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예천 용문사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예천 용문사 '
우측 윤장대좌측 윤장대
▲  용문사의 자랑, 윤장대

용문사에 다시 오니 산이 깊어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
상방(上方)에는 중의 평상이 고요하고 옛 벽에는 부처의 등불이 환하다.
한 줄기 샘물 소리는 가늘고 일천 봉우리 달빛이 나뉜다
고요히 깊은 반성에 잠겨지니 다시 이미 나의 가졌던 것까지 잃어버린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이 용문사에서 지은 시



 

♠  용문사(龍門寺) 입문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

▲  회전문을 지키는 사천왕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


늦가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겨울이 제국의 기틀을 닦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일행들과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예천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용문사를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찾았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
고 경내로 들어서니 일주문(一柱門)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온다. 
 
용문사 일주문은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따르면 1608년에 시작된 대대적인 중창의 마
지막 불사로 81년 뒤인 1689년에 세울 예정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80여 년의 장대한 계획
을 세우고 중창에 임한 듯 싶다. 당시의 계획대로 81년 뒤에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공포의 조
각 수법이나 장식이 18세기 후반 양식이 강해서 1767년 대장전 중창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1938년에 보수를 했다.
문 현판에는 '소백산(小白山) 용문사'라 쓰여있어 이곳의 이름을 밝혀주며, 용문사를 직접 품
고 있는 용문산(龍門山)보다는 거리가 조금 있는 소백산을 칭하고 있으니 이는 소백산이 훨씬
명성이 높고 웅장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소백산의 영역을 좀 늘려보면 용문산도 그 범주에 들
어가기는 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삼삼한 숲길이 중생을 맞는다. 늦가을의 절정을 누렸던 나무들은 마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 중생 마냥 벌거숭이가 되어 겨울 제국(帝國)의 눈치를 받는다. '올해도 다
저물었구나. 이제 곧 강제로 나이 1살이 얹혀지겠군'
싶은 생각이 거친 파도처럼 몰려와 나그
네들을 잠시 우울쟁이로 만들어버린다. 숲이 아무리 청량한 바람을 불어 속세에서 꾸리고 온
번뇌를 싹 단죄한다고 해도 그런 우울한 생각까지 악성바이러스처럼 심어놓으니 심기가 별로
이다. 간신히 번뇌를 일주문 부근에 내던지고 경내로 발길을 향한다.

그렇게 길을 재촉하다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든 용문사에는 이르나 두 발로
가는 경우에는 산사의 정취에 어울리게 오른쪽 돌계단으로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절을 다
둘러보고 나올 때는 경내 서쪽 주차장(제3주차장)을 거쳐 잘 닦여진 찻길로 내려오면 된다.

돌계단을 오르면 경내로 인도하는 2번째 관문인 회전문(回轉門)이 마중을 한다. 그는 석가여
래의 경호원인 사천왕의 보금자리로 흔히 천왕문(天王門)이라 불린다. 여기서 그들의 간단한
검문을 받고 경내로 들어서면 되는데, 사천왕의 표정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다기보다는
느긋하고 친숙한 표정 같다.


▲  용문사 해운루(海雲樓)

회전문을 지나면 바로 조급한 게단이 숨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펼쳐진다. 다행히 계단은 짧
은데, 그 계단의 끝에는 해운루가 수미산(須彌山)에 높이 선 누각 마냥 물끄러미 천왕문을 통
과한 중생을 굽어본다.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인 해운루는 경내로 향하는 3번째 관문으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경내
를 가리고 있다. 1984년 대화재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이 누각을 지나면 대장전과 보
광명전이 정면에 나타나면서 비로소 경내에 이르게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용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해우소에서 바라본 용문사 외경

예천군 용문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문사는 양평(楊平) 용문사, 남해(南海) 용문
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용문사의 하나로 꼽힌다. 다들 쟁쟁한 역사와 보물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한번 가려보라면 바로 예천 용문사가
단연 갑(甲)이 아닐까 싶다.
양평 용문사는 이 땅 최대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로 유명하나 6.25때 죄다 파괴되어 고
색의 깊이가 얕고, 남해 용문사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지만 고색이 깊고 문화유산이 많다.
허나 예천 용문사는 그곳의 상징이자 천하에서 거의 유일하다는 오래된 윤장대를 간직하고 있
고, 조선 중기 건물인 대장전을 비롯해 무수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성보박물관까지 따
로 장만할 정도이다. 1984년 불의의 큰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대단했을 것인데,
천하의 시샘 때문인지 화재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예천의 대표급 관광지로 몸값을 올린 용문사는 870년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당나라에서 귀
국하여 지은 조그만 암자인 두운암(杜雲庵)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 초막을 짓고 머물고 있었는데, 920~930년경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경상도를 정벌하러 하늘재를 넘어 예천 땅을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그를 보러 찾아갔다.
허나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헤매고 있다가 어디선가 청룡(靑龍) 2마리가 바위 위에 나타나 길
을 인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 했다고 하며, 두운을 위해 용문사를 창건
했다고 한다. 이때 절을 짓는데, 나무 둥치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이 나와 공사비로 썼
다고 전한다.
전설에 나오는 청룡은 진짜 용은 아닐테고 아마도 지역 사람들이나 지방 세력의 격한 환영을
받거나 도움을 받은 것을 과대포장하여 그렇게 표현한 듯 싶으며, 은병 16냥은 예천의 지방
세력이나 백성들의 지원을 뜻하는 것 같다.

태조는 이곳에 머물며 장차 천하를 평정하면 큰 절로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936
년 오랜 숙원인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자 약속대로 그해에 칙명(勅命)을 내려 절을 크게 중
건하고 매년 150석의 쌀을 내렸다. 그 쌀은 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충당했다.

1165년에 의종(毅宗)의 칙명으로 중수했으며, 1171년에 명종(明宗)의 태자(太子)의 태를 절의
왼쪽 봉우리에 묻으면서 창기사()로 이름을 바꾸고 축성수법회()를 열어 낮
에는 금광명경(金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로 삼았다.
그 법회가 끝나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승려 500명을 불러 50일 동안 담선회()를 열었
으며, 그때 산청 단속사(斷俗寺)의 승려인 효돈()이 전등록(傳錄), 인악집(仁集), 설
두집
(雪集) 등을 강의했다.
그리고
1173년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일어나자 3만 승재()를 여는
한편 1180∼1182년에 대법회를 열었다.

▲  용문사 보광명전

▲  용문사 명부전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많은 절들의 법등(法燈)이 간당간당하던 조선 때도 용문사는 승
승장구하여 세조(世祖)가 이곳 승려의 잡역(雜役)을 감하거나 면제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렸
으며, 1478년에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실을 봉안하고 1480년에 세조의 왕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중수하여 성불산(成佛山) 용문사라 했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왜군은 절 입구인 초간정(草澗亭)에서 돌아갔다
고 한다. 그 기나긴 왜란 동안 용문사에서 짚신을 짜서 전국 승군(僧軍)들에게 보급하는 한편,
승병을 훈련시켰다.
1783년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갈았으며, 1835년
에 불이 나자 열파(), 상민(), 부열() 등이 힘을 모아 1840년대에 공사를 마쳤다.

6.25때도 별 피해를 입지 않는 등, 전화(戰禍)도 피해가는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을 날렸으
나, 1984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보광명전과 해운루, 강원, 요사 등 대부분의 건물을 날리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화마(火魔)는 대장전과 윤장대, 자운루 등은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으며,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벌여 주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뜨락을 넓게
다졌다.
또한 용문사와 인근 사찰의 문화유산 관리를 위해 경내 우측에 성보박물관을 세웠으며, 구식
해우소를 폐쇄하고 샤워장을 갖춘 신식 해우소를 갖추어 중생과 승려의 편의를 고려했다.


용문사에는 3가지의 믿거나 말거나 이적(異蹟)이 있는데, 하나는 태조 왕건이 두운을 찾았을
때 용이 나와 영접한 일이고, 둘째는 절을 지을 때 은병이 나와 공사비로 충당한 일이며, 3째
는 절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 지금은 없음)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 위로 오색구
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경내에는 오랜 내력과 명성에 걸맞게 법당(法堂)인 보광명전을 비롯해 대장전, 극락보전, 명
부전, 자운루, 원통전, 산신각, 해운루, 성보박물관 등 20동의 건물이 경내를 한가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대표 보물인 대장전과 윤장대를 위시해 세조의 감역교지,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영산회괘불탱, 천불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국가 국보 1점과 국
가 보물 7점, 중수용문사기비 등의 약간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  영남제일강원(嶺南第一講院)

▲  성보박물관에 있는 독성상과 지장보살좌상

깊숙한 산자락에 묻혀 있어 아무리 질긴 번뇌라도 쫓아오다 제풀에 졸도하며, 절을 감싼 숲이
삼삼하여 서거정의 시처럼 속인들의 마음을 정화해 준다. 거기에 고색이 깊은 경내에 발을 들
이면 나도 모르게 속세를 잊고 잠시나마 번뇌가 끊어지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로부터 4계절이 아름다운 경승지라 선비와 문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
와 문장으로 남겼으며, 20세기에는 출세를 위해 공부하러 절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행정, 법조계, 경찰 쪽으로 크게 출세한 이들이 많아 공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다.

대장전과 자운루를 제외하고는 1984년 이후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 부분에 따라 고색의 질감이
다르다. 허나 윤장대를 비롯하여 이곳의 깊은 내력을 가늠케 해주는 늙은 유물이 많아 경북
북부권에서 영주 부석사(浮石寺) 다음 급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예전에 이곳 승려인 청
안이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광고 문구로 유명한 모 핸드폰 통
신사 TV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 용문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391 (용문사길 285-30 ☎ 054-655-1010)
* 용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용문사 대장전과 그 주변



 

♠  용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광명전(普光明殿)과 3층석탑

해운루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입혀진 너른 뜨락과 함께 석탑 2기를 거느린 보광명전이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중생을 맞는다.

보광명전은 대장전 다음급의 건물로 1984년 대화재로 쓰러진 것을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철조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봉안했으며, 앞뜨락에는 하얀 피부
의 맨들맨들한 석탑 2기가 나란히 솟아 있는데, 우측 탑은 5층, 좌측 탑은 3층으로 층수를 달
리했다. 둘은 높이가 조금 차이가 날 뿐, 모습이 비슷하여 층수를 같게 하고 높이를 맞췄으면
보기에도 자연스러웠을텐데, 그 점이 좀 아쉽다.


▲  성보박물관에서 바라본 보광명전 뜨락

▲  보광명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광명전 불단(佛壇)에는 이곳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이 그만의 특허 제스쳐인 지권인(智拳印)
을 선보이고 있다. 얼굴이 너무 부어있어 통통한 인상을 주는데, 그의 좌우에는 소조(塑造)
로 만든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이 협시(夾侍)로 자리를 지킨다. 허나 주불(主佛)보다 덩치
가 지나치게 작아 마치 어른과 아이가 앉아있는 듯 하다. 그런 불단을 둘러싸고 중생들의 소
망이 한아름 담긴 연분홍 연등이 천정을 가리며 허공을 가득 메운다.


▲  보광명전 좌측에 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똥배하면 속인들은 만병의 근원이라며 다들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하여 똥배를 출렁이고
다니는 모습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포대화상만큼은 예외이다. 다 같은 똥
배인데도 말이다. 역시나 사람은 출세하거나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면 속인들이 흔히 안좋게
보는 것도 모두 좋게 보는 모양이다.
똥배는 그의 상징으로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그의 배를 문지른다. 무척이나 두꺼운 얼굴과 축
쳐진 가슴은 그의 비만이 꽤 심각함을 여실히 보여주나 그걸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
려 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그의 인기가 올라간다.


▲  진영당(眞影堂)

대장전 좌측에 자리한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81년에 희인대사(希
仁大師)가 세웠다고 전한다.
진영당은 이름 그대로 용문사를 거쳐간 조사(祖師)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건물로 1934년과
1935년에 주지 이광하가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곳에 깃든 진영들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무늬뿐인 건물의 이름과 달리 주지승의 집무실 및 종무소(宗務所)로 쓰이
고 있다.

주지승 집무실에는 목각탱화처럼 무늬가 복잡하고 현란한 의자들이 놓여있는데, 마치 부유층
집안의 거실이나 대기업 회장 사무실, 고위관료 접대실 같은 분위기라 조금은 이질감이 든다.
절에 어울리게 소박한 의자를 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진영당 주지승 집무실

▲  용문사 명부전(冥府殿)

진영당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
낸다.
이 건물은 1682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며, 불단에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
며 양쪽에 서 있다. 그 좌우에는 시왕상(十王像)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앉아 중생을 굽어보
고 있는데, 이들은 명부전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실적(實籍)과 신경(神鏡) 등이 만
들었다고 전한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명부(저승) 식구들

▲  용문사 자운루(慈雲樓)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76호

영남제일강원 남쪽에 맞배지붕 누각인 자운루가 속세를 바라보고 있다. 이 건물은 1166년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1561년과 1621년에 중수를 했고, 1979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쓸 짚신을 만들어 보급하던 의미 깊은 현장으로 조선 중/후기 건축 기
법을 지니고 있으며, 절에서 큰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행사장이나 공양 장소로 쓰인다.

자운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를 벗어나면 바로 2층 규모의 옛 해우소가 나온다. 재래식 화장실
로 신식 해우소가 세워지면서 지금은 문을 닫아 걸고 한가로운 노후를 보낸다.


▲  용문사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영남제일강원 뒤쪽에는 보기만 해도 장맛을 돋구는 장독대들이 5열로 늘어서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저 안에는 온갖 전통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으며 햇볕을 볼 그날을 꿈꾼다.

▲  원통전(왼쪽)과 산신각(오른쪽)

경내의 중심인 대장전과 보광명전 뒤쪽 높은 곳에 원통전(圓通殿)과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는데, 문이 가운데
칸에만 달려있다. 그 뒤쪽 높은 곳에는 1칸짜리 산신각이 원통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는
데,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로 산령각(山靈閣)이라 불리기도 한다.


▲  보광명전, 대장전 뒤쪽 산책로

▲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극락보전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84년 이후 경내를 크게 정비할 때 장만했는데, 원래는 천불전(千佛殿)이었으나
근래에 극락보전(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삼았다.
허나 예전 천불전의 성격은 여전하여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개가 아미타3존불을 빼곡
히 둘러싸며 장관을 이룬다.


▲  극락보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과 조그만 천불의 물결

▲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경내 (정면에 보광명전의 뒷통수가 보임)

▲  성보박물관 좌측에 자리한 샘터
용문산에 베푼 물이 나무로 만든 수로를 타고 석조(石槽)로 내려간다.



 

♠  용문사의 상징, 대장전(大藏殿) - 국보 328호

대장전은 용문사의 으뜸 건물이자 대표 보물이다. 만약 그와 윤장대가 없었다면 용문사를 찾
는 이는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고, 명성도 다른 용문사에 비해 낮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용
문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다. 작게는 절의 보물이나 크게는 나라의 귀한 보물로 절
에서도 그들을 특별히 옆구리에 두어 온갖 정성을 들인다. 화마(火魔)가 한바탕 할퀴고 지나
간 1984년에도 대장전은 띠끌의 피해도 없이 살아 남았으며, 그 이후 화재방지를 위해 보존처
리를 가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집으로 얕은 석축에 막돌 주초를 놓고 민흘
림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안과 밖을 모두 2출목(出目)으로 짜고 기둥 사이마다 공간포(空間
包)를 두었으며, 주심도리가 대들보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 지붕이 높아진 만큼 기둥이 짧아
보인다. 단청은 금단청(錦丹靑)을 입혀 내부를 화려하게 치장했으며, 천정의 반자틀에도 화려
하게 단청을 입히고 대들보와 종보 사이의 화반(花盤)에 풀무늬를, 대들보 위의 용은 물고기
를 몰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천정 곳곳을 화려하게 수식해 건물의 품격을 드높였다.

이렇게 화려한 대장전은 1173년에 자엄대사(資嚴大師)가 세웠다고 한다. 허나 그때 세워진 대
장전이 지금의 건물은 아니다. 자엄은 인도의 고승인 구담(瞿曇)이 대장경(大藏經)을 용궁(龍
宮)에 소장했다는 옛 이야기에 따라 용이 나타났다고 하는 용문사에 나라의 호국(護國)을 기
원하고자 대장경을 보관하고 건물 이름을 대장전이라 했으며, 나중에 그런 연유를 잘 상징하
고자 천정에 용과 물고기 장식을 만든 것이다.

그 이후 1467년과 1534년, 1597년, 1665년(또는 1670년)에 중수했으며, 1684년에 아미타3존불
과 목각탱화를 만들어 봉안했다. 그리고 1767년에 중수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
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해체수리를 하면서 19세기에도 보수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기단 공
사를 위해 간이시굴조사를 벌이던 중, 현재 기단 속에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이 모습을 드러
냈는데, 이는 대장전의 창건 당시의 흔적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중앙 뒷쪽에 불단을 두고 그 좌우에 윤장대를 1개씩을 설치
해 서적을 두었다. 내부 구조 양식은 조선 중기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으나, 외부는 고려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데, 가까운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과도 좀 비슷해 보이
기도 한다.

▲  우측에서 본 대장전

▲  좌측에서 본 대장전


▲  붉은 무늬 현판에 쓰여진 대장전 3글자의 위엄

▲  온갖 무늬가 그려진 대장전 우물천정

▲  대장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 보물 989-1호
뒤에 보이는 후불탱화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보물 989-2호


용문사 대장전하면 다들 윤장대가 생각날 것이다. 허나 윤장대보다 명성과 시대가 조금 떨어
지지만 불단을 지키고 앉은 목조아미타3존상과 그 뒤에 걸린 아미타후불탱화도 그에 못지 않
은 귀중한 보물이다.

두툼한 붉은 방석에 앉아 중생을 위로하는 아미타3존상은 나무로 만들어 금색 피부를 입힌 것
으로 아미타불이 자비로운 인상으로 가운데에 앉아있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
菩薩)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그 좌우를 지킨다. 뒤에 있는 후불탱화와 더불어 17세
기 후반 숙종(肅宗) 시절에 조성된 것이다.

그들 뒤로 목각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는데, 그는 1684년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
라에 널린 목각후불탱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이다. 후불탱화가 너무 화려해 가히 눈이 부실 지
경으로 기본 구조는 상하가 긴 직사각형이지만 더듬이처럼 생긴 하얀색의 구름무늬 광선을 표
현하여 금색과 흰색의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탱화의 수려함을 더욱 돋게 만든다.

탱화 중앙에 본존불은 얼굴을 앞으로 숙여 속세를 살피고 있으며,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
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
을 구분했다.

본존불을 둘러싼 나머지 불상은 상,중,하 3줄로 배치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
좌(臺座) 좌우로 2구씩 1렬로 서 있으며,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각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었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인 아난(阿難
)과 가섭(迦葉)을 배치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본존불과 보살상 사이
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하여 여백을 빼곡히 채웠는데, 너무 빼곡하여 솔직히 눈이 어지럽
다. 또한 탱화를 지탱하고 있는 양쪽 나무 기둥에는 용무늬 같은 것이 새겨져 장엄함을 드러
낸다.

▲  용문사 윤장대(輪藏臺) - 국보 328호

용문사에 왔다면 대장전에 깃든 윤장대는 꼭 한번 만져봐야 된다. 예전에는 돌리는 것도 가능
했으나 이제는 연로한 탓에 돌릴 수는 없고, 대신 성보박물관에 마련된 윤장대를 돌리면 된다.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1개씩 배치되어 있는데, 이 땅의 수많은 고찰 가운데 유일하게 있는
늙은 윤장대로 그 명성이 저승에까지 전해졌는지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꾸중을 듣는다
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도 있다.

윤장대는 원래 서적이나 장경판(藏經板)을 넣어두던 일종의 장경각(藏經閣)이다. 장경각은 쉽
게 말하면 책장이다. 법회 때는 경전을 넣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염불을 했는데, 옛날에는
일반 백성들 상당수가 까막눈이었고, 설령 한자(漢字)를 알아도 불교 경전이 좀체 어려운 것
이 아니다. 하여 '윤장대를 1번 돌리면 경전을 1번 읽은 것과 같다 /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
다 / 소망이 이루어진다 /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혼난다'
는 식으로 속인들에게 영업을
했던 것이다.

이들 윤장대는 높이 4.2m, 둘레 3.37m 크기로 양쪽에는 손잡이가 있어 그를 잡고 돌리면 되며,
기둥을 마루 밑에 있는 문둔테에 박아 회전식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8각원당형의 굴도리식
모양의 책장을 만들었다. 책장을 여닫는 문은 8개로 우측 윤장대의 문창살은 가지각색의 문양
으로 아름다움을 더하며, 좌측 윤장대는 그냥 소박한 빗살로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이는 음
양의 조화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또한 문 위쪽에는 연꽃과 보살 등이 그려져 있어 안그래도
포식하는 두 눈을 더욱 배부르게 만든다.

윤장대의 조성시기는 1190년이라고 하며, 두운이 절을 세울 때 용궁에 보관된 대장경을 보관
하고자 대장전에 윤장대를 만들고 7일 동안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윤장대 때문
에 그를 간직한 건물 이름이 대장전이 된 것이다.


▲  좌측 윤장대 윗부분

▲  우측 윤장대 윗부분

지붕과 촘촘하게 짜여진 공포덩어리는 그가 그냥 책장이 아닌 법당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던
져주며 좌측 윤장대의 처마와 공포는 금을 칠한 듯, 너무나 화사하다. 이렇듯 윤장대는 세밀
하고 뛰어난 조각품으로 우리나라 불교 미술의 또 다른 정화이다.

      ◀  책이 담긴 윤장대 가운데 부분
대장전 윤장대는 돌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그걸 무시하고 억지로 돌리려고 해도, 밑에 단
단하게 고정을 시켜버려 돌려지지도 않는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내 책장으로 삼고 싶
은 윤장대, 나중에 윤장대 모양의 책장을 하나
만들어 대리만족으로 옆에 두고 싶다.

(대장전은 원래 국가 보물 145호, 윤장대는
가 보물 684호
였으나 2019년 12월 '용문사 대
장전과 윤장대'란 이름으로 국보 328호로 특진
되었음)



 

♠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경내 서쪽에는 용문사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성보박물관이 넓게 터를 닦았다. 2010년에 문
을 연 이곳은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용문사의 보물을 비롯해 주변 사찰에서 맡긴 문화유
산 등 315점이 전시/보관되고 있다. 내부 촬영은 상업성이 아니라면 가능하며, 대장전과 더불
어 필수로 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는 윤장대를 돌리는 코너도 있으니 꼭 살펴
보길 권한다.
마음 같아서는 박물관의 유물을 모두 다루고 싶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질 수 있어 일부 중요한
유물만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른 유물은 직접 가서 눈에 담기 바란다.
 
* 성보박물관(☎ 054-655-8695) 관람시간은 9:30~17:30 (11~2월에는 10시부터 17시까지) 매주
  월요일과 설날, 추석연휴는 문을 닫아걸고 쉰다.

       ◀  영산회괘불탱 - 보물 1445호
괘불은 석가탄신일이나 주요 법회 때만 잠깐씩
등장하는 비싼 존재이다. 이 괘불은 1705년에
승려 92명과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조성되었는
데,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
華經)을 설법하는 영산회를 표현했다.
초록색 두광(頭光)을 갖춘 석가여래 좌우에 붉
두광을 두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해
있으며, 그 위에 석가여래의 제자인 아난과 가
섭이 합장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고, 테두리
하단부에 그림과 관련된 화기(畵記)가 있다.
이 괘불의 특징이라면 그림 상단에 하늘색 바
탕으로 하늘을 표현한 점과 석가여래가 연꽃가
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다른 괘불과는 다른 새
로운 모습이다.


▲  용문사 천불도(千佛圖) - 보물 1644호

이곳 성보박물관의 탱화 중 크게 두드러지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천불도가 아닐까 싶다. 천
불을 봉안한 천불전이란 건물은 많이 있지만 정작 천불을 그린 늙은 그림은 천하에 딱 2개 밖
에 없는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탱화는 1709년에 화승(畵僧) 도문(道文)과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 등이 제작
한 것으로 붉은 바탕에 조그만 1,000개의 불상을 질서정연하게 그려넣었다. 이 땅에 전해오는
천불도는 1754년에 그려진 선운사(禪雲寺) 천불도 5폭과 이곳 용문사가 전부로 18세기 초기
천불신앙(千佛信仰)과 당시의 불화 양식을 잘보여준다고 하여 국가 보물로 대접받고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1812년 제작)
용문사의 부속 암자인 극락암에서 가져온 그림으로 중앙에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명부(저승)의 시왕(十王)과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극락암 지장시왕탱 복장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유물

▲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동자입상(童子立像)과 사자입상(使者立像)

동자입상은 용문사 명부전에 있던 것으로 시왕의 심부름을 하는 비서이다. 원래 동자상 10개
가 각각 시왕(十王) 곁에 있었으나 관리소홀로 지금은 달랑 1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옮겼
다.
오른쪽 눈에 안타깝게도 크게 금이 가서 애꾸눈처럼 되었지만 동자에 걸맞게 그의 표정에는
귀여운 티가 배여 있으며 양손에는 시왕의 물건을 들고 있는데, 물건을 숨기며 장난을 칠 것
같은 천진난만함이 묻어나온다.

동자입상 옆에는 응진전에서 가져온 사자상(使者像)이 나란히 서 있는데, 동자상과 달리 머리
에 모자를 쓰고 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조그만 독성좌상(獨聖坐像)

독성이 그려진 독성도(獨聖圖)는 많이 봐왔지만 늙은 독성상은 흔치 않다. 이 독성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塑造像)으로 원래 응진전 내부 정방형 감실(龕室)에 홀로 봉안되어 있었다.
왼손에는 게이트볼에서 공을 칠 때 쓰는 것과 비스므리하게 생긴 긴 장대를 들고 있는데, 조
선 후기에 신경대사가 시왕상과 금당의 판불(板佛)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여 승려들이 축수
전(祝壽殿) 서쪽에 별도로 감실(龕室)을 만들어 신경대사의 진영을 안치했다는 기록이 '속용
문사적기'에 나와있어 그의 상이라는 의견도 있다.


▲  너그러운 표정의 지장보살좌상

독성상 옆에 자리한 지장보살좌상은 원래 강원(講院)에 있었다. 15~16세기에 나무로 만든 목
불(木佛)로 도금을 입혔으며,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지그시 눈을 감은 둥근 얼굴에는 온화함
이 물씬 배여나와 중생들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목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있는데, 두건과 수인
(手印)이 아니라면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착각하고도 남을 모습이다.

강원 불단에 있던 그는 1984년 대화재로 강원이 불타면서 응진전으로 옮겨졌으며, 화재로 인
해 어깨 부분과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에 그을음이 생겨 당시의 참담함을 증언한다. 다행
히도 재빨리 구조한 탓에 이렇게 살아있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  봉인사(奉印寺) 부도암(浮屠庵) 신중탱 복장낭(腹臟囊, 복장주머니)과
복장물

봉인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思陵) 인근에 있는 절로 광해군(光海君) 시절부터 왕실의 원
찰(願刹)로 지원을 받았다. 1867년 상궁의 시주로 신중탱과 복장물을 만들었는데, 1887년 봉
인사가 불에 타면서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용문사에 안착하
게 되었다.
복장주머니에는 한글로 쓰인 발원문이 있으며, 이 주머니에서 각종 다라니경과 약초, 금과 은
이 나오기도 했다.


▲  전패(殿牌)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패로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경내에 1884년 6월에 궁궐 상궁(尙
宮)의 지원으로 만든 탱화가 있어 그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패 중앙의 붉은 부분에는 '황실삼전하수만세(皇室三殿下壽萬歲)'라 쓰여 있어 제왕(帝王)의
장수를 기원하는 전패임을 보여주며, 여기서 삼전하는 당시 제왕인 고종과 명성황후, 세자 순
종(純宗)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돋보이는 것은 왕실이 아닌 황실로 썼다는 것이다. 하여 고종
이 황제를 칭한 1897년 이후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왕을 폐하(陛下)가 아닌 전하로
칭하고 있어 앞뒤가 맞지를 않는다.

이 전패는 8각형의 높은 대좌(臺座) 위에 패를 올렸으며, 발원 내용을 적은 가운데 부분에는
연화좌(蓮花座) 위에 화려한 꽃장식을 채웠다. 머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채
색은 좀 희미해졌지만 용과 꽃무늬 장식을 갖춘 화려한 모습으로 왕실을 위한 전패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조선 때 만들어진 전패나 위패(位牌), 불패(佛牌)는 많지만 이렇게 대좌부터 머
리까지 완벽하게 남은 것은 흔치 않다.

             ◀  업경대(業鏡臺)
조선 후기에 나무로 만들어 채색을 입힌 것으
로 저승의 염라대왕이 심판할 때 쓰는 거울이
라고 한다. 거울을 보면 생전의 죄업이 싹 비
친다고 하며, 그 경량에 따라 지옥으로 갈지,
극락으로 갈지가 정해진다고 한다.
이 업경대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는데, 아랫부
분을 수미산(須彌山) 형태로 조각했다. 이는
죄업(罪業)을 쌓지 않고 깨달음을 통해 극락으
로 갈 수 있다는 업경(業鏡)의 상징성을 강조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죄업을 비추는 거울
인 업경은 불꽃 형태로 조각된 원형의 놋쇠로
만들었다.
나도 만약 저세상에 가서 업경대를 본다면 과
연 어떻게 나올까? 궁금함보다는 왠지 두려움
이 앞선다.


▲  화엄칠조탱(華嚴七祖幀) - 19세기 탱화

화엄7조탱은 화엄종(華嚴宗)의 정통을 계승한 7명의 승려를 담은 탱화이다. 다들 열심히 화엄
경책을 보고 있는데, 모두 머리에 초록색 두광(頭光)을 지니고 있어 그들을 높이고 있다.
화엄7조는 인도의 마명(馬鳴, 50~150)부터 시작하여 용수(龍樹, 150~250), 중원대륙의 법순두
순(法順杜順. 557~640),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청량징
관(淸凉澄觀. 738~839),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로 그들을 순서에 따라 배치했다.

상단 중앙에는 마명이, 그 좌측에는 용수가 앉아있고, 우측에는 두순을 앉혀 3명이 기나긴 세
월을 뛰어넘어 같은 경상에 앉아있다. 그 옆에 지엄과 현수가 있으며, 하단 좌우에 막내인 청
량과 종밀이 따로 앉아있다. 용수와 마명은 후대에 보살로 격이 높아져, 보살의 얼굴처럼 표
현되었으며, 다른 조사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킨다. 조사 옆에는 그들의 법
호(法號)와 생애를 함축한 글이 적혀있으며, 각자의 저서가 놓여져 있다.
그래서 마명이 앉은 경상에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있고, 종밀의 경상에는 '대방광불
원각경(大方廣佛圓覺經)'이 놓여 있다. 또한 마명 앞에는 앞발을 들어 힘차게 달려가는 말이
그려져 눈길을 끈다.

이 탱화는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화엄종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7조탱이 제작되어
봉안된 것은 용문사가 유일하다. 또한 19세기 화엄사상을 중시했던 용문사의 노선이 잘 반영
되어 있다.


▲  묘법연화경 변상도(妙法蓮華經 變相圖) - 조선 후기

▲  묘법연화경 권제1
1635년에 인쇄된 것으로 용문사에는 묘법연화경 27책이 전하고 있다.

▲  대장전기일록(大藏殿忌日錄)
대장전에서 사용한 서적으로 용문사 승려들이 그들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  문수사리설마가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說摩訶般若波羅密經)과
백유경(百喩經) 1,2,3,4권
기나긴 이름부터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반야바라밀경과 백유경은
고려 고종 때 간행된 8만대장경에 수록된 경전의 하나로 여기의 것은
조선 후기에 간행되었다.

▲  고색의 때가 자욱한 감역교지(減役敎旨) - 보물 729호

감역교지(면역사패교지)는 1457년 8월 14일에 세조가 용문사에 내린 교지이다. 큰아버지인 효
령대군(孝寧大君, 세종의 둘째 형)과 함께 불교를 믿었던 세조는 용문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
에 교지를 내려 승려의 잡역을 면제시켜주는 한편,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교지에

'경상도 예천 용문사를 경상도 감사와 예천 수령에게 이미 알린데로 더욱 살펴 한층 완호(完
護)하고 잡역을 영구히 면제해줄 것'
이란 내용과 함께 국왕의 친필 수결(手決)이 있으며, 교
지를 담던 봉투에는 '교지함(敎旨函)','어압(御押)'이라 적혀 있다. 그리고 천안 광덕사(廣德
寺)와 화순 쌍봉사(雙峯寺)에도 비슷한 시기에 교지를 내렸는데, 용문사보다 4일 전에 내린
것이다. 허나 대상 사찰명과 발급일자만 틀릴 뿐, 문장과 체제는 똑같다.


▲  용문사를 빛낸 고승들의 진영(眞影)
절을 창건했다는 두운선사를 비롯해 고승 16명의 진영이 걸려있다. 이들은
원래 진영각에 있던 것으로 보관을 위해 성보박물관 지하로 옮겨졌다.

▲  경내에서 제3주차장으로 인도하는 돌담길
(밑에서 본 모습,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성보박물관)


성보박물관을 끝으로 2시간에 걸친 용문사 관람은 정말 배부르게 마무리가 되었다. 경내에서
속세로 나갈 때는 돌계단이 있는 회전문 대신 제3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담장(토담)길과 숲길을
거쳐 일주문 옆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담장길에는 아무렇게나 생긴 큼직한 박석이 깔려 토
담과 함께 한줄기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근처에서 우두커니 있던 번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다시 절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들을 강제로 껴앉고 나의 제자리로 향했다. 이래서
정말 해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리하여 윤장대로 빛나는 고찰, 용문사 관람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예천 용문사를 끝으로
우리나라 3대 용문사는 모두 인연을 지은 셈인데, 이들 용문사 중 가장 작성하기 힘들었던 곳
이 예천 용문사가 아닐까 싶다. (작성하기 쉬운 곳은 양평 용문사)
(양평 용문사 ☞ 보러 가기  / 남해 용문사 ☞ 보러 가기)


▲  일주문으로 내려가는 숲길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2월 1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1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