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경북 예천 나들이 '
(개심사지5층석탑, 초간정 일대)

▲  예천 초간정


 

겨울 제국(帝國)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 지배의 반석을 다지던 11월의 마지막 주말에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초겨울의 냉랭한 기운이 짙게 감돌던 이른 아침, 도봉동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예
천행 직행버스에 나를 싣고 2시간 20여 분을 달려 용궁(龍宮)에 두 발을 내렸다. 거기서
20분 정도를 기다려 안동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잡아타고 예천터미널 다음 정류장인 남본
교차로에서 하차했다. (예천터미널에서 남본교차로까지 약 1.2km, 거기서 환승하거나 걷
기도 애매하여 용궁에서 갈아탔음)

남본교차로 북서쪽에 안면이 2번 정도 있는 개심사지5층석탑이 있는데, 여기서 남쪽에서
오는 일행들과 만나기로 했다. 길을 일부러 더디게 왔음에도 일찍 도착하여 30분 정도를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니 남쪽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가 구세주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오
랜만에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지척에 있는 개심사지5층석탑으로 다가섰다.
(그때 시간 대략 10시)


 

♣  너무나 곱게 늙은 단아한 모습의 고려 초기 석탑
개심사터 5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 - 보물 53호

▲  옛 개심사터를 홀로 지키고 선 5층석탑

남본교차로 서북쪽 벌판 한복판에 맵시가 도드라진 5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고려 초에 창건
되어 신기루처럼 사라진 옛 개심사(開心寺)의 유일한 흔적으로 윗층 기단(基壇)에는 아주 감
사하게도 탑과 관련된 내용<석탑기(石塔記)>이 새겨져 있어 그의 신상명세를 조금이나마 알려
준다. 다만 그 글씨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닳고 깨져서 알아보기는 힘들다.

석탑기에 따르면 그는 1010년에 세워졌으며, 이곳에 개심사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고려 3대 제왕인 정종(定宗, 재위 945~949)이 거란(요나라)과의 전쟁에 대비코자 조직한 광군
(光軍)에 대한 내용이 짧게 깃들여져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  개심사터와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길

고려 초에 세워진 석탑답게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땅바닥에 접한
아랫층 기단에는 몸통은 사람이고 머리는 동물인 지신상(支神像)을 1면에 3개씩 모두 12지신
상을 새겼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지키는 8명의 존재,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있는데 1쪽 면에 2명씩
8명을 맞추었으며 이들은 불법(佛法) 대신 이 탑을 지킨다. 개심사는 이미 오래전에 녹아 없
어졌지만 이 탑은 그들의 가호 덕에 1,000년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너무 온전하고 생동
감 있게 살아있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의 모습은 탑이 심어진 시기에
고려 군사의 모습으로 불상의 얼굴도 그렇고 의복(衣服)이나 보살상, 불교 관련 존재들의 모
습은 왕족이나 귀족, 승려, 여인들을 모델로 많이 삼았다. 그러니 무인(武人) 계통의 팔부중
상은 당시 늠름했던 고려 군사를 참고하여 만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부처나 보살의 얼굴이
나 불교 관련 존재들의 모습과 의복 등은 딱히 정형화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  12지신상과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의 기단부 ▼
제일 밑에 3인 1조로 자리한 존재가 12지신상, 윗부분에 무기를 들고
2인 1조로 지키고 선 존재가 팔부중상이다.

윗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로 탑신을 떠받들기 위해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두었는데 이는 고려
탑의 특징이다. 1층 탑신의 남쪽에는 문고리와 인왕상을 새겼는데, 혹 열쇠가 있어 저 문고리
를 딸 수만 있다면 탑 안에 안치된 보물과 개심사의 정체를 흔쾌히 밝혀줄 존재가 나오지는
않을까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든다. 우리집 열쇠라도 들이밀어 저 문고리를 풀어보고 싶다.

탑의 높이는 4.33m, 기단 폭 2.15m로 체감률이 안정되어 안정적인 비례를 이루고 있으며 예천
에 왔다면 꼭 보고 가야되는 이 고을의 소중한 보물이다. 또한 2011년 가을에는 탑 주변 논을
갈아엎고 주변 정비 및 개심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잘 생긴 탑을 보니 절의 모습 또한 대단했을 듯 싶으나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려진 것
이 없다. 다만 절터의 위치가 한천(漢川) 가에 있어 아주 오래 전에 홍수로 망한 듯 싶다. 어
째서 산에 세우지 않고 평지인 이곳에 터를 닦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가 예천에서 안동(安
東)과 영주로 넘어가는 길목이고, 안동과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개경(開京)으로 가려면 이곳
을 거쳐 하늘재를 넘어야 했다. 그러니 예천 토박이 세력에서 그 길목의 절을 세워 지역간의
교역과 길손들의 숙식 제공 장소로 삼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만 절이 너무 일찍 사라져버
려 그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이 흠이면 흠이다.


▲  1층 탑신에는 문고리를 사이에 두고 2명의 인왕상(仁王像)이 있다.
그 아래로 연꽃 무늬가 새겨진 괴임돌이 보이는데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어 탑의 나이를 의심케 만든다.

▲ 석탑기가 새겨진 1층 탑신 피부
심술쟁이 자연이 석탑의 피부를 마구 건드리면서 글씨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 예천 개심사터 5층석탑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대구북부정류장과 동대구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전인 남본교차로(
  보통 삼거리라고 부름)에서 내리면 바로 탑이 보인다. (대구북부에서 1일 6회, 동대구에서
  1일 7회 운행)
* 영주, 안동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3거리(남본교차로) 하차
* 상주, 김천에서 예천 경유 영주, 안동행 직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다음인 3거리에서 하
  차
* 예천터미널과 예천역(경북선)에서 영주 방면 4차선 길(충효로)을 따라 한천을 건너 17분 정
  도 걸으면 남본교차로이다.
* 승용차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에서 좌회전
   → 남산교차로에서 우회전 → 남본교차로에서 직진 → 개심사지5층석탑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00-3


 

♠ 이름 없는 옛 절터를 지키고 있는 신라 후기 석불과 석탑
예천 동본리(東本里) 3층석탑 /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  동본리3층석탑 - 보물 426호

▲  동본리 석조여래입상 - 보물 427호

개심사지5층석탑을 둘러보고 예천읍의 젖줄인 한천을 건너 한천 둑방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동본리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 나란히 우리를 마중한다.
이렇게 잘생긴 석탑과 석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절과 관련된 기록은 하나도 없고, 절터의 흔적도 딱히 나오지를 않아 현재로써는 그 절의 정
체를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절터의 흔적을 제대로 캐내려면 언제 한번 날을 잡아서 주변을 싹
뒤집어야 그나마 좀 나올 것이다. 다만 이곳이 한천변인지라 홍수의 흥분으로 강제로 문을 닫
았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게 절의 이름 석 자도 세상에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급하게 떠내려
간 모양이다.

절이 읍내에 있고 석탑과 석불의 조성시기가 신라 후기라고 하니 예천 토박이 세력의 지원으
로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 세력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을 수도 있겠다. 다만 너무 오
래전의 일이라 속시원한 정답은 없다. 석불이 흔쾌히 입만 열어준다면 정말로 좋을텐데, 너무
머나먼 시기의 일이라 기억도 흐릿할 것이며. 집을 잃은 상처가 너무 커 입 밖에 드러내는 것
조차 싫어할 것이다.

절이 사라진 이후, 상류에서 떠내려온 흙들이 차곡차곡 주변에 쌓여갔으며, 그 흙에 논과 밭
이 들어서면서 절터의 흔적은 더욱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탑과 석불은 마을 사람들이 신
앙 대상으로 삼아 정성으로 살펴주면서 지금도 정정한 모습을 자랑한다. 절의 이름을 모르니
석탑과 석불은 속 편하게 동네 이름을 따서 동본리 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란 이름으로 살
아가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동본리3층석탑

▲  동본리 석조여래입상의 뒷모습

우선 동본리3층석탑을 살펴보면 땅바닥에 네모난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기단을 두었는데 그
밑 부분에 가운데돌을 두어 기단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윗층 기단에는 무슨 존재를 새겼는
데 이는 탑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으로 그런데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과
2층은 5단, 3층은 4단이다. 1층이 윗층들보다 피부가 하얀데 이는 후대에 손질을 가한 듯 싶
으며, 탑이 윗층으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것이 원칙이지만 1층은 그 비율을 깨고
조금은 육중해 보인다. 탑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고
색의 때가 적어 1층 탑신을 손질할 때 새로 끼워놓은 듯 싶다.
탑신 지붕돌 밑면의 수가 줄어들고, 괴임돌이 간략해진 점으로 신라 후기 탑으로 평가받고 있
으며, 개심사지5층석탑만큼은 아니지만 건강 상태도 썩 양호한 편이다.

3층석탑과 나란히 한 석조여래입상은 신라 후기에 조성된 키 3.46m의 석불이다. 머리를 보면
꼽슬인 나발(螺髮)로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주렁주렁 달아놨으며,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
(肉髻)가 두툼하게 솟아있다. 후덕함이 묻어난 둥근 넓쩍한 얼굴에는 좌우로 길다란 눈이 지
그시 감겨져 있는데 왼쪽 눈이 오른쪽에 비해 너무 희미하고 존재감이 떨어져 마치 애꾸눈을
보는 듯 하다. 코는 끝부분이 두툼하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입은 옛날의
일을 감추고 싶은지 다물어져 있다. 귀는 중생의 고충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다.
그의 몸통을 보면 얼굴과 상반신의 비율이 너무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얼굴을 크
게 만들어 신체비례가 많이 떨어진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이 꽤 두꺼우며, 어깨가 좁
고 팔이 짧아 다소 기죽은 느낌을 준다. 오른팔은 옆으로 내려 옷자락을 붙들고 있고, 왼팔은
앞으로 들어 새끼 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을 안으로 굽혔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의(通肩衣)
로 옷의 주름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것 같으며 이런 옷주름 표현은 신라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 예천 동본리3층석탑/석조여래입상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예천시외터미널 옆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예천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동본리정류
  장에서 내린다. 버스에서 내려 왼쪽을 보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그 3거리에서 오른쪽으
  로 2분 가면 동본교란 다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한천 둑방길을 1분 정도
  가면 왼쪽에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가면 바로 동본리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다.
* 개심사지5층석탑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남본교차로에서 북쪽(읍내 방향)으로 가다가 예천교
  를 건너 오른쪽 한천 둑방길로 12분 정도 걸으면 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3층석탑 앞에 조그만 공터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 직진 → 동본
   교를 건너서 우회전 → 바로 보이는 왼쪽 길로 내려가면 동본리3층석탑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74-4


 

♠  조선 중기에 세워진 사대부의 별서(別墅)이자 예천 제일의 경승지
초간정(草澗亭)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143호

예천읍에서 용문사(龍門寺)로 가는 길목인 죽림리에 초간정이라 불리는 경승지가 있다. 간장
의 하나인 초간장과 겨우 받침 하나 사이로 이름이 너무나 비슷하여 나도 모르게 초간장이라
불리게 되는 이곳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예천 출신인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1591)가
세운 별서(別墅, 별장)이다.

권문해는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보물 878호)'을 쓴 인물로 조
선과 요동(遼東), 만주, 명나라에 전해오는 수많은 문헌을 참고하여 옛 조선부터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시절(조선 명종 시절)까지 이 땅의 역사와 지리, 인물, 문학,
식물, 동물 등을 집대성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했다. 책의 이름인 대동(大東)은 '동방대국(東
方大國)'으로 조선을 뜻하며, 운부군옥(韻府群玉)은 운별로 배열한 책이란 뜻이다.

이 책은 초간이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내던 1589년 20권 20책으로 편찬을 완료해 3벌을 정
서해두었다. 허나 1벌은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다른 1벌은 정구(鄭逑)가 빌려갔다가 개념
없게도 실수로 불에 태워버렸다. 그래서 겨우 1벌만 남아 초간의 외아들인 권별(權鼈, 1589~
1671)이 정산서원(鼎山書院) 원장으로 있을 때 정서하여 그 서원에 보관했으며, 1812년 간행
을 시작해 1836년 완료했다. 이후로도 여러 번 복판(腹板)을 했다.

초간은 1582년 집 부근인 이곳에 정자를 지어 자신의 호를 따서 초간정이라 하였다. 그는 계
곡이 크게 굽이쳐 흘러 기암절벽과 소(沼)를 이루는 지금의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바위 위에
돌을 쌓고 터를 다져 조촐하고 정자를 지었다. 지금은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이는 1870년에 다
시 지은 거라 원래 모습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소박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여기서 휴식과 독서를 하였고 벗들과 어울려 곡차(穀茶) 1잔의 여유를 즐겼으며 별서 주
변에 소나무를 잔득 심어 이곳의 운치를 한껏 부풀렸다.
허나 임진왜란 때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왜군에 의해 부질없이 파괴되었으며, 1612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으나 1636년 불에 타 없어졌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불에 탔다고 나온다. 허나
병자호란 시절 청나라군은 경기도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전란이 아닌 불을 잘못
취급하거나 우연히 화재를 입은 것으로 봐야 된다. 이후 오랫동안 터만 전해오다가 1870년 후
손들이 초간의 서적을 보관하고자 조그만 기와집으로 새로 짓고 담장과 부속건물을 갖추니 이
것이 지금의 초간정이 되겠다.

초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앞면 왼쪽 2칸에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4
칸은 대청마루로 삼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끔 난간을 둘렀다. (그래봐야 난간의 높이가 낮음
) 또한 1636년 화재로 건물이 무너지고 초간정 현판 또한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는데 어느 날
늪에서 오색무지개가 피어오르자 종손(宗孫)이 이게 뭔가 싶어 그곳을 파보았더니 글쎄 현판
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정자 앞 늪에서 현판을 발견한 것이다. 정말 현판이 오색무지개를 발
산했는지는 생각해볼 일이지만 전설 내용이 다소 불교틱하다.

아름드리 노송(老松)이 조촐하게 숲을 이루고 기암을 휘돌아 흐르는 물은 소를 이루어 절경을
자아낸 예천 제일의 경승지로 용문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여행꾼과 답사객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온다. 다행히 초간정은 일반에 개방을 하고 있어 신발을 벗고 정자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서쪽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기와집(초간정 부속 건물)은 민박으로 1박
머물 수 있다. 또한 초간정 주위로 심어진 나무들은 '초간정 원림(園林)'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51호로 지정되었다.


▲  초간정 주차장에서 바라본 초간정과 소나무들
소나무가 초간정을 향해 거의 30도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을 있게 해준 초간에
대한 일편단심의 표현일까?

▲ 바위 위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둥지를 튼 초간정의 모습
자연에 거스르며 무식하게 크기만 한 현대식 별장보다는 소박하지만 저런 전통 기와집도
나름 정감이 많이 든다. 나도 나중에 경관이 적당한 곳에 조촐하게 전통식 정자나
한옥을 짓고 머물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과연 뜻대로 될련지? ㅠㅠ

▲  초간정 옆에서 90도로 굽이쳐 흐르는 계곡
초간이 바로 저 풍경에 반해서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높이는 낮지만 나름대로
기암절벽을 이루며 소소하게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낸다.

▲  초간정 상류 개울
초간정 원림의 서쪽 끝으로 소나무들이 개울을 향해 한결같이 30도로 구부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  개울 다리에서 바라본 초간정

▲  초간정 옆구리에 자리한 부속 기와집
1870년 초간정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 그 곁에 부속 건물을 지어 초간의 서적
보관 및 정자 관리인의 숙소로 삼았는데, 현재는 민박으로 쓰이고 있다.

▲  초간정 부속 기와집 내부

▲  초간정으로 들어가는 문

이곳이 초간정으로 접근하는 유일한 문으로 문이 좁고 낮다. 왠만한 성인 남성은 고개를 숙이
고 들어가야 되고 한 사람이 지나가면 문이 꽉 찬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키와 덩치가 반영된
탓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갖추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


▲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머리에 짊어진 초간정
좌측에 마련된 섬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 오르면 된다. 단 섬돌과
대청마루까지는 높이가 좀 있으므로 주의요망

▲  초간정에 걸린 초간정사(草澗精舍) 중수기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초간정사 중수기는 1870년 초간정을
다시 세웠을 때 작성된 것으로 초간정사는 초간정의 예전 이름이다.

▲  초간정 내부 대청마루
겉으로 보면 좀 부실해보여도 속은 현대식 건물 이상으로 매우 견실하다.

▲  초간정에서 바라본 계곡 건너편

초간정은 동쪽을 향한 건물로 정자를 받치는 기둥 중의 도끼 자국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자
국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조선 후기판 판문점(板門店) 도끼만행사건 비스므리한 일이 일
어났던 현장이라고 하며 다음의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 후기에 인근에 살던 선비가 과거준비를 하다가 초간정 난간을 100바퀴 돌면 과거 급제한
다는 전설을 믿고 난간을 돌았다. 허나 100바퀴를 다 돌기도 전에 어지럼증과 체력 고갈로 그
만 쓰러지면서 정자 밑에 있는 소(못)에 떨어져 죽었는데, 남편을 잃은 부인이 뚜껑이 폭발해
도끼를 들고 찾아와 도끼질을 했다고 한다. 그 도끼자국이 바로 그때 찍힌 자국이라는 것이다.
선비가 빠져 죽었다는 소는 옛날에는 매우 깊어서 명주꾸리 1개를 펴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한
다. 허나 지금은 많이 메워져 옛날의 명성은 많이 죽은 상태이다.

이런 경승지에 전설이 하나만 있으면 초간정도 초간 선생도 매우 섭할 것이다. 그래서 옵션으
로 전설이 더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1864년경, 초간정을 소유한 예천권씨 집안에서 정자 주위를 거꾸로 100바퀴 도
는 사람에게 정자를 주겠다고 광고를 냈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 초립동이가 나서서 99바퀴까
지 돌았으나 나머지 1바퀴를 도는 과정에서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화
가 난 그의 어머니가 도끼를 들고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전설로는 옥매(玉梅)라는 예천 제일의 기생이 초간정에서 장고춤을 추다가 그
만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는데 화가 단단히 난 그녀의 어머니가 도끼를 들고 찾아와 도끼질
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풍류가 넘치는 곳에 왠 난데없이 무시무시한 도끼질 자국이 있는지 참 옥의
티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실수로 떨어져 죽어도 그렇지 죽은 이의 부인이나 어머니 등, 여
인들이 도끼를 들고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는 것도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끼가 보기와
달리 은근히 무게가 나가는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정
자를 새로 지을 때 목수의 실수로 도끼 자국이 생긴 나무 기둥을 그대로 썼을 수도 있을 것이
고, 19세기 중/후반 지배층의 수탈과 학정이 극에 달한 시절에 인근 백성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린 흔적일 수도 있겠다.


▲  초간정 바로 밑에서 무섭게 입을 벌리고 있는 소(못)

초간정 관람시 반드시 유의해야될 점이 있다. 문이 봉해진 온돌방은 통제구역이므로 애써 들
어가서는 안되며 그걸 어기면 자칫 속세에 개방한 초간정의 문이 쾅 닫혀질 수도 있다. 그리
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난간 부분에서 장난을 치거나 무리해서는 안된다. 난간 너머는 바로
초간정을 끼고 흐르는 개울로 정자와 개울까지는 높이가 약 6~7m 정도 되는 아슬아슬한 낭떠
러지이다. 게다가 난간의 높이도 난쟁이 반바지를 반 접은 정도 밖에 안될 정도로 낮고 오래
된 탓에 조금 부실하다. 괜히 난간에 기대거나 아찔하게 장난을 치다 소로 떨어져 사고를 당
할 수 있다.
소의 깊이가 예전보다는 온순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는 소이다. 정자 위에서 소를 바라보
면 여전히 밑바닥이 보이질 않으니 깊은 것은 여전하다.


▲  초간정을 끼고 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울
개울 주변에 대자연이 빚은 기암절벽이 심심치 않게 늘어서 초간정의 정취를
더욱 돋군다.

▲  하늘을 받치고 선 초간정 소나무
초간정을 둘러싼 소나무 숲은 초간정의 구수한 상징이다.

▲  초간정의 새로운 명물, 구름다리
초간정 동쪽 개울에 흔들거리는 구름다리를 닦았다. 초간정으로 들어갈 때는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 진입하고, 나올 때는 초간정 동쪽 소나무 숲을 거쳐 구름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나가면 된다.

▲  초간정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초간정 방향
개울이 조그만 협곡을 그리며 연주하는 물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이
잠시나마 정화되는 것 같다.

▲  초간정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동쪽
초간정 방향과 달리 평범한 개울로 흘러간다. 개울 양쪽에는 소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속세로 흘러가는 개울을 배웅한다.

▲  떠나기가 몹내 아쉬워 잠시 뒤돌아본 초간정

초간정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와서 보니 정말 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
을 알게 되었다. 개울 북쪽에 신작로(용문경천로)가 생긴 것과 현대의 이기(利器)들이 들어온
것 외에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는 옛 모습으로 주변 경치와 어우러져 1폭의 수묵담채화(水墨
淡彩畵) 같은 절경을 자아내 사람들의 정처 없는 마음을 사뿐히 앗아간다.
겉으로 보면 작고 수수해 보여 누구나 쉽게 만들겠지 싶지만 조선시대에 저 정도의 별장을 소
유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력과 지위가 있어야 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즉 지배층의 전유
물이었던 것이다. 허나 지나치게 큰 별장과 달리 소소한 모습에 정감이 많이 가며, 정자를 둘
러싼 풍경과 소나무 숲(초간정 원림)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지배하려 드
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간정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여기서 가까운 용문사로 길을 향했다. 이후는 본글의 내용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초간정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예천터미널(예천역 북쪽) 옆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용문사, 두천, 사부리로 가는 군내버스(1
  일 7회 운행)를 타고 원류(초간정)에서 내린다.
* 승용차 (주차장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에서 우회전
→ 우계교차로에서 좌회전 → 백전3거리에서 우회전 → 용문 → 초간정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보통 9시부터 18시까지 (겨울에는 16~17시까지)
* 초간정에 딸린 기와집(초간정민박)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민박 관련 문의는 ☞ ☎ 054-655
  -9233
)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166 (용문경천로 874)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8년 3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8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