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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련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아미타3존상)

청련사 큰법당에는 이곳에 대표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잘생긴 외모를 지닌 그는 부드럽고 단아한

이국적인 얼굴과 y자 형태로 분명하게 표현한 귀의 상/하각, 볼링핀 형태의 명확한 귓구멍,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 왼쪽
가슴에서 머플러처럼 너풀너풀거리며 늘어진 띠 주름과 어깨의 잘게 늘어진 주름 사이로 조그맣게 표현된 Ω형 주름, 승각
기를 돌돌 말아 단단하게 묶은 띠 매듭과 자락, 그리고 양 무릎에 수평으로 표현된 힘 있게 눌러 찍은 듯한 골깊은 주름,
른쪽 발목을 덮어 내린 넓은 ‘八’자 모양 띠 주름 등의 양식에서 1274년에 중수된 서울 개운사 아미타여래좌상이나 1280년
에 중수된 서산 개심사 아미타여래좌상, 13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서울 수국사 아미타여래좌상 등 13세기 전반기에 조성
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가깝다.
비록 조성기나 중수기 등의 자료는 남아있지 않으나
불상의 조형적, 양식적 특성을 통해 빠르면 13세기 초, 늦어도 13세기
중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그는 다른 지역에서 넘어온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청련사의 주불로 예경되었던
것이라고 하니 13세기 중/후기에 벌어진 몽고(원)와의 전쟁 시절 개경에서 넘어온 수준 높은 장인이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 불상은 고려 불교미술이 추구했던 우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조형적, 예술적, 종교
적으로도 성숙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어 2012년에 국가 보물의 지위를 받았다.

 

 


 

 

2. 목조아미타여래좌상(아미타3존상)과 붉은 닫집
불단 가운데 자리한 아미타여래좌상은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거느리며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3. 옆에서 바라본 청련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위엄

 

 

4. 큰법당 옆에 자리한 선방

 

5. 큰법당 감로왕탱
감로탱은 망인의 천도를 위해 우란분경(盂蘭盆經)의 내용을 도상화한 큰 그림이다. 화면 가운데 커다란 상에 성반을 차려놓
고 제를 올리는 광경을 중심으로 위에는 7불이 나란히 있고, 좌측편에는 아미타삼존불이, 우측편에는 지장보살과 인로왕보

살이 있다. 성반 아래에는 굶주린 아귀 2마리가 있고, 그 아래로 지옥과 현세의 여러 생활상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왜정 초

기인 1916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반적으로 색이 둔탁하다.
탱화의 크기는 가로 166.5cm, 세로 146cm이다. 원래 원통암에 있었으나 큰법당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원통암에도 별도의

감로탱이 봉안되어 있다.

 

 

 

6. 큰법당 현왕탱(왼쪽)과 삼장탱

 

7. 큰법당 현왕탱

병풍처럼 생긴 'ㄷ'자형 황색 벽을 배경으로 하여 가운데 의자에 앉은 현왕이 있고, 성왕, 판관, 녹사, 동자, 동녀 등 현왕
의 식구들이 에워싼 형식이다.
현왕은 머리위에 경책을 얹은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뭔가를 가리키고 있으며, 머리에는 녹색의 두광이 표현되었다. 좌 /우측에서 성왕이 협시하고 있으며 아래편
에는 경권과 경책을 가지고 있는 판관, 기록을 하고 있는 녹사, 사자, 동자, 동녀 등이 표현되었다.
현왕이 앉아 있는 의자 뒤편으로 조그맣게 묘사된 인물들이 번과 부채, 삼지창 등을 들고 현왕을 시위하고 있으며, 인물
장에는 주로 적색과 청색을 사용하였고 황색, 백색도 많이 썼다. 1881년에 조성된 것으로 탱화의 크기는 가로 104.5cm, 세
로 156cm이다.

 

8. 큰법당 삼장탱

상하 2단으로 크게 구분하여 상단에는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권속들이 가득 자리해 있다.
하단에는 이들 보살의 협시와 권속들로 채워져 있으며, 삼장보살은 하나의 방형 수미단 위에 중앙 천장보살의 신광만 바탕
을 금니로 처리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이중륜광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결가부좌 하였다.

채색은 주로 적색과 청색, 백색, 황색을 주로 사용했으며 부분적으로 금니를 사용했는데, 천장보살, 지지보살, 지장보살상의
몸색은 황색을 사용했고 나머지 인물들은 백색으로 처리했다. 제작시기는 현왕탱과 비슷한 188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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