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여름맞이 서라벌 경주 나들이 '
(감산사, 숭복사)

▲  감산사지 3층석탑


 

여름 제국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한복판에 신라의 향기가 지독하게 서린 서라벌 경주
(慶州)를 찾았다.
신라 왕릉의 백미(白眉)로 손꼽히는 괘릉(掛陵)을 둘러보고 그 후식거리로 감산사와 숭복
사를 둘러보고자 괘릉안내소 문화유산해설사(이하 해설사)에게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감
산사는 약 20분, 숭복사는 더 들어가야 된다고 그런다. 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미
답처(未踏處)에 대한 설레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

괘릉을 지나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은 감산사, 오른쪽은 숭복사로 이어진다. 3거
리에 감산사 이정표가 있지만 숭복사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은 없다. 나는 감산사를 먼
저 둘러보고 숭복사를 거쳐 속세(俗世)로 나갈 생각이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괘릉초등학교를 지나 멀리 남월산<南月山, 토함산 남쪽 산>의 관찰을 받으며 한적한 시골
길을 거닌다. 오르막도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고, 드넓은 논두렁과 밭두렁이 펼쳐진 그야
말로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의 연속이라 가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20분
을 가니 산 밑에 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입구에는 절의 정체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
해 있는데, 그의 피부에는 감산사 3자가 쓰여 있다.


▲  감산사 표석과 2층 요사

표석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ㄱ'자 모양의 기와집이 나온다. 이 집은 승려
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거의 한옥 민박이나 펜션 같은 모습이다. 

요사를 지나면 경내로 인도하는 길이 2갈래가 펼쳐진다. 어느 길로 가던 목적지는 같지만
연못을 끼고 가는 길이 더 아기자기하다. 돌과 흙으로 축대(築臺)를 쌓고 그 위에 마련된
연못은 네모난 모습으로 연꽃들이 막바지 와신상담(臥薪嘗膽) 중이라 소소한 연잎들만 가
득하다. 이제 보름 정도 지나면 연꽃의 향기가 눈과 코를 제대로 마비시킬 것이다.

연못에서 들꽃들이 손짓하는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이 있는 감산사 중심에 이른다.


▲  감산사 연못

▲  감산사의 중심지로 인도하는 돌계단
옛 감산사의 주춧돌로 만든 계단 너머로 법당인 대적광전이 슬쩍 머리를 내민다.


 

♠  감산사(甘山寺) 둘러보기

▲  감산사의 법당(法堂)인 대적광전(大寂光殿)

감산사는 토함산의 남쪽 줄기인 남월산 서쪽 자락에 안긴 절이다. 겉으로 보면 근래에 창건된
절처럼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매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시절에 김지성(金志誠, 652~?)이 부모와 가족들,
아내의 명복을 빌고 제왕(帝王)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가산을 털어서 지은 절이다. 이때 감산
(甘山)에 있던 자신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 연유로 감산사라 불
리게 되었다.
절을 세운 김지성은 문신(文臣)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粲) 김인장(金仁章), 어머니는 관초
리(觀肖里)부인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중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67세란 적지 않은
나이에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에서 물러났는데, 나름대로 정치 개혁을 꿈꾸다가 지략(智
略)이 얕아 실패하고 자칫 형벌을 받을 뻔했다고 한다. 아마도 형벌 대신 은퇴를 권유받아 시
랑에서 물러난 듯 싶다.
어쨌든 벼슬에서 물러나 719년 2월 자신의 사유지에 감산사를 짓고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에 가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과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을 봉안했다. 미륵
보살 광배(光背) 뒤에 창건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감산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 마저 없었다면 감산사의 존재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그 명문은 신라
의 대학자 설총(薛聰)이 썼다고 전한다.

또한 은퇴 이후,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고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노장사상(老
莊思想)에 크게 빠져들었다. 특히 5천 언에 이르는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늘 펼쳐 읽었다고
하니 그의 사례를 통해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 노장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김지성이 애지중지 가꾸던 감산사는 김지성 일가의 원찰(願刹) 노릇을 하며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했으나 마땅한 사적(事蹟)은 전해오지 않으며, 고려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조
선 중기 때 완전히 망했다고 한다.
이후 절터만 황량하게 남게 되었으며, 김지성이 봉안한 석불들은 절이 망하는 과정에서 죄다
땅속에 묻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3층석탑과 석등 대석 등은 비록 생매장은 면했으나
이리저리 뒹구는 신세가 되었으며, 절터는 논밭으로 변해 감산사의 존재는 말끔히 잊혀져 갔
다.

그러다가 1915년경 왜인(倭人)들이 우연히 절터 논밭에서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캐내면서 역사
속에 사라진 감산사의 존재가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허나 이들 불상은 서울로 강
제로 옮겨지고 절터는 다시 방치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비구니들이 들어와 옛터 위에 조그
만 건물을 지어 감산사를 칭했으며, 지금은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극락전 등 여러 건물이
경내를 이루면서 제법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며, 왜정(倭
政) 때 발견되어 서울로 소환된 석불 2개는 국보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절이 산 밑에 있을 뿐, 괘릉리의 너른 전답을 바라보고 있는 평지 절로 경내 건물에서 고색(
古色)의 내음은 맡아볼 수 없으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3층석탑 등 옛 석조물에서는 고색의
향기가 진동한다. 게다가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깔끔하며 아기자기하다.


▲  현란한 색채의 극치, 대적광전 내부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18호

협시불(夾侍佛)도 없이 혼자 불단(佛壇)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
라 후기 불상이다. 전체 높이는 약 1m로 얼굴은 딱히 표정은 없어 보인다. 눈과 코, 입, 머리
,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제대로 남아있으며, 머리는 깨져있던 것을 복원했고, 광배(光
背)와 대좌(臺座)는 새로 만들어 붙였는데, 고색의 때가 가득 입혀진 석불과는 달리 너무 대
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비로자나불이 좋아하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
는 근래에 보수한 것이다.
이 땅에 남아있는 비로자나불 중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
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불 앞에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함일까? 그의 1/15도 안되는 조그만 석불을 갖다두어 마
치 어미와 새끼를 보는 듯 하다. 그의 뒤에는 고운 빛깔로 채색된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
)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  꽃창살이 아름다운 극락전(極樂殿)

▲  대적광전 뒷뜨락

대적광전 뒤쪽에는 잔디가 입혀진 넓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감산사터의 일부분으로 3층석
탑과 석등 대석, 옛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며 까마득한 왕년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만큼 감
산사의 전성기와 신라란 나라는 우리와 엄청 멀리 떨어진 시대이다.

3층석탑 북쪽 가장자리에는 특이하게도 네모난 원두막을 두어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냥
빈터만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저런 것이라도 만들어 약간의 자리를
채워넣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  감산사지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

절터 동쪽에 자리한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
라 후기 석탑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는데, 1층 탑신은 약간의 상처가 있는 것 외에는 그런데로 온전하나 2층과 3층 탑신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완전히 사라져 세월 앞에 장사가 없음을 실감케 한다. 기백(幾百)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로 있던 절터에서 저 정도라도 건진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탑 옥개석(屋蓋石)은 4단 받침이며, 추녀 부분이 위로 살짝 올려져 작은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 있다.


▲  주인을 잃어버린 석등대석(石燈臺石)

3층석탑 인근에 화석(化石)처럼 박힌 석등대석, 꽃잎이 아래로 쳐진 연꽃 무늬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실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저기에 그럴싸하게 색깔만 입히면 정말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비록 옛 사람들이 조각한 연꽃 무늬지만 그에 대한 시샘 때문일까? 주변에는 꽃
들이 거의 없었다.
저 수려한 대석에 뿌리를 내린 석등(石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석등의 모습이 거의 거기서 거
기지만 저 석등만큼은 왠지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오래 전에 가출한 석등을 애타
게 기다리며 화려한 연꽃잎을 펼쳐 보인다.


▲  바닥에 바짝 엎드린 석등대석과 주춧돌

▲  수습된 주춧돌들 (1)

▲  수습된 주춧돌들 (2)
저들이 받쳐들던 감산사의 옛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터에 맞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더라면 짧은 상상력이라도 발휘해볼 수 있었을텐데, 한쪽에 수습해
놓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  감산사 감로수(甘露水)
감로수란 말에 단단히 각인된 것일까? 물맛이 제법 달콤한 것 같다. 물을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마름에 잠긴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  붉은 장미 옷을 걸친 초가 형태의 불연정(佛緣亭)

감산사는 원두막과 불연정 등의 초가를 갖추고 있다. 불연정은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벽 바깥
에는 장미꽃이 가득하여 마치 장미 옷을 걸친 듯, 운치를 가득 돋군다. 땅바닥에는 힘없이 떨
어진 장미꽃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데, 장미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
도 그 역시 잠깐일 뿐.. 세월과 자연은 그 존재조차 희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래서 세월이란
존재가 무섭다.

* 감산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6-2 (앞등길 117-20 ☎ 054-746-7096)


▲  바위 위에 자리를 편 조그만 석불
몸에 가득 피어난 세월의 때를 보니 제법 오래된 석불 같다. 이 석불은 근래
수습되어 없어진 머리를 새로 만들고 부분부분 손질하였다.


감산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숭복사로 가고자 왔던 길로 괘릉으로 나왔다. 날씨도 허벌나
게 덥고 지치기도 해서 다시 괘릉안내소에 얼굴을 들이미니 해설사(50대 후반 아줌마)가 반가
운 표정으로 벌써 2곳을 다 둘러봤냐고 그런다. 하여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제 감산사 하
나 보고 왔다고 그러니 힘들겠다면서 잠깐 들어와 쉬었다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안내소에 들어가 앉으니 참외와 사과, 시원한 매실차를 권한다. 마침 시장도 하고 해
서 고마움을 표하며 흔쾌히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다과시간을 가지며 해설사와 괘릉과 감산
사, 숭복사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제(話題)는 점차 경주와 신라(新羅), 개인적인 이야기
까지 확대되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보니 2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갈 준비를 했지만 귀차니즘 발동으로 발길이 쉽사리 떠지질 않는다. 해설
사와의 이야기도 재미있던 터라 그런 마음은 더했다. 허나 그날 내 자신에게 내린 임무도 있
고 시간도 제법 흘러간 터라 이제 떠나야 된다. 해설사가 날씨가 덥다며 시원한 물을 제공하
니 그 물을 모두 마시고 아쉽지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잘 보고 가라며 숭복사 가는 길을 알
려주었다.

괘릉을 나와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숭복사로 통한다. 중간에 햇갈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
만 그 길(신계입실길)을 따라 한없이 가다보면 숭복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리를 대
충 헤아려보니 거의 2.3km 정도 된다. 이동 도중에 활성리마을에서 생각치도 못했던 연지암과
활성리석불입상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애타게 손짓을 하여 숭복사는 잠시 넣어두고 그 손짓
에 이끌려 연지암으로 들어갔다.


 

♠  신라 후기 석불을 간직한 조그만 암자, 연지암(蓮池庵)

▲  활성리석불입상의 거처, 연지암 대웅전(大雄殿)

감산사와 숭복사 중간에 자리한 연지암은 팔작지붕 대웅전과 2채의 요사(寮舍)가 전부인 그야
말로 손바닥만한 작은 절이다. 불국사(佛國寺)의 말사(末寺)로 이곳에는 신라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절터가 있었다. 물론 절의 자세한 정보는 전하는 것이 없다.

왜정 시절의 어느 날 김연지화(金蓮池花) 보살이 밭 가운데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었
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그 밭을 찾아 직접 파보니 석불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연지암의 보물인 활성리석불입상이다. 연지화는 그 불상을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
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연지암이라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왜경(倭警)이 무슨 심보인지 불상의 출처를 대라며 연지화를 괴롭혔는데, 갑
자기 왜경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꺼꾸러졌다고 한다.

어쨌든 활성리석불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태어난 연지암은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꾸준히 법
등(法燈)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조촐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절 남쪽에는 나무가 약간
우거져 있고, 주변에는 경작지가 펼쳐진 평지 절이다.

* 연지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활성리 378 (활성길 120-5, ☎ 054-744-7314)


▲  연지암 대웅전 내부

▲  대웅전 내 서쪽에 있는 활성리석불입상(活城里石佛立像)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6호

연지암의 법당인 대웅전은 198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안에 이곳의 보물인 활성리 석불입
상이 깃들여져 있는데, 마땅히 중심 불단에 있을 줄 알았더만 불단에는 엉뚱하게도 금동(金銅
)으로 다져진 석가3존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정작 당사자는 서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 것
이다. 지금의 연지암을 있게 해준 존재이건만 한참 후배들에게 밀려나 구석에 있는 것이다.
다소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나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 석불은 신라 후기 불상으로 주형광배()를 갖추고 있다. 불상 높이는 153cm, 광배
높이는 190cm에 이르며, 광배에는 머리 주변의 두광()과 몸 뒤쪽의 신광()을 새기고
그 바깥쪽에 화염(火焰) 무늬를 새겼다. 얼굴은 다소 훼손되어 지워져 있으며, 귀가 유난히
길어 어깨에 닿는다. 왼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데, 약합(藥盒)인듯 싶으며, 그게 맞다면
그는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된다. 오른손에도 뭔가가 쥐어져 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머리 꼭대기의 무견정상은 꽤나 두꺼워 보이며,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얼
굴이 좀 지워진 것 외에는 대체로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이렇게 연지암을 덤으로 둘러보고 숭복사로 길을 재촉했다. 숭복사입구에서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왼쪽(동쪽)에 조그만 농로로 한없이 들어서니 넓은 절터와 함께 그 위에 자리한 숭복사
가 모습을 비춘다. 감산사는 그나마 길이 쉽지만 숭복사는 괘릉 해설사와 이정표의 안내가 없
었으면 결코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  숭복사(崇福寺)터 둘러보기

▲  숭복사터
절터 가운데에 나무가 솟아나 얇게나마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저 나무는
이곳이 절터(금당터)인지도 모르고 대책도 없이 뿌리를 내렸으니 자연도
망각할 정도로 숭복사란 존재가 오랫동안 잊혀졌다는 뜻이다.


괘릉에서 도보로 거의 30분 이상 떨어진 말방리 구석에 자리한 숭복사는 괘릉과도 무척 인연
이 깊다.
괘릉의 주인을 속시원하게 밝혀준 이곳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 이전에 파진찬(波珍
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곡사<鵠寺, 또는 동곡사(洞鵠寺)>였다.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시절에 왕이 능자리를 물색하자 신하들이 곡사 자리가 좋다며
추천했다. 이에 왕은 어찌 절에다 능을 쓰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폐하(陛下),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복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입니
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지맥(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천심(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무덤에 사상
(四象)을 포괄함으로서 천대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
다. 불법(佛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예(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
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 됩니다.
다만 청오자(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습니
까? 또한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폐하의 인척에게 속해 있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웅려(雄麗)한 곳에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
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요. 저 후문(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
입니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는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정(鄭)나라 자산
(子産)의 작은 은혜와 한(漢)나라 노공왕(魯恭王)이 도중에 그만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습니까?.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용신(龍神)이 기뻐함을 보
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원성왕은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자리로 옮
겼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
왕의 땅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
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이후 경문왕(景文王)이 꿈에서 원성왕을 친견하여 곡사를 크게 중건하며 괘릉 수호와 원성왕
의 명복을 빌었으며, 헌강왕(憲康王) 시절에 대숭복사(大崇福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상은 최
치원(崔致遠)이 숭복사비에 남겼다는 비문(碑文)의 내용이다.

신라가 망한 이후, 마땅한 사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시대까지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한 듯
싶으며, 조선의 배불(排佛) 정책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문을 닫고 소리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이곳은 속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지면서 숭복사란 고유의 이름을 잃은 채, 그저 지
명 이름을 따서 '말방리(末方里)절터'란 이름으로 흘러내려왔다. 그러다가 1931년 입실소학교
에서 이곳으로 소풍을 왔는데, 그때 깨진 비편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있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 대조한 결과 이곳이 숭복사터임이 밝혀졌다. 그제서야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은 것이다. 또한 비석은 최치원이 쓴 숭복사비로 밝혀졌고, 비
석의 내용을 통해 경주김씨들이 문무왕릉(文武王陵)이라고 그렇게나 우기던 괘릉이 원성왕릉
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숭복사비는 2마리의 거북이 조성된 쌍귀부(雙龜趺)로 절터에서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비석 조각은 13개가 발견되어 1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그 외에 기와조각과 주
춧돌 등이 다량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를 비롯해 금당터과 여러 석재(石材), 주춧돌
등이 남아있으며, '國寺大雄(국사대웅)'과 '蓋瓦大雄(개와대웅)'이 새겨진 평와(平瓦)와 금동
제 금구(金口)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근래에 승려들이 절터 옆에 건물을 짓고 숭복사를 칭하
며 아주 옛날에 끊긴 숭복사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건물 4~5동 정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많이 떨어지는 건물이다. 그나마 저것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냥 절터만 덩그러니 있어 도난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보다는 절터도 지키고 석탑도 지킬
겸, 조그만 절집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숭복사터에게도 좋을 듯 싶다. 다만 욕심과 불사(佛事
)에 너무 눈이 멀어 절터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  숭복사터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4호

금당(金堂)터 남쪽에는 옛 숭복사의 영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3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서로가 닮은 쌍탑(雙塔)으로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인데, 감산사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후기 탑이다. 게다가 1금당 2탑 형식의 신라 후기 가람배치하고도 맞아떨어
진다.

동쪽 탑은 2층과 3층 탑신, 3층 옥개석이 없어졌고, 서쪽 탑은 2층 탑신이 온데간데 없다. 기
단은 이리저리 깨지고 닳아 그 틈을 이용하여 자연이 심어놓은 잡초가 둥지를 틀었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것이 위대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모래성에 불과하다. 다
행히 탑이 자연의 일부가 되버리기 전에 절터를 수습하여 이렇게나마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인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새겨져 있는데, 세월의 때
가 가득 끼었지만 알아보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 1층 탑신에 문(門)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
며, 옥개석은 4단의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  숭복사터 동3층석탑
세월이란 꺼지지 않는 불에 형편없이 녹아내린 듯한 모습이다.

▲  숭복사터 서3층석탑
동탑보다는 낫지만 여기저기 상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  3층석탑 기단에 깃든 팔부신장들 ▼


▲  숭복사 금당터

탑 북쪽에는 두툼하게 솟은 금당터가 있다.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죄다 휩쓸려 가고 터만 황
량하게 남은 금당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잡초에 쌓여 간신히 주춧돌을
내밀고 있으니 세상살이는 그야말로 무상한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감산사와 숭복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숭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68-2 (개곡말방길 175-11)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8월 1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