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산사(甘山寺) 둘러보기
![](https://t1.daumcdn.net/cfile/blog/1617683F4E6F625743) ▲ 감산사의 법당(法堂)인 대적광전(大寂光殿) |
감산사는 토함산의 남쪽 줄기인 남월산 서쪽 자락에 안긴 절이다. 겉으로 보면 근래에 창건된 절처럼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매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시절에 김지성(金志誠, 652~?)이 부모와 가족들, 아내의 명복을 빌고 제왕(帝王)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가산을 털어서 지은 절이다. 이때 감산 (甘山)에 있던 자신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 연유로 감산사라 불 리게 되었다. 절을 세운 김지성은 문신(文臣)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粲) 김인장(金仁章), 어머니는 관초 리(觀肖里)부인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중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67세란 적지 않은 나이에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에서 물러났는데, 나름대로 정치 개혁을 꿈꾸다가 지략(智 略)이 얕아 실패하고 자칫 형벌을 받을 뻔했다고 한다. 아마도 형벌 대신 은퇴를 권유받아 시 랑에서 물러난 듯 싶다. 어쨌든 벼슬에서 물러나 719년 2월 자신의 사유지에 감산사를 짓고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에 가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과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을 봉안했다. 미륵 보살 광배(光背) 뒤에 창건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감산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 마저 없었다면 감산사의 존재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그 명문은 신라 의 대학자 설총(薛聰)이 썼다고 전한다.
또한 은퇴 이후,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고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노장사상(老 莊思想)에 크게 빠져들었다. 특히 5천 언에 이르는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늘 펼쳐 읽었다고 하니 그의 사례를 통해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 노장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김지성이 애지중지 가꾸던 감산사는 김지성 일가의 원찰(願刹) 노릇을 하며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했으나 마땅한 사적(事蹟)은 전해오지 않으며, 고려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조 선 중기 때 완전히 망했다고 한다. 이후 절터만 황량하게 남게 되었으며, 김지성이 봉안한 석불들은 절이 망하는 과정에서 죄다 땅속에 묻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3층석탑과 석등 대석 등은 비록 생매장은 면했으나 이리저리 뒹구는 신세가 되었으며, 절터는 논밭으로 변해 감산사의 존재는 말끔히 잊혀져 갔 다.
그러다가 1915년경 왜인(倭人)들이 우연히 절터 논밭에서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캐내면서 역사 속에 사라진 감산사의 존재가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허나 이들 불상은 서울로 강 제로 옮겨지고 절터는 다시 방치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비구니들이 들어와 옛터 위에 조그 만 건물을 지어 감산사를 칭했으며, 지금은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극락전 등 여러 건물이 경내를 이루면서 제법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며, 왜정(倭 政) 때 발견되어 서울로 소환된 석불 2개는 국보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절이 산 밑에 있을 뿐, 괘릉리의 너른 전답을 바라보고 있는 평지 절로 경내 건물에서 고색( 古色)의 내음은 맡아볼 수 없으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3층석탑 등 옛 석조물에서는 고색의 향기가 진동한다. 게다가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깔끔하며 아기자기하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216FD424E6F62691E) ▲ 현란한 색채의 극치, 대적광전 내부
![](https://t1.daumcdn.net/cfile/blog/13216A424E6F62670B)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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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시불(夾侍佛)도 없이 혼자 불단(佛壇)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 라 후기 불상이다. 전체 높이는 약 1m로 얼굴은 딱히 표정은 없어 보인다. 눈과 코, 입, 머리 ,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제대로 남아있으며, 머리는 깨져있던 것을 복원했고, 광배(光 背)와 대좌(臺座)는 새로 만들어 붙였는데, 고색의 때가 가득 입혀진 석불과는 달리 너무 대 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비로자나불이 좋아하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 는 근래에 보수한 것이다. 이 땅에 남아있는 비로자나불 중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 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불 앞에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함일까? 그의 1/15도 안되는 조그만 석불을 갖다두어 마 치 어미와 새끼를 보는 듯 하다. 그의 뒤에는 고운 빛깔로 채색된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 )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825003F4E6F625533) |
![](https://1.bp.blogspot.com/-Qm5fWTcroPw/XU8p0Xszw4I/AAAAAAAAN3k/CuklLD2fAZclrDciR_xW28fsgDXFA8_LwCLcBGAs/s640/JTR0wUCkAby6bXZ73mZ2Ww.jpg) |
▲ 꽃창살이 아름다운 극락전(極樂殿) |
▲ 대적광전 뒷뜨락 |
대적광전 뒤쪽에는 잔디가 입혀진 넓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감산사터의 일부분으로 3층석 탑과 석등 대석, 옛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며 까마득한 왕년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만큼 감 산사의 전성기와 신라란 나라는 우리와 엄청 멀리 떨어진 시대이다.
3층석탑 북쪽 가장자리에는 특이하게도 네모난 원두막을 두어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냥 빈터만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저런 것이라도 만들어 약간의 자리를 채워넣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30A7F424E6F626E31) ▲ 감산사지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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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동쪽에 자리한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 라 후기 석탑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는데, 1층 탑신은 약간의 상처가 있는 것 외에는 그런데로 온전하나 2층과 3층 탑신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완전히 사라져 세월 앞에 장사가 없음을 실감케 한다. 기백(幾百)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로 있던 절터에서 저 정도라도 건진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탑 옥개석(屋蓋石)은 4단 받침이며, 추녀 부분이 위로 살짝 올려져 작은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 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916C2424E6F62301E) ▲ 주인을 잃어버린 석등대석(石燈臺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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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석탑 인근에 화석(化石)처럼 박힌 석등대석, 꽃잎이 아래로 쳐진 연꽃 무늬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실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저기에 그럴싸하게 색깔만 입히면 정말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비록 옛 사람들이 조각한 연꽃 무늬지만 그에 대한 시샘 때문일까? 주변에는 꽃 들이 거의 없었다. 저 수려한 대석에 뿌리를 내린 석등(石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석등의 모습이 거의 거기서 거 기지만 저 석등만큼은 왠지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오래 전에 가출한 석등을 애타 게 기다리며 화려한 연꽃잎을 펼쳐 보인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50778424E6F62702B) ▲ 바닥에 바짝 엎드린 석등대석과 주춧돌
![](https://1.bp.blogspot.com/-Z028qqTR98c/XU8p1N2OveI/AAAAAAAAN3w/1req2U0AOTsugqMljvSDHsim8xVat8orACLcBGAs/s640/RM5UDcnIRZB.s2phhoh4Lg.jpg) ▲ 수습된 주춧돌들 (1)
![](https://1.bp.blogspot.com/-XwlBofYVOPY/XU8p3LS__mI/AAAAAAAAN4I/badUyduTpA4SfDOPxmoruCfZ8fyo4DLgwCLcBGAs/s640/xDnOli7fqX5vWk3x_sFyGg.jpg) ▲ 수습된 주춧돌들 (2) 저들이 받쳐들던 감산사의 옛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터에 맞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더라면 짧은 상상력이라도 발휘해볼 수 있었을텐데, 한쪽에 수습해 놓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https://1.bp.blogspot.com/-cOYzRMLKL-g/XU8pyYjRoHI/AAAAAAAAN3Q/6ARiBktLNwwifb8d-5-Py-YcZvwFow_NwCLcBGAs/s640/5qpl8lgx8.a9UmEwfiJGlw.jpg) ▲ 감산사 감로수(甘露水) 감로수란 말에 단단히 각인된 것일까? 물맛이 제법 달콤한 것 같다. 물을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마름에 잠긴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https://1.bp.blogspot.com/-Lx56GZsjY1o/XU8p2YaEskI/AAAAAAAAN4A/X-ksyWNYKM4iyoA7QTza0cIGLXZgbYtZQCLcBGAs/s640/ojSS4yr7V8_Rk1lD3vTJ1Q.jpg) ▲ 붉은 장미 옷을 걸친 초가 형태의 불연정(佛緣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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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사는 원두막과 불연정 등의 초가를 갖추고 있다. 불연정은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벽 바깥 에는 장미꽃이 가득하여 마치 장미 옷을 걸친 듯, 운치를 가득 돋군다. 땅바닥에는 힘없이 떨 어진 장미꽃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데, 장미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 도 그 역시 잠깐일 뿐.. 세월과 자연은 그 존재조차 희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래서 세월이란 존재가 무섭다.
* 감산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6-2 (앞등길 117-20 ☎ 054-746-7096) |
![](https://1.bp.blogspot.com/-Lat5yU92_kg/XU8pyZJ686I/AAAAAAAAN3U/Iexz3Fy9StUucYrsNoNMDLqSyI_Xhy77QCLcBGAs/s640/4Q2VRU1wi57PuxZcsrMeew.jpg) ▲ 바위 위에 자리를 편 조그만 석불 몸에 가득 피어난 세월의 때를 보니 제법 오래된 석불 같다. 이 석불은 근래 수습되어 없어진 머리를 새로 만들고 부분부분 손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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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숭복사로 가고자 왔던 길로 괘릉으로 나왔다. 날씨도 허벌나 게 덥고 지치기도 해서 다시 괘릉안내소에 얼굴을 들이미니 해설사(50대 후반 아줌마)가 반가 운 표정으로 벌써 2곳을 다 둘러봤냐고 그런다. 하여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제 감산사 하 나 보고 왔다고 그러니 힘들겠다면서 잠깐 들어와 쉬었다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안내소에 들어가 앉으니 참외와 사과, 시원한 매실차를 권한다. 마침 시장도 하고 해 서 고마움을 표하며 흔쾌히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다과시간을 가지며 해설사와 괘릉과 감산 사, 숭복사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제(話題)는 점차 경주와 신라(新羅), 개인적인 이야기 까지 확대되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보니 2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갈 준비를 했지만 귀차니즘 발동으로 발길이 쉽사리 떠지질 않는다. 해설 사와의 이야기도 재미있던 터라 그런 마음은 더했다. 허나 그날 내 자신에게 내린 임무도 있 고 시간도 제법 흘러간 터라 이제 떠나야 된다. 해설사가 날씨가 덥다며 시원한 물을 제공하 니 그 물을 모두 마시고 아쉽지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잘 보고 가라며 숭복사 가는 길을 알 려주었다.
괘릉을 나와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숭복사로 통한다. 중간에 햇갈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 만 그 길(신계입실길)을 따라 한없이 가다보면 숭복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리를 대 충 헤아려보니 거의 2.3km 정도 된다. 이동 도중에 활성리마을에서 생각치도 못했던 연지암과 활성리석불입상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애타게 손짓을 하여 숭복사는 잠시 넣어두고 그 손짓 에 이끌려 연지암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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