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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천 임고서원 은행나무

임고서원 은행나무는 이곳의 오랜 명물로 500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높이 20m, 둘레 5.95m의 크고 큰 나무로 원래
고서원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
부래산 자락)에 있었으나 1600년경 이곳에 재건하면서 은행나무도 가져왔다고 전한다.
예로부터 나무에게 정성껏 차린 깨끗한 음식이나 맑은 정화수를 차려 기도를 올리면 부녀자는 아들을 얻고, 병자는 완쾌된

다고 전하며, 나무를 해치면 크게 벌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어 지역 사람들이 꽤 애지중지한다.

 

2. 하늘 높이 솟은 임고서원 은행나무의 위엄

 

3. 포은선생 숭모기념비

 

4. 임고서원 앞에 재현된 개성 선죽교

개성 선죽교는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게 피살된 현장으로 유명하다. 하여 정몽주를 배향한 임고서원 앞에 선죽

교를 재현하여 그의 충심을 기리고 있다.

선죽교의 원본이 있는 개성은 분명 우리 땅이나 70년 넘게 공산괴뢰정권이 무단 점령하고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한때 북한이 선죽교와 박연폭포 등 개성 극히 일부를 개방하여 개성 관광이 가능하기도 했으나 그것도 아
잠시 뿐이었으며, 서울에
서 겨우 70여km 거리에 여행상품 가격이 무려 20~30만원(그렇게 기억함)이 넘었다.

 

 

5. 선죽교와 그 너머로 바라보이는 임고서원

 

6. 붉은 글씨로 이루어진 선죽교 비석

 

7. 선죽교 옆에 닦여진 낮은 공간과 수로

 

8. 임고서원 (새 서원)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여헌 장현광, 지봉 황보인이 배향되어 있다. 영천 출신으로 충신으로 명성이 높은 정몽

주를 기리고자 1553년에 노수, 김응생, 정윤량, 정거 등이 부래산 자락에 세운 것으로 1554년에 완성이 되었으며, 조정에서

사액을 받아 농토와 서적, 노비를 지원받았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3년 현 위치에 재건하여 재사액을 받았으며, 1643년에 여헌 장현광을 배향하고 1787년에는 계

유정난(1453년) 때 처단된 지봉 황보인이 추가 배향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으로 파괴되었으나, 1879

년에 존영각을 세워 포은 정몽주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1965년에 서원을 복원해 정몽주만 우선 복향했으며, 1979년 묘우인 문충사를 세웠다. 그리고 1991년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

여 1992년에 그 동쪽으로 새 서원이 지어졌으며, 2001년 지봉 황보인이 다시 배향되어 지금에 이른다.
묘우는 문충사, 내삼문은 유정문, 강당은 흥문관, 동협은 경의협, 서협은 명성협, 동재는 수성재, 서재는 함육재, 문루는 영

광루이며, 심진각과 전사청, 포은선생신도비, 단심가비, 백로가비 등을 지니고 있다.

 

9. 구 임고서원

1965년에 복원된 것으로 1991년 새 서원이 동쪽에 들어서면서 지금은 매우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려
움) 이곳에 있던 위패와 영정 등은 모두 새 서원에 있으며, 향사 또한 새 서원에서 열린다.

 

 

10. 임고서원 안내도

임고서원은 영천시 임고면의 중심 마을인 양항리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과 교통편은 괜찮은 편이다. (영천터미널에서 임고

방면 시내버스를 타면 서원앞이나 그 부근에 내려줌, 또한 동대구역복합환승센터 남쪽 건너편이나 동부정류장, 안심역에서

영천시내버스 555번 일부가 임고서원까지 운행, 자세한 것은 영천시청 홈페이지 참조)

 

11. 단심가, 백로가 표석

단심가는 이방원의 회유에 대한 답으로 보낸 시로 유명하다. 즉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를 시로 표현

했다. 그리고 백로가는 정몽주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정의롭게 살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시라고 전한다.

 

12. 임고서원 새 서원의 정문인 영광루

 

13. 통정대부 공조참의 최선매 기적비
최선매(1554~1626)는 자는 의수, 호는 긍와이다. 부래산 밑에 살았으며 원우(옛 임고서원) 유생이었는데, 임진왜란이 터
자 포은의 영정과 위관을 기룡산 석굴 속으로 피신시켰다.
이후 서원을 중건하여 포은의 영정을 다시 안치한 공을 인받아 유림의 상소로 1891년 공조참의로 추증되었으며 유림들

이 그의 공을 오랫동안 기리고자 서원 영당 앞에 그의 기적비를 세웠다. 글은 봉한이 쓰고, 포은의 방손인 정희규가 비문을

지었으며, 정재완과 정규성, 정규석, 정규룡 등이 이 일을 주관했다.
비석은 바닥돌과 비신,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으로 높이는 2m 남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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