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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연미정, 강화 평화전망대)

▲  강화 연미정

▲  월곶돈대

▲  강화평화전망대 망배단


 


강추위를 앞세우며 천하를 꽁꽁 얼리던 무심한 겨울 제국, 그 제국의 유일한 꿀연휴인 설날이 다가왔다.

이번 연휴는 다행히도 제국(帝國)의 기운이 다소 누그러들어 길을 떠나기에는 좋았다.
여 처음에는 경기도 동부로 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강화도 연미정이 격하게 땡겨 서쪽으로
쿨하게 방향을 돌렸다.

연미정은 강화도(江華島) 동북쪽 끝에 매달린 오랜 명소로 금지된 바다 너머로 역시나 금
지된 땅 북한이 바라보인다. 참으로 순진했던 어린 시절에는 내가 장성할 때쯤 되면 반드
시 통일이 될거라 기대를 했었지.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은 커녕 점점 절망적으로 변
해간다. 분단이 된지 벌써 70년이 넘었건만 이 상태로는 서울과 가까운 개성(開城)DMZ
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철원의 후고구려(後高句麗) 도성도 어림 없을 것이다.
그러니 비록 간의 기별도 가지 않겠지만 북녘이 바라보이는 전방을 찾아 멀리서나마 그곳
을 바라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것이 이 땅의 개같은 현실이다.

아침 일찍 합정역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김포좌석버스 3000(강화터미널신촌로터리)
잡아탔다. 이 노선은 강화도의 오랜 발로 강화도가 연륙되기 이전부터 시외직행버스로 운
행해 왔으나 2010년 봄에 좌석(광역)버스로 전환되어 보다 저렴하게 강화도를 찾을 수 있
게 되었다.
허나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강화도를 찾는 나들이 수요가 폭증하여 마송(통진)부터 강화
읍내까지 허벌나게 막힌다. 인간의 이기(利己)4발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기어
가기를 반복, 강화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강화해협(江華海峽)을 겨우 건너 강화도의 관
문인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 이르러 연미정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찾았으나 그는 간발의 차이로 이미 떠나고
없는 상태, 교통체증으로 일정이 벌써부터 틀어져 버렸다. 하여 잠시 멘붕(혼란)에 빠졌
으나 곧 극복하고 마침 점심 때라 밥을 먼저 먹기로 했다.
그래서 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강화군청에서 내려 예전에 갔던 밥집을 찾았다.
허나 그 밥집은 설날 연휴를 이유로 빗장을 닫아 걸은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멘붕된 마
음을 부여잡으며 부근에 적당한 집을 찾다가 군청 서쪽에 '흥부네집'이란 고기집이 장사
를 하고 있어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도 없이 그곳에 들어가 불고기버섯전골을 먹었다.


▲  잘 차려져 나온 불고기버섯전골과 반찬들

▲  밥도둑, 불고기버섯전골의 위엄

전골을 주문하니 김치와 멸치볶음, 게장 등으로 이루어진 밑반찬 7가지가 차려진다.
다음 불고기버섯전골이 나타나 푹푹 끓여대니 보글보글 익으면서 멋지게 숙성이 되었다.
전골에는 소고기, 당면, 여러 채소들이 육수에 버무려져 있는데 한참 시장한 상태라 목
구멍에 제멋대로 들어갈 정도로 퍼먹었고 밥도 무려 2공기나 먹었다. 그야말로 밥 도둑
이 따로 없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후식 커피를 뽑아 먹으며 밖으로 나왔다. 오늘 계획대로
연미정을 가야되나? 아니면 다른 데로 갈까? 궁리하다가 후배가 북한 땅이 보고 싶다며
택시를 타고 연미정에 가자고 그런다. 아무리 세상에 관심이 없고 지리, 역사와 철저히
담을 쌓은 후배지만 역시나 이 땅의 어쩔 수 없는 백성인가 보다.
하여 거리에서 놀고 있는 택시를 붙잡아 강화읍내 북쪽을 가로지르며 연미정으로 이동했
. 소요시간은 약 10분 정도. 그곳에 이르니 인적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예상을 뒤엎고
나들이객들이 제법 있었다.


 

♠  연미정을 품으며 강화해협을 지키는 조선 후기 해안 요새
월곶돈대(月串墩臺) - 사적 452호(강화외성)

▲  월곶돈대 조해루(朝海樓)

강화도의 동북쪽 끝으머리인 월곶리(月串里) 해변에 연미정을 품은 월곶돈대가 의연한 모습으
로 자리해 있다.
이곳은 강화해협과 한강(아리수)이 만나는 요충지로 동쪽 강화해협 너머로는 김포 문수산(
殊山), 북쪽 바다 너머로는 금지된 땅으로 묶인 개성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월곶돈대는 강화외성(江華外城)의 일원으로 17세기 이후에 축성되었다. 그렇다면 강화외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때는 13세기의 한복판, 사기급의 전투력으로 주변 나라를 닥치는데로 때려잡던 깡패 나라,
()가 고려를 잡고자 1232년부터 7차례가 넘게 공격을 해왔다. 당시 고려 조정을 주름잡던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 최우<崔瑀, 최이(崔怡)>1233년 개경(開京)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읍
을 옮겨 강도(江都)로 삼았는데, 그해부터 강화도 방어를 위해 백성을 동원해 내성(內城,
재 강화읍성)과 중성(中城)을 쌓고 강화해협에 23km의 긴 외성을 방패로 둘렀다. 외성은 적북
돈대에서 월곶리, 갑곶, 광성보를 거쳐 초지진까지 이어지며 흙으로 쌓았다. 허나 몽고에 두
손을 들던 1270년 이후 모두 버려져 앉은뱅이가 되고 만다.

조선 15대 군주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했다.
1618년 버려진 외성을 흙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허나 병자호란(1636~1637)으로 강화도
가 청나라에게 털리자 외성 상당수가 손상을 입었고 숙종(肅宗) 시절에 돌을 이용해 다시 쌓
았다. 이때 곳곳에 돈대(墩臺)를 설치하니, 월곶돈대도 바로 그때 탄생했다.
영조(英祖) 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은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린다고 건의하여 1743
년부터 1년 동안 벽돌을 이용해 다시 손질했다.

강화외성은 문루(門樓) 6, 암문(暗門) 6, 수문(水門) 17개를 두었으며, 외성 뿐만 아니라
강화도 해변에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의 돈대를 빼곡히 설치해 섬 전체를 그야말로 요새화
하였다. 이중 돈대는 진, 보를 돕는 조그만 요새로 20명 정도의 병력이 머물렀다.

월곶돈대는 연미정 주변에 동그렇게 성을 두룬 형태로 이곳에 올라서면 한강과 강화해협,
성 남쪽 해변, 김포 문수산, 유도 등이 바라보여 여기가 보통 자리가 아님을 귀띔해준다.
리고 남쪽 해변으로 성을 내려뜨리며 조해루란 성문을 두었는데, 그가 강화외성의 주요 문루
이다.
허나 구한말 이후 강화도의 요새들은 방어의 성격이 상실되어 버려지게 되었고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조해루는 사라졌다. 겨우 연미정을 품은 돈대 중심부만 남아있었으나 그마저
도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예민한 위치로 인해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묶여있었다.
이미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암 걸리던 시절이 되버린 2006, 그런 사실도 모르고 이곳을 찾
은 적이 있었는데 연미정을 만나려면 최소 1주 전에 관할 군부대를 찾아가 출입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만큼 까다로운 곳이었다. 그러다가 2008년 금지된 땅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고, 쓰러진 조해루를 복원해 지금에 이른다.
현재 강화외성은 국가 사적 45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월곶돈대는 그 일원으로 묶여 사적의 지
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강화도의 야심작 강화나들길 1코스인 '심도(沁都) 역사문화길(강화터
미널~연미정~갑곶돈대, 18km)'이 이곳을 지나간다. 여기서 심도란 강화도의 고려 때 이름이다.


▲  밑에서 바라본 월곶돈대와 조해루를 잇는 성곽
(중간에 보이는 비석이 황형장군 택지비)


조해루는 월곶돈대의 성문이다. 닫혀진 문을 나서면 바로 파도가 일렁이는 강화해협인데 바다
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막고자 바닷가에 성문을 둔 것이다.
장대한 세월이 감쪽같이 훔쳐갔던 조해루는 2011년 말에 복원되었으며 성문과 문루, 남쪽 성
벽 일부가 다시 지어졌다. 문루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13m, 면적 45.56로 문루를 감싸고 있
는 여장은 이곳에서 나온 오래된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성문과 남쪽 성벽은 새 성돌로 꾸며
져 서로 어색한 세월의 조화를 이룬다. 원래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성벽이 이어져야 되지만
아직 그럴 여건까지는 되지 못한다.


▲  윗쪽에서 바라본 조해루와 월곶리

▲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莊武公 黃衡將軍 宅地碑)

월곶돈대를 오르다보면 때깔이 좋은 비석 하나가 발길을 잡는다. 바로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
던 장무공 황형장군의 택지비이다.

황형(1459~1520)은 창원황씨로 자는 언평(彦平)이다. 1480년 무과(武科)와 진현시(進賢試)
급제, 상서원(尙瑞院) 판관이 되어 내승(內乘)을 겸임했으며, 1486년 무과중시에 장원해 함경
도 혜산진(惠山鎭)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
15104, 부산포(釜山浦)와 제포(薺浦, 진해), 염포(鹽浦, 울산 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
이 조선 조정에 불만을 품고 조선의 속방인 대마도(對馬島) 세력과 연합해 폭동을 일으킨 삼
포왜란(三浦倭亂)이 터지자 전라좌도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제포의 왜인을 때려잡았다. (
마도까지 쫓아가서 정벌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그 공으로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되었으며, 왕이 연미정 일대를 하사했다.

1512년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이 조선에 거역하며 소란을 피우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그들
을 정벌했고, 이어 평안도와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북녘 변방을 지키다가 공조판서(工曹判書)
를 끝으로 관직에서 사퇴, 연미정이 있던 이곳에 자리를 잡고 말년을 보냈다.
1520년 그가 숨을 거두자 중종(中宗)은 크게 애통해하며 '장무공'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연미
정 주변 3만 평의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하사했다. 그의 묘는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학무
산 자락에 있으며, 장무사(莊武祠)에 배향되어 매년 음력 101일 자정, 제향을 올리고 있다.

연미정 주변에는 대나무가 있었는데, 황형이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올 때 가져 손수 가져와 심
은 것이라고 전한다. (안내문에는 대마도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가져왔다고 나옴) 또한 그는
소나무도 잔뜩 심었는데 임진왜란 때 그 나무로 수군 함선을 만들기도 했으며, 1597년 정유재
란이 터지자 선조(宣祖)가 잠시 이곳에 온 적이 있었는데, 소나무를 이용해 성책과 집을 만들
어 사람들은 황형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미래를 대비하여 나무를 심은 것인지 아
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월곶돈대 남쪽 성벽에서 바라본 강화해협과 김포 문수산

강화도는 북한과 겨우 짧은 해협을 사이에 둔 가까운 곳이라 해변에는 철조망이 휴전선마냥
길게 둘러져 있다. 남북분단이 선사한 강화외성의 현대판 버전이라고나 할까? 어서 이 땅이
통일이 되어 옥의 티 같은 저 산물을 싹 걷어냈으면 좋겠다.


▲  연미정을 품은 월곶돈대

▲  월곶돈대 암문(暗門)
돈대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이다.

▲  월곶돈대 암문 안쪽
암문 바깥쪽은 동그란 홍예로, 안쪽은
네모나게 문을 지었다.


 

♠ 강화10경의 하나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았던 경승지이자 월곶돈대의 얼굴
연미정(燕尾亭)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4호

월곶돈대 정상에는 이곳의 얼굴이자 나를 여기로 소환한 연미정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한강과 강화해협이 쿨하게 만나는 현장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한 줄기는 바로 서해로,
른 줄기는 강화해협을 이루며 남쪽으로 흐르니 그 모습이 마치 제비 꼬리와 같다하여 연미정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연미정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귀신도 모르나 고려 23대 군주인 고종(高宗)이 구재(九齋)의 학
생들을 여기에 모아놓고 공부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기에 뿌리를 내린 것으
로 짐작된다.
이후 폐허가 된 것을 조선 중종이 다시 지어 황형에게 하사했다고 전하며, 황형은 이 일대에
집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그 인연으로 현재 연미정은 그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이 조선의 외교 정책에 격하게 불만을 품으며 압록강
을 건너 황해도까지 침공하자 이에 염통이 쫄깃해진 조선은 급하게 강화를 요구했다. 그래서
바로 이곳 연미정에서 후금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후 병자호란(1636~1637) 때 후금(後金)
서 청()으로 나라 간판을 바꾼 청나라군이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정자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1744년 강화유수 김시혁이 월곶돈대를 손질하면서 연미정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91년 조동
(趙東冕)이 다시 중수했으며, 1931년 유군성(劉君星)이 보수했다. 허나 6.25전쟁으로 서남
쪽 모서리 기둥이 세 동강이 나는 등, 무거운 상처를 입은 것을 중수했으며 이때 세 동강 난
기둥은 붙여서 다시 세웠다.
1976년 강화도 국방유적을 복원하면서 현재와 같이 재생되었는데, 처음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하던 베이지색으로 기둥을 떡칠했으나 이후 색을 제거해 자연스런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서남쪽을 바라보고 선 연미정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 10개의 기둥을 돌기
둥 위에 얹힌 민도리집이다. 월곶돈대 꼭대기에 서 있어 자연히 장대(將臺)의 역할을 했으며,
정자 뒷쪽에는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병풍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야 앞바다가 금지된 바다로 묶여 오가는 배도 없는 실정이지만, 구한말까지만 해도 서
해바다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배는 연미정 밑에서 만조를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들어갔다. 그러
니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고려와 상업이 한참 성장하던 조선 후기, 연미정 주변은 대단했을 것
이다. 특히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흐름이 보일 정도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며 여기서 즐
기는 달맞이는 강화10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곳이건만 남북분단이라는 가혹한 시련이 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고, 그마
저도 철저히 금지된 곳으로 묶여 오랫동안 외롭게 남아있다가 2008년에 비로소 해방되어 자유
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달맞이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주변 해변은 여전히 금
지된 곳으로 묶여 있어 출입이 어렵다. 이 땅이 통일되는 그때 나머지도 그 빗장이 열릴 것이
.


▲  연미정과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

연미정 뒷쪽에는 겨울 제국에서 영혼까지 털린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들은 약 510
년 묵은 것들로 2000년에 강화군 보호수 4-9-58호, 4-9-59호로 지정되었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
그들은 높이 약 22m, 둘레 4.5m4.2m로 그 장대한 나이를 거슬러 가면 황형이 이곳에 머물
던 시절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 그가 심었던 나무가 아닐까 싶다. 연미정과 월곶돈대를 쭉
지켜온 살아있는 증인으로 연미정의 풍치를 더욱 살찌워주는 역할도 했다. 비록 겨울이라 감
흥은 덜해도 늦봄이나 여름, 늦가을에 왔다면 한층 아름다웠을 것이다.

▲  연미정의 뒷모습

▲  연미정 현판의 위엄


▲  연미정 부근의 조그만 비석
비석 피부에는 '고 공신 장무공 황형 택(故 功臣 莊武公 黃衡宅)' 이라 쓰여 있다.
즉 황형이 이곳에 살던 것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다.

▲  연미정 부근에 놓인 주춧돌 3개
옛 연미정의 주춧돌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받쳐들 존재를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고적한 월곶돈대 내부 (연미정 남쪽)

▲  북한을 향하고 있는 월곶돈대 (연미정 동북쪽)

▲  월곶돈대 서북쪽과 월곶리 해변

▲  텅 비어있는 월곶돈대 포대
옛날에는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빈 자리만 허전하게 남아있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김포 문수산
강화해협 너머로 보이는 곳은 다행히도 출입이 가능한 김포 지역이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한강과 유도(留島, 가운데 섬)

안개로 흐릿한 한강에 조촐하게 떠있는 섬이 유도이다. 오랫동안 민통선에 묶인 금지된 섬으
로 옛날에 섬이 떠내려오다가 여기에 머물렀다고 해서 머무루섬이라 불렸다.
남북분단으로 인간의 발길이 끊긴 그곳에는 저어새를 비롯한 철새와 야생 동식물이 살아가고
있으며, 2008년 야생동식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북한 개성 땅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 안개가 아주 극성이었다. 그래서 시야는 절망 수준, 그렇게 보고
싶었던 북한 땅은 한 치도 보이질 않는다. 날씨가 좋아야 바다 너머 지역이 바라보이는데 이
땅에 내려진 저주, 남북분단의 아픔을 애써 지우고 싶었는지 하늘이 안개로 바다 너머 땅을
잠시 지운 모양이다.
차라리 저 너머는 그냥 망망대해였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아쉽지나 않지. 문제는 그 너머가 금
지된 땅이라는 것. 요즘은 달나라는 물론 우주도 가는 세상이라는데, 저 너머 땅은 그 우주보
다도 가기가 힘들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월곶리 검문소와 월곶리 지역
월곶리 검문소는 신분증이 없으면 통과하기 힘든 전방의 까다로운 검문소 중
하나이다. 그러니 저곳을 지날 때는 꼭 신분증을 지참해야 뒷탈이 없다.


※ 연미정, 월곶돈대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강화읍(강화터미널)까지
* 신촌로터리(2호선 신촌역 1번 출구), 홍대입구역(2호선/경의중앙선/공항전철) 중앙차로 정
  류장, 합정역(2/6호선)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 5호선 송정역(1,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88, 3000번을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 부평역(서울1호선/인천1호선) 정류장, 부평구청역(서울7호선/인천1호선, 1번 출구 밖),
  1호선 경인교대입구역(1번 출구)에서 김포 90번 이용
* 인천2호선 마전역(1번 출구)에서 70, 700-1, 90번 이용
* 3호선 백석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96번 이용

현지교통
* 강화터미널에서 강화군내버스 10번을 타고 연미정 하차 (113회 운행)
승용차 (연미정 밑에 주차장 있음)
* 서울 -> 김포한강로/강화 방면 48번 국도 -> 통진 -> 강화대교 -> 강화읍 수협4거리에서 우
  회전 -> 연미정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  남북분단이 빚은 서글픈 산물, 강화평화전망대(제적봉 평화전망대)

▲  강화도 최북단에 자리한 강화평화전망대

연미정을 둘러보니 어느덧 14시가 넘었다.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그렇게 소원하던 북한 땅
을 하늘의 방해로 살피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지 강화평화전망대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래
서 그곳을 가기로 했지. 허나 군내버스로 가려면 강화읍내에서 강제 환승을 해야 되고 더군다
나 연미정은 버스가 별로 없어 가기가 좀 우울하다. 그래서 후배의 쿨한 지원에 힘입어 택시
를 소환하여 가기로 했다.

연미정 주차장에 있는 콜택시 번호로 택시를 부르니 10분 뒤 택시가 나타나 입을 벌린다.
것을 잡아타고 강화도의 북쪽 들판을 신나게 가로질러 당산리검문소에 이른다. 당산리(堂山里
)와 평화전망대가 있는 철산리는 엄연한 민통선 구역이라 검문이 좀 까다로우며 반드시 신분
증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만 있으면 통과됨)
설연휴로 통일전망대를 찾은 차량의 행렬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었는데 우리 차례가 되자 택
시 운전사는 동네 사람을 태우고 간다며 군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군인은 검문도 하지
않고 쿨하게 통과시켜주었다. 일반 차량은 신분증 검사를 철저히 하지만 택시는 지역 사람들
을 주로 태우고 다니는지라 그렇게 해주는 모양이다. 어쨌든 신선한 충격을 간직하며 당산리
와 철산리를 지나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했다. 택시 요금은 16천원 정도 나왔다.


▲  강화평화전망대 입구 (왼쪽이 평화전망대, 오른쪽은 인화리,
교동도 방면)

▲  강화평화전망대의 옆모습

강화도 최북단인 제적봉(制赤峰) 정상에 강화제적봉 평화전망대(강화평화전망대)가 웅크리고
있다. 제적봉이란 '붉은 것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붉은 것은 북한을 일컫는다.

원래 제적봉은 김포(金浦) 애기봉에게 씌우려던 반공 스타일의 봉우리 이름이었다. 1966년 공
정식 제6대 해병대사령관이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박정희 전대통령이 애기봉을 방문해
그곳에 서린 애기 전설을 전해듣고는 애기봉으로 할 것을 지시하여 그 이름을 지키게 되었다.
그래서 강화와 김포 지역 전방의 여러 봉우리를 상대로 제적봉 후보감을 물색하다가 해병대가
있는 철산리 언덕을 제적봉으로 삼았다. 이를 기리고자 그의 측근인 김종필이 '제적봉' 비석
글씨를 남기며 명명식(命名式)을 거행했다.

이후 40여 년 뒤, 제적봉에 강화평화전망대를 지어 200895일 문을 열었다. 그 역시 북
한 이 바라보이는 적당한 곳에 세우는 통일전망대의 일종으로 가장 최근에 지어진 통일전망대
이다. 허나 아무리 그런 전망대에서 통일을 염원하며 북녘을 뚫어지라 바라본들, 그림의 떡이
. 분단의 한은 더해가기만 한다. 이건 어찌된 것이 통일은 커녕 분단만 더욱 고착화되고 있
으니 말이다. 그러니 남북분단이 빚은 서글픈 산물이라고나 할까? 그리 유쾌한 현장은 아니다.

여기는 다른 전망대와 달리 바다를 앞에 두고 있고<고성(高城) 통일전망대는 바다를 옆에 끼
고 있음>, 그 바다 너머로 북녘을 바라볼 수 있는데 북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바로 가까이
에서 구경할 수 있는 전망대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북한 땅까지 불과 2.3km에 불과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실제로 바다 너머 그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인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 농사를
짓는 마을 사람들, 학교에 가는 학생 등, 허나 그것도 날씨가 좋고 운이 좋아야 보이는 것이
지 보통은 보기 힘들다.

바다 너머 지역은 황해북도 개성 지역으로 날씨가 좋으면 예성강(禮成江) 포구도 시야에 잡힌
. 허나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안개가 지독해 북한 땅은 아주 흐릿하게 시야에 잡혔다. 그래서
전망대에 전시된 북녘 촬영 사진으로 그 아쉬움을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전망대의 규모는 지하 1, 지상 4층으로 지하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 있어 출입이 어렵고, 1
층에는 통일염원소와 휴게실, 식당, 기념품 매장이, 2층은 전시관과 전망대, 3층은 북한땅 조
망대와 옥외전망대가 있다.
바깥에는 망배단이 설치되어 실향민들의 한을 어루만지고 있으며, 군부대에서 기증받은 오래
된 전차와 제적봉 비석, 임진왜란 초기인 15928월에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황해도
연백에서 왜군을 크게 때려잡은 것을 기리고자 세운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등이 자리를 채
우고 있다.
연성대첩비는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모정리에 있으나 거기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강화도에 정
착하면서 양사면 연화리에 편강렬(片康烈) 의사 충렬비와 함께 세워 기리던 것을 20098
19일 이곳으로 옮겼다.

▲  1966년에 지어진 제적봉 비석
제적봉 3자는 김종필의 친필이다.

▲  편강렬 의사 충렬비(왼쪽)와
연성대첩비


▲  전망대 1층 통일염원소

통일염원소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남북통
일을 염원하며 한 글자씩 남긴 종이가 한 공간
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토록 이 땅의 민중들은 통일을 바라고 있지
만 이 땅과 북한의 더러운 권력층 작자들은 이
를 크게 바라지 않는다. 말로만 통일, 통일을
외칠 뿐, 뒤에서는 서로를 이용하며 그들의 권
력유지와 욕심 채우기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통일염원소에 글을 남긴들 딱히
소용이 없다. 결국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가게
되니 말이다.

 

◀  통일염원소를 가득 메운 민중들의
메아리


▲  2014년 여름과 가을에 이곳에서 담은 북녘 땅 사진

▲  3층 북한땅 조망실(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북한 개성 땅 ①
여기서 북한 땅까지는 겨우 2.3km이다. 날이 좋으면 저 너머가 훤히
두 눈에 들어올텐데 안개의 방해로 겨우 해안만 시야에 들어온다.

▲  3층 북한땅 조망실(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북한 개성 땅 ②

▲  3층 북한땅 조망실에 있는 개성 지역 조감도
밑부분 빨간 표시가 있는 곳이 강화평화전망대이다.

▲  북한에서 제작된 개성, 김포, 강화도 지역 지도

▲  2층에 전시된 6.25전쟁의 상징물, 녹슨 철모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①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②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③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 (서북쪽 방향)
바다 안개 너머로 개성 땅과 예성강이 있다. 벽란도(碧瀾渡)를 품은 그 예성강이라..?
말로만 듣던 그 현장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렌다.

▲  3층 옥외전망대에 설치된 500원짜리 망원경
안개를 뚫고 북녘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500원을 넣어 잠든 망원경의 혼을 불러 모은다.
망원경의 시력이 더 좋은 탓에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바다 너머 땅도 썩 신통치 않게 보인다.

▲  북녘 실향민(失鄕民)을 위한 망배단(望拜壇)
망배단은 통일전망대의 필수 요소로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거나 북쪽에 둔
가족을 향해 인사를 하는 실향민들이 적지 않다.

▲  망배단에서 바라본 북녘 개성 땅
실향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강과 임진강이 합동으로 쏟아놓은
바닷물은 유유히 서해로 흘러갈 뿐이다.

▲  강화평화전망대의 귀염둥이(?) 전차
1971년 미국에서 생산된 전차로 길이 7.94m, 높이 3.12m, 폭 3.2m, 무게 23톤이다.
해병대에서 사용한 상륙돌격장갑차로 1975년부터 절찬리에 쓰였다가 2004년 국산
장갑차에게 자리를 넘기고 은퇴, 이곳에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노후를 보낸다.


이렇게 강화평화전망대를 둘러보고 매점에서 간단하게 간식을 사먹었다. 이곳은 북한 땅이 바
라보인다는 이유로 입장료도 비싸고, 간식이나 음식도 바깥보다 조금 더해진 가격을 받아먹는
. 민간도 아니고 강화군청에서 운영하는 공영인데 적당히좀 먹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통일
전망대 같은 것이 뭐 그리 자랑이란 말인가? 이 땅의 우울한 산물이거늘. 나중에 정말 통일이
된다면 우후죽순 들어선 통일전망대부터 싹 정리하고 상징적인 몇 개만 남겨 분단의 기념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평화전망대 입구로 나와서 강화읍내로 가는 강화군내버스 2번을 잡아타고 읍내로 나왔다.
님은 벌써 칼퇴근을 하여 천하는 어둑어둑해진 상태, 이럴 때는 그저 얌전하게 집으로 돌아가
는 것이 진리이다. 이렇게 하여 설연휴 강화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강화평화전망대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강화읍까지 교통편은 앞의 연미정 참조
* 강화터미널에서 강화군내버스 1(19), 26(16)을 타고 평화전망대 하차, 도보
  5
* 승용차 (반드시 신분증 지참 요망) : 서울 김포한강로/강화 방면 48번 국도 통진
  강화대교 강화읍 송해3거리 당산리검문소 (검문을 거쳐 출입통제증을 받아야 됨)
  강화평화전망대

★ 강화평화전망대 관람정보 (2018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2,500(20인 이상 단체 2,200) / 청소년과 군인 1,700(20인 이상 단
  1,500) / 어린이 1,000(20인 이상 단체 800) / 유아와 노인은 무료
* 관람시간 : 9~18(12~2월은 17시까지) 연중무휴, 주차비 없음
* 전망대 해설시간 : 1011, 1220, 13, 14, 15, 16
* 민통선 구역이라 자전거와 오토바이, 도보 접근은 불가하다. (무조건 군내버스나 관광버스,
  승용차, 택시로 가야 됨), 그리고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하기 바란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11-12 (전망대로 797 ☎ 032-930-7062)
* 강화평화전망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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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6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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