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닭실의 보물창고 충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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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마을에 들어서 가장 먼저 충재박물관을 살피기로 했다. 마을 북쪽에 자리한 충재박물관은
닭실을
일군 충재(沖齋) 권벌의 문서와 유물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과 마을에 전해오던 유물을
모은 보물창고이다. 겉으로는 작고 싱거워 보여 정말 10분이면 다 볼 것 같지만 저 안에 무려
3,000여 점의 유물이 깃들여져 있다.
충재박물관은 마을의 옛 보물을 속세에 보여주고, 그것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권벌의
후손들이
돈을 모아 1995년 3월에 세운 충재선생유물관에서 비롯되었다. 허나 마을의 전통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전체적인 공간의 조형미를 깬다는 지적이 있었고, 항온/항습시설의 부재로 인
해
유물이 병들어가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2007년 9월 기존 건물을 싹 갈아버리고 현재 위치에
기와집으로 새로 지어 충재박물관으로 이름을 갈았다.
박물관 안에는 보물 261호로 지정된 권벌 충재일기(沖齋日記) 6책과 보물 262호인 근사록(近
思錄) 4책, 보물 896호인 충재 종가 전적(典籍) 15종 184책, 보물 901호인 권벌 종가 고문서(
古文書) 15종 274점,
보물 902호인 권벌 종가 유묵(遺墨) 8종 14점 등 보물급 문화재
5개 482
점을 포함 3,000여 점의 유물이 있는데, 이중 전시 유물은 일부 밖에 안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충재 권벌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박물관 유물을 일부 살펴보도록 하자.
* 닭실마을을 일군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1548)
권벌은 안동권씨 집안으로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道村里)에서 권사빈(權士彬)의 아들로 태어
났다.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훤정(萱亭), 송정(松亭)으로 충재를 주로 썼다.
1496년에 생원시(生員試)를 통과했고, 1507년 문과 별시(別試)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사헌부지평(司
憲府持平)이 되었을 때 신윤무(辛允武)와 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알리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건의하여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날렸다.
1514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고 이어서 호조전랑(戶曹正郞)이 되었으며, 1519년 예조참판(
禮曹參判)까지 승진했다. 바로 그해 조광조(趙光祖)가 훈구파(勳舊派)를 건드리며 왕도정치(
王道政治)를 주장하자 이러다 사단이 벌어지겠다 싶어서 조광조를 지지하는 사림(士林)과 훈
구파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그들의 정쟁을 피하고자 아버지가 연로하고 자기 자신은 풍병(風病)이 있다고 우겨 강
원도 삼척부사로 자처해서 외직으로 나갔다. 이때 고향을 거쳐가면서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닭실을 찾았는데, 닭실 경관에 크게 반하여 나중에 꼭 이곳에 살리라 다짐을 하고 삼척(三陟)
으로 떠났다.
그해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터지자 사림패거리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했다. 그래서 고향
으로 내려오면서 이전에 봐두었던 닭실로 거처를 옮겨 1520년 초에 지금의 종택(宗宅)을 지었
으며,
1526년에 집 곁에 석천정을 짓고 1533년까지 닭실에 머물렀다.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었고,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1538년에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와 형조참판으로 승진했다. 그
리고 1539년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 서울을 다스렸고, 그해 7월에는 중종의 특명
을 받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기록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가계(家系)를 고
쳐줄 것을 요구했다.
1540년에 병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1541년에 예조판서와 의정부좌찬찬(議政府左參贊)
을 거쳤으며, 1545년에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이 되었고, 그해 7월 명종(明宗)이 왕위에 오르
자 원상(院相)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소윤(小尹) 패거리가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대윤(大尹
) 패거리에게 시비를 건 을사사화(乙巳士禍)가 터지자 대윤패거리인 윤임(尹任) 등을 구하려
고 왕에게 계사(啓辭)를 올렸으며, 사화가 끝나자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
原君)에 봉해지기도 했으나 소윤패거리인 정순붕(鄭順朋)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공
격해 공신록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10월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으며,
1547년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구례(求禮)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평안도 삭주(朔州)로 옮겨졌다가 1548년 거기서 인생을 마감했다.
선조 때 권벌의 억울함이 밝혀져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
으며, 불천위제사의 특권을 누리며 후손들에게 매년 성대한 인사를 받는다.
* 닭실마을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63 (충재길42 ☎ 054-674-0963)
* 충재박물관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34 (충재길 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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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재선생 문집
권벌의 글과 그와 교류하던 인사와 후대 명사들의 글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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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경(心經) - 보물 896호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마음에 대해 논한 옛 성현의 격언을 모은 서적으로
정조 임금이 수진근사록(袖珍近思錄)을 읽어보고 권벌의 근사록과 함께
충재 후손에게 내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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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사록(近思錄) - 보물 896호
영조가 권벌의 근사록을 궁궐로 들여와 그 내용을 필사하여
권벌의
후손에게 보낸 근사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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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덕(定德)2년 3월 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 - 보물 896호
1507년 권벌이 문과 별시에 병과(丙科)로 합격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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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권(試券) - 보물 901호
1507년 권벌이 문과 별시에 붙었을 때 그가 제출했던 시험 답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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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서(諭書) - 보물 901호
1538년 중종이 경상감사인 권벌에게 군사 징병 권한을 내리는 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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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렇게 바랜 과거 급제 교지(敎旨) - 보물 901호
1507년 중종이 내린 과거 급제 교지
![](https://t1.daumcdn.net/cfile/blog/2239D03A523DC2B834)
▲ 근사록 - 보물 262호 |
근사록은 송나라 때 주자<朱子, 주희(朱熹)>와 그의 제자인 여조겸(呂祖謙)이 만든 책으로 일
상 수양에 필요한 장구(章句) 622조록을 추려내어 14부로 분류한 14권의 책이다.
권벌이 소장한 근사록은 1370년 이인민(李仁敏, 1330~1393)이 작성한 것으로 14권과 15권 끝
에
'성산이씨간우진양(星山李氏刊于晋陽)'이란 전문을 새겼고, 그 다음 종형인(鐘形印) 안에
'홍무(洪武)
3년(홍무는 명태조의 연호)', 정형인(鼎形印) 안에 이노숙(李魯淑, 이인민의 호
가 '노숙')을
새겨서 작성 시기와 간행자, 간행처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이인민이 1370년 진주목사로 부임하자 그와 친하던 사예(司藝) 박상충(朴尙衷)이 전별 선물로
근사록을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렇게나 구하고 싶었던 그 책을 얻자 너무 기뻐서 진주에서
이를 간행했는데, 비록 원본이 아닌 그것을 옮긴 복사본이지만 이 땅의 희귀한 고려 서적으로
그 가치는 충분하며, 권벌이 평소 가지고 다닌 수택본(手澤本)이란 점과 정조 임금이 친히 서
문(序文)을 지어서 붙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서적이다.
권벌은 근사록을 소매에 늘 넣고 다니며 내용을 줄줄 외웠는데, 중종(中宗) 때는 경연(經筵)
에서 그 책으로 강연까지 했다. 또한 중종 어느 해에 중종이 권벌을 비롯한 신하들과 궁궐에
서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며 놀았는데, 다음날 누군가가 근사록을 주어와 바쳤다.
이에 중종은
'아마 권벌의 옷소매에서 빠졌을 것이다. 그러니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해라' 명
을 내렸다. 그만큼
권벌하면 근사록이 생각날 정도로 근사록 광이었던 것이다.
이런 유래에 호기심을 가진 영조(英祖) 임금은 권벌의 후손인 권만(權萬)에게 그 책을 궁궐로
들일 것을 명했고, 이후 궁중(宮中)에 두었다가 1794년 정조가 '어제충정공권벌 수진근사록서
(御製忠定公權橃袖珍近思錄序)'를 지어서 승정원 좌부승지 서영보(徐榮輔)에게 명해 글씨를
쓰고
후손에게
보냈다. 그 연유로 이 근사록을 수진근사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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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有旨) - 보물 901호
1539년 중종이 승정원(承政院)을 통해 내린 교서로 명나라에서 태조 이성계의
가계를
잘못 기록한 것을 지적하며 이를 고쳐줄 것을 요구하고자 권벌에게
개종개주청사(改宗系奏請使)의 임무를 부여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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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글씨라고 전하는 '충(忠)' 족자 |
권벌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가져온 것이다. 주원장의 친필인지 아니면 그것을 모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족자는 권벌의 5대손인 권두광(權斗光) 집안에서 보관해오다가 후손
권주섭이 박물관에 기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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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벌 수적(手蹟) - 보물 902호
권벌의 자필 간찰(簡札)을 비롯하여 그가 수집한 황보인(皇甫仁)의 필적과
후대에 태어난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의 필적이 담겨져 있다.
이 수적의 표제(表題)는 '선조수적(先祖手蹟)'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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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재일기(沖齋日記) - 보물 261호
|
권벌이 매우 잘한 점을 하나 꼽는다면 당시의 상황을 일부나마 남겼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에
서
관직생활을 하던 30대에 일기를 썼는데,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당후일기(堂后日記) 1책
,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신창령추단일기(新昌令推斷日記) 1책 등 모두 6책이다.
한원일기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지낼 때 쓴 것으로 1책은 1508년 1월 5일부터 9일
20일까지, 2책은 12월 1일부터 1509년 9월 14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한원은 한림원(翰林院)으
로
불렸던 예문관의 별칭이다.
당후일기는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를 지낼 때 쓴 것으로 1510년 3월 1일부터 3월 30일까
지의 짧은 기록이다. 당후(堂后)는 승정원 주서가 거처하던 방으로 승정원 뒤에 있었다.
승선시일기는 승정원 승지(承旨)를 지낸 당시의 공사(公事)를 담은 것으로 1책은 1518년 5월
15일부터 7월 5일까지, 2권은 7월 10일부터 11월 6일까지 썼다.
끝으로 신창령추단일기는 승정원 주서로 있을 때 서얼 출신이던 신창령(新昌令) 이흔(李訢)의
역모사건 전말을 추단한 기록으로 1509년 10월 28일에 작성되었다.
일기라고 해서 충무공 이순신처럼 여러 해 동안 매일 쭉 쓴 것이 아니라 일부만 기록한 것으
로 중종실록을 편찬했을 때 중요한 자료로 참고했으며, 권벌의 문집인 충재집(沖齋集)에도 일
부
실려있다. 당시 관료의 생활실태와 조정과 왕실의 일상 행사가 기록된 드문 자료로 유희춘
(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와 함께 조선 전기의 주요
기록물로 가치가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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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필 진묵(張弼 眞墨) - 보물 902호
명나라 문장가로 초서를 잘쓰던 장필이 남긴 것으로(1465~1504년 사이)
권벌이 명나라에 개종계주청사로 갔을 때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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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지(敎旨) - 보물 901호
선조(宣祖) 임금이 1591년 5월 권벌을 영의정에 추증하면서 내린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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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지(敎旨) - 보물 901호
1568년 선조가 권벌의 공과 직에 따라 그의 부인을 정경부인으로 올린다는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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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재선생문집 - 권벌의 시문집으로 10권 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537B742523DC6F62D)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249C942523DC6FC25) |
▲ 문서와 그림에 사용하는 조선시대
도장들 |
▲ 호구단자(戶口單子) - 보물 901호
호주(戶主)가 호적작성을 위해 관청에
제출한 문서 (1690년작)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3146641523DC70325)
▲ 예조입안(禮曹立案) - 보물 901호
예조에서 권벌의 손자인 권래(權來)의 입후(立後, 양자로 삼음)를 인정하는 문서
![](http://3.bp.blogspot.com/-peLfSx2sr5c/Uj6GflhLeZI/AAAAAAAAEXk/jTgaqbFifHg/s640/DSCN8632.JPG)
▲ 분재기(分財記) - 보물 901호
권벌의 어머니인 윤씨가 친정에서 받은 재산 내역이 적혀있다.
![](http://3.bp.blogspot.com/-lgRtwgT5zJc/Uj6GhYK0lMI/AAAAAAAAEX4/FRa6HHrYDy0/s640/DSCN8637.JPG)
▲ 혼례용 복숭아 모양 은술잔
은으로 만든 술잔으로 2개가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전 닭실마을에서
혼례 때 사용되었다. (지금은 그냥 전시물..)
![](http://2.bp.blogspot.com/-hzGvBls3SoU/Uj6GhsRtMsI/AAAAAAAAEYA/yUjZ1ca3jdY/s640/DSCN8639.JPG)
▲ 석천정사 현판과 주자대전(朱子大全) - 보물 896호
송나라 주자(주희)의 시문을 모아서 만든 책으로
권벌이
좌참찬(左參贊)을 지냈을 때 받은 것이다.
![](http://3.bp.blogspot.com/-r_EUaEQmDzw/Uj6GjkYfNsI/AAAAAAAAEYU/azCij1eMelo/s640/DSCN8642.JPG)
▲ 퇴계 이황(李滉)이 청암정을 찾아와 남긴 시현판(왼쪽)과
청암 권동보가 쓴 제석천정사 시현판(오른쪽)
이들 현판은 각각 청암정과 석천정사에 있었으나 도난이 염려되어
박물관으로 옮겼다.
![](http://3.bp.blogspot.com/-IV4DME28-ew/Uj6GkbadsoI/AAAAAAAAEYg/KRioVYtNM20/s640/DSCN8643.JPG)
▲ 유향설원(劉向說苑) - 보물 896호
유향설원은 한나라 유향(劉向)이 중원대륙 고금(古今)의 기문(奇聞)과 일화를
20편으로 엮은 책으로 권벌이 임사균(任士均)에게 받은 필사본이다.
![](http://3.bp.blogspot.com/-hl5YfbvrrbQ/Uj6GmiVw3II/AAAAAAAAEZA/i8fJoiu6yTw/s640/DSCN8649.JPG)
▲ 왕세자책례도감계병(王世子冊禮都監契屛) - 보물 901호
1690년 숙종이 왕세자(경종)를 책봉하면서 만든 병풍으로
그림 6폭과
서문, 좌목 등이 기재된 글씨 2폭으로 이루어져있다.
![](http://1.bp.blogspot.com/-LS0JyfY6nRM/Uj6GnZ9L1bI/AAAAAAAAEZQ/uG-_y1EA7hE/s640/DSCN8650.JPG)
▲ 우향계축(友鄕契軸)
안동, 봉화 지역의 양반 단체인 우향계의 문서이다.
![](http://2.bp.blogspot.com/-P0g-u_4taZ0/UkMA0SPvmrI/AAAAAAAAEZo/SP31xmv0zSY/s640/DSCN8705.JPG)
▲ 상다리가 미안할 정도로 풍성하게 차려진 권벌 제사상의 위엄 |
충재박물관 정문에는 권벌 제사상의 모형도가 있다. 차려지는 음식만 과일을 합쳐서 무려 30
종이 넘는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의 호화로운 제삿상이라
'아직도 이렇게 제를 지내나?'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과 공포에 빠져들게 하는데, 권벌의 제
사는 단순 기제사(忌祭祀)가 아닌 아무나 할 수 없는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이다. 불천위제
사란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 가운데 제왕의 승인을 받은 사람만 두고두고 받을 수 있는 제사
로 그 가문에는 보통 그를 위한 부조묘(不祧廟)가 세워진다.
권벌 종가(宗家)에도 부조묘가 있는데, 이런 부조묘를 지닌 집을 흔히 종가라고 부른다. 보통
은
3~4대만 제를 지내고 그것이 지나면 제삿상을 받지 못하나 부조묘에 봉안되거나 불천위 특
권을 받은 이는 세상이 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제삿밥을 받는다.
권벌 내외의 제사는 자시(子時, 23~1시)에 치르며 전통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때가 되면 천
하에 흩어진 권벌 후손들이 모여들어 대부분 유생 복장을 갖추며 정성껏 제에 임한다. 저 제
삿상을
한번 차리는 것도 참 큰일 중의 큰일일텐데, 아직까지도 옛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니
권벌과 가문에 대한 후손들의 긍지가 참 대단함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