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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주, 봉화 나들이 (오전약수터, 석천계곡) '

▲  오전약수터

▲  석천계곡

▲  석천정사


 

 

여름 제국의 한복판인 7월 중순의 어느 평화로운 날, 몸에 좋은 탄산약수와 시원한 계곡
생각이 간절하여 간만에 수도권을 벗어났다.

청량리역에서 안동(安東)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고 원주, 제천, 단양을 거쳐
영주로 내려가는데, 죽령(竹嶺) 이전까지만 해도 장마의 기운이 여전했으나 죽령을 지나
면서부터 차창 밖은 완전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단지 고개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중
부 지방에서 남부로 지역이 지역이 바뀌었고 장마가 죽령을 넘지 못하면서 그 이남은 벌
써부터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판을 치는 것이다.

영주역에 도착해 두 발을 내리니 거의 숨이 막힐 정도로 후덥지근한 날씨가 나를 맞이한
다. 장마로 조금은 선선한 서울 날씨에 익숙해진 탓에 처음에는 좀 난감했지. 하여 인근
편의점으로 들어가 무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벗삼아 컵라면과 삼각깁밥 등으로 조촐하
게 이른 점심을 때우며 더위에 흥분한 몸을 달랬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편의점을 나와 무더위를 뚫고 영주여객 종점으로 이동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휴천동 주택가를 기웃거렸다.


 

 

♠  이 땅에 흔치 않은 고인돌과 선돌의 공존 현장
영주 휴천동 지석(支石) 및 입석(立石) -
경북 지방기념물 24호

휴천동(休川洞) 주택가 속 조그만 공원에는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존재들이 있다. 바로 고인
돌<지석묘(支石墓)>과 선돌(입석) 형제이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휴천리 지석 및 입석')
이들은 고인돌 2기와 선돌 1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가 허전한 돌이 여럿 자리해 있어 고
인돌이 더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고인돌과 선돌은 학창시절 교과서부터 요란하게 등장하는 존재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대
표적인 유적이다. 고인돌은 지역과 마을을 다스리던 우두머리의 무덤, 선돌은 세력이나 마을
간의 경계 표시나 기념비, 신앙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선돌이 나중에 장승
으로 변했다고 함) 특히 고인돌은 한반도와 요동(遼東), 만주에 집중 분포하고 있어 우리 역
사의 특허 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돌 분포지를 옛 조선의 영역으로 보기도 함)
이렇게 고인돌과 선돌이 많이 널려있지만 정작 그들이 같이 있는 현장은 매우 희귀한데, 이곳
휴천동 유적은 바로 그 흔치 않은 두 존재의 흥미로운 공존 현장이다.

2그루의 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운 곳에 드러누워 여름 제국을 잊고 사는 이들 고인돌은 조
그만 돌을 기반으로 삼고, 그 위에 넓직한 뚜껑돌을 올렸는데, 아직 학술조사를 벌이지 않아
땅 속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지역을 주름잡던 고인돌 주인의 시신이 담긴 공간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고인돌 곁에 서 있는 선돌은 남자 성인 키의 절반 정도의 높이
로 예전에는 치성의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고인돌 형제

▲  고인돌 남쪽에 자리한 선돌

오랜 세월을 탄 고인돌은 피부가 까무잡잡하며, 선돌도 비슷하나 남쪽 면은 제법 하얗다. 이
곳은 무려 20여 년 전에 와본 인연이 있는데, 보호 난간과 공원이 조성된 것 외에는 고인돌과
선돌 자체는 딱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내가 많이 변해 버렸지. (그때는 파릇파
릇했던 10대 시절, 지금은 그저 눈물만 ㅠㅠ)
고인돌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으며, 동네 사람들이 일군 조그만 텃밭도 있어 도심
속의 소소한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휴식처는 엄밀히 따지면 고인돌/선돌 형제가 시민
들에게 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곳도 진작에 건물이 들어섰을 것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693-1,-2


 

휴천동 지석/입석을 오랜만에 인연 짓고 영주여객 종점(영주시내버스 차고지)으로 이동해 봉
화(奉化)로 가는 영주좌석버스 33번을 탔다. 날씨도 허벌나게 무덥고 가격도 비싼 좌석버스이
건만 무정하게도 냉방을 틀지 않아 창문을 열어 자연산 바람에 의지해 더위를 쫓았다. 
영주시내와 봉화읍내는 30리 남짓의 가까운 거리라 약 30분 만에 봉화읍내에 진입, 읍내 한복
판에 자리한 봉화터미널에서 하차했다.

봉화터미널로 들어가 그날의 주메뉴인 오전약수터행 시간표를 확인하니 40분 뒤에 차가 있다.
하여 그 시간을 억지로 죽이다가 오전약수터(오전약수탕)로 가는 군내버스에 나를 담고 북쪽
으로 향한다.
차가 막힐 일이 거의 없는 곳이라 2차선 도로를 쌩쌩 질주하며, 석천계곡과 북지리 마애여래
좌상, 계서당(溪西堂) 입구를 지나 어느새 물야(物野)에 이른다.
물야에서 사람들은 모두 내리고, 나와 운전사 둘만 남은 상태로 내성천(乃城川)을 따라 북쪽
으로 더 들어가니 물야저수지가 물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며 그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그 호수를 지나 2분 정도 더 가니 오전약수터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 북쪽 가게에서 버스는
심장 소리를 멈추었다. 그곳이 바로 오전약수탕 종점이다.


 

 

♠  탄산 약수의 정석, 봉화 오전약수(梧田藥水)터 <오전약수관광지>

▲  오전약수터 주차장에 세워진 오전약수관광지 표석

선달산(先達山, 1,236m) 동남쪽 자락 450m 고지에 자리한 오전약수터(오전약수탕)는 일반적인
약수와 달리 탄산과 철분이 함유된 약수(藥水)이다. 이런 약수는 주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나는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춘천, 양구, 인제, 평창, 홍천, 정선)과 경북 산간지대(봉화,
청송)에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교통이 불편한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혀있다.

오전약수터의 오전은 점심 이전의 오전(午前)이 아니라 쑥밭을 뜻하는 한자어로 조선 성종(成
宗) 때 보부상(褓負商)이 발견했다고 전한다. 그 보부상은 서벽장과 오전리 후평장을 오가며
장사를 했는데, 산을 넘다가 너무 피곤하여 쑥밭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했다. 그때 만병통치(
萬病通治) 약수가 있다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보니 바로 옆에서 약수가 솟는 것이 아닌가. 그
약수가 바로 오전약수라고 한다.
성종 임금은 천하에서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추천하게 했는데, 오전약수가 그 으뜸으로 뽑
혔다고 전한다. (전국 약수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중종(中宗) 시절에는 풍기
군수를 지내며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이 즐겨 찾았으며, 그가 남긴 4편의
약수터 찬양시가 전해오고 있다.

영남 북부 제일의 약수터로 오랜 인기를 누렸으며, 탄산과 철분이 강해 피부병과 위장병에 아
주 좋다고 전한다. 이런 약수는 사이다처럼 톡쏘는 맛이 나고, 맛이 일반 약수보다 쓴 편으로
여기에 설탕을 넣으면 거의 사이다가 된다.
약수의 성분은 탄산과 철분이 거의 절반을 이루고 있으며, 마그네슘이 1/3정도 된다. 그래서
약수터 주변이 온통 시뻘겋다. 또한 이런 물로 몸을 씻으면 건강에 좋다고 하여 약수터 부근
에 목욕탕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런 탕을 약수탕(藥水湯)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오전약
수탕이라 부름) 

오전약수 같은 탄산/철분 약수는 일반 약수와 맛이 틀리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 약수
를 가장 기피하여 입에 대지도 않았지, 그런데 이런 약수로 지은 밥은 밥이 파랗게 물이 오르
면서 일반 밥과 달리 꼬들꼬들하고 맛이 좋았다. 물은 싫었지만 그 물로 지은 밥은 좋았던 것
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에 탄산약수의 하나인 설악산 오색약수(五色藥水)를 오랜만에
가보았는데, 약수터가 마르도록 본전을 뽑았다. 소시(少時)적에 그토록 싫어했던 물맛이 이제
는 달콤한 물맛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몸에 좋다는 이유도 크게 한몫했지, 맛은 좀 쓰지만
몸에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제 슬슬 몸을 생각할 나이대가 된 것이다.
그 이후 오랫동안 그런 약수를 찾지 못했다가 이번에 이렇게 오전약수를 찾게 된 것이다.

약수터에는 거북이 석상이 물을 졸졸 내뱉고 있는데, 몇 바가지를 마셨는지 모른다. 위장병이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나 물이 몸 속에 들어가니 정말 약수의 효과인지 꼬르륵하던 뱃속이 조
용해진 거 같다. 마치 속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오전약수터(왼쪽 6각형 정자)와 보부상 석상

▲  탄산 약수의 정석, 오전약수터

오전약수탕 종점에서 무성한 숲길을 3분 정도 들어가면 6각형 정자에 자리한 오전약수터가 활
짝 모습을 드러낸다. 한참을 들어가야 나올 것 같은 신비의 약수가 싱겁게 나와버려 이게 정
말 오전이 맞나? 오후 아닌가? 갸우뚱했지만 오전은 맞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약수터 주변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식당이 여럿 있는데, 한결같이 이 물을 이
용하여 닭백숙을 내놓고 있다. 탄산 약수로 고아 만든 닭백숙은 맛도 일품이고, 몸에도 좋다
고 하여 이곳의 든든한 별미로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격이 좀 있는 편인데,
혼자 온 탓에 백숙은 먹지 않았다.

식당은 대부분 민박을 겸하고 있으며, 평일이라 다들 한산하다. 약수터도 덩달아 한산하여 혼
자 거의 전세를 내다싶이하여 물을 섭취했다. 기분 같아서는 이 약수터를 집으로 가져와 혼자
두고두고 마시고 싶지만 그럴 권한과 힘은 나에게 없었다. 선달산 산신령을 뇌물을 구워삶아
약수터를 내게 달라고 청하고 싶지만 산신령이 약을 빨지 않는 이상은 이곳의 꿀인 약수터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오전약수터는 바로 이곳에 있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하지 다른 데로 가면
죽은 약수가 된다.

오전약수터는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많은 식당과 민박집이 생겨났으며, 약
수터 동쪽에는 몸을 씻을 수 있는 약수탕이 조성되어있고, 북쪽에는 근래에 인공폭포와 조그
만 공원을 닦았다. 또한 도보길 유행붐을 타고 봉화군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외씨버선길이 이
곳을 지나간다.
인공폭포와 공원은 약수터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는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조성한 것 같은데
, 솔직히 오전약수와 어울리는 존재는 아니다. 이런 약수터에는 샘터과 계곡, 적당한 양의 편
의 시설(식당, 숙박업소)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보며 이런 어설픈 것까지 굳이 만들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99-5, 1212 (오전약수탕길 18-24, 문수로 1601)


▲  오전약수터 옆을 흐르는 오전계곡 (내성천 상류)

▲  오전약수터 북쪽에 조성된 인공폭포
인공폭포 위쪽에는 넓게 공원을 조성하여 정자와 연못, 공연장을 두었다.


오전약수터와 인공폭포 공원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종점으로 나갔다. 외
씨버선길을 타고 두내약수탕(두내약수터)으로 넘어갈 생각도 했지만 날씨가 무더워 그건 포기
했다. 하여 일단 읍내로 나가면서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사람의 마음
이 갈대라 이내 변심하여 예전에 갔던 석천계곡(석천정사)으로 메뉴를 바꿨다. 한여름에는 뭐
니뭐니해도 계곡과 바다가 최고 아니겠는가.

봉화읍으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석천계곡 입구이자 읍내 직전인 삼계에서 내렸다. 계곡으
로 들어가려던 찰라에 문득 마을 쪽에서 오래된 기와집 하나가 크게 눈빛을 보낸다. 하여 그
눈빛에 일부러 홀리며 가보니 삼계서원이란 오래된 서원이다.


▲  삼계서원(三溪書院)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417호

석천계곡 입구 북쪽에 자리한 삼계서원은 석천계곡과 닭실을 일군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
~1548)을 배향한 서원이다.
1588년 안동부사(安東府使) 김우옹(金宇顒)이 권벌을 기리고자 석천계곡 입구에 조촐하게 세
웠는데, 1601년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건물 이름을 지어주었고, 1660년 삼계란 사액(賜額)
을 받아 국가 공인 서원이 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통 큰 서원 정리 사업으로 사당과 환성문(喚惺門), 관물루(
觀物樓)가 철거되었으며, 1951년에 중건되었다. 이곳은 특히 을미의병(乙未義兵)이 한참 일어
나던 1895년 안동 유림들이 권세현(權世賢)을 의병(義兵) 대장으로 추대하며 격문(檄文)을 작
성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서원의 구조는 앞에 공부를 하는 강당(講堂)을 두고 뒤에 사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
태로 좀 지나치게 커 보이는 2층 누각인 관물루가 서원 앞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 가운데 칸
에 문을 두어 환성문이라 했다. 허나 문은 굳게 잠겨있어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환성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정면에는 강당이 자리해 있는데,
서원 철폐 당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래서 고색
의 기운이 진하다. 강당 뒤쪽에는 사당이 자리해 있고, 서재 좌측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
이 있으며, 동재 옆에는 1906년 사림(士林)에서 세운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서원 주위로 돌담을 길게 둘렀는데, 오래된 마을의 돌담길처럼 정겹고 푸근한 모습이다. 서원
서쪽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나 어차
피 밖에서도 사당을 제외하고 보일 것은 다 보이므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들어가기도 귀찮
고, 그때 내 마음은 이미 석천계곡에 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계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174 (생기마1길 24)

▲  담장 너머로 바라본 강당과 동/서재

▲  1906년에 세워진 권벌 신도비(神道碑)


 

 

♠  봉화 제일의 경승지, 석천계곡(石泉溪谷) - 명승 60호

▲  석천계곡 입구

삼계서원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석천계곡으로 이동했다. 이 계곡은 봉화 제일의 경
승지이자 피서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봉화의 꿀단지로 아직 본격적인 피서철도 아니고 그
날이 평일인지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것보다는 이렇게 한적한 것이 더 좋
지, 덕분에 석천계곡과 닭실마을 일대를 참 아늑하고 마음 편하게 둘러보았다.

석천계곡은 가계천(駕溪川)의 일부로 닭실마을<달실, 유곡(酉谷)마을>에서 내성천(乃城川)이
합류하는 삼계교까지 약 1km 구간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권벌이 터를 다지고 그의 큰 아들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가 지은 석천정사(석천정)가 있으며, 울창한 소나무숲과 기암괴석,
계류(溪流)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예로부터 봉화 으뜸의 경승지로 찬양이 대단했다.
계곡 상류에 자리한 닭실은 권벌이 개척한 곳으로(또는 권벌의 조상이 1380년대에 개척했다고
함)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을 당하자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1520년 집을 짓고 닭
실을 일구었다.
지금은 석천계곡이 자연/답사 탐방로가 되었지만 읍내에서 계곡 남쪽에 신작로(다덕로)를 내
기 이전에는 읍내에서 닭실로 갈 때는 이 계곡을 거쳐서 갔다.

석천계곡과 닭실 일대는 '내성유곡 권충재(乃城酉谷 權沖齋) 관계 유적'이라 하여 사적 및 명
승 3호
로 지정되었으나 그 등급이 명승에 통합되면서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이란 이름으로
명승 60호로 변경되었다.


▲  석천계곡 하류 (주차장 남쪽)
멋드러진 풍경에 계곡 수심까지 얕은 편이라 피서의 성지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

▲  석천계곡 (석천정사로 가는 계곡길)

석천계곡 주차장을 지나면 흙과 돌로 이루어진 계곡길이 나온다. 길이 좀 울퉁불퉁하긴 하지
만 너무 깔끔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포장길보다는 운치가 있고 정겹다. 길도 오로지 계곡길
뿐이라 두 다리에 의지하여 갈 수 밖에 없는데, 송림(松林)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윽하며, 계
곡에는 온갖 바위가 계류의 희롱을 즐긴다.


▲  청하동천(靑霞洞天) 바위글씨

석천계곡 주차장과 석천정사 중간 정도에 기묘하게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중간 도
리에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청하동천 바위글씨가 있다. 청하동천은 석천계곡의 다른 이름으로
하늘 위에 있는 신선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만큼 이곳이 신선(神仙) 세계와 가까울 정도
로 경승지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서 동천(洞天)은 빼어난 경승지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
름으로 아무 명소나 가질 수 있는 명칭이 아니다.

이 바위글씨는 권벌의 5대손인 권두옹(權斗應, 1645~1732)이 쓴 것으로 그의 호는 대졸자(大
拙子)이다. 여기서 대졸자는 요즘 흔한 대졸자가 아니라 크게 어리석은 작자라는 뜻으로 자신
을 낮추려는 의도로 지은 것이다. 호부터가 참 특이한데, 그가 살던 시절에 석천계곡의 명성
을 듣고 많은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면서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크게 고통을 당했다
고 한다.
그래서 권두옹은 바위에 글씨를 새기고 붉은 칠을 하여 필력(筆力)으로 도깨비를 쫓아내니 이
후 계곡에 평화가 찾아와 유생들의 공부가 더 잘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한 토막 전해
온다.
과연 도깨비가 이곳까지 놀러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도깨비도 흥분시킬만큼 이곳이 대단한 경승
지임을 강조하고자 적당하게 지어낸 설화라 하겠다.


▲  청하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구렁이가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필체이다.

▲  신선이 나올 것만 같은 소나무 숲길

▲  바위에 뿌리를 내리며 장차 석천계곡의
중심을 꿈꾸는 돌탑 무리들

▲  싱그러운 석천계곡 (청하동천 바위글씨와 석천정사 중간 지점)


▲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석천정사<(石泉精舍), 석천정(石泉亭)>

▲  석천계곡의 백미(白眉) 석천정사(석천정)

석천계곡 주차장에서 계곡길을 10분 정도 들어가면 계곡 건너에 자리한 석천정사가 모습을 드
러낸다. 석천정은 석천계곡의 상징이자 이 계곡에서 가장 절경이 뛰어난 곳으로 권벌이 1526
년에 세우려고 축대까지 쌓았으나 거기서 공사가 중단되고 대신 청암정을 지었다. 이후 축대
만 남은 이곳을 큰아들 권동보가 춘양목(春陽木)으로 산뜻하게 집을 지었다. 그의 후손과 지
역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배움터이기도 했으며, 여러 번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계곡 동쪽에 돌로 석축을 단단히 다지고 돌담을 두룬 다음 팔작지붕의 석천정을 세워 계곡을
바라보게 했고, 그 옆구리에 익랑(翼廊)을 덧붙여 공간을 넓혔으며, 담장 양쪽에 외부로 나가
는 문을 내고, 북쪽 문 옆에는 유생들의 숙소인 3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을 두었다.

계곡길에서 석천정을 가려면 계류 위에 놓인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물살의 패기가 조
금 있을 뿐, 수심이 얕아서 폭우로 계곡이 미치지 않는 이상은 누구든 건너갈 수 있는 수준이
다.


▲  석천정으로 인도하는 외나무다리 (다리 건너의 기와집은
석천정의 딸린 건물로 관리인이 머물고 있음)

▲  외나무다리와 무성한 숲을 이룬 계곡 상류

▲  서쪽에서 바라본 석천정의 위엄


▲  석천정에서 바라본 계곡

▲  외나무다리에서 바라본 계곡 (주차장 방향)
이곳은 계곡이 굽이치는 곳이라 물살이 제법 급하다.

▲  석천계곡 상류 방면 (닭실 방향)

석천정은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허나 바깥에서도 왠만한 것은 다 보
이니 굳이 홍길동을 따라하며 월담을 할 필요는 없다. 예전 석천계곡에 왔을 때도 딱 여기까
지만 갔었다.
여기서 뒤쪽으로 조용히 난 샛길을 따라가면 권벌의 후손이 사는 닭실마을이 나온다. 기왕 석
천계곡에 발을 들였다면 샛길을 쭉 따라가 닭실까지 모두 살펴보기 바란다. 닭실과 석천계곡
은 서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계곡으로 이어져 있는 하나의 존재이다.

글 분량상 닭실마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 석천정사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45 (충재길 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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