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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외도 월대, 수산봉, 납읍리 금산공원)

▲  제주해협이 바라보이는 외도 해변

수산리 곰솔 납읍리 금산공원 (납읍리 난대림)

▲  수산리 곰솔

▲  납읍리 금산공원

 


 

묵은 해가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막 기지개를 켜던 1월의 첫 무렵, 사흘 일정으로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제주도는 거의 13년 만에 방문으로 비행기나 장거리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 되는
부담감 때문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나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수천~수만 리가 되
는 것도 아니고 고작 500km 남짓에 불과하며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 내외면 충분
히 닿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천하를 마음대로 주유한다는 내가 제주도에게 너무나 소심하게 대한
것 같고, 이러다가는 제주도란 존재를 깜빡 잊어먹을 것만 같았다. 하여 나를 제주도에
팍 떨어트리기로 작정하고 부랴부랴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비행기표 예약밖에
는 없음)

평일 아침 6시대 비행기라 널널하게 새벽 2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심야시내버스(N버스)
를 1회 갈아타고 다시 일반시내버스로 환승하여 5시에 김포국제공항 국내선청사에 도착
했다. (2시 50분대에 방학사거리에서 N1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로2가로 이동 → 3시 50
분대에 N26번 시내버스를 타고 공항시장까지 이동 → 4시 50분대에 공항시장 건너편 정
류장에서 6629번을 타고 김포공항 진입)

공항은 여행 비수기인 겨울 평일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제주도를 꿈꾸러 온 사람들로 거
의 북새통을 이루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30여 분 정도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다가 제
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그 작은 입을 닫
고 넓은 활주로를 10분 남짓 방황하다가 드디어 하늘 높이 비상한다.
제주도에 처음 발을 들였던 초등학교 시절, 김포공항에서 50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
고 있다. 그 소요시간은 여전히 유효하여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하여 바퀴를 멈출 때까지
딱 50분이 걸렸다. (보통은 활주로 방황 시간까지 포함하여 1시간~1시간 10분을 소요시
간으로 잡고 있음)

활주로 한쪽에 멈춰선 비행기에서 내려서니 공항청사로 인도하는 저상형 셔틀버스가 대
기하고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3분 정도를 달려 공항청사로 이동했는데 공항이 바닷가
와 가까워서 그런지 바람이 다소 매서웠다. 제주도는 여름에만 와봤지 겨울에는 처음이
다. 따뜻한 남쪽이라 별로 춥지 않을 것이라 방심을 하였으나 바닷가는 바람 때문에 오
히려 본토 이상만큼이나 추웠다. (단 내륙 쪽은 따뜻함)

제주도에서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된다. 남들은 렌
트카로 많이 이동을 하지만 난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선택하여 돌아다녔다. 제주도는
비록 일부 노선을 제외하면 버스 배차간격은 긴 편이나 본토보다 시내버스 차비가 저렴
하고 무료환승제가 아주 휼륭해 섬 1바퀴(180km)를 기본요금(현금 1,200원, 카드 1,150
원)이면 돌 수 있다. (제주도 급행버스와 공항버스는 제외)

제주국제공항에서 첫 답사지인 외도 월대를 가고자 제주시내버스 315번(국제여객선터미
널↔수산리)을 탔다. (다른 노선들도 있으나 그것이 먼저 와서 탔음)
버스는 오랜만에 건너온 나에게 신제주 일대를 신나게 강제투어를 시켜주고 8시가 조금
넘어서 외도초교 정류장에 나를 가져다 주었다. 외도초교에서 남쪽으로 가면 광령천(光
令川)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나를 여기로 부른 월대가 있다.


 

♠  달놀이와 은어로 유명했던 제주시내 외곽 명승지
외도 월대(月臺)

▲  현무암으로 닦여진 월대

월대는 광령천(외도천)과 도근천<都近川, 수정천, 조공천>이 만나는 곳에 닦여진 명승지이다.
월대 앞을 흐르는 광령천을 따로 월대천이라 부르기도 하며, 남해바다도 이곳까지 손을 대고
있어 자연히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수심이 깊고 청정해 예로부터 은어
와 숭어, 뱀장어가 많이 노닐고 있다. (지금도 많이 서식하고 있음)

월대 주위로 하천을 따라 200~300년 숙성된 팽나무와 해송이 멋드러지게 늘어서 있는데 이곳
지형이 반달과 비슷하다고 하며, 달님이 뜰 때 주위와 어우러져 수면에 비친 달빛이 아주 예
술이라고 한다. 반달을 닮은 곳에 달빛 또한 그윽하니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옛 사람들은 누
대(樓臺)를 짓고 신선이 내려와 달놀이를 하던 곳이란 의미로 '월대'라 하였다.

월대는 제주도에서 가장 흔한 현무암으로 낮게 네모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동그란 낮은 대
를 다져 4각형 위에 동그라미가 있는 모습처럼 되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돌로 쌓은 석대만 있을 뿐, 건물은 없으며 선비와 관리들, 지역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시
를 짓고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그들은 월대를 포함한 외도동(外都洞) 일대에 적당한 풍
경 8곳을 골라 외도팔경(外都八景)이라 이름 짓고 찬양을 하니 그 8경은 다음과 같다.

1. 월대피서(月臺避暑) - 월대에서의 피서
2. 야소상춘(野沼賞春) - 들이소(월대천 남쪽)에서의 봄구경
3. 마지약어(馬池躍漁) - 마지(연대입구 마이못)에서 뛰는 물고기
4. 우령특송(牛嶺特松) - 우왓동산의 큰 소나무
5. 대포귀범(大浦歸帆) - 큰 포구(조공포)로 돌아오는 돛단배
6. 광탄채조(廣灘採藻) - 넓은 여에서 해조를 캐는 모습
7. 사수도화(寺水稻花) - 절물 벼밭에 벼꽃이 핀 모습
8. 병암어화(屛岩漁火) - 병풍바위에서 고기잡이 불구경


▲  시커먼 피부의 월대 비석
비석 피부에 쓰인 '월'이 그 흔한 '月'이 아니라 거의 초승달 같은 모습이다.
(사람이나 동물의 삐뚤어진 눈처럼 보이기도 함)
비석까지도 달을 표현했으니 이곳은 그야말로 달을 찬양하는 공간이다.


월대 주변은 완전 시골이었으나 제주 시내가 동/서/남으로 크게 살을 찌우면서 그 주위로 시
가지가 형성되었다. 하여 옛날의 운치는 다소 깎이긴 했으나 월대와 광령천, 하천을 따라 늘
어선 나무들은 거의 그대로이며, 광령천 동쪽은 전원(田園) 풍경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어 월
대의 위엄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또한 제주도의 야심작인 제주올레길 17코스(제주시내 원도
심~광령, 18.1km)가 이곳을 살짝 지나가며 올레길 뚜벅이들을 인도한다.


▲  월대 주변에 자리한 키 작은 비석 4형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들은
지역 사람들의 공덕비로 기단석은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  월대 해송 - 제주시 보호수 13-1-15-30(2) / 13-1-15-30(3)호

월대 옆에 제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해송 2그루가 있다. 이들은 280년 묵은 것들로(1982년 보
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50년) 지정 번호가 앞선 것을 기준으로 높이는 각각 10m와
3m, 나무둘레는 3.2m와 2m이다.


▲  월대 산책로의 평화로운 아침 풍경 (제주올레길 17코스)

▲  월대 산책로와 오래된 해송<제주시 보호수 13-1-15-30(1)호>
정면에 보이는 수형(樹形)이 좋은 소나무가 제주시 보호수인 해송으로 앞서 언급한
해송들과 나이(약 280년)가 비슷하다. 나무높이는 12m, 나무둘레 3.2m

▲  이제는 무늬만 남은 고망물(수정천)

월대가 있는 외도동에는 조부연대(煙臺)와 고인돌(지석묘), 마이못, 고망물, 수정사(水精寺)
터, 제주도에서 유일한 자갈해변인 알작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전하고 있다.
나는 월대와 수정사터만 알고 있었지 다른 명소는 전혀 몰랐다. 여기서 덤으로 알게 된 그들
을 싹 보고 가면 좋겠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도 여의치 않았고 마음은 벌써부터 다음 행선
지를 재촉하고 있어서 월대에서 가까운 고망물만 보기로 했다. 그곳은 월대교에서 광령천 천
변길(통물길)을 따라 2~3분 정도만 가면 된다. (제주올레길 17코스가 그 길을 따라감)

고망물은 오래된 샘터로 외도동에 크게 둥지를 틀었던 수정사의 샘터로 전해진다. 그래서 수
정천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수정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 원나라(몽고)의 황후(皇后)가 물이 잘 나
오기를 기원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몽고 왕비(또는 몽고 조정)가 그들과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머나먼 제주도에 왜 절을 세웠나 싶겠지만 그 시절 고려는 몽고의 그늘에 있었고, 몽고
는 고려의 영역이던 제주도, 함경남도, 평안도, 요동(遼東) 지역을 강제로 접수해 그들 땅에
넣어버렸다. <평안도와 요동에 동녕부(東寧府)를, 함경남도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제주
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여 통치함>
기마병 중심인 몽고에게 말은 꽤 중요한 전투 자원으로 제주도는 말목장으로 아주 휼륭했다.
그러니 몽고의 제주도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으며, 절도 여럿 설치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배경에서 태어난 수정사는 제주도에서 제법 덩치가 있던 절로 서귀포에 있던 법화사(法
華寺)와 함께 제주도 2대 사찰(또는 3대 사찰)로 꼽혔다. 허나 17세기 말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어 부질없이 사라졌으며, 20세기 이후에 새로운 수정사가 들어서 작게나마 옛 터를 지키
고 있다.

고망물은 늘 물이 풍부하게 나와 동네 사람들의 식수가 되었으며, 왜정(倭政) 때 지금의 모습
으로 정비하고 그 기념비를 세웠다. 여전히 물은 나오고 있으나 개발의 칼질이 주변까지 미치
면서 수질은 장담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갈증이 나더라도 이곳 물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  세월이 씌워놓은 온갖 주근깨로 범벅이 된 수정천 신축기념비
왜정 때 고망물을 손질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으로 옆구리에 조성시기가 쓰여있다.
허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서기 대신 왜왕(倭王)의 연호가 쓰여있었고,
1945년 이후 그 부분은 뜯겨졌다.

▲  고망물에서 바라본 한라산(漢拏山)의 위엄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한라산은
제주도를 빚은 장본인이자 제주도의 어머니와 같은 큰 존재이다.

▲  광령천과 바다가 만나는 외도 해변 <조공포(朝貢浦)>

고망물에서 광령천을 따라 월대를 거쳐 외도 해변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 때 제주
도에서 조정으로 보내는 공물선(貢物船)이 오가던 포구로 조공포라 불렸는데, 그 조공선은 도
근천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하여 도근천을 조공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늘에 점점이 떠있는 구름 밑으로 푸르기 그지없는 제주해협이 넓게 펼쳐져 있다. 혹시나 추
자도(楸子島)나 본토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 주름선이 일그러질 정도로 눈에 힘을 주고 살펴봤
으나 역시나 거리 때문인지 보이지가 않는다. 바다 파도는 조금 흥분기를 보이며 뭍을 때리고
있었고 바닷바람은 그리 춥지 않았다.


▲  외도 해변 (대원암 동쪽)
왼쪽에 보이는 돌탑은 대원암에서 만든 것이다.


외도 해변 서쪽에는 천하 유일의 해수관음보살(海水觀音菩薩) 와상(臥像)을 봉안한 대원암이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절집으로 내가 갔을 때는 와상의 존재도 전혀 몰랐
고, 그곳에는 딱히 손이 가지 않아 해변만 잠깐 기웃거리고 외도초교 정류장으로 나왔다.

* 외도 월대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외도2동 230, 240, 241일대


 

  제주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조그만 오름(봉우리)
수산봉(水山峰)과 수산리(水山里) 곰솔

▲  수산봉 충혼묘지(모감동) 기점 (제주올레길 16코스)

외도초교 정류장에서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하귀를 지나 모감동에서 내렸다. 202번은 제
주터미널에서 제주도 서쪽 일주로(애월, 한림, 고산, 대정, 화순, 중문)를 따라 서귀포 중앙
로터리(서귀포등기소)까지 가는 긴 노선으로 외도부터 다음날 찾아간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까지 쭉 그의 신세를 졌다. (총 5번을 탔음)
이 노선은 달랑 1km를 가던, 40km를 가던, 전 구간을 가던 무조건 기본 요금이며, 제주시내버
스(300, 400번대)와 서귀포시내버스(500, 600번대), 제주시와 서귀포 외곽버스(700번대), 제
주도 장거리 간선버스(200번대)와 무료환승이 가능하다. (100번대 제주도 장거리 급행버스도
환승이 되나 약간의 차액이 나가며 구간요금 있음)

모감동 정류장 남쪽에 야트막한 산이 손짓을 하니 그곳이 수산봉이다.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일주서로)를 신호등의 도움을 받아 건너면 수산봉으로 인도하는 길이 마중을 나오는데,
제주올레길16코스(고내~광령, 15.8km)가 그 길을 따라 수산봉 남쪽까지 이어진다. 16코스는
광령에서 17코스로 간판을 갈아 월대와 제주시내로 달려가며, 고내에서는 15코스로 이름을 바
꾸고 한림읍으로 이어진다.


▲  수산봉 북쪽 산길 (1)

수산봉은 해발 122m의 낮은 뫼로 '수산봉오름','수산오름','물메오름','물메' 등의 별칭을 가
지고 있다. 옛날에는 주로 물메라 불렸는데, 이는 봉우리 정상에 못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 것
이다. (물뫼, 물메)
지금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어보이는 평범한 뒷동산이나 그 태생은 무시무시했던 화산으로 화
산 폭발로 못과 지금의 산이 형성되었다. 이런 식의 산은 제주도에 매우 많다.

조선 때는 정상에 물메봉수를 두었는데 동쪽에 도두봉수, 서쪽으로 고내봉수와 연락을 했으며,
기우제를 지냈던 터가 있어 영산(靈山)으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해송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
윽하며 서쪽 자락에는 애월읍 충혼묘지가 닦여져 있어 호국(護國) 신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모감동(충혼묘지), 대원정사, 수산리 곰솔 등 3개가 있는데, 산이
작다보니 어디로 올라가든 10분 안에 정상부에 닿는다. 산 정상은 군부대가 있어 금지된 곳이
되었으며, 봉수대터는 그 안에 있어 관람이 어렵다.
내가 수산봉을 찾은 것은 봉우리보다는 산 남쪽에 있는 수산리 곰솔을 보고자 함이다. 그곳으
로 가려면 수산봉을 거쳐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  수산봉 북쪽 산길 (2)

▲  수산봉 북쪽 산길 (3)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해송 외에도 많은 나무들이 버젓히 푸른 옷을 걸치고 있어
겨울임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만큼 제주도는 따뜻한 남쪽이다.

▲  수산봉 정상부
바다가 바라보이는 정상부에는 쉼터용 정자와 여러 운동시설이 닦여져 있다.

▲  수산봉 남쪽 숲길

▲  수산리 곰솔 - 천연기념물 441호

수산봉 동남쪽에 곱게 늙은 곰솔이 있다. 수산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도도한 모습을 드러내
고 있는 그는 높이 11.5m, 나무둘레 4.7m, 수관폭 26m로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무의 눈덮힌 모습이 마치 백곰이 물을 마시고자 웅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 곰솔이라 불
리며 나무 껍질이 검은색이라 흑송(黑松)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바닷가에 많이 자라고 있
어 해송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지상 2.5m 높이에 원줄기가 잘려진 흔적이 있고, 거기서 4
개의 큰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호수 쪽 가지가 밑동보다 2m 정도 낮게 물가에 드리워
져 있어 나무의 자태가 곱다.

이 나무는 수산봉 밑에 마을이 지어졌을 때 그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라 전하며, 수산리 사람
들은 그를 수호목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다. 나무 북서쪽에는 나무에게 당제를 지내는 맞
배지붕 당집이 있다.


▲  물을 향한 마음, 호수로 뻗은 남쪽 가지
물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갈증이 심했는지도) 나무의 남쪽 가지가
계속 호수로 손을 내밀고는 있으나 호수는 액체라 그의 손을 잡을 만한
것이 없어 서로 뻔히 보임에도 전혀 닿지를 못하고 있다.

▲  수산봉과 곰솔의 잘생긴 거울, 수산저수지

수산저수지는 현무암 피부를 지닌 제주도에서 거의 흔치 않은 저수지이다. 예전에는 유원지가
들어서 한때 시끌벅적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흔적들이 거의 지워져 고요하다. 다만 그 고요
함을 툭하면 건드리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제주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들이다.
이곳은 비행기들이 제주국제공항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5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비록 소음
이 있긴 하나 형형색색의 비행기들이 날개를 낮추며 들어서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으며, 저렇
게 많은 비행기가 들어오고 그만큼 바깥으로 나가니 제주도의 위엄과 인기를 정말 실감케 한
다. (현재 제주공항은 거의 포화상태임)

수산봉을 넘어온 제주올레길16코스는 저수지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가며, 나는 곰솔과 당
집 주변만 둘러보고 다시 수산봉 정상부를 거쳐 모감동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  수산리 곰솔에게 제를 지내는
마을 당집

▲  곰솔 맞은편에 자리한 무덤들
현무암으로 무덤 경계를 닦았다.

* 수산봉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 수산리 곰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1935


 

♠  오래된 난대림을 간직한 납읍리의 상큼한 언덕
납읍 금산공원(錦山公園)


▲  납읍리 돌담길

모감동 정류장에서 다시 202번을 타고 애월을 지나 한림읍내에서 내렸다. 여기서 제주도 간선
291번(제주터미널~한림읍)으로 환승하여 금산공원을 간직한 납읍리에 두 발을 내린다.
모감동에서 여기까지 바로 가는 292번 버스가 있으나 운행횟수가 너무 적고 시간이 전혀 맞지
않아서 부득이 한림으로 돌아간 것이다. (한림읍에서 납읍리로 가는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있음)
애월읍 납읍리(納邑里)는 제주도에서 이름난 양반 마을로 꼽힌다. 14세기에 마을이 조성된 것
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납읍을 중심으로 사방 10리 이내에 곽지, 애월, 고내, 상가, 하가, 어
음, 봉성 등 7개의 마을이 들어서 있어 그것을 아우르는 뜻에서 동네 이름에 읍을 쓴 것으로
보인다.
납읍리 지역에서 처음 사람이 산 곳은 곽남(郭南)으로 여겨진다. 그곳의 처음 이름은 곽지남
동으로 그것을 줄여 곽남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곰팡이','둥덩이' 등지에 사람들이 터
전을 닦으면서 마을이 확대되었다.

현재 납읍리는 본동, 서동, 중하동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동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산공원이 있다. 제주시(북제주)에서 가장 감귤이 잘되는 동네로 제주올레길15-A코스(
한림~납읍~고내, 16.5km)가 납읍리와 금산공원 내부를 지난다.


▲  귤나무밭을 가르는 납읍리 돌담길

▲  금산공원 정문

납읍리사무소 정류장(반대편 정류장은 '납읍리')에서 납읍로2길을 따라 9분 정도 들어가면 무
성한 숲을 드러낸 금산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납읍리사무소에 이르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양
쪽 길이 비슷하게 생겨서 햇갈리기가 쉽다. (이정표도 없음) 여기서는 무조건 서쪽(진행 방향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된다.
현무암 돌담과 귤나무, 마을 가옥이 잘 어우러진 제주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귤나무 가지
에 감귤이 달린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어 제주도 한복판에 왔음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금산공원은 납읍리의 허파이자 아름다운 뒷동산으로 33,980㎡(약 13,000여 평) 면적에 후박나
무와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모밀잣밤나무, 동백나무, 식나무, 아왜나무, 자금우, 마삭줄, 송
이 등 200여 종의 식물이 우거진 상록수림(常綠樹林)이다. 다른 말로는 난대림(暖帶林)이라고
도 한다. 제주시 서부에서 평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상록수림으로 온난한 기후에 적합한 식물
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1년 내내 삼삼한 모습을 자랑한다.

허나 금산공원은 원래부터 숲동산은 아니었다. 옛날에는 돌만 가득한 돌언덕으로 볼품이 없었
다고 하며, 그 언덕 건너편으로 금악봉(430m)이 훤히 바라보여 마을에 화재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금악봉이 보이지 않게끔 돌언덕에 나무를 심었고 마을
제사를 지내는 포제단을 담으면서 마을의 성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성역을 품은 숲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법칙이라, 마을에서는 나무 벌채나 식물 채취를 엄격히 금하여 숲이 마음
놓고 자라게끔 배려했으며, 숲 주위로 돌담을 둘러 속세와 숲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처음에는 숲 벌채를 금한다는 뜻으로 금산(禁山)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이름을 순화시켜 비단
뫼를 뜻하는 금산(錦山)으로 한자를 갈았다고 한다.

공원을 덮고 있는 숲은 '납읍리 난대림'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37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
으며(예전에는 천연기념물 182-4호였음) 공원 전체가 국가 천연기념물 보호 구역이라 지정된
탐방로 외에는 접근을 금하고 있다. 아무리 공원 감독이 느슨하다고 해도 자연보호를 위해 탐
방로를 벗어나거나 식물을 괴롭히는 행동, 나뭇잎과 식물을 따는 행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된
다.


▲  금산공원 정문 갈림길

원시림과 같은 공원으로 들어서면 길은 3갈래로 갈린다. 넓은 흙길로 된 중앙 숲길은 이곳의
성역인 포제청으로 이어지며,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은 흙길과 나무데크길이 섞여있다. 어느
길로 가든 남쪽에서 모두 만나며, 다시 정문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공원으로 들어서는 문은
정문 1개 뿐이며, 공원 밖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즉 밭 한복판에 숲이 있는 것이다.


▲  송석대(松石臺)

정문 동쪽(진행 방향 왼쪽)에는 송석대란 높은 대가 있다. 이곳은 정헌 김용징(靜軒 金龍徵)
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1850년대 말에 그의 제자들이 지었다. 구릉지를 다듬어 3개 층으
로 겹돌을 쌓아 터를 다진 다음 반지름 4.5m의 원형 정자를 닦았는데, 현재 정자는 없고 완전
히 개방된 공간으로 있으며 매년 여름마다 애월문학회에서 시낭송회와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
어 문학 공간의 기능은 녹슬지 않았다.


▲  인상정(仁庠亭)

송석대 맞은편(정문 서쪽)에는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천문에 능했던 현일문
(玄日文)이 공부를 했던 곳으로 1889년 그의 후학들이 구릉지를 다지고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
간을 지었다. 송석대처럼 정자가 없는 그냥 열린 공간으로 그 한복판에 오래된 나무가 자리하
여 고품격의 그늘을 선사한다.


▲  난대림 속에 나를 숨기다 (공원 서쪽 숲길)
아무리 따스한 남쪽이라고 해도 동남아나 아프리카가 아닌 이상은 이렇게까지
푸른 잎을 대놓고 드러내며 무성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이곳은 계절의
변화도 안중에 없는 별천지 같은 곳이다.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1)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2)

통행 편의와 식물 보호를 위해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 일부에 나무데크길을 닦았다.


▲  정낭이 걸쳐진 포제단(酺祭壇) 출입구

금산공원 한복판에는 돌담에 둘러싸인 포제단이 있다. 이곳은 납읍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마을의 성역으로 서쪽에 제주도 스타일의 정낭이 있는 출입구가 있어 그곳으로 들어서면 된다.
허나 제삿날을 제외하면 정낭이 모두 걸쳐져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다행히 정낭이
그리 높지가 않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살짝 안으로 발을 들였다.

▲  포제청 건물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늘 적적한 모습이다.

▲  난대림에 둘러싸인 포제단 뜨락
저 끝부분에 3개의 단이 있다.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를 '납읍리 포제','납읍리 마을제'라고 하는데, 남자들이 행하는 유교적
마을제인 포제와 여자들이 하는 무속 마을제인 당굿을 같이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춘제(春祭)를 지냈고, 7월 초정일에 추제(秋祭)를 지냈으나 20세기 중반 이
후부터는 춘제만 지내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 일이 생겨서 정월 초정일에 제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그 다음 중정일(中丁日)에 제를 지내는 융통성도 가지고 있다.
포제단으로 들어서면 남쪽(오른쪽)에 포제청이란 기와집이 있다. 이곳은 제를 지내고 준비하
는 건물로 원래는 초가였으나 최근에 기와집으로 손질했다. 북쪽(왼쪽)에는 3개의 조그만 석
단(石壇)이 누워있는데 이들 단은 손님신을 봉안한 포신단(酺神壇), 마을의 수호신을 봉안한
토신단(土神壇), 홍역이나 마마신을 봉안한 서신단(西神壇)이다.
예전에는 포신, 토신, 서신에게 모두 제를 올렸으나 홍역과 마마가 사실상 사라진 상태라 포
신과 토신에게만 제삿밥을 올린다.

이곳 제사는 '납읍리 마을제'란 이름으로 제주도 지방무형문화재 6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현무암으로 닦여진 3개의 제단 (서신단, 토신단, 포신단)
제단 앞에는 술이나 향로 등을 두는 조그만 돌이 있고, 단 위에는 위패 역할을
하는 키 작은 돌이 세워져 있다.

▲  금산공원 동쪽 숲길 (1)

▲  금산공원 동쪽 숲길 (2)

▲  주황색 피부를 드러낸 납읍리 감귤

금산공원을 1바퀴 둘러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쪽 숲길로 들어서 포제청을 찍고 동쪽 숲
길로 나왔으니 공원의 공개된 공간은 모두 본 셈이다. (통제구역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음)

이렇게 금산공원과의 인연을 마무리 짓고 다음 답사지로 가고자 제주도 간선 291번을 타고 한
림읍으로 나왔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금산공원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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