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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맞이 산사 나들이,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

▲  파계사 원통전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봄이 천하를 파릇파릇 물들이던 4월 한복판에 그리운 이들을 보고자 부산으로 길을 떠났다.
부산(釜山)으로 가면서 중간에 대구(大邱)에 들렸는데,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팔공산
파계사를 찾기로 했다. 이곳은 이미 13년 전에 가본 곳이지만 기억도 흐릿하고, 그때 보는
것과 지금 보는 것도 확연히 틀리며, 그 당시 안가봤던 파계사의 뒷쪽 부분(성전암과 현응
대사 부도)도 살펴볼 겸 해서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대구역 정류장에서 대구시내버스 101번을 타고 북구청, 복현5거리, 불로동, 지묘동을 차례
대로 지나 거의 1시간 만에 파계사 종점에 도착했다. (대구역 맞은 편에서 101-1번을 타도
됨)

파계사 종점에서 파계사로 인도하는 파계로 주변에는 파계사 지구가 형성되어 편의점과 온
갖 식당, 찻집, 까페, 숙박업소 등이 무리를 지어 앉아 속인(俗人)을 유혹한다. 허나 유혹
의 정도가 적어서 별무리 없이 파계사지구를 통과했다. 숲과 나무에는 녹색의 기운이 점차
강해지고 벚꽃을 비롯하여 개나리, 목련 등이 수줍게 꽃망울을 터트리며 봄의 분위기를 한
층 드높인다.



♠  파계사 가는 길 (느티나무, 하마비)

▲  현응대사 나무라 불리는 느티나무 - 대구 보호수 2-6호

파계사 종점에서 8분 정도 오르면 지긋한 연세의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약 250년 정도
묵었는데, 높이 15m, 둘레 4.1m에 이르며, 봄이 천하를 해방시켰건만 아직 잎도 피우지 못하고
겨울의 망령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성전암에 머물던 현응대사가 속세로 외출하여 밤에 돌아올 때 그
를 모시는 호랑이가 여기까지 내려와 그를 기다렸다가 성전암까지 태워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일종의 심야 셔틀 노릇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범의 정자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하여 대구시
에서 그 전설을 바탕으로 이 나무에게 '현응대사의 나무'란 이름을 지어주어 졸지에 이름이 2
개가 되었다. 허나 속세에서 무슨 이름을 지어주든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절과 산을 찾는 중
생에게 잠깐의 쉼터와 그늘을 제공하는 소중한 존재로 늘 그 자리를 지킨다.

현응대사 느티나무에서 5분 정도 오르면 별로 달갑지 않은 매표소가 중생과 차량을 멈춰 세우며
입장료를 받고 있다. 예전에는 입장료가 없었는데, 꼭 그런 미운 것만 도입하여 돈을 받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2012년 1월부터 차량들에게도 주차비를 물린다며 관련 현수막을 큼지막하게 걸
어놓아 적지 않게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매표소에 이르니 직원이 입장료를 내라고 그런다. 그래서 대학생 할인은 안되냐고 떠보니 인상
을 찌푸리며 그딴 것은 안된다고 한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발길을 되돌리기도 그렇고 나에게
는 딱히 선택권이 없는지라 동전을 다 털어서 1,5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유료(有料)의 땅으
로 들어선다.


▲  매표소 옆에 자라난 거대한 돌탑

파계사와 팔공산을 들락거리던 중생들이 얹힌 자연석이 모이고 모여 저렇게 장대한 돌탑으로 성
장했다.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산물로 이렇게까지 커다란 돌탑은 처음 본다. 중생들의 소망을
양분 삼아 오랜 세월을 두고 다져진 돌탑으로 그의 건강을 위해 주위를 난간으로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다.


▲  슬슬 깨어나고 있는 파계사 계곡
나의 무거운 번뇌를 계곡에 내던지며 일주문을 들어선다. 번뇌가 멀리멀리 흘러가길
바랬건만 흘러가기는 커녕 계곡 옆에서 나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  파계사 일주문(一柱門)

파계사 계곡을 가르는 다리를 건너면 파계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나온다. 문 옆에는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2차선 도로가 뚫려있어 굳이 문을 지날 필요는 없겠으나, 절에 왔다면 일
주문은 꼭 지나가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다.

일주문을 지나면 경사가 다소 각박해져 숨이 턱까지 차게 만드는데, 해탈의 세계로 가는 속세의
마지막 고비란 심정으로 길을 임하면 길이 좀 짧게 느껴질 것이다.


▲  계곡물을 모아둔 파계지(把溪池)

일주문을 지나 8분 정도 오르면 둑을 만들어 계곡물을 집합시킨 파계지가 나온다. 파계사 부근
에서 발원하여 큰 세상을 향해 흐르던 계곡물이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정든 고향을 등지고
금호강(琴湖江)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호수 주변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아직 초라한 몰골의 나무들은 봄의 도래에 기뻐하며 호수에 비친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
느라 여념이 없다.

파계지를 지나면 파계사가 모습을 보이면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 길은 성전암과 대비암
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길은 바로 파계사 주차장인데, 예전에는 연못이 있었다. 그 주차장을
지나면 경내로 이어지며, 주차장 한쪽에 있는 관광안내소 옆 길을 오르면 석축(石築) 위에 둥지
를 튼 비석과 부도(浮屠) 형제를 만나게 된다.


▲  부도와 비석들 (제일 오른쪽이 하마비)

부도와 비석 형제는 모두 8기(부도 3, 비석 5)로 조금은 오래된 조그만 부도 2기가 가운데에 있
으며, 하마비 옆 가장자리에는 근래에 지어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와 비석이 있다.
조그만 부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자리한 비석은 파계사의 장대한 역사를 담은 사적비(事蹟
碑)로 1936년 5월에 세워졌으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는 특이하게도 조그만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어 눈길을 끈다.

하마비는 하마 서식지가 아닌 궁궐과 지체 높은 이의 사당, 향교, 관아, 왕릉, 귀족의 무덤 앞
에 세우는 비석으로 80cm 높이의 비석 피부에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 즉 무조건 말
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7자의 글씨가 쓰여 있다. 파계사에 이토록 지엄한 하마비가 있게 된 것은
경내에 있는 기영각이 제왕과 왕실의 안녕을 비는 원당(願堂)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응대사가
양반과 유생의 횡포와 해꼬지로부터 절을 지키고자 숙종 임금에게 왕실의 원당을 설치해줄 것을
요청하여 지어진 것이다. 아무리 절을 깔보는 양반이라고 해도 왕실의 원당이 있는 절까지는 감
히 해꼬지를 할 수 없다.


▲  측면에서 본 부도와 비석들 (부도 3기, 비석 5기)



♠  파계사 입문 (진동루 주변)

▲  파계사 진동루(鎭洞樓)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10호

부도와 하마비를 둘러보고 경내로 향하면 경내의 중심을 가리고 선 진동루를 만나게 된다. 높은
축대 위에 문어발보다 많은 다리를 딛으며 위엄을 뽐내는 2층 규모의 진동루는 속세를 향해 넓
직한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그 계단을 올라 진동루의 아랫도리를 지나면 원통전이 떠오르듯 모
습을 비춘다. (진동루의 양 옆구리로도 경내 진입이 가능함)

이 건물은 1715년(숙종 41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1층 가운데 칸에 경내로 인도하는 통로를 냈고, 우측 칸에는 옛날에 쓰던 거대한 목조(木槽)가
누워있다. 그리고 2층은 법회나 행사 장소로 쓰인 일종의 강당(講堂)으로 우물마루로 천정을 꾸
며 조선 중/후기 양식을 잘 보여준다.

파계사란 절 이름은 파계승(破戒僧)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절 좌우 계곡의 물줄기가 9갈래
나 되어 그 물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지기(地氣)가 흘러나가는 것을 막고자 계곡을 잡는다는 뜻
의 파계(把溪)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허나 그 이름으로도 이곳의 기운을 제압하기가 벅찬지 그
기를 마저 잡는다는 의미로 이 누각에 진동루란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  진동루 1층에 있는 목조(木槽, 구유)

진동루 1층 우측 공간에는 커다란 목조(구유)가 누워있다. 얼핏 보면 말이나 돼지가 밥을 먹을
때 쓰는 통으로 오인 할 수 있다. 허나 이것은 승려와 신도들의 밥통으로 부엌에서 지은 밥을
이 통에 담아 공양을 하게 했으며, 수백 명의 밥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구유 가운데 바닥에는
통을 씻을 수 있도록 원공이 뚫려있다.
파계사가 잘나갔던 조선 후기에 절찬리에 쓰였던 통이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강제로 물러나 밥풀
대신 먼지만 가득하며, 숟가락과 주걱이 수없이 드나들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영조(英祖) 임금 나무'라 불리는 느티나무

진동루 앞에는 250년 정도 묵은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다정하게 솟아나 있다. 이 나무는 영
조 임금 나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들으면 진짜 영조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나무로
보일 수 있다. 허나 영조가 파계사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곳까지 내려
온 적은 없다. 단순히 경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를 골라 '영조임금나무'란 이름을 붙여
이곳의 명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영조하고도 전혀 관련이 없는 나무에게 그런 이름을 무턱대고 주었으니 그도 좀 어이가
없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파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팔공산의 주요 사찰인 파계사의 역사
대구의 듬직한 진산(鎭山)이자 대구, 경북 지역의 불교 성지(聖地)로 꼽히는 팔공산(八公山)에
는 동화사(桐華寺)와 북지장사(北地藏寺), 부인사(符人寺), 갓바위(선본사), 파계사, 제2석굴암,
파계사, 송림사(松林寺), 염불암 등 크고 작은 오래된 절들 가득 포진해 있다. 그중에서 동화사
와 갓바위, 제2석굴암의 명성이 단연 갑(甲)이지만 파계사도 그들 못지 않은 고찰로 804년(신라
애장왕 5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뚜렷한 사적(事
績)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기에 대한 의구심을 가득 돋군다. 절을 알리는 첫 기록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관음전에 봉안
된 건칠관음보살좌상으로 조선 초 이르면 고려 후기에 조성되었다. 그런 것을 보면 빨라도 고려
때 조촐하게 문을 연 것을 인근 동화사 내력에 등장하는 심지왕사를 앞세워 창건 시기를 부풀린
것이 아닐까 싶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된 것을 1605년에 계관(戒寬)이 중창했다고 하며, 1695년에 현응대사(玄
應大師)가 3번째 중창을 했다. 현응은 숙종(肅宗)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  2층 규모의 범종각

▲  주지실과 내원(內院)

현응은 성전암 부근 석굴에서 불도를 닦고 있었다. 그는 나라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과 절
과 승려에 물리는 막대한 부역(負役)과 조세, 그리고 나날이 심해지는 유생들의 횡포 등, 절망
적인 불교의 현실에 너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를 탄원하고자 서울로 올라갔다. 조선시대에는
승려의 서울 도성(都城)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는지라 짧게 기른 머리로 솔잎 상투를 틀고
속세의 옷을 갖추어 도성 안으로 잠입했다.

그는 3년 동안 주막에서 일을 하거나 한강물을 날라 민가에 날라주면서 탄원할 기회를 노렸으나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여 결국 쿨
하게 포기하고 남대문 부근 봉놋방에서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런데 바로 이날 밤 숙종은 남대문 부근에서 청룡과 황룡이 요란을 부리며 승천하는 꿈을 꾸었
다. 꿈이 하도 기이하여 그곳에 뭔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신하를 보내 살펴보니 현응이 행장을
꾸리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현응의 법명은 용피(龍被)였다. <혹은 용파(龍波)>

왕이 보낸 신하의 손에 이끌려 궁궐로 들어간 현응은 드디어 왕을 알현했다. 왕이 서울에 온 이
유를 묻자 그는 현재 불교의 힘든 현실을 이야기하며 탄압을 줄여줄 것을 건의했다. 그 말에 고
개를 끄덕인 숙종은
'너의 탄원을 흔쾌히 들어주겠다. 허나 나도 부탁이 있다. 내가 아직 왕자가 없어서 그러니 한
양 100리 이내에 적당한 곳에서 숙빈(淑嬪) 최씨의 잉태를 빌어줄 수 있겠는가?'

왕의 난이도가 높은 부탁에 현응은 다소 난감했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히 해보겠
다고 답을 올렸다. 그리고 친분이 있던 승려 농산(聾山)을 보러 북한산 금선사(金仙寺)를 찾았
다. (☞ 북한산 금선사글 보러가기)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현응은 수락산(水落山) 내원암(內院庵)에서, 농산은 금선사에
서 각각 100일 기도를 올렸다. 70일이 막 지났을 때 현응은 선정(禪定)에 들어 이 땅의 백성 가
운데 다음 세상에서 제왕의 지위에 오를 만한 인물을 찾았다. 허나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해 천
상 자신 또는 농산이 죽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래야 그 혼이 숙빈의 몸에 들어가 금수저의 진
정한 갑(甲)인 왕자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응은 서울에 온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농산에게 편지를 보내
왕자로 다시 태어날 것을 청했다. 이에 농산은
'내가 나라의 위축(爲祝) 기도를 맡은 것으로 인(因)을 삼았는데,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결과가
벌써 돌아왔구려. 50년 동안 망건(網巾)을 쓰게 되었다니~!'
답을 하고 100일 기도를 마치고 죽
었다. 그리고 그날 밤 농산의 혼은 숙종과 숙빈의 꿈에 나타나 현몽했고, 이듬해 1694년에 왕자
로 다시 태어나니 그가 곧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이었다.
 
숙종은 고대하던 왕자가 태어나자 기쁜 나머지 용피(현응)에게 현응(玄應)이란 이름을 내리고,
파계사를 중심으로 사방 40리에서 징수하는 세금을 파계사에서 거두도록 했다. 허나 현응은 이
를 거절하고 '절에 선대(先代) 왕의 위패를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청했다.
이에 숙종은 흔쾌히 윤허하고 기영각을 지어 선대왕의 위패를 봉안했다. 이로써 양반들의 해꼬
지를 막을 수 있었으며, 경내 앞에 하마비를 세워 양반들을 살살 기게 만들었다.

▲  응향각(凝香閣)

▲  산령각

여기까지가 현응과 숙종, 영조에 얽힌 설화이다. 허나 설화의 내용과 달리 숙종은 당시 장희빈(
張禧嬪)을 통해 나중에 경종(景宗)이 되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니 왕자가 없어 징징거렸다는 부
분은 맞지가 않는다. 또한 숙빈최씨도 잉태를 위해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숙종과 숙빈과
의 처음 만남에서 일을 치룬 상태였다. (장희빈이 숙빈의 임신에 뚜껑이 폭발해 매질하여 죽이
려는 것을 숙종이 간신히 구했음)
그리고 농산이 자신의 육신을 버리고 숙빈의 몸에 들어가 왕자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런 전설
은 북한산 금선사 전설에도 거의 똑같이 전해온다. 여기서는 파계사 승려인 용파가 서울로 올라
와 정조(正祖)에게 불교의 폐단을 시정해 줄 것을 건의했고, 이에 정조는 그것을 들어줄 터이니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탁을 받은 용파는 금선사를 찾아가 농산과 300일 기도를 올렸는데, 왕자로 태어날 이는 농산
밖에 없음을 알고 농산에게 왕자로 태어날 것을 청했다. 이에 농산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도를
마치고 죽었고, 그 혼이 정조의 후궁인 수빈(綏嬪) 박씨의 몸에 들어가 왕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금선사의 전설과는 시절과 기도를 올린 날짜 수만 다르지 완전 똑같다. 아마도 파계사의 전설을
금선사가 그대로 모방한 듯 싶으며, 농산이 죽어 정말 왕자로 태어났는지는 그야말로 믿거나 말
거나이지만 이런 전설을 통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절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금선사는 정조 때 왕자의 탄생을 기원하던 곳으로 왕실 원찰의 하나였으며, 파계사 역시 현응대
사를 통해 왕실과 인연이 닿아 숙종과 영조의 안녕을 비는 원찰이 된 것이다. 그걸 마치 농산의
혼이 들어가 영조로 태어난 것처럼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숙종의 명으로 만든 기영각에는 선조(宣祖)와 덕종(德宗, 세조의 아들로 추존된 왕), 숙종, 영
조의 위패를 봉안했으며, 1979년 원통전 건칠관음보살좌상에 도금을 입힐 때 불상에서 영조의
도포와 1740년 9월 영조의 지원으로 탱화를 만들고 불상과 나한을 중수했다는 내용의 발원문(發
願文)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성전암에는 영조가 11세에 썼다는 자응전(慈應殿) 편액이 있어
영조가 어린 시절부터 이곳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음은 물론 이들이 영조를 위한 절이었음을 보
여준다.

숙종 이후 여러 차례 건물을 수리한 것 외에는 딱히 별다른 일은 없으며, 계속 몸집을 불려나가
지금은 법당(法堂)인 원통전을 중심으로 설선당, 적묵당, 기영각, 산령각, 내원, 응향각, 진동
루, 극락전, 설법전, 지장전 등 약 20여 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지장전과 극락전은 경내에
서 좀 떨어져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영산회상도, 원통전, 영조대
왕의 도포(중요민속문화재 220호)를 비롯해 설선당과 산령각, 적묵당, 진동루, 기영각, 왕실원
당 관련 고문서 일괄(대구 지방유형문화재 74호), 소장 책판 일괄(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4호)
등 10여 점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그밖에 숙종이 하사한 병풍 2개와 구슬 2개, 석등, 하마비,
현응대사 부도를 위시한 조선 중기 부도 3기와 탑비, 영조임금나무가 있으며, 성전암과 대비암
등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번뇌도 쫓아오다가 떡실신할 정도로 팔공산 깊은 산자락 500m 고지에 둥지를 틀고 있으며, 속세
하고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고, 숲이 울창하고 맑은 계곡이 절 양쪽으로 흐르고 있어 공기도
청정하다. 또한 공양밥도 맛있기로 유명해 점심시간에 지나간다면 공양 1끼 하고 가길 권한다.
다만 입장료를 적지 않은 가격으로 징수하는 것이 이곳의 옥의 티이다.

파계사 종점에서 파계사까지는 넉넉잡아 20분 정도 걸리며, 파계재까지 1시간 30분, 성전암까지
50분 정도 잡으면 된다.

※ 팔공산 파계사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대구역 건너 정류장, 동대구역 북쪽 지하도, 큰고개역(2호선, 3번 출구), 아양교역(2호선, 2
  번 출구)에서 대구시내버스 101-1번을 타고 파계사 종점 하차
* 대구역앞, 옛 경북도청 건너, 복현5거리에서 대구시내버스 101번 이용
* 불로전통시장, 파군재3거리에서 101, 101-1번 시내버스 이용
* 4월부터 11월까지 주말마다 팔공3번 시내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다닌다. 이 노선은 칠곡경
  북대병원에서 동명, 송림사, 파계사, 부인사, 수태골, 동화사를 거쳐 갓바위까지 운행한다.
* 승용차편 (경내까지 진입 가능)
① 대구시내 → 서변동 / 불로동 → 지묘동(파계교교차로) → 파계로 직진 → 파계3거리 직진
   → 파계사 매표소 → 파계사

★ 파계사 관람정보 (2016년 4월 기준)
* 관람비 :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 주차비 : 승용차 2,000원 / 대형차 5,000원
* 관람/출입시간 : 일출부터 일몰시까지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7 (파계로 741 ☎ 053-984-4550)
* 파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원통전 수미단(대구 지방유형문화재 73호)과 건칠관음보살좌상



♠  파계사 둘러보기

▲  파계사 설선당(設禪堂)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7호

진동루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3줄로 이루어진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비로
소 경내의 중심인 원통전 앞이다.
원통전 뜨락을 중심으로 원통전은 진동루와 마주보고 있으며, 뜨락 좌우에는 설선당, 적묵당이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법당 앞에는 흔히 있는 석탑(石塔)이 없는데, 탑을 두기에는 뜨락이
좀 좁긴 하지만 파계사에는 석탑 자체가 없다. 파계사의 지형이 돌을 올리면 깨지는 계란형 지
형이라 그런가..? 아니면 일부로 두지 않은 것일까?

설선당은 1623년에 계관이 지은 것으로 1646년과 1725년, 1762년에 각각 중건을 했고, 1922년과
1973년에 보수 공사를 벌였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ㄱ'자형 건물로 교육 및 참선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요사(寮舍)처럼 툇마루도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가기에 좋다.


▲  파계사 적묵당(寂默堂)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9호

설선당을 마주보고 있는 적묵당은 절이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804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1620년
에 중건을 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며, 1695년과 1920년에 중건을 하고 1976년에 번와 공
사를 벌였다.
정면 6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설선당과 마찬가지로 'ㄱ'자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정
확히는 'Γ' 모습이다. 그러니까 설선당과 적묵당이 각각 'ㄱ, Γ' 구조가 된다. 설선당과 달리
단청이나 색이 입혀지지 않은 수수한 모습으로 참선 및 숙소로 쓰인다.


▲  파계사 원통전(圓通殿) - 보물 1850호

진동루가 있는 남쪽을 굽어보고 선 원통전은 파계사의 중심 건물인 법당이다. 관음보살을 봉안
한 건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5년에 계관이 중건하고, 1695년에 현응이 수리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축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깔고 둥근 기둥을 올렸으며,
불단은 영천 백흥암(百興庵) 극락전의 수미단(須彌壇)과 비슷한 형태로 화려함을 선사한다. 그
리고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씌웠다. 계단 양쪽에는 고된 세월에 지친 키 작은 당간지주(幢
竿支柱) 2쌍과 근래에 심은 뽀얀 피부의 석등 1쌍이 원통전 주변을 수식한다.


▲  원통전 수미단(須彌壇)에 봉안된 건칠(乾漆)관음보살좌상 - 보물 992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보물 1214호

원통전 수미단에는 이 건물의 주인인 관음보살좌상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화유산 도난
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려해 그에게 방탄막같은 유리상자를 굴레처
럼 씌웠는데, 철창 안에 갇힌 새처럼 답답하긴 하겠지만 그의 신변을 위해서는 별 도리가 없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1979년 불상에서 발견된 복장발원문(腹藏發願
文)에는 1447년(세종 29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현재 파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높이가 108.1cm에 이르며, 머리에는 꽃모양을 붙인
수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다.

그의 작은 얼굴은 미소가 살짝 드리워져 편안한 인상을 풍기는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
러져 선의 미를 선사하며, 두 눈은 살짝 감겨져 명상에 잠긴 듯 보인다. 코는 작고 끝이 좀 두
툼하며, 다물어진 조그만 입에는 엷게 미소가 담겨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목에는 두툼
하게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귀는 다른 불상에 비해 좀 짧다.
오른손은 어깨 쪽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이 하여 손바닥을 위로 했다. 옷깃이 양쪽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 오른발 끝을
덮은 상현좌(裳懸坐)를 하고 있으며, 가슴 윗부분은 시원하게 트여 있다. 가슴까지 올라온 상의
(裳衣, 치마)를 주름잡아 끈으로 묶은 것과 손의 모양, 두터운 옷 등은 고려 후기 불상 양식에
서 많이 보이고 있으며, 영덕 장육사(莊陸寺)에 있는 보살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관음보살 뒤에 후광(後光)처럼 자리한 큰 그림은 부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는 장면을 비단에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길이 3.4m, 폭 2.54m에 이르며 1707년에 숙종을 비롯
한 왕실의 지원으로 제작된 것으로 채색도 화려하고 색감도 매우 좋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불화
로 다른 영산회상도와 달리 부처의 광배는 신광(身光)만 나와있고, 부처의 옷에 전(田) 비슷한
무늬가 없으며, 부처의 오른쪽 발목에 꽃잎 장식이 없는 등 3가지의 유별난 차별화를 두었다.

관음보살이 앉아있는 수미단은 상,중,하대를 갖춘 조선 후기 일반적인 수미단으로 수호와 공양
을 상징하는 문양과 불교적 색채를 띤 길상문(吉祥紋)이 조각되어 있다. 원통전이 중건된 1605
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영천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과 비슷한 모습이다.


▲  원통전 내부 우측 부분 -
절과 부처를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이 꾸역꾸역 담긴 신중탱(神衆幀)과
민화(民畵)처럼 그려진 선명한 색채의 그림 2점이 걸려있다.

▲  원통전 내부 좌측 부분
원통전 좌측에 걸린 큰 그림은 삼장탱화로 천장(天藏), 지장(地藏), 지지(地指)보살을
담았다. 삼장탱화는 이 땅에만 있는 불화로 하늘과 땅, 지하를 다스리는
보살을 설정하고 그린 것인데, 18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파계사 산령각(山靈閣)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8호

원통전 우측 석축 위에는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산령각이 자리해 있다. 그 모습이 너무
나 단촐하여 두 눈에 쏙 넣어 보기에도 부담이 없다.
원통전보다 1단계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건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
이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겯처마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 천
정은 우물천정으로 되어있고, 내/외부에는 금단청(錦丹靑)을 입혀 올렸다.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山神幀)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에는 붉은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산신을 중심으로 그의 시중을 드는 동
자(童子) 2명이 서 있으며,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고양이처럼 재
롱을 부린다. 산신 주변에는 학과 소나무, 구름 등이 그려져 신선 세계의 분위기를 그려낸다.


▲  파계사 기영각(祈永閣)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11호

산령각 우측에 자리한 기영각은 1696년에 현응대사가 왕실의 원당으로 세웠다. 영조 때는 매일
마다 그의 안녕을 빌었고 (그래서 영조가 오래 산 것은 아닐까?) 정조 때는 영조를 위해 기도한
건물이란 뜻에서 기영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영조 외에도 숙종, 선조, 덕종의 위패를 봉
안해 명실상부한 왕실의 원당이 되면서, 절에 해꼬지를 일삼던 양반과 유생들도 파계사 앞에서
는 살살 기었다고 한다.
정조가 내린 어필(御筆)을 보관하여 어필각(御筆閣)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그 어필은 전하지 않
으며, 1910년 이후 제왕의 위패가 모두 서울로 옮겨지면서 건물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아미타
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직지붕 건물로 늘씬한 처마선을 자랑하며, 덤벙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
고, 기둥 위에 주두(柱頭)의 장식이 번잡하여 조선 후기 공포(空包) 양식을 잘 보여준다. 가구
는 5량가로 우물 천정에 가려져 있다.


▲  기영각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제왕들의 위패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며 기영각의 주인이 된 아미타3존불은 아미타불을 중심으
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좌우에 앉아있다. 머리에 보관을 쓴 이가 관음보살이고, 초록색 머리
를 한 이가 지장보살(地藏菩薩)로 그들의 신변을 위해 유리를 씌웠다. 그들 뒤에는 붉은 종이에
금색으로 선묘(線描)된 약사후불탱화가 붉은 빛을 드러내며 아미타불의 뒤를 받쳐준다. 이런 그
림을 유식한 말로 홍지금니화(紅紙金泥畵)라고 한다.

▲  홍지금니화로 그려진 붉은 불화들

▲  삼세불(三世佛)이 그려진 불화와 독성탱
삼세불은 석가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이다.


▲  석등(石燈)과 순백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목련

원통전과 응향각 사이에는 경내의 유일한 석물(石物)이라 할 수 있는 석등이 서 있다. 이 석등
은 높이가 2m로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하대석(下臺石)은 사라졌지만 8각 기둥과 앙련
(仰蓮)이 새겨진 상대석(上臺石), 불을 밝히던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이 진하게 남아
있다. 기영각, 산령각과 견줄 정도로 오래된 존재이지만 아직까진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  설법전(說法殿)에 봉안된 석가불

파계사 경내를 동쪽에서 가리고 선 3층짜리 큰 건물이 있다. 건물 3층은 설법전으로 쓰이고 있
는데, 연병장처럼 무지 넓어 꾸역꾸역 넣으면 능히 2,000명도 가능해 보인다. 교육과 행사 공간
으로 북쪽 끝에 석가불이 봉안된 불단이 있으며, 내부는 은근히 시원하여 에어컨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건물 2층은 밥을 먹는 공양간으로 점심을 먹고자 들어갔더니 식사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청
소를 하고 나오는 아줌마 신도에게 물으니 공양시간이 끝났다고 그런다. 점심시간은 1시까지인
데 시간은 이미 1시 반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 이런 ~~!' 한숨을 몰아 쉬니 아줌마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그래서 서울에서
왔다고 답을 하니 멀리서 왔다면서 밥과 반찬이 남아있을 것이니 잠시 기다리라고 그런다. 그러
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뒷정리를 하고 있는 아줌마들에게 이야기를 하더니 같이 냉장고를 뒤적거
려 콩나물과 김치, 시금치, 박나물 등 다량의 반찬을 배식 장소로 가져온다. 밥통은 배식하는
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큰 그릇에 밥을 듬뿍 담아주고는 반찬통을 보이며, 먹을 만큼 가져가라고 그런다. 그
래서 양씬 담으니, 아줌마가 빙그레 웃으며 이 그릇에 배가 차겠냐면서 그보다 덩치가 큰 양은
냄비를 가져와 밥과 반찬을 죄다 담아서 준다. 물론 밥도 2주걱을 더 주었고 고추장과 참기름도
넉넉히 부어주었다.

그렇게 공양밥 1그릇을 마련하여 기분 좋게 점심 공양을 들었다. 밥과 나물을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절집 비빔밥으로 밥에 나물을 가득 비벼 먹으니 정말 꿀맛이 따로 없다. 처음에는 양이 적
어 보였으나 먹고 나니 상상을 초월하게 양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니 밥은 서서히 줄어들어 이내 1톨의 밥알도 없이 아주 깨끗한 그릇이 되었다.
밥을 먹고나니 아줌마들이 물까지 1컵 따라준다. 절에 들어올 때 입장료 때문에 기분이 좀 그랬
으나 아줌마 신도들의 후한 인심에 감격하여 섭섭한 기분도 바로 풀어졌다. 거액의 입장료는 공
양밥으로 충분히 본전을 뽑은 셈이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서울에서 온 단체 관광객 6명이 공양
간을 찾았는데, 공양시간이 끝았음에도 공양밥을 제공하여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공양을 마치자 부엌에 들어가 그릇을 씻고 포만감의 행복을 느끼며 밖으로 나온다. 졸음이 그새
살짝 밀려와 한숨 자고 가라며 희롱을 걸면서 눈이 좀 흐려지긴 했으나 아직 갈 길이 아직인 관
계로 과감히 뿌리치고 성전암으로 길을 향했다.


▲  찻집 앞에서 바라본 진동루 주변 (진동루 앞 주차장과 영조임금나무)

▲  지장전(地藏殿)

▲  경내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극락전

파계사에서 성전암으로 가려면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가는 길도 있지만 진동루 서쪽으로 난 길을
이용하는 것이 조금은 빠르다. 그 길목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
된 지장전과 납골당(納骨堂)을 겸한 극락전(極樂殿)이 자리해 있는데, 경내와는 조금 거리를 두
고 있는 파계사의 변두리로 극락전이 가장 외진 곳이다.



♠  대비암(大悲庵)과 현응대사부도, 험준한 곳에 묻힌 산중암자
성전암(聖殿庵)

▲  대비암 입구

파계사에서 성전암 방면으로 5분 정도 가면 대비암이란 암자가 나온다. 이곳은 2000년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절로 암자이긴 하지만 경내가 제법 넓으며, 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
하여 선방과 요사, 돌로 만든 관음보살상과 석가여래상이 있다.
선방은 정면 7칸, 측면 4칸에 이르는 큰 규모이며, 뜨락에는 금잔디가 곱게 입혀져 괜찮은 별장
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대비암은 법등(法燈)이 매우 짧은 절이라 딱히 오래된 볼거리는 없으나, 절 동쪽 산자락에 현응
대사 부도를 비롯한 조선 중기 석종형(石鐘形) 부도가 있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성전암으로
가는 산길에서도 진하게 바라보여 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는 것은 무지 쉽다.


▲  대비암에서 가장 높은 곳에 대웅보전이 자리해 있다.

▲  광배를 등에 지고 선 관음보살상
왼손에 꽃을 들며 고운 누님의 모습을 취했다.

▲  조그만 바위에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석가불좌상


▲  대비암 동쪽 산자락에 있는 비석과 부도
대비암을 일으킨 승려의 탑과 비석으로 근래에 지어진 탓에 피부가 매우 곱다
.

▲  현응대사 부도를 비롯한 부도군

대비암 동쪽 소나무 숲에는 솔내음을 누리고 선 석종형 부도 4기와 비석 1기가 있다. 고된 세월
의 때를 간직한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현응대사를 비롯해 파계사를 빛낸 승려들
이 고이 잠들어 있는데, 이중에서 제일 오래된 것은 1648년에 조성된 원의(圓義)의 탑이며, 그
다음이 1658년에 지어진 전명(傳明)의 탑, 그 다음이 1701년에 만들어진 현응대사의 탑이다. 허
나 나머지 1기는 주인을 모르겠다.
부도 가운데 현응대사만 유일하게 비석을 갖추고 있는데, 그 비신(碑身)에는 '선종 현응당대사
지고현(禪宗 玄應堂大士之高現)'이라 쓰여 있다. 그런데 큰 승려를 뜻하는 대사(大師) 대신 대
사(大士)로 쓰인 것이 특이하다. 아마도 옛 사람들이 낸 신선한 오타거나 그의 활약을 기리고자
선비, 관리를 뜻하는 '士'를 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비신 윗쪽 가장자리에는 '성상 즉위(聖上 卽位) 37년~~~'이라 쓰여 있어 부도의 나이를
알려주고 있는데, 청나라 연호 대신 성상 즉위라고 쓴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비신 뒤쪽에는 그
의 생애와 업적이 간추려져 적혀 있으나 마멸된 부분이 많다. 팔공산의 조그만 절을 왕실의 원
찰로 크게 일으킨 현응의 마지막 흔적들이지만 아직도 비지정문화재의 서러움 속에서 살고 있으
니 참 이유를 모르겠다. 다른 부도와의 형편성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 흔한 석종형부
도의 하나라서 그런 것일까?


▲  세월의 주름과 기미가 깃들여진 현응대사 탑비

▲  성전암으로 올라가는 길

대비암에서 성전암으로 가는 길은 인간의 고되고 부질없는 인생을 축소한 것처럼 험난하다. 처
음에는 경사가 완만하고 계곡도 옆에 흘러 쏠쏠하게 시원한 바람을 건네니 금방 가겠구나 싶지
만, 가면 갈수록 경사가 각박해져 다시 한번 숨을 차게 만든다.
차량도 힘들어 하는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주차장이 나타나면서 길은 끝나고, 거의 60도 가
까이 이루어진 산자락에 펼쳐진 산길이 시작된다. 그 길이 얼마나 아슬아슬하던지 그야말로 기
겁을 하게 만들며 길도 가늘고 각박하다. 길을 오르다가 뒤를 돌아다보면 천길낭떠러지에서 있
는 기분처럼 두 눈이 놀라 어쩌지를 못할 것이다. 그만큼 길이 고되고 험준하다.
그 길을 10분 정도 타면 성전암이 마치 산속의 요새처럼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며, 절이 늘어뜨
린 계단을 오르면 소박한 모습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  성전암 일주문 - 하늘로 오르는 문 같다.

▲  성전암 경내와 현응선원 (커다란 기와집이 현응선원)

파계사에서 25분 정도 올라간 680m 고지에 조그만 암자 성전암이 자리해 있다. 경사면에 석축을
쌓고 터를 다진 이 절은 파계사의 부속암자로 영남 3대 선원도량의 하나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
다. 그래서 조선 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이 다녀갔는데, 그 이름도 낯이 익은 성
철(性徹, 1912~1993)이 1955년부터 10년 동안 절문도 나서지 않고 동구불출(洞口不出)했던 곳으
로도 유명하다. 성철 외에도 만공, 해월, 서옹 등도 다녀가 이곳의 가치를 드높였다.

성전암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딱히 전하는 것은 없으나 현응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하며,
1695년에 중창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가 아닐까 싶다. 파계사와
더불어 영조의 탄생과 건강을 빌었던 곳으로 영조가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주는 현응을 위해 11
세에 현응전(玄應殿)이란 현판을 써서 이곳에 보냈는데, 그 편액이 아직도 현응선원에 걸려있다.
그리고 영조 때 조성된 특이한 모습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조선 후기에 제작된 현응의 영정
과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모두 친견하지 못했다.
현응이 일군 성전암은 1915년 보령(保寧)이 중건했고 1955년 성철이 머물면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완전한 수도도량으로 만들어 영남 3대 선원도량의 하나로 키웠다. 허나 2007년 불의의 화
재로 현응선원이 불에 탔으며, 험한 지형에 공사 자재 운반도 쉽지 않아 간신히 공사를 진행하
여 2010년 3월 3일 낙성식을 가졌다. 이후 경내에서 주차장까지 일종의 모노레일을 만들어 물자
수송이 다소 수월해졌다.

절의 위치도 속세의 기운이 엄습하기 어려운 첩첩한 산중턱 가파른 곳에 매달린 듯 자리해 있고
번뇌도 오다가 졸도할 정도로 궁벽한 곳이라 참선의 공간으로는 아주 제격이다. 굳이 참선이 아
니더라도 속세에서 잠시 나란 존재를 지우고 싶을 때,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속세의
번뇌를 싹둑 정리하고 싶을 때 문을 두드려 안기고 싶은 산중암자이다. 제 아무리 천하의 번뇌
라도 이곳까지는 감히 오르기 힘들 것이다.

* 성전암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1206 (파계로741 ☎ 053-982-3600)


▲  높은 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성전암의 위엄

경내에는 현응선원과 관음전을 비롯해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현응선원 주위로 건물이 몰려
있다. 현응의 영정과 벽화, 불상, 현응전 현판을 빼고는 딱히 오래된 것은 없으며, 그나마 현응
선원 주변은 참선시간에는 참선 공간으로 전환되어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참선 시간은 새
벽 3~5시, 8~10시, 14~16시, 19~21시이며, 그때는 관음전과 종무소 주변에만 머물 수 있다.

▲  성전암의 중심 건물인 현응선원
내가 갔을 때는 오후 참선시간이었음 (15시)

▲  꽃창살이 아름다운 관음전(觀音殿)과
쉼터로 조성된 조그만 정자

▲  현응선원 뒤쪽에 있는 조그만 동굴
현응대사가 참선했던 동굴로 전해진다.

▲  물로 가득한 석조(石槽)
이런 척박한 산중턱에 어디서 저렇게
많은 물이 나오는 건지 신기하다.


▲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현역에서 물러난 맷돌
문명의 이기(利器)가 이곳에 오기 이전까지 쓰였던 맷돌
지금은 석조 주변에서 때아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  관음전에 봉안된 관음보살상

성전암에서 언제나 관람이 가능한 건물은 현응선원 서쪽에 있는 관음전이다.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건물로 문에 새겨진 꽃창살이 매우 아름다운데, 그 때문에 그런지 그 주변에는 꽃
이 없다. 아마도 꽃창살을 시샘해 다른 곳으로 가버린 모양이다.

관음전 불단에는 아주 조그만 관음보살이 가녀린 모습으로 서 있는데,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지
나치게 커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불상이 자리를 커버할 정도로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의 좌우에는 협시불 대신에 산신과 문수보살(文殊童子)로 보이는 작은 존재들이 그를 지키고
있으며, 그들 뒤에 관음탱화가 자리한다.


▲  성전암에서 바라본 천하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 조망이 좋을 것이라 여기겠지만 산들이 첩첩히 시야를
막고 있어 보이는 범위는 저게 전부이다.

            ◀  성전암 5층석탑
경내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수수하게
생긴 5층석탑이 있다. 근래에 세워진 것으로 기
단(基壇)이나 탑신이 서로 비슷한 모습이라 지
식이 짧은 경우에는 6층탑으로 오인하기 쉽다.
탑 주변에는 잠시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닦여져 있으며, 여기서 보는 조망이 경내에서
보는 것보다는 조금은 괜찮다.

성전암에서 파계재를 가려면 이 탑을 거쳐서 가
면 되며, 탑 서쪽 나지막한 곳에 성전암에서 경
작하는 밭이 있다.

성전암은 하필이면 참선시간에 발을 들인 죄로 현응선원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 놓
고 다리를 부릴 수 있는 곳은 관음전과 종무소, 5층석탑 주변이 고작이다. 석조에서 팔공산이
베푼 물을 한 바가지 마시니 몸 속에 낀 온갖 체증이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정자에 앉아 불만에 잠긴 두 다리와 발을 쉬게 하면서 잠시 머물렀는데, 구름과 비슷한 위치에
있고보니 완전 수미산(須彌山)이나 신선의 세계에 입산한 기분이다. 기분 같아서는 탑 주변 쉼
터에 더 머물며 현응선원 내부를 꼭 보고 싶지만 시간이 나를 압박하면서 아쉽지만 성전암과 작
별을 고하며 혼란한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했다.
내려갈 때는 파계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내려가 파계사 종점에서 대구시내버스 101번을 타고 동
대구역으로 이동해 동대구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성전암을 겯드린 대구 파계사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파계사의 점심 공
양과 보살 아줌마들의 후한 인심, 그리고 참선 도량의 품격을 지닌 성전암까지, 정말 배부른 대
구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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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4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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