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바닷가 언덕, 절부암(節婦岩) - 제주도 지방기념물 9호
▲ 서쪽에서 바라본 절부암 |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용수리 포구에 이르면 유난히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시선을 붙잡는다. 온갖 나무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뒤섞여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 그 언덕은 용수리의 오랜 상징이자 나를 이 머나먼 남국(南國)으로 오게 한 절부암이다. 서쪽을 바라보고 선 절부암은 이름 그대로 절개를 지킨 부인을 기리는 바위로 다음과 같은 슬 픈 이야기가 속삭이듯 서려있다.
때는 1863년 경, 용수리에는 강사철(姜士喆)과 16살(또는 19세) 먹은 고씨 여인이 살고 있었 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여 혼인까지 했으나 살림이 영 좋지 못해 차귀도에서 대나무를 베어와 바구니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혼인 며칠 후, 강씨는 바구니를 만들 재료를 취하고자 마을 사람들과 테위(테배)를 타고 차귀 도로 건너갔다. 허나 정오가 지나면서 갑자기 강한 바람이 몰아치자 서둘러 마을로 돌아오다 가 강풍의 희롱에 제대로 흥분한 바다 파도로 배가 뒤집혀 모두 죽고 만다. (다른 이야기로는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강풍으로 침몰해 죽었다고 함) 졸지에 남편을 잃은 고씨는 크게 통곡하며 바닷가에 나가 남편의 시신을 찾을 수 있기를 절절 히 빌었다. 그렇게 3달을 빌었으나 남편의 시신은 소식이 없었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결 국 해안 절벽에 있는 팽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그때까지 행 방이 묘연하던 남편의 시신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고씨가 목을 맨 자리 밑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해괴한 일에 지역 사람들은 중원대륙 조아(曹娥)의 일과 같다며 감탄을 했다. 여기서 조아는 조간의 딸로 그가 강을 건너다 급류에 빠져 죽자 조아는 70일 동안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가 너무 비통하여 강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5일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물 위에 떠올랐다고 한다. 고씨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대정(모슬포) 사람 신재우(愼哉佑)는 크게 감동을 먹고 자신이 과 거에 붙으면 고씨의 열녀비(烈女碑)를 세워주겠다고 공언했다. 하여 바다를 건너 서울로 올라 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정성 부족인지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풀이 죽은 신씨는 고향으로 가다가 답답한 마음에 점집에 들렸다. 점쟁이는 한 여인이 따라다 니고 있으니 그를 잘 모시면 급제를 할 것이라 답을 했다. 허나 그 여인이 누군지 전혀 알 수 가 없었고 집에 와서도 계속 머리를 굴렸으나 딱히 떠오르는 여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고씨 부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 여인이 고씨라 여겨져 고씨의 묘를 참배했다. 그리고 다시 상경 하여 과거에 응시해 드디어 급제를 하였다. 그는 대정판관(大靜判官)의 직을 제수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정에 상소하여 고씨의 열녀비를 세우는 한편, 70냥을 지원해 고씨 부부의 묘를 당산봉(고산봉) 서쪽 비탈에 합장해 매년 3월 15일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고산과 용수 마을에 100냥을 내주어 제사를 꼭 챙기도록 했으며, 고씨가 목을 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이름 지었다.
왜정(倭政) 때는 왜정의 태클과 재정 문제로 제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마을 부인회가 돈을 모아 300평 정도의 절부암전을 마련하여 그 소출로 매년 꾸준히 제를 지낸다. |
▲ 북서쪽에서 바라본 절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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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부암 언덕에는 사철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포나무, 느릅나무, 박달목서(환경부 지정 멸 종위기 야생생물 2급) 등이 모진 바닷바람을 이겨내며 우거져 있다. 예전에는 절부암 바로 앞 까지 바닷물이 넝실거렸으나 개발의 칼질이 여기까지 마수를 뻗치면서 적지 않은 변화를 강제 로 받게 되었다. 절부암 앞에 돌로 다져진 산책로가 닦여 바닷물은 서쪽으로 조금 밀려났으며, 그 앞바다에 도 로가 생기고 항구가 생겼다. 게다가 절부암 뒤쪽에도 집들이 마구 들어서 마치 도시 속에 갇 힌 외로운 공간처럼 되었다. 이곳이 대도시 한복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엄연한 시골 포 구이다. 개발의 칼질에 절부암의 공간이 다소 쪼그라든 느낌을 주며, 절부암 바로 뒷쪽에 옥 의 티를 선사하면서까지 건축 허가를 내줬어야 했는지 제주도 철밥통들에게 실로 회의감이 든 다. (무분별한 난개발로 계속 망가지고 고통받고 있는 제주도의 현실임) |
▲ 절부암 앞 산책로 (북쪽 방향)
▲ 절부암 앞 산책로 (남쪽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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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가 닦여진 이곳에는 층층이 주름진 바위들이 있었고 그곳까지 바닷물이 손을 내밀어 절 부암과 진한 정을 나누었다. 산책로 조성으로 절부암 접근이 좀 쉬워지긴 했으나 1980년대 절 부암 사진과 비교해보니 개발이 씌운 굴레에 단단히 갇혀있는 듯한 모습이다. |
▲ 절부암 제단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을 갖춘 이곳에서 절부암 제사가 이루어진다. 평소에는 먼지가 놀이터로 삼을 정도로 한가하지만 3월 15일만 되면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세월을 너무 간지나게 탄 절부암 바위들
▲ 절부암 바위글씨의 위엄 감동 김응하(監董 金應河)가 글을 짓고 동수 이팔근(洞首 李八根)이 글씨를 썼다. 제주도에서 유일하다는 전서체 바위글씨로 독특한 글씨라 절부암이면서도 아닌듯한 아리송한 모습이다.
▲ 신재우가 남긴 바위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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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부암 바위글씨 주변에는 '同治丁卯紀平三字(동치정묘기평삼자, 여기서 '동치정묘'는 1867년 )','判官愼裁佑撰(판관 신재우찬)' 바위글씨가 있다. 이들은 절부암을 있게 한 신재우의 흔적 들로 그 주변 바위에는 절부암 제사를 주관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어 절부암의 과거와 현재가 깃든 소중한 일기장 같은 곳이다.
* 절부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41-5 |
▲ 바다를 향해 작게 입을 벌린 용수리 포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섬은 와도와 차귀도이다. 저들은 용수리에서 수월봉까지 다양한 각도로 아주 지겹도록 구경을 했다.
▲ 차귀도(遮歸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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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닿을듯 가까이 떠있는 차귀도는 0.16㎢의 조그만 섬으로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다. 지실이섬, 죽도, 와도 등의 작은 섬을 거느리고 있으며, 1970년대까지 약간의 사람들이 거주 하고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 시절에 여러 번 터졌던 북한의 도발 행위(1968년 김신조 공비 패 거리 서울 침투, 1974년 공비단 추자도 침투 등)로 외딴 섬들의 안보 취약이 문제가 되자 섬 사람들을 제주도 본토로 이주시켜 무인도가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금지된 섬이 되어 완전 자연의 공간으로 남아있다가 2011년 이후 개방되어 섬 나들이가 가능해졌다. 차귀도는 고산리 차귀도 포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되며, 낚시터로도 유명하여 참돔과 돌 돔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잡힌다. (1~3월, 6~12월에 많이 잡힘~) 이번에는 그림의 떡처럼 차 귀도를 대했지만 다음에는 저곳에 꼭 발을 들이고 싶다.
차귀도 일대는 '차귀도 천연보호구역'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422호로 지정되었다. |
▲ 와도(臥島, 누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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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도는 차귀도에 딸린 작은 바위 섬으로 용수리에서 보면 마치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으로 보 인다. 얼굴과 가슴(조금 뾰죡하게 나온 부분은 젖꼭지), 다리 부분이 제법 현실감있는 모습으 로 대자연 형님의 위대한 작품성을 느끼게 한다. 허나 용수리에서 볼 때나 그렇게 보이지 당 산봉과 고산리, 수월봉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의 와도 때문인지 그곳과 가까운 고산리에는 예로부터 과부들이 많았다 고 한다. |
▲ 바다에 나란히 떠서 물놀이를 즐기는 와도와 차귀도(오른쪽)
▲ 용수마을 방사탑(防邪塔) 2호 - 제주도 민속문화재 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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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방사탑이라 불리는 동그란 돌탑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 흔한 서낭당이나 돌탑 스타일의 탑으로 마을의 재앙을 막고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허한 곳을 채워주는 용 도로 지어졌는데, 답, 답데, 거욱, 거왁, 답단이, 거욱대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으며, (주로 쓰이는 명칭은 '방사탑') 탑 위에는 돌하르방 모양의 돌이나 사람 얼굴 모양으로 다듬은 돌, 새 모양의 돌을 추가로 올려놓는다.
용수리포구에는 남쪽과 북쪽에 총 2개의 방사탑이 세워져 있다. 차귀도 주변은 바다가 툭하면 심술을 부려 배가 자주 좌초되었고 그때마다 죽은 이들의 시신이 마을로 밀려왔다. 하여 마을 주민들은 그런 재앙을 막고자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화성물 가까이에 있어서 화성물답, 화성물탑이라 불리기도 하며, 탑의 꼭대기에 새의 부리와 비슷하게 생긴 길쭉한 돌이 바다와 차귀도가 있는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새 부리 비슷하 게 생긴 돌이 놓여 있어서 '매주제기'라 불리기도 한다. 새는 예로부터 인간과 하늘을 이어주고 인간의 소리를 하늘로 전해주는 존재로 여겨져 용수리 앞바다에 사고가 없게끔 하늘에 민원을 넣는 용도로 단 것으로 보인다.
* 용수마을 방사탑2호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88-6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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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서 본 용수마을 방사탑 2호 |
▲ 방사탑 주변 바닷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