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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가까운 그림 같은 섬, 그리고 그림 같은 산사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눈썹바위)
▲  보문사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



 

봄이 슬슬 기지개를 켜던 4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강화도(江華島) 서쪽에 자리한 석모도
보문사를 찾았다. 원래는 강화도 1박 2일 여행으로 토요일 낮에 가서 일요일 오후에 오는
일정이나 나는 개인 사정으로 토요일에 같이 가지 않고 일요일 아침 일찍 새벽 이슬을 맞
으며 완전 후발대로 그들이 있는 강화도 황청리로 넘어갔다.

내가 서식하는 서울 도봉동(道峰洞)에서 황청리(외포리 서북쪽 동네)까지 그 장대한 거리
를 대중교통에 의지하여 9시 정도에 황청리 종점에 이르렀다. 그들이 머물던 펜션은 종점
바로 뒷쪽 언덕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어 찾기는 쉬웠다.
펜션에 들어서니 몇몇은 해장술이란 명목으로 아침부터 곡차(穀茶)를 걸치고 있었고 대부
분은 안에서 아침을 먹거나 TV를 보고 있었다. 물론 전날 밤샘의 위엄으로 아직도 깨어나
지 못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침을 먹으면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몸을 쉬게 했다.
11시가 넘자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석모도로 가고자 외포리(外浦里)로 이동을 했다. 일행
들 차량 6대 중 1대만 외포리에 두고 나머지 5대에 나눠 타서 석모도로 넘어갔는데, 일요
일이라 석모도 나들이 수요가 상당하여 외포리는 그야말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외포리와 석모도(석포리)를 오가는 여객선은 휴일 만선(滿船)의 기쁨을 톡톡히 누리며 수
시로 두 곳을 악착같이 이어준다. 이 여객선은 소형차량은 물론 대형버스, 화물차에 이르
기까지 수송이 가능하여 나들이객들이 가져온 차량을 꾸역꾸역 넣어 섬으로 보낸다.
사람이야 아무리 미어터져도 배 1척에 거의 다 실을 수 있지만 차량들은 수송능력에 한계
가 있고 섬으로 가려는 차량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어 40분 정도를 기다린 끝에야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배가 크긴 해도 차량 10대 정도 들어가면 꽉 찰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간
이란 공간을 다 활용하여 차량을 구겨넣으니 거의 30대 정도 실은 듯 싶었다.
사람들은 차에 있거나 2층 객실에 있으면 되며, 석모도까지는 소리를 지르면 흔쾌히 들릴
정도로 가까워 불과 10분이면 도착한다.


 

♠  석모도(席毛島)와 보문사 입문

▲  외포리 포구와 잠시 작별을 고하다.

사람과 차량을 가득 머금은 배는 미련 없이 포구를 출발했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에서 섬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화도도 엄연한 섬이므로 섬에서 섬으로의 이동이다. 다만 강화도가
2개의 다리로 한반도와 너무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보니 착각하기가 쉽다.

포구 주변에는 서해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갯벌이 진하게 펼쳐져 여러 생명들이 삶을 의지
하고 있다. 서해바다의 보물이라 일컬어지는 갯벌은 기후 변화와 인간들의 무분별한 개발의 칼
질로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으로 강화도 지역 갯벌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세계적 희귀종인
저어새(가리새)가 서식하고 있어 지구에서 매우 우수한 갯뻘로 추앙을 받고 있다. 하여 강화도
를 비롯하여 석모도, 볼음도(乶音島) 지역의 갯벌을 한 덩어리로 묶어 천연기념물 419호로 삼
았으며 단일 문화유산 지정 구역으로는 이 땅에서 가장 넓다.
(면적은 약 1억 3,600만평,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강화갯벌 및 저어새번식지')


▲  조금씩 멀어져가는 강화도, 그리고 시야를 어지럽히는 갈매기들

배가 출발하니 인근 갯벌에서 망을 보던 구공(鷗公, 갈매기)들이 몰려와 배를 포위한다. 날카
롭게 끼룩끼룩거리며 통행세를 요구하니 사람들은 준비해 온 새우깡을 던지며 그들을 달랜다.
허나 구공들이 입맛들이 변했는지 아니면 배가 불러터졌는지, 아니면 둔해졌는지 좀처럼 새우
깡을 잡지 못했다. 바다에는 그렇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떨어진 새우깡이 두둥실 무리를
이루며 떠있었다.


▲  어느 양이(攘夷) 여인이 팔을 뻗어 새우깡으로 구공을 유혹하지만
낯설은 피부색 탓인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  통행세를 요구하며 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구공들

▲  하늘이 온통 구공들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거니는 그들이 그저 부러울 뿐~~ ▼

외포리를 출발한지 겨우 10분 만에 석모도의 관문인 석포리 포구에 닻을 내린다. 배로 이동한
구간이 강화도와 석모도, 교동도(喬桐島) 등에 빙 둘러싸여 있어 마치 소양호, 대청호(大淸湖)
등의 너른 호수를 건넌 기분이다.
배에 담긴 사람과 차량들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쏟아져 나오면서 석포리 포구는 다시 활기를 되
찾고 강화도로 나가려는 사람과 차량들이 그들의 빈 자리를 메우면서 배는 왕복으로 만선의 기
쁨을 재현한다. 아마도 그날 여객선 회사는 소고기 회식을 거창하게 했을 것이다.

석포리에서 보문사까지는 잘 닦여진 2차선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10~15분 정도 들어가야 된다.
보문사에 이르니 주차장은 그야말로 초만원. 간신히 공간을 찾아 바퀴를 접고 보문사로 올라갈
준비를 한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는 여타 관광지와 비슷하게 보문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주막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들 주막은 나물튀김과 동동주를 미끼로 호객행위를 벌인다. 덕분
에 튀김과 동동주 몇 잔을 무료로 챙겨 마시며 배를 조금이나마 채운다.


▲  보문사 일주문(一柱門)

보문사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일주문을 거쳐야 된다. 일주문 옆에는 별로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고, 문 앞에는 매표소 사람이 철통같이 입장권을 검
사하고 있다. 예전 2004년에 왔을 때는 입장료가 1,500원이었는데, 지금은 10년의 무게가 억지
로 더해져 무려 2,000원씩이나 뜯는다.
후덜덜한 입장료 앞에 경악하며 단체 할인을 요구하였으나 적정 인원(30명)이 안된다며 거절당
했다. 우리 일행은 딱 20명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 구워삶아 단체 할
인으로 표를 끊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일주문 현판에는 '낙가산 보문사(洛迦山 普門寺)'라 쓰여 있는데, 이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7)의 글씨이다.


▲  은행나무 옆에 자리한 보문사 사적비(事蹟碑)

일주문을 들어서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길의 경사가 급해진다. 허나 그렇게 긴 거리는 아니므
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길을 2분 정도 오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보문사가 조금씩
모습을 끄집어내고, 담장에 둘러싸인 보문사 사적비와 거대한 은행나무가 먼저 마중을 나온다.

 ◀ 보문사 은행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63호

사적비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00
년에 이른다. 겨울이 저 멀리 물러가고 봄이 왔
건만 아직도 겨울의 망령에 사로잡혀 허우적거
리고 있다. 하루 빨리 파릇파릇한 은행잎을 펼
쳐보여야 될텐데 몸이 마음처럼 잘 따라주지를
못하니 보는 입장에서도 좀 안따까울 따름이다.
나무의 높이는 약 20m, 둘레는 3m에 이르며 보
문사의 정성과 아무리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세
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성장했다.

은행나무를 지나면 천하 3대 관음성지로 명성이
자자한 보문사 경내에 이른다. 그럼 여기서 잠
시 보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의 하나, 서해바다를 품은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석모도의 중심을 이루는 낙가산(洛迦山) 서쪽 자락, 서해바다가 잘 바라보이는 곳에 보문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보문사의 보문(普門)은 중생을 구제하려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보살행(菩薩行)이 크고 변함
이 없다는 뜻으로 동해바다의 낙산사(洛山寺), 남해바다의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과 더불
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절은 635년 회정대사(懷正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금강산(金剛山)에서 도를 닦고 강
화도 지역으로 들어와 보문사와 마니산(摩尼山)에 정수사(淨水寺)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 당
시 강화도와 석모도는 고구려(高句麗)와 신라의 팽팽한 접경 지역으로 절을 지을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창건 이후 무려 1,100년 이상의 공백기가 있어 창건 시기에 대해 강하게
회의감을 품게 한다. 물론 관련 기록이나 유물도 없다.
다만 전국에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되거나 경내에 600~700년 묵은
향나무가 있어 적어도 고려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절을 지은 이는 창건설화에 나오
는 회정(懷正)으로 보인다. 그는 석모도 어민들과 섬을 좌지우지하는 세력가, 부호(富豪)들의
지원으로 절을 세운 듯 싶으며 지역 어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도우며 공
존하고 있다.

절이 창건된 이후 18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이 전해오지 않으며, 180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
소 발자국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1800년 선방(禪房)을 조성해 한영 등 여러 승려가 수행을 했
으며, 1812년 유생 홍봉장의 지원을 받아 절을 중창했다.
1867년 경산이 석굴이 나한전을 지었고, 1893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지원으로 관음전과 객실
을 지었다. 1919년 보경이 관음후불탱, 신중탱, 칠성탱, 산신탱, 현왕탱을 제작해 봉안했으며,
1920년 대원이 관음전법당(극락보전)을 중건했다. 그리고 1928년 주지 배선주가 금강산 표훈사
의 이화응과 함께 경내 뒷쪽 눈썹바위에 그 유명한 마애관음보살을 조성해 절의 듬직한 명물로
삼았다.
1935년 나한전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58년 나한전 석굴을 손질하고 1972년 관음전을 중건했
다. 1982년 동각이 석실을 확장해 여러 성상(聖像)을 봉안했으며, 1987년부터 18년 동안 와불
조성 공사를 벌여 2005년 5월 완공을 보았다. 1996년 관음전을 중창해 극락보전으로 이름을 갈
았고, 2006년 5월부터 3년 동안 오백나한을 조성하는 등 새로운 볼거리를 계속 추가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선방, 석실, 삼성각, 와불전 등 10동 정도의 건물
이 있으며 석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마애석불좌상과
석실, 맷돌, 향나무 등 지방문화재 4점을 품고 있으며, 은행나무와 향나무 등 수백 년 묵은 나
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운다.

보문사는 관음성지의 명성에다가 석실 나한상의 영험, 배를 타고 가야되는 섬 산자락에 있다는
특성, 바다가 가깝다는 매력과 서해 일몰지, 서울과 가깝다는 잇점으로 1960년 이후 수도권의
명소를 뛰어 넘어 천하 명소로 성장했으며, 강화도에 오면 꼭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국민관광
지가 되었다. 이렇듯 석모도의 든든한 후광이자 꿀단지로 보문사가 없는 석모도는 순대가 없는
순대국밥이나 다름이 없다. 그만큼 석모도에서 보문사의 위치는 90%를 먹고 들어간다.

바다를 겯드릴 수 있는 수도권 당일 나들이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며, 바다를 바라보는 이 땅에
서 몇 안되는 절로 조망 또한 일품이다.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찾아와 안기고 싶
은 절로 관음보살의 인자함과 시원스런 조망이 속세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잠시나마 보듬어 줄
것이다. 
참고로 이곳은 관음성지 외에도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도 명성이 높다. 석실에 봉안된 18인의
나한상은 영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관련 전설이 몇 개나 전해온다.

※ 석모도 보문사 찾아가기 (2016년 7월 기준)
① 수도권에서 강화읍(강화터미널)까지
* 신촌역(2호선/1,4번 출구) 정류장과 홍대입구역(2호선, 경의중앙선, 공항전철/2번 출구) 중
  앙차로 정류장, 합정역(2,6호선/5,10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종점 하차
* 5호선 송정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88, 3000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마두역(4번 출구), 3호선 백석역(4번 출구)에서 96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대화역(4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뒷쪽)에서 97번 시내버스를 타고 장기4거리 이후 아
  무 정류장에서 강화행 시내버스로 환승 (88, 96, 3000, 90, 800번 등)
* 부평역(1호선, 인천1호선) 국민은행 앞 정류장과 부평구청역(7호선, 인천1호선/1번 출구)에
  서 90번 시내버스 이용
* 인천종합터미널 건너편이나 인천터미널역(인천1호선/1번 출구), 인천시청역(인천1호선/3번
  출구)에서 800번 좌석버스 이용
② 강화도에서 보문사까지
* 강화터미널에서 외포리행 군내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외포리터미널에서 도보 3분)에서 석모도행 여객선이 30분 간격으로
  다니며, 주말과 휴일, 피서철에는 10~20분 내외 간격으로 오간다. 마지막 배는 3~11월은 21
  시, 12~2월은 19시 정도이며 차량 수송도 가능하다. (문의 삼보해운 ☎ 032-932-6007)
* 석모도 선착장에서 보문사까지 마을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니며, 주말과 휴일, 피서철에
  는 20~30분 간격으로 증회 운행한다.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서울 → 48번 국도 → 강화터미널 → 인산3거리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 여객선 승선
  → 석모도 석포리 → 보문사
* 인천 → 검단 → 대곶 → 강화초지대교 → 온수리 → 화도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 여
  객선 승선 → 석모도 석포리 → 보문사

★ 보문사 관람정보 (2016년 7월 기준)
* 입장료 : 일반 2,000원(30인 이상 단체 1,600원) / 청소년 1,500원(단체 1,200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800원)
* 주차비 : 대형 5,000원 / 소형 2,000원 (문의 ☎ 032-933-8271)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삼산남로 828번길 ☎ 032-933-8271~3)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경내에서 바라본 낙가산, 하얀 바위가 뭉쳐있는 곳에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이 있다.


 

♠  보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문사 와불전(臥佛殿)

경내로 들어서면 범종각과 와불전, 500나한상 등이 제일 먼저 중생을 맞는다. 범종각(梵鍾閣)
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物)의 보금자리로 범종과 운판(雲版), 법고
(法鼓), 목어(木魚) 등이 자리를 메운다.
와불전과 오백나한(五百羅漢)은 2006년 이후에 닦여진 보문사의 새로운 명물로 와불전에는 말
그대로 누워있는 부처가 봉안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와불전의 존재를 몰라 내부를 살피지 못
했지. 그런 와불전 옆에는 하얀 피부의 500나한이 그들의 스승 부처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있는데, 그들의 표정이 우리나라 5,000만 인구 만큼이나 가지각색이라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  새롭게 만든 500나한상과 3층석탑 

▲  극락보전에 바라본 와불전(오른쪽)과 오백나한(왼쪽)

▲  보문사 석실(石室)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7호

보문사에는 유명한 존재가 2개가 있으니 하나는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석실이다.
이 석실은 나한상을 봉안한 공간으로 나한전(羅漢殿)으로 불리기도 한다. 649년 회정대사가 어
부들이 바다에서 건진 나한상(羅漢像)을 봉안하고자 만들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12년
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67년(고종 4년)에 경산(京山)
이 보수했으며, 1958년 춘성(春城)이 석굴 내부를 확장, 개수했고, 1980년에 정수(靜守)가 내
부를 확장하고 불단 뒤와 옆에 석탱화를 조성했다.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석굴사원(石窟寺院)으로 바위 밑에 난 천연동굴을 개조하여 만들었는데,
 '1⌒1⌒1⌒1'모양의 3개의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30평 크기로 넓게 자리를 닦아 18나한
과 석가불, 미륵불, 제화갈라보살, 송자관음보살, 관음보살 등을 봉안했다.


▲  석실을 가득 메운 중생들

석실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 보문사 측에서 649년이라 주장하는 어느 멀고 먼 옛날, 석모도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
바다에 쳐놓은 그물이 평소와는 달리 꽤 무거운지라 이거 큰 것이 잡혔구나 싶어 즐거운 마음
에 힘껏 당겨보니 왠걸 이상한 괴석(怪石) 22개가 걸려든 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사람 모습
과 비슷했다.
어부들은 기이한 석상에 허탈해하며 죄다 바다에 내던지고 다른 곳에 가서 고기를 잡았다. 허
나 거기서도 그 석상들이 그대로 걸려들었다. 어부들은 매우 놀라 그들을 바다에 내던지고 육
지로 돌아가 버렸다.

그날 밤, 어부들은 비슷한 시간에 같은 꿈을 꾸었다. 그들 꿈에 노승(老僧)이 나타나
'우리는 서천축국(인도)에서 왔다. 나와 함께 22명의 성인(聖人)이 돌배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
데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잠수해 있다가 그대들의 그물을 따라 올라왔더니 2번 씩이나 우
리를 버렸더구나. 우리는 부처의 법문과 중생의 복락(福樂)을 성취하는 길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명산으로 안내해주길 바란다. 그러면 그대들의 후손까지 길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며 어부들을 인도해 보문사 앞 석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이곳
에 쉬게 해달라고 당부를 하고는 바다로 사라졌다.

어부들은 이른 아침 바다로 나와 간밤의 꿈 이야기를 나누니 글쎄 다들 같은 꿈을 꾼 것이 아
닌가? 보통 일이 아닌 듯 싶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끌고 석상을 버린 곳으로 달려
가 그물을 치니 그 석상들이 고스란히 나왔다.
어부들은 그 석상을 가지고 보문사로 가져와 꿈에서 본 석굴에 봉안했다. (또는 석상을 낙가산
으로 옮겼는데 보문사 석굴 앞에서 그들이 갑자기 무거워져 꼼짝도 하지 않자 그 석굴에 봉안
했다고 함)
석굴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내음이 진동했는데, 누가 다듬은 듯 석상이 앉을 좌대
(座臺)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석상을 앉히니 신비한 기운이 가득찬 듯 하였고 마을 사
람들은 일제히 그들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어부들은 그 공로로 후손들까지 잘먹고 잘살았다
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이들 나한상은 바다에서 발견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종종 불상이나 옛 사
람들의 물건이 바다나 강 속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운반이나 약
탈을 당하는 과정에서 배가 침몰하여 바다에 버려진 것을 석모도 어부가 우연히 발견하여 보문
사에 봉안한 것으로 보이며, 보문사가 해상세력 또는 석모도 어부를 위한 사찰임을 은연중 내
비추는 것 같다. 또한 근래 절에서 나한상의 석질을 조사했더니 우리나라 화강암이 아닌 인도
에서 산출되는 돌로 밝혀졌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다.

석실 내부는 마침 단체 예불 중이라 들어가지 않았다. 하여 나한의 자세한 모습까지는 확인을
하지 못했지. 그리고 나한상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하나 덧붙여 전해오니 내
용은 대략 이렇다. 아마도 나한도량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지어낸 이야기로 여겨진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동짓날, 보문사 승려들은 팥죽을 만들어 불공을 드리고자 이른 아침
부터 서둘렀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궁이에는 불이 없었고, 불을 일으킬만한 어떠한 도구도 없
어서 도저히 팥죽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보문사 아래에 살던 고씨의 집에 보문사 동자승(童子僧)이 성냥을 구하기 위해 추
운 날씨에 맨발로 찾아왔다. 고씨는 그 동승을 불쌍히 여기고 따뜻한 방으로 데려와 팥죽을 한
그릇 먹이고 성냥을 보내주었다.
몇 시간 뒤 보문사 부엌 아궁이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면서 승려들은 신이 났고 서둘러 팥죽
을 지어 불공을 올리고 맛있게 공양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보문사 주지승이 고씨 집에 갔다. 고씨가 주지에게
'저번 동짓날. 어른 승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어린 동자승을 보냈습니까?'
주지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네? 동자승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동자승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불씨를 얻어오라고 시키지도 않았구요'

그 말에 고씨는 발끈하여 '스님들이 거짓말도 하시오? 절에 불씨가 꺼져서 팥죽 공양을 못하게
되자 불씨를 얻으러 왔다고 했어요~~!'

고씨 집에서 돌아온 주지승은 승려들에게 고씨의 말을 전하면서 그 동자승의 정체가 과연 무엇
일까 곰곰히 생각하던 중, 우연히 석실에 들어가보았다. 그러니 왠걸 석실 한쪽 구석 나한상의
입에 팥죽이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승려들은 나한의 은혜에 감복하여 더욱 열심히 정진
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도 동짓날이 되면 팥을 가지고 절로 올라와 팔죽을 쑤어 올리고 기도
를 했다고 한다. 그 일이 100년 동안 연례 행사처럼 계속되고 있다.


▲  보문사 향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17호

석실 바로 앞에는 푸른 내음을 자랑하는 오래된 향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석실 나한상의 법력(
法力)을 받아서 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서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용트림을 하는 듯한 모습으
로 그의 나이는 약 600~7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문사가 최소 600년은 넘었음을 보
여주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겨우 3.2mㄹ로 바위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렸으며, 6.25전쟁 때 폭격으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3년 뒤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생명력 하나는 정말 끈질기다.


▲  보문사 맷돌 - 인천 지방민속문화재 1호

향나무 앞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큰 맷돌이 놓여 있다. 여기서 어처구니는 맷돌을 돌리는 손잡
이를 말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리지를 못한다. 그래서 기가 막힐 때 사용하는 '어
처구니가 없다'
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사 승려들이 불공과 공양(供養)에 쓸 음식을 만들 때 사용했던 이 맷돌은 조선 후기에 화
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지름 69cm, 두께 20cm이며, 웃돌과 아랫돌이 잘 남아 있다. 지금은 현
대화된 조리기구에 제대로 밀려나 이렇게 손잡이를 잃은 채, 돌절구 등과 한가로이 남은 여생
을 보내고 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다.


▲  맷돌 옆에 놓인 돌절구
조선 후기부터 쓰인 보문사의 음식 조리 도구로 지금은 전시/관상용이 되어
향나무 주변을 수식한다.

▲  석실과 극락보전 사이에 들어앉은 삼성각(三聖閣)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1960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4평도 안되는 작은 건물이었다.

▲  삼성각에 봉안된 불화들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으로 모두 1992년에 제작되었다.

▲  보문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은 보문사의 법당으로 원래는 대웅전이었다.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하여 관음보살과 옥(玉)으로 조성된 조그만 3,000불이 봉안되어 장엄함
을 더해주고 있다.


▲  극락보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과 3천불의 위엄

▲  'ㄱ'자 모습의 요사(寮舍)
보문사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요사 건너편에 자리한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한 오백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나한을 위한 공간은
이미 석실과 야외 500나한상이 있는데 그걸로도 모자른 것일까? 오백나한전까지
지어 올려 3대 관음성지 외에 나한도량 성지의 인지도를 더욱 견고히 했다.


 

♠  보문사의 상징,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

▲  오색영롱한 연등이 계단을 오르는 중생들을 격려하고 인도한다.

극락보전 옆구리에는 눈썹바위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펼쳐져 있다. 눈썹바
위와 마애석불좌상은 보문사에서 꼭 봐야되는 이곳의 얼굴로 오르기 귀찮다고 통과하는 사람들
도 종종 있는데, 이는 천지(天池)를 안보는 백두산(白頭山) 관광과 같다. 계단길이 좀 가파르
긴 해도 보문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누리고 있는 존재인만큼 꼭 올라가 보는 것이 보문사에 대
한 예의가 될 것이다.

경내에서 눈썹바위까지는 108계단도 아닌 418계단이 이어져 있다. 왜 418계단인지는 모르겠다.
오르는 길이 좀 각박해 보여도 노공(老公)들도 거뜬히 오를 정도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이 있듯이 열심히 길을 임하면 눈썹바위 마애불이 반가이 맞이해 줄 것이다. 또한 그 앞에 훤
히 펼쳐진 서해바다는 근심덩어리로 꽉 막힌 가슴과 머리를 시원하게 트이게 할 것이다.


▲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9호

418계단 끝에 이르면 기이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거대
한 마애석불좌상이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환하게 맞이한다. 불상이 있는
바위 위쪽에는 특이하게도 암석이 눈썹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약 90년 동안 마애불의 우산 역할
을 해주니 덕분에 석불의 건강은 여전히 청신호이다.

이 석불은 1928년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주지였던 이화응(李華應)과 당시 보문사의 주지인 배
선주(裵善周)가 관음성지의 명성을 견고히 다지고자 의기투합하여 조성한 것으로 나이는 고작
90년 정도 밖에 안된 팔팔한 석불이다. 어둠의 시절 당시에 조성된 여러 불상 중 하나이자 가
장 규모가 큰 석불로 그의 얼굴을 보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조금은 우울해 보이
는데, 이는 1920년대 어둠의 시기를 살아야 했던 중생들의 근심어린 얼굴을 모델로 한 듯 싶다.

마애불의 정체는 관음보살로 소원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높아 바위 아래 기도처에 시주를 하려
는 사람들로 넘쳐나며, 불상 앞에 닦여진 예불장소에도 언제나 중생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서
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어 그 풍경에 나도 모르게 매료되고 만다. 여기서 바라보는 낙조
(落照)는 김제 망해사(望海寺), 변산 월명암(月明庵)의 낙조와 버금갈 정도로 그 찬란함을 자
랑한다.

눈썹처럼 삐죽 나온 암석과 그 밑에 관음보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대자연은 저곳에 저런
멋드러진 바위를 만들었고, 20세기 초반 이 땅의 인간들은 관음보살상을 조성하여 자연과 인간
의 합작품 눈썹바위 마애불이 탄생하게 되었다. 보면 볼 수록 눈썹바위의 모습은 신기하여 절
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마애불의 높이는 약 9.2m, 폭은 약 3,3m이다. 앙련(仰蓮)으로 구성된 대좌(臺座) 위에 선정인(
禪定印)을 하며 앉아 있으며, 선정인 아래 다리는 옷에 덮여 있는 방식으로 처리했는데 현실감
이 조금은 떨어지는 것 같다. 다만 못생긴 발바닥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저 석불이 결가부좌(
結跏趺坐)로 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가슴 부분에는 특이하게도 '卍'마크가 새겨져 있어 참 이채롭
다. 둥근널쩍한 그의 얼굴은 시름에 잠긴 듯, 별로 유쾌한 인상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손 위에
는 조그만 정병(政柄)이 하나 놓여져 있으니 이는 관음보살이 좋아하는 감로수(甘露水) 병으로
물방울이 들어가기도 버겨울 정도로 정병의 크기가 너무 작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이마 가운데에는 백호가 찍혀 있고, 지그시 감은 눈, 커
다란 코, 입술, 풍만해 보이는 얼굴살, 그리고 해학적 분위기의 길쭉한 귀가 있다.

석불의 우산 역할을 하는 눈썹바위에 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암석 아래에 무지개 모양처럼
돋음새김이 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손길이 미친 흔적들로 무엇을 새길려고 했는지
는 잘 모르겠다. 그를 더 장엄하게 연출하고자 저곳까지 손을 댄 모험까지 감행했던 것 같다.


▲  관음보살 옆에 새겨진 바위글씨

불상 옆에는 '造佛華應禪師'라 쓰여 있으니 즉 앞에서 언급했던 이화응 선사가 조성했음을 알
려주고 있으며, 오른쪽 글씨에는 '華嚴會上八部四王衆(화엄회상필부사왕중), 南無華嚴會上欲色
諸天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 華嚴會上護法善(화엄회상호법선신중)이라 쓰여 있다.


▲  마애석불좌상에서 바라본 천하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마애관음보살)을 둘러보고 3배를 하려고 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향만 키고 왔다. 내려가는 길에도 눈썹바위를 향한 사람들의 물결은 여전하다.

절을 등지고 주막촌으로 내려가다가 어느 적당한 주막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런 데 와서
파전에 도토리묵도 먹어줘야 되지만 아침을 많이 먹은 탓에 간단히 산채비빔밥과 동동주로 마
무리했다.
점심을 먹으니 식곤증이 살짝 등을 두드리며 한숨 주무시라고 부추긴다. 서비스로 제공되는 커
피를 마시며 식곤증의 압박을 덜면서 잠깐이지만 석모도 보문사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시간이 시간인만큼 석포리 포구까지 가는 길은 썩 순탄치 않았다. 포구 1km를 앞두고 섬을 나
가려는 차량들로 대도시 못지 않은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1km가 마치 1,000km
로 마냥 늘어진 듯, 강화도로 나가는 배에 오르기까지 무려 2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따분하던지 속히 이곳을 탈출하기를 희망하며 잠을 억지로 청했다. 다행히 잠이 금방
와주어 기다림의 시간을 좀 덜어주었다.
허나 한참을 잔 듯 싶은데 겨우 100m 이동.. 배 2~3척이 대박 쾌재를 부르며 바깥으로 나가는
차량과 사람을 열심히 실어나르지만 힘에 겨워 보인다. 그렇게 간신히 배에 올라 멀어져 가는
석모도와 작별을 고하며, 10여 분의 짧은 항해를 마치고 외포리로 돌아왔다. 지금은 비록 배로
왕래하지만 석모도를 한반도에 더욱 단단히 묶어두고자 한참 연륙교 공사가 진행중이다. 2017
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불편하게 배의 신세를 질 필요는 없게 된다.
여객선 회사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말이다.

정말 번개처럼 날아가 짧지만 재미지게 보냈던 그날 하루,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사람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석모
도 보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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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7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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