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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현풍(玄風) 나들이 ~ 도동서원, 이노정 ♠
도동서원 담장
▲  도동서원 담장
 


여름의 제국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7월 중순, 경북의 중심지인 대구(大邱)를 찾았다. 대구에서
현풍(玄風) 지역 투어를 같이 할 여인네와는 북부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하여 동서울터미널에서
구미행 직행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바로 대구 북부로 가는 차편이 없음)
피서객들로 미어터지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주 방면 버스는 대기시
간이 무지 긴데 반해 구미행 버스는 무척이나 한산하다.

피서차량으로 여름 몸살을 앓는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여
구미까지는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 구미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대구 북부행 직행버스를 잡
아타고 오후 2시에 북부정류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이르니 만나기로 한 여인네는 그의 4발 수
레를 끌고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차에 오르니 현풍에서 왔다는 그의 친구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셋이서 현풍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지~~

아직 다들 점심을 못먹은 터라 현풍 직전 달성1차공단에서 그들의 단골 식당에 들어가 간단하
게 뼈다귀해장국을 먹었다. 그렇게 점심을 채우고 그의 친구가 만든 과자를 후식으로 배의 나
머지 공간까지 꾸역꾸역 채우니 포만감의 행복에 쓰러질 지경이다.

잠시 현풍터미널에서 들려 부산으로 가는 직행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1번째 답사지인 도동서원
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 여인네는 고향이 달성군 구지면이라 현풍과 구지 일대를 훤하게 꿰고
있어 나들이에 그리 불편은 없었다.

현풍에서 도동서원까지는 성하리와 자모리를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가다가 대니산(戴尼山, 408
m) 북쪽에 둘러진 험한 고갯길 다람재를 넘어야 된다. 다람쥐가 연상되는 다람재는 그 귀여운
이름과 걸맞지 않게 강원도의 고갯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험준하기 그지 없어 눈이 오
면 아예 통행이 불가능하다.
구불구불의 극치를 누리며 힘겹게 고개를 오르니 드디어 전망이 확트인 고개 마루에 이른다.
고개 정상에는 고개를 오르느라 지친 나그네와 수레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조촐하게 공
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선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서원 주변과 강 건너로
고령군 개진면이 시원스레 두 눈에 다가와 조망도 괜찮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마음까지 여
유로워지는 이런 곳에 서면 멋드러지게 시(詩) 한 수 읊어야 폼이 나겠지만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해 그냥 쉽게 감탄사만 연발했다.


▲  다람재 정상에 세워진 6각형 정자
정자에 오르면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리, 강 건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오사리, 옥산리 지역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1)
강 왼쪽은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로 기와가 씌워진 도동서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강 오른쪽은 고령군 개진면이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2)
장마로 누런빛을 드러낸 낙동강 너머의 비옥한 평야는 고령군 개진면 옥산리

▲  뭉글뭉글한 다람재 표석
도동서원을 찾는 답사객이 늘자 대구시에서는 서원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인 다람재를
정비하고 고갯 마루에 다람재 표석과 정자를 갖춘 아담한 쉼터를
만들어 그들의 발길을 배려했다.

▲  김굉필(金宏弼)의 시 한 수가 담긴 표석

 <
길가의 소나무(路傍松)>
  一老蒼髥任路塵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勞勞迎送往來賓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는가


다람재에서 비록 보이는 범위는 좁지만 눈 아래로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며 대니산과 낙동강이
제공헌 선선한 기운을 즐기다가 구비구비 고갯길을 내려와 도동서원을 찾았다. 서원 주차장에
이르니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먹구름이 조금씩 빗방울을 뿌려 천하를 적히기 시작한다.
서원을 둘러보기 전에 잠시 도동서원의 내력을 흔쾌히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서원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道東書院) - 사적 488호
(강당과 사당, 담장은 보물 350호)

▲  다람쥐와 서화 무늬
자모에서 도동으로 넘어오는 다람재란 고개 이름이 이 다람쥐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하늘을 향해 꼬랑지를 흔들며 열심히 올라가는
모습은 조정으로의 출세를 염원하는 유생들의 욕심이 담겨진 것이다.


대구의 대표적인 서원인 도동서원은 앞에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대니산을
배경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이 서원은 1568년 조선5현(朝鮮五賢)의 하나로 꼽히는 한훤당 김굉
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유림(儒林)에서 현풍 동쪽 비슬산(琵
瑟山) 자락에 세웠다. 여기서 조선5현이란 정여창(鄭汝昌), 이황(李滉), 조광조(趙光祖), 김굉
필, 이언적(李彦迪)을 일컫는다.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정식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파괴되었다.

1605년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유생들의 후원을 받아 김굉필의 무덤 밑인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재건하고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했다. 김굉필의 명성 탓인지 유생
들이 보낸 후원금이 상당하여 제법 많은 돈이 남았다고 하며, 정구는 그 돈을 다른데 쓰지 않고
죄다 서원을 꾸미는 데 쏟아부었다고 한다. (차라리 왜란 이후 어렵게 살던 백성들을 도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1607년 공자(孔子)의 도가 동쪽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도동서원으로 사액되면서 동네 이름도 도
동(道東)으로 강제로 변경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도 운좋게 비켜
가면서 조선 중기 서원 양식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달성군이 경상북도 시절에는 도동서원이 경북 제일 남쪽 끝으머리에 자리한 탓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서원을 이루는 건물도 거의 폐가처럼 변해갔고, 용머리와 여러가지 조각들이 도난
당하고 훼손되기가 바뻤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6년 대구에 강제로 편입된 이후, 비로소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산지형(山地形) 서원의 배치형태로 진입공간과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눠져 있다. 진
입공간에는 수월루와 외삼문이 있고, 공부를 하는 강학공간에는 강당과 동재, 서재, 장판각이
있으며, 서원에서 제일 뒤쪽이자 가장 높다란 곳에 제향공간인 사당이 자리한다.

도동서원은 달성군(達城郡)의 이름난 명소로 필수 답사지로 손꼽힌다. 비록 안동 도산서원(陶山
書院)이나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명성까지는 아니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고 시간이 흐
를수록 찾는 이도 정비례로 늘어나 우리나라 서원의 새로운 성지(聖地)로 부각되고 있다. 이곳
이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다른 서원과 차별화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선 서원 주변을 두르는 흙담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담장으
로 유명하며, 강당은 기단이 높고, 용머리와 다람쥐 등의 동물상, 서화(瑞花) 등이 조각되어 건
물의 품격을 드높인다. 게다가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門)은 특이한 구조로 눈길을 잡아
맨다. 이들 담장과 강당은 서원에서 따로 분리하여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앞에는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아름드리 그늘을 드리워주며, 신도비와 사
적비 등이 자리한다. 유물전시관에는 왕이 서원에 내린 서책과 제기(祭器), 경현록(景賢錄) 목
판 등이 전시되어 있으나 거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윽하고 정겹기 그지없는 도동서원, 400년 묵은 오랜 은행나무가 선사한 그늘로 마음이 시원하
며, 선비의 낭낭한 글읽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서원 내부, 다른 서원과 차별을 둔 다양한 볼
거리로 눈과 마음이 즐거운 곳이다.

※ 도동서원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600, 655,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현풍터미널 하차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급행좌석 4번을 타고 유가치안센터 하차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창녕, 의령 방면 직행버스 이용
* 현풍터미널과 유가치안센터, 구지에서 달성4번(1일 7회 운행)을 타고 도동 종점 하차, 버스에
  서 내리면 바로 도동서원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정표가 잘 갖추어져 있어 찾기는 쉬움)
① 구마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수라리 → 도
   동서원
② 구마고속도로 → 달성나들목 → 논공카톨릭병원 → 현풍외곽도로 → 현풍3교 지나서 우회전
   → 자모 → 다람재 → 도동서원

★ 도동서원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
* 사당은 향사(享祀)를 지내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일과 8월 중정일에만 공개된다.
* 유물전시관은 평소에는 문이 잠겨져 있다. 사전에 문의하기 바란다.
* 도동서원 뒷산에 김굉필의 묘소가 있다.
* 도동서원 문화관광해설사가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근무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10시~18시까지
  이며 설과 추석연휴에는 근무하지 않는다. 해설을 원하면 도동서원 관광안내소를 찾는다.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구지서로 726) <☎ 053-617-7620>


▲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은행나무 - 대구 보호구 3-9호

도동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존재가 바로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커다란 은행나무이
다. 나무의 덩치가 얼마나 거대한지 그의 앞에서는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위대한 자연
의 힘과 400년의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다.
이 나무는 서원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존재로 1607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던 한강 정구가
서원이 사액된 기념으로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하나 확실하진 않으며,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을 기
리고자 조선 후기에 서원 관계자들이 김굉필나무라 이름을 붙인 것이지 절대 김굉필이 심은 나
무가 아니다.

400년의 지긋한 나이에도 변함없이 울창한 모습을 간직한 은행나무의 자태와 웅장함에 그저 감
탄사 밖에는 쏟아지지 않는다. 천연기념물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정말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나무의 품격에 걸맞지 않게 아직까지 보호수(保護樹) 등급에 머물러 있다. 먹구름의
영향으로 나무 사진이 다소 흐리게 나왔지만 여름의 제국이 사라지고 가을이 오면 가을에 물든
아름다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  노쇠한 나무의 가지를 받치는 기둥들

아무리 울창하고 거대한 모습을 지녀도 400년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400년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다. 나무의 동쪽 줄기
는 이미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역시나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
이다, 옛날에는 동네 애들이 땅에 내려앉은 가지를 타고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고 한다.


▲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水月樓)

수수한 모습을 지닌 수월루는 서원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누각이다. 누각에 오르면 은행나무 너머로 낙동강의 풍광이 속시원하게 다가온다. 이곳은
유생들이 공부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며 바람을 쐬는 쉼터 및 교육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누
각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2명 정도가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이는 세상의 번잡함을 멀리하고
서원에 지나치게 사람이 많은 것을 경계하며, 정말로 학문에 정진할 소수정예만을 받아들이겠다
는 서원의 의지로 보인다.

수월루란 이름은 누각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바라보여 지어진
풍류적인 이름이다. 강과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헛제사밥을 차려 음식과 곡차를 끼며 달놀이
를 즐기던 현장으로 선비들의 해학적이고 고풍스런 풍류가 와 닿는 공간이다. 지금은 노쇠한 수
월루의 보존을 위해 누각 출입이 통제되어 그들의 풍류를 따라하지 못함이 애석할 따름이다.

◀  수월루에서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
門)
수월루를 지나면 강당으로 향하는 조그만 계단
과 함께 환주문이 나온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란 뜻으로 주인의
식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
다. 이곳의 계단도 수월루의 계단처럼 폭이 좁
고, 문의 높이도 낮아 부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이는 옛 사람들의 키가 작아서
가 아니라 서원에 들어온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
고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과 서원에 있는 덕망있
는 이들에게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란 뜻에서
문의 높이를 일부로 낮게 만든 것이다.
머리가 부딪쳐 혹여나 문이 손상되지 않도록 머
리를 푹 숙여 문을 들어서니 마음가짐이 절로
숙연해진다.

여닫이 문을 고정시키는 정지석(현판이 걸린 평
방의 양쪽 모서리)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
져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

▲  도동서원 서재<西齋, 거의재(居義齋)>

▲  도동서원 동재<(東齋), 거인재(居仁齋)>

환주문을 들어서면 강학공간인 강당이 정면에 나타난다. 그 좌우로 서원 유생들의 숙소인 조그
만 서재와 동재가 서로 마주보며 자리해 있는데, 서재는 의로움이 산다는 뜻에서 거의재, 동재
는 인자함이 사는 뜻에서 거인재라 불린다. 서원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구름처럼 몰려
왔을 유생들의 고무신이 가득했을 섬돌에는 먼지만이 자욱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아무
도 없는 방문에 귀를 대면 학문의 어려움에 넋두리를 떨던 그들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올 것만
같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어려운 것이다.


▲  강당 앞뜨락에 머리를 내민 거북이
화마(火魔) 등의 나쁜 기운을 막고자 만든 것으로 보인다.

▲  강당 우측에 자리한 장판각(藏板閣)
서원의 소중한 보물인 경현록(景賢錄)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물전시관에 가 있다.

▲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中正堂) - 보물 350호

고색의 때가 만연한 서원의 강당(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1.5m의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웅장함과 품격이 더욱 돋보인다. 건물 좌측과 우측 방은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개방된 대청마루로 유생들이 유학의 도를 배우며 토론하던 장이다.
건물의 모습은 여느 한옥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이 건물의 매력은 바로 기단부에 있다. 기
단을 이루는 돌은 일정한 법칙이 없이 제멋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분방하게 늘어서 눈길을 끈다.
그런 기단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가 삐죽 나와 있으며, 다람쥐 모양의 동
물상과 서화(瑞花)무늬 2쌍이 조각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들 무늬는 모두 나름대로
의 뜻을 담고 있으니, 기단을 유심히 살펴 괜한 보물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  삐죽 고개를 내민 용머리

멀뚱한 표정으로 기단 밖으로 고개를 내민 4마리의 용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마(火
魔)의 피해를 막고자 만든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들 용머리는 겉으로 보기에
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여러 차례 도난을 당했던 아픔의 과거를 간직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저 중에서 1~2개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모조품이
라고 한다. 모조품의 진품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물전시관이나 대구에 있는 모박물관
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  해학적인 표정의 용머리 ~ 용머리의 눈이 마치 누군가에게 단단히
얻어터진 듯, 밤탱이가 된 것처럼 보여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  강당 내부에 걸린 2개의 현판

▲  강당 좌측에 있는 굴뚝
연기를 모락모락 뿜어내던 왕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의 모습에 쓸쓸함이 비쳐진다.

▲  사당으로 들어서는 내삼문(內三門)

강당 뒤에는 서원의 중심인 사당이 있다. 김굉필이 배향된 사당으로 들어서려면 내삼문을 지나
야 되는데 제향일을 제외하고는 입을 굳게 봉한 채,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  도동서원의 백미, 담장 - 보물 350호

고색이 가득 깃들여진 담장은 자연석을 정렬시킨 바닥돌 위에 자연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
를 5단으로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 거의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웠다. 담장에
암키와와 수막새를 사용한 것은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담장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장식효과
를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밋밋한 모습의 다른 서원의 담장과 달리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
으로 우리나라의 오래된 담장 중에서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흙과 돌, 기와를 적절히 이용했으며 수막새를 달아놓은 매력적인 담장으로 나중에 한옥을 짓고
산다면 저런 담장을 만들어 집을 두르고 싶다. 서원과 외부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담장에 미적
(美的)인 부분이 크게 배려되어 밤손님조차도 담을 아껴줄 것 같다. 담에 쓰인 흙에는 오랜 세
월의 누런 때가 가득 끼여 담장에 대한 눈길을 단단히 붙들어 맨다.


♠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이 말년을 보내며, 석별의 정을 나누던 곳
이노정(二老亭)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이노정 전경 (정자를 가린 건물은 정자를 관리하는 노부부의 집)

▲  담장 너머로 바라본 이노정

▲  곁에서 바라본 이노정

도동서원을 둘러보고 구지(창리)를 거쳐 내리에 있는 이노정을 찾았다. 모정에서 이노정을 알리
는 갈색 이정표를 따라 조그만 농로로 들어서면 막다른 곳에 녹음이 짙은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부뚜막 연기가 뿜어 나올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의 기와집, 이노정이 나온다.
세상과 거리를 두며 강가에 홀로 자리한 외로운 기와집인 이곳까지는 현대의 이기(利器)는 전혀
들어오지 못하고 전통 방식으로 초롱불로 어두운 밤을 밝히며 장작을 뗄 것 같은 분위기가 엄습
한다. 허나 안으로 들어가보면 티비에 냉장고까지 현대의 이기는 이미 여기까지 손을 썼다. 이
곳은 도동서원처럼 낙동강변에 자리해 있는데 그곳과는 달리 강이 바라보이는 높다란 곳에 터를
잡았다.
 
고색창연해 보이는 이노정은 다른 말로 제일강정(第一江亭)이라고도 하며, 김굉필과 정여창(鄭
汝昌)이 말년을 보낸 곳이라 전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당한 그들이 시골(김굉필은 도
동서원이 있는 도동리, 정여창은 함양)로 내려와 살다가 1504년 이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정자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팔자 좋게 지내다가 연산군(燕山君)이 훈구파(勳舊派)와 건
방진 사림계열 유생들을 때려잡고자 일을 벌린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로 석별의 정을 나누
었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처단되었다. 정자의 이름인 이노(二老)는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
네를 지칭한 것으로 그 당시 그들의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도동에 머물던 김굉필은 배를 타고 10km 떨어진 이곳을 자주 왕래했다고 하며 그들이 사라진 이
후 정자는 그들을 추모하는 이들이 관리하였다. 1885년 영남 유림에서 중수를 했고, 1904년에도
수리를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자의 두 이름(이노정, 제일강정)이 새
겨진 현판과 그들이 지은 유악양(遊岳陽, 악양을 거닐다)이란 시가 걸려있다.

이곳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천정에는
우물정(井) 모양의 통풍구를 두어 산바람과 강바람이 서로 어우러지게 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하다. 정자 주변으로는 얕은 담장을 둘렀으며 정자 밖에 뒷간을 두었다.

현재 이노정은 어느 노부부가 관리하고 있다. 그들은 정자 앞에 딸린 조그만 기와집에 살고 있
는데, 드문드문 오긴 하지만 정자를 찾은 답사객에게 정자 내부를 둘러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다. 우리가 갔을 때는 처음에는 조금 경계의 눈빛을 보냈는데,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표정을
바로 하고는 구경하고 가라며 내부로 안내해 주었다.

그들은 이노정에서도 가끔 잠을 자고 생활을 하는지, 정자 내부는 모기장이 쳐져있고, 여러 생
활용품이 널려 있는 등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비록 세상물정 모르고 공자와 성리학 사상만 들
쑤시던 지배층의 전유물이긴 하지만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살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가짐이 보
이는 정자로 두 노인네가 술 한잔 걸치며 시를 짓고 달놀이를 즐길 때 그들의 노비는 강에 돌을
던지며 신세 한탄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벼슬을 박탈당하고 시골에 숨어 사는 처지긴 하
나 잘나가는 집안의 양반이자 조선의 중심계층인 선비이며, 그들을 추종하는 제자들이 많기 때
문에 먹고 사는 문제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  중후한 멋이 엿보이는 이노정 현판

▲  제일강산(第一江山) 현판


▲  정자 밖에 자리한 뒷간 - 하얀 털의 견공(犬公)이 처음 본 우리에게
경계의 메세지를 보낸다.

▲  정자 담장 밖으로 장맛비로 불어난 낙동강이 보인다.
강 건너로 보이는 곳은 고령군 우곡면이다.

▲  온돌방을 지피던 아궁이의 흔적

▲  아마존의 깊은 늪지대처럼 다가서기가 두려운 이노정 앞 낙동강 늪지대
홍수가 심할 때는 저 늪지대는 물론이고 정자 앞까지 강물이 넝실거린다.


※ 이노정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이방, 의령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모정(내리) 하차 (1일 20회
  남짓 운행)
* 현풍터미널에서 이방, 신반, 의령 방면 직행버스 또는 달성7번 시내버스(1일 6회)를 타고 모
  정(내리) 하차
* 모정에서 대암리, 의령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이노정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5분 정도 들어가면 이노정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노정까지 차량 접근 가능, 단 길이 좁으므로 정자를 둘러보고 차를 돌
  려 나갈 때 주의 요망)
① 구마/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모정 → 이노정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내리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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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2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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