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락국의 마지막 군주, 구형왕의 능으로 전해오는 신비의 돌무덤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 - 사적 2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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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전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왕산 북쪽 골짜기에 '전 구형왕릉(이하 구형왕릉, 석총)'이 라 전하는 거대한 돌무덤이 신비로움과 수수께끼를 고요히 품은 채 웅크리고 있다. 산청의 대 표적인 명소로 주변의 빼어난 풍광 때문인지 나 같은 범인(凡人)들이 감히 발을 들이는 것이 뭐할 정도로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이 무덤은 일반적인 흙무덤이 아닌 돌로 쌓은 이른바 석총(石塚)이다. 이 땅에서 석총의 대표 적인 존재로 고구려의 장군총(將軍塚)이 있는데, 그건 덩치로 보아 고구려의 태왕(太王) 무덤 이 확실하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의 왕릉으로 보고 있음> 하지만 이곳 석총은 여전히 정체가 아리송하다. 그래서 구형왕릉이란 이름 앞에 전(傳)을 붙인 것이다. 즉 구형왕 릉으로 아련히 전해오는 존재란 뜻이다.
석총의 형태는 경사진 언덕에 돌로 쌓은 기단식 석단(石壇) 형태로 동쪽으로 뻗어있는 경사면 에 잡석으로 앞면을 7단 쌓고, 정상은 봉분(封墳)처럼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 높 이는 7.15m 정도로 어떤 이는 산청의 피라미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연 경사를 활용하여 만 든 것이라 평지에 만든 계단식 돌무덤<장군총이나 서울 석촌동고분군>과는 차이가 있다. 석총 중간 부분에는 네모난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는 폭 40cm, 깊이 68cm의 감실(龕室)로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 처음에는 내부로 들 어가는 문으로 생각했지만, 깊이가 1m도 안되니 그것도 아니다. 만약 불교와 관련된 돌탑이라 면 불상을 봉안한 공간이겠지만 그런 증거도 마땅치가 않다. 예전부터 구형왕릉에 가게 되면 반드시 저 구멍을 살펴보겠노라 다짐했으나, 석총으로 올라가는 양 사이드에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장이 있어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사람도 없으니 그 경고를 무 시하고 올라가도 되겠지만 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석총 주위에는 돌로 쌓은 키 작은 돌담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데, 돌담의 모습은 아까 덕양전 의 돌담과 비슷하여 덕양전이 1930년 그 자리에 터를 닦을 때, 이곳의 돌담을 따라 만들었음 을 알 수 있다. 석총 앞은 경사가 좀 기울어져 있는데 경사면 앞 평지에 비석과 장명등, 문인석(文人石)과 무 인석(武人石) 1쌍을 두어 석총을 지키게 했다. 이들은 모두 근래에 심은 것으로 석총과는 시 대 차이가 상당하다. 무엇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존의 문인석, 무인석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훤칠한 키의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문인석은 너무 나이가 지긋해 보 인다. 그리고 세월에 지쳤는지 조금은 경직된 표정이다. 석총 북쪽 계곡에는 돌로 터를 다지고 능을 관리하고 제기(祭器)를 관리하는 재실(齋室) 2동 을 만들었고, 근래에 주차장과 무덤으로 건너가는 홍예다리를 가설하고 주변을 정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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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형왕릉 우측 석인(石人) 왼쪽이 문인석, 오른쪽이 무인석이다. |
▲ 구형왕릉 좌측 석인의 뒷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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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형왕릉 비석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쓰여 있다. 여기서 양왕릉은 구형왕릉의 다른 이름이다. |
이 석총의 정체에 대해서는 왕릉이란 설과 석탑이란 설이 있다. 탑으로 보는 설은 안동(安東) 과 의성 지역에 비슷한 모습의 탑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근처에 왕산사란 절이 있어서 석탑 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탑의 모습은 이 땅의 흔한 스타일이 아닌 이형(異形) 스타일일 것이다. 그리고 구형왕릉이나 왕릉(신라 왕릉으로 구전됨)으로 보는 것은 오래 전부터 구전이나 기록 을 통해 왕릉으로 전해오고 있어서 그렇다. 지금은 왕릉 쪽에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으나 불 교 석탑의 견해도 만만치 않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음현(山陰縣) 부분에 '현 서쪽 10리, 왕 산 산중에 돌로 쌓은 언덕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상에서는 왕릉으로 전한다' 는 기록이 있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옛날부터 왕릉으로 구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이곳이 구형왕릉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홍의영(洪儀永, 1750~1815)의 '왕산심 릉기(王山尋陵記)'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서는 무덤 서쪽에 왕산사란 절이 있고 그 절에서 전 하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쓰여있다고 했으며, 산사기권(山寺記券)에도 그렇게 나와있 다. 또한 산청현읍지(山淸縣邑誌)에는 무오년(戊午年, 1798년)에 구형왕릉을 수리하고 사당을 세워 수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허나 이들도 딱히 신뢰도는 떨어진다. 경주에 있는 많은 신 라 무덤들이 신라 왕족 후손들(박씨, 석씨, 김씨)에 의해 대충 '신라 어느 왕'의 능으로 둔갑 되었듯이 구형왕릉 역시 후손(김해김씨)에 의해 둔갑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석총의 조성시기는 구형왕릉이 맞다면 6세기 중반이 될 것이고, 만약 탑이라면 그 이후가 될 것이다. 이곳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구형왕이 세상을 뜨자 '나라도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는가?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따르던 신하와 군사들은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산에서 뒹굴던 잡석을 하나씩 얹혀서 지금의 석총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 이곳은 구체적인 발굴작업이나 학술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는데, 하루 빨리 발굴조사가 이 루어져 그 속을 속시원히 들추었으면 좋겠다. 왕릉이라면 조촐하게 석실(石室) 같은 것이 있 을 것이고 거기서 괜찮은 단서나 당시 유물이 앞다투어 나올 지도 모른다. 옛날 제왕이나 귀 족의 무덤은 보물단지라 불릴 만큼 유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
▲ 신비한 기운에 감싸인 듯한 구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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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곳에 묻혔다는 구형왕(?~537년)은 누구일까? 구형왕을 살피기 전에 일단 가락국을 포 함한 가야(伽倻)에 대해 아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던 삼국시대에 당당한 일원임에도 삼국(三國)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가야, 당연히 사국(四國)시대라고 불려야 되지만 가야는 늘 외면을 받고 있다. 가야는 변한(弁韓)을 이루던 12개 나라의 일원인 구야국(狗倻國, 경남 김해)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김수로(金首露)가 지역 촌장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가락국(駕洛國)을 건국했 다. 그 가락국(금관가야)의 건국 시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나 개황록(開皇曆)에 따르면 서기 42년이라고 한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다.
가락국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변한을 통합했으며, 점령한 곳에는 왕족이나 귀족을 보내 그 곳의 왕이나 관리로 삼거나, 항복한 세력의 군장에게 통치권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소위 말하는 13가야를 이루게 되었다. (예전에는 6가야라고 했음) 13개(혹은 그 이상)의 연맹국가(聯盟國家)로 구성된 가야는 경남 대부분을 차지하고, 경북 성 주(星州)와 상주, 문경<고령가야(古寧伽倻)>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북쪽에 있는 신라(新 羅)와 자주 충돌했는데, 초기에는 가야가 우위를 차지했으며, 서로는 마한(馬韓)과 백제와 다 투었다. 또한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열도(倭列島)로 진출, 곳곳을 개척하여 속령(屬領)으로 삼았으며, 이때 건너간 가야인 중 유력한 사람이 왜왕(倭王)이 되어 가야의 명을 받았다. 특히 철이 많이 생산되어 철생산국으로 막대한 부를 모았는데, 그 철을 바탕으로 강력한 기마 군단을 만들어 주변 나라를 벌벌 떨게 했다.
이렇게 부강하던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제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지 못 한 한계점이 있었다. 이들 삼국은 중앙집권체제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영토 확장에 매진했으나, 가야는 각 연맹국가가 따로국밥처럼 놀아 단결이 쉽게 되 지 못했던 것이다. 가락국과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盟主) 노릇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맹주일 뿐, 다른 연맹국가를 제어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같은 가야라도 이익 관계에 따라 서 로 치고 박고 싸우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3세기 초반에 안라국(安羅國)이 일으킨 포 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가락국이 주변 나라와의 해상교역권을 송두리째 차지하며 혼자서만 배를 불리자 안라국 등 경 남 남부 해안 지역에 있던 8개의 나라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가락국을 공격했다. 가락국은 서 둘러 신라에 구원을 청했으나, 8국 연합군의 수군이 신라 땅인 울산까지 치고 들어가 그 기세 를 떨치니 가락국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
▲ 계곡 위에 닦여진 홍예다리 홍예다리는 근래에 만든 것으로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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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후반, 가락국은 왜열도의 군사를 징발해 약 2만의 군사로 신라 왕경(王京, 경주)을 공 격했다. 신라 내물왕(奈勿王)은 급히 고구려에 살려달라 요청을 했고, 고구려의 태왕인 광개 토태왕(廣開土太王)은 친히 기병 5만을 이끌고 서라벌로 달려가 가야군을 격파했다. 이때 고구려의 기마군과 가야의 기마군이 처음으로 격전을 벌였는데, 둘 다 같은 철갑기병(鐵 甲騎兵)에 철갑옷을 갖췄지만 승자는 고구려였다. 가야의 철갑은 판갑(板甲)으로 방어력은 끝 내주지만 너무 무거워 기동력이 떨어진데 반해 고구려 철갑은 환갑(環甲)으로 방어력은 좀 떨 어지지만 가벼워서 기동력이 좋다. 게다가 고구려군이 전쟁경험도 풍부하니 어찌 가야가 당해 내겠는가.
고구려군은 줄행랑치는 가야군을 쫓아 가야를 풍비박산을 내었고 바다를 건너 왜열도까지 공 격해 쓸어버렸다고 전한다. 그 과정에서 가야연맹국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이후 소리 없이 쇠 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런 마당에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좌우에서 가야를 압박하 니 하나로 뭉치지 못해 따로 노는 가야연맹은 더욱 힘들어 질 수 밖에 없다.
가야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6세기가 도래하고, 521년 구형왕이 가락국 10대 제왕이 되었다. 가 락국이 42년에 세워졌다고 쳐도 480년 동안 왕은 겨우 9명이었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50~55년이라는 소리인데, 이게 말이 될까? 이는 기록의 실수로 중간에 누락된 제왕이 제법 많을 것이다. 세상에 전하는 왕은 구형왕 포함 10명 뿐이니 후세에서 이 를 잘못 계산한 것이다.
구형왕은 구충왕(仇衝王), 구해왕(仇亥王),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는데, 왕비는 분질수이질( 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이다. 그는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노종(奴宗), 2남은 무 덕(武德), 3남은 무력(武力)이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은 가락국 왕자(또는 왕족)에게 화친의 의미로 신라 왕족 여인을 시집보 냈다. 허나 구형왕은 시집 온 신라 왕녀에게 가야 옷을 입혔고, 이를 들은 법흥왕은 괜한 것 도 아닌데도 뚜껑이 폭발하여 532년 사다함(斯多含)을 시켜 가락국을 공격케 했다. 가야연맹의 오랜 맹주로 위엄을 떨쳤던 가락국은 신라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결국 국고(國 庫)의 보물을 들고 신하를 대동하여 신라에 항복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500년 역사의 가락국 은 532년 그 문을 닫게 되고, 가야의 맹주는 대가야(大伽倻)로 넘어가게 된다. 또한 가락국을 방패 삼아 간신히 나라를 꾸리던 다른 가야연맹국도 차례대로 무너져 561년 안라국(경남 함안 ), 562년 대가야의 멸망을 끝으로 가야연맹은 역사에서 영원히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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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이 깃든 재실 주변 이곳을 지나던 늦가을도 구형왕릉의 신비로움에 반한 것일까? 잠시 길을 멈추고 곱게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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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왕이 항복하자 신라 조정은 상등(上等)의 벼슬을 내리고 가락국 땅을 식읍(食邑)으로 주 어 심심치 않게 사례를 했다. 또한 구형왕 일가를 신라 진골(眞骨) 귀족으로 대우했다. 허나 왕은 가락국에 있지 않고, 바로 길을 떠나 수로왕의 별궁이라고 전하는 수정궁(水晶宮)에 들 어와 은둔했다고 한다. 수정궁은 구형왕릉 남쪽 왕산사터라고 전한다. 반면 그의 아들은 김해 에 남거나 신라 조정에 출사했다. 그가 김해를 떠나 산청 산골로 들어간 것은 나라를 말아먹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기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수정궁이 대가야 서쪽이고, 백제 땅과도 가까워 이들의 도움을 받아 후 일을 도모하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여기서 5년을 머물다가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구형왕의 3째 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은 신라 조정에 출사해 많은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나 중에 벼슬이 상위 등급인 각간(角干)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인 김서현(金舒玄)은 신라 왕족인 만명(萬明)과 혼인했으며, 그 역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김유 신으로 그도 숱한 전공을 세우고, 왕족인 김춘추(金春秋)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면서 군권 을 장악했다. 그가 죽자 왕족이 아님에도 왕으로 추존되었으니 신라에서 그의 위치가 어떠했 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그의 시호는 흥무왕(興武王)이다. 그를 통해 가야계 김씨들의 세력이 왕성해졌으나 그가 세상을 뜬 이후, 그 세력도 많이 약해 졌으며, 김유신의 자손들도 별로 두드러지는 인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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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건너편 남쪽 재실(호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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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왕릉은 새도 들어오기 힘든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졸졸 흘러 한 여름에도 시원하다. 산청에서 띄워주는 명소로 휴일에는 사람이 좀 오지만 평일에는 사람 구 경 하기가 힘들어 새소리와 산바람의 소리만이 이곳에 내려앉은 정적을 살짝 깨뜨린다. 자연을 벗삼아 사색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곳으로 왕산 등산로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여기 서 유의태약수터나 망경대를 통해 왕산으로 오를 수 있다.
홍살문에서 구형왕릉으로 갈 때는 정면 돌다리를 건너 호릉각을 거치거나 홍살문을 지나 삼문 을 거쳐도 된다. 어차피 거리는 둘 다 비슷하다. 다리 건너에 돌로 터를 다져 석축을 3단으로 쌓고 재실인 호릉각을 지었는데, 그곳에 서린 늦가을 풍경이 가히 숨이 막히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저곳에 들어가면 나도 단풍마냥 알록달록 물드는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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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릉으로써의 애써 위엄을 보이려는 붉은 피부의 홍살문 |
▲ 왕릉 앞에 세워진 삼문(三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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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 물품을 보관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호릉각(護陵閣, 남쪽 재실) |
▲ 호릉각과 북쪽 재실을 이어주는 문 |
▲ 왕릉의 우측 돌담 돌담과 왕릉 뒤쪽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이젠 나이가 상당하여 돌담과 왕릉에 발을 올리기만 해도 스르륵 무너질 것 같다.
▲ 약간 우측에서 올려다본 구형왕릉 가을 볕이 살포시 내려앉은 구형왕릉, 워낙 비밀이 많은 곳이다 보니 왕릉을 이루고 있는 돌들도 모두 범상치 않게 다가온다.
▲ 북쪽 재실에서 바라본 돌다리와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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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구형왕릉 찾아가기 (2018년 10월 기준) ① 산청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1일 8회 떠난다. *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진주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운행 ② 현지교통 * 산청터미널에서 화계리행 군내버스가 1일 9회 정도 있으며, 화산마을(덕양전)에서 하차하여 도보 20분 ③ 승용차 (주차비 없으며, 덕양전에도 주차장 있음) * 대전~통영고속도로 → 산청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매촌3거리에서 우회전 → 덕양전에서 좌회전 → 구형왕릉 * 구형왕릉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