물의 지위를 누린 아미타불과 좌우 보살의 표정에는 자비로움이 가득하여 속세살이에 지친 중
생을 위로하며 그들 뒤에는 1777년에 제작된 영산회상도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  용연사 3층석탑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28호

극락전 뜨락에 서 있는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고려시대 탑
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옥개석 받침이 4단인 것과 옥개 낙수면이 짧고 추녀가 얇
은데 반해 받침이 높은 형식으로 이들을 통해 신라 탑에서 변질된 고려 탑으로 여겨진다.
탑 높이는 3.2m로 근래에 보수를 벌여 깨지거나 부실한 부분을 보충했으며, 장대한 세월의 때가
곳곳에 역력하다.


▲  빛바랜 목조 구시

극락전 곁에는 나무로 만든 길쭉한 목조 구시가 누워있다. 이 구시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나무
통으로 쌀을 담거나 법회나 행사 때 공양용으로 쓰였는데, 왕년에는 거의 100명 분의 밥을 담았
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밥 대신 먼지만 가득하니 사람이든 물건이든 뒷전
으로 밀려난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구시의 체면도 살려줄 겸, 그를 깨끗히 손질하여
옛날 공양 체험 이벤트를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  삼성각 밑에 누운 두꺼비상의 위엄
조각 수법이 아까 전 악어상과 비슷하다. 아마도 악어상을 기증한 신도가
악어와 같이 넘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  선열당(禪悅堂)이라 불리는 요사(寮舍) 정면
승려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넓은 방을 갖추고 있다.
점심공양은 요사 뒤쪽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는 심검당(尋劍堂)

▲  용연사 영산전(靈山殿)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석가3존불과 16나한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영산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를 협시한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 봉안된 그림들
오른쪽부터 산신할배의 산신탱,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독성할배의
느긋함이 돋보이는 독성탱


♠  용연사 명부전 주변, 그리고 점심공양

▲  요사에서 명부전으로 넘어가는 불이문(不二門)

용연사는 중심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석조계단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구역
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명부전 구역은 경내
의 중심인 극락전 구역 남쪽에 있는데 요사 옆구리와 불이문을 지나 청운교(靑雲橋)란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온다. 이 구역에는 명부전과 사명당, 독산각이 자리해 있다.


▲  불이문에서 바라본 명부전 구역
명부전을 비롯한 건물 3동이 조촐하게 구역을 이룬다.

▲  용연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다. 처마 밑에는 어느 갑술년(甲戌年)에 쓰인 공덕기(功德記)와 관음계(觀音契) 현판이 걸
려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
온화한 미소를 드리우며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해 나란히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  문을 꽁꽁 걸어잠군 사명당(四溟堂)

명부전 곁에 높이 축대를 쌓고 황토색 담장을 걸치며 들어앉은 사명당은 절의 가장 어른인 주지
승이 머무는 주지실이다. 원래는 관음전(觀音殿)이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절 중창을 지시
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고자 사명당이라 했다. 사명당 곁에는 독산각(獨山閣)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이 있으며, 이들 건물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명부전에서 바라본 청운교와 요사채

명부전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극락전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13시, 1시간 가까이 경내를 방황
하니 시장기가 가득 피어올라 나를 괴롭힌다. 경내에는 적막한 산사의 이미지를 지키듯,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공양간이 있는 요사 뒤쪽으로 들어가니 그 안은 사람들(아줌마와 할머니가
대부분)로 북새통을 이루어 썰렁한 바깥과 완전 대조를 보인다. 그 시간 절에 발을 들인 사람들
2/3 이상이 요사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점심시간은 13시까지인데, 사람들이 많아 아직도 공양(供養)을 제공하고 있었다. 요사로 들어가
일반인도 공양이 가능한가 물으니 당연히 그렇다며 한숟가락 들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기쁜
표정을 띄며 신발을 벗고 요사로 들어가 공양 행렬에 동참했다. 약간 붉은 양파를 비롯한 갖은
채소가 버무려진 그릇에 주걱으로 밥을 담아주는데, 많이 달라고 청하니 2주걱을 더 준다.
밥과 함께 숭늉 1그릇과 떡을 하나씩 거머쥐고 마땅한 자리를 찾았으나 사람들로 미어터져 두
다리를 편히 할 자리가 마땅치가 않았다. 간신히 좁게나마 자리가 하나 생겨 그곳에 낑겨 앉아
열심히 점심 공양에 임했다.


▲  용연사 점심공양의 위엄

공양밥은 다양한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이다. 붉은 양파와 콩나물, 시금치, 고사리 등의 나물
이 흰쌀밥과 고추장과 조화를 이루며 어엿한 비빔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용연사 공양밥은 공양간 아줌마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담겨 제법 맛이 좋았다. 지금까지 섭취한
공양밥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반대로 공양밥 최악의 종
결자는 여기서도 그리 멀지 않은 경산 갓바위(선본사) 공양이었다. 절 나들이에서 공양을 하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지만 안타깝게도 중생들에게 널리 공양을 펼치는 절이 그리 많지 않다.

밥그릇을 아주 깨끗히 비우고, 숭늉과 떡을 먹고 나니 포만감의 행복과 식곤증이 나를 감싸고
돈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5분 정도 머물렀으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와 자리를 내주고 방을 나섰다. 동화사나 갓바위처럼 그렇게까지 유명한 절도 아닌데 사람(특히
신도들)이 많은 걸 보아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어 문의를 하니 음력 초하루라고 그런다.
자리를 뜨면서 공양할 때 발견하지 못한 된장국을 1그릇 섭취하고 숭늉도 2그릇이나 더 마신 다
음 내가 먹은 그릇을 목욕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  용연사 석조계단, 적멸보궁

▲  적멸보궁 입구

▲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계단

기분 좋게 점심공양을 마치고 용연사의 나머지 부분인 석조계단(적멸보궁)으로 이동했다. 적멸
보궁 입구에는 일주문을 닮은 문이 서 있는데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琵瑟山 龍淵寺 寂滅寶宮
)'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지나 잘 다듬어진 계단을 한발짝씩 오르면 초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적멸보궁과 비슬
산으로 갈린다. 초소를 지나니 아까 문화유산 해설사(이하 해설사) 아저씨가 초소에서 나와 구
경 잘했냐고 묻는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세 표정을 바로 하고 잘 둘러
봤다고 답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주마간산처럼 보고 가는데 반해 1시간 이상 꼼꼼히 본
것 같다며 칭찬의 말을 건네면서 적멸보궁을 안내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그를 따라 적멸보
궁으로 들어갔다.

▲  용연사 주변을 정비한 기념으로 세운 정비불사공덕비(整備佛事功德碑)

▲  시원스런 지붕의 적멸보궁 정문 -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용연사 3대 구역의 하나인 금강계단 구역은 높이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적멸보궁과 향로전을 두
고 가장 높은 뒷쪽에 자리를 다져 석조계단과 사리탑을 세웠다.

석조계단을 가리고 선 적멸보궁(이하 보궁)은 극락전에 버금가는 지체 높은 건물로 보통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앞에 둔다. 사리탑에 불사리(佛舍利)가 있으므로 적멸보궁 불단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그냥 빈 자리로 둔다. 살짝 휘어진 2개의 활주가 지붕 추녀를 받들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덩어리가 매우 섬세하다. 보궁 어칸(가운데 칸) 앞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그 계단은 법회(法會) 때 절의 고참 승려만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계단 외에는 보
궁으로 접근하는 계단이 쉽게 보이질 않아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무심코 그 계단을 오르
락거린다. 허나 건물 양쪽에 보궁으로 가는 계단이 있으니 가운데 계단을 오르는 실례는 범하지
않도록 한다. 물론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가면 어디 법을
지키라는 명언처럼 예의는 되도록 지키는 것이 좋다.


▲  적멸보궁 내부
불단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뒤에 유리창을 내어 석조계단과 사리탑이 보이게끔 했다.

▲  적멸보궁 곁을 지키는 향로전(香爐殿)
적멸보궁을 관리하는 건물로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적멸보궁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건물들

적멸보궁 좌우에는 고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이들 건물은 따로 이름이
없다고 하며, 사리탑과 석조계단을 관리하던 승려의 숙소나 예불을 하던 공간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굳게 문을 봉한 채, 적멸보궁의 좌우를 호위한다.


▲  용연사 석조계단(石造戒壇) - 보물 539호

적멸보궁 뒤에는 용연사의 상징인 석조계단이 자리해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도 하며,
네모난 기단에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을 심어 부처의 불사리를 봉안했다. 계단(戒壇)은 흔히 말
하는 오르락 내리락 계단이 아닌 수계의식(受戒儀式)을 거행하던 곳으로 통도사(通度寺) 금강계
단이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 사리탑을 파괴하자 사명대사가 사리를 수습하여 금강산으로 가져가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어찌하면 좋을 지를 문의했다. 서산은 본래 있던 곳에 마땅히
되돌려 줘야 한다고 답을 하니,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두고 만약을 위해 다른 하나는 제자 선
화(禪和)에게 주어 태백산 보현사(어딘지??)에 봉안토록 했다. 허나 그때는 아직 경상도 지방이
안정되지 못했고, 선조(宣祖)의 명으로 왜열도(倭列島)에 사신으로 가게 되면서 사리를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임시로 두었다.
그 이후 사명이 입적하자 제자 청진(淸振)이 각림사에 봉안한 사리함을 용연사로 가져와 모시면
서 신도들과 상의하여 사리탑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서산과 사명의 뜻을 모두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를 통도사로 보내고 1과만 용연사 북쪽에 봉안했으며, 사리탑은 1673년에 완성되었다.

이 탑은 2단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큼직한 네모난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얇은 원형 괴임돌을
2개 포개 석종형 사리탑을 올렸다. 사리탑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가 중간을 지
나면서 좁아지는 것이 영락없이 범종을 닮았는데, 탑 윗부분에는 구슬 무늬를 1줄로 두르고 겹
으로 된 연꽃 무늬 위에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새겼다. 2단의 기단 중 윗층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면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4면을 8칸으로 나눈 뒤, 칸마
다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새겼다. 아래 기단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장대석으로 마감했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원래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여러 차례 도난을 당해 지금은 경내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며, 기단 주변으로 1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8각으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
워 연결했다. 난간에 쇠창살을 꽂은 것은 1934년에 탑을 보호하고자 설치했으나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계단 앞에는 상석(床石)을 두었고, 그 옆에 조금 비뚤어진 석등(石燈)은 계단에 난간을 달았을
때 같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계단 주변에는 황토 담장을 둘렀고, 계단의 보호를 위해 계단
앞쪽에 보호철책을 두르면서 접근이 어렵게 되었다.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한다고 함)

이곳 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과 더불어 이 땅의 대표적인 계단으로
꼽히며, 계단에 얽힌 이야기처럼 정말 사리가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수 차례 도굴 시도가
있었다고 하니 도굴이 되었을 가능성도 제법 있다고 한다.


▲  석조계단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석조계단비 - 비석 이름은
'사바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이다.

▲  적멸보궁 부근에 터를 닦은 승탑 형제들

향로전 뒤쪽 담장 너머에 조선 후기 승탑 7기가 1열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들은 죄다
석종 스타일로 별도로 비석 2기가 서 있는데, 하나는 송파 각민(松坡覺敏, 1596~1675), 다른 하
나는 동운 혜원(東雲慧遠, 1637~1702)의 비석이다. 승탑의 주인이나 승탑 이름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며, 여기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산자락에도 조선 후기 승탑 5기가 숨겨져
있다.

적멸보궁과 석조계단을 둘러보면서 해설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궁금한 것은 정말 은하
계에 널린 별만큼이나 많은데 정작 질문 거리가 생각이 안난다. 머릿 속에서 간신히 질문 거리
를 긁어내어 물어보면서 의문 거리를 일부나마 해소했으나 머리가 장식용이라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해설사는 제법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초청 강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통
도사에서 해설사를 하다가 용연사로 넘어왔는데 각 절마다 익혀야 될 내용이 너무 많아서 힘들
다고 한다. 간신히 용연사의 모든 것을 꿰었는데. 다른 절로 근무지가 바뀌면 그 절에 대해 처
음부터 공부를 해야 된다. 또한 관람객들이 대충 둘러보고 가는 게 다반사라 너무 사물을 볼 줄
모른다며 따끔한 충고도 건넨다. 상황이 이러니 질문을 건네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이며, 이
렇게 자신을 귀찮게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대구시티투어버스가 들어왔다. 가이드 2명이 양이(洋夷) 여자 관광
객 2명을 데리고 와서 석조계단을 구경시켜주고 해설사와 인사를 하며 시내로 나갔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더 머물러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다. 이곳에
발을 들인지 벌써 4시간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2시간 남짓 있다 갈려고 했는데, 시간
도 참 빠르다. 게다가 부산(釜山)에도 늦지 않게 들어가야 되는 터라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속세로 나가는 버스가 20분 뒤에 있길래 매표소 밑 주차장까지 가려고 했으나 마침 해설사와 안
면이 있는 신도 아줌마 3명이 수레를 끌고 속세로 나가려고 하자 해설사가 그들에게 나를 태워
달라고 부탁을 넣으면서 그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렇게 짧지만 용연사와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갔다.

나를 태워준 아줌마 신도는 모두 대구 사람<1명은 인천 사람으로 대구로 시집 왔음>이다. 수레
를 끌고 온 아줌마는 시지동에서 왔는데, 그들은 절에서 가져온 고사떡과 사과를 나에게도 아낌
없이 나눠주었다.
화원으로 나와서 아줌마 2명과 작별을 고하고 인천 출신 아줌마 신도와 대구시내버스 655번을
타고 대곡역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환승하여 칠성역에서 나머지 작별을 고했다.

이날은 원래 팔공산 부인사(夫人寺)를 가려고 했으나 교통이 좋지 못해 용연사로 바꿨다. 허나
용연사에서 맛있는 점심공양도 먹고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했으며(해
소하면 뭐하나? 다 까먹는데) 아줌마 신도의 도움으로 쉽게 속세로 나왔고, 그들에게 떡과 사과
를 나눠 받는 등, 푸짐한 인심을 느꼈다. 부인사로 갔으면 아마도 이런 것을 누리진 못했을 것
이다. 용연사로 가게 된 것도 다 이런 인연들과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라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었던 것 같다.
용연사에게 나는 잠깐 스치고 사라지는 존재이고, 내 입장에서도 용연사는 1번 아니면 2번 정도
스치는 그런 장소이지만, 지금까지의 사찰 나들이 가운데 제법 인상과 정이 깊었으며, 여러 좋
은 경험과 넉넉한 인심을 체험했던 것 같다. 용연사에서 겪은 그 추억과 인연을 고이 간직하며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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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2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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