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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봄나들이 ~~~ '

북한산 일선사에서 바라본 서울
▲  일선사에서 바라본 형제봉능선과 서울시내

영취사 5층석탑

형제봉 능선에서 바라본 보현봉

▲  영취사 5층석탑

▲  형제봉능선과 보현봉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을 하루 앞둔 어느 평화로운 봄날, 북한산(삼
각산) 형제봉능선 밑에 깃든 영취사를 찾았다. 영취사는 북한산성 대성문에서 정릉으
로 내려오면서 여러 번 거쳐간 인연이 있는데, 그곳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늙은 5층
석탑이 있다. 허나 그를 제대로 사진에 담은 적이 없어 이렇게 출동한 것이다.

북한산(삼각산) 기점의 하나인 정릉(貞陵) 코스는 어렸을 때부터 익혀온 길이라 이쪽
은 아주 잘 안다고 자부를 했었는데, 시작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 아주 초보적인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날이 초파일 직전이라 절까지 연등이 대롱대롱 달려있기 마련인데,
내가 빠진 길(정릉계곡~신성천약수터 방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만 했을 뿐, '조금만 가면 영취사로 가는 길이 나오겠지' 싶은 안
일한 생각으로 계속 고집을 부리니 신성천약수터와 이상한 능선길이 나온다. 이거 왠
능선인가? 싶어 살펴보니 글쎄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던가. 길을 완전히
잘못 들어선 것이다.
허나 형제봉능선에서 영취사나 정릉계곡으로 바로 빠지는 길은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
정길 외에는 없어 일선사입구까지 강제 등산을 해야 된다. 거기까지는 가야 영취사로
가는 법정 탐방로가 나온다. 하여 일정에도 없던 일선사(해발 560m)까지 강제로 덤으
로 보고 영취사로 내려가 5층석탑을 친견한 다음 정릉으로 원점 회기했다. 간단히 영
취사만 보려고 출동한 것이 잠깐의 실수로 아주 파란만장한 북한산 등산이 되버린 것
이다.


▲  두 암벽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북한산 정릉계곡 하류
(정릉탐방지원센터 서쪽)



 

♠  뜻밖에 인연들, 형제봉능선을 거쳐 일선사까지

▲  정릉계곡 하류에서 형제봉능선으로 인도하는 숲길

정릉 코스는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주요 기점의 하나로 도심과 매우 가깝고 교통
편 또한 착하여 이곳을 이용하는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다. 정릉동 북한산국립공원 종점(
110, 143, 162, 1020, 1113번 종점)에서 4~5분 정도 가면 정릉탐방지원센터가 마중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풍경은 180도 바뀌어 대자연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정릉계곡을 옆에 끼고 5~6분을 더 들어가면 다리 직전에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
면 정릉계곡 상류와 북한산성 보국문, 영취사로  이어지며, 서쪽 길은 형제봉능선으로 빠진다
. 허나 오랜만에 정릉 코스를 찾은 탓일까? 아니면 1살을 먹은 휴유증 때문일까? 판단을 잘못
하여 그만 서쪽 길로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 더 들어가야 영취사로 가는 산길이
나옴)
아무리 아는 길이라도 돌다리를 꼭 두들겨 패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뒷탈이 없는데, 자만 때
문에 뜻하지 않은 강제 고행의 길을 밟게 되었다.


▲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숲길

▲  빨간줄이 그어진 신성천(新盛泉) 약수터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숲이 매우 짙다. 게다가 사람도 별로 없어 고적하기만 하다. 초
파일 연등이 걸려있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길을 임하니 완전히 숲
속에 묻힌 신성천약수터가 마중한다.
내 데이터에는 전혀 없는 곳이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이라도 한 모금 축낼까 했더니 안내문
에 빨간색 줄 2개(부적합 판정)이 매정하게 그어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다. 게다
가 봄가뭄으로 인해 걸려있는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물까지 말라버려 목도 축이지 못하고
바로 길을 재촉했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보현봉(普賢峰)
보현봉 밑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고 봉우리 너머에 북한산성이 숨어 있다.


신성천약수터에서 5~6분 정도 오르면 낯설은 능선길에 이른다. '여기는 도대체 뭔가?' 두리번
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니 뜻밖에도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니던가. 그 길을 20여 분 오
르면 형제봉 밑도리에 이르게 되고 그 북쪽(형제봉3거리)에서 형제봉능선에 합류하게 된다.

형제봉(兄弟峰)은 평창동(平倉洞) 동쪽에 우뚝 솟은 북한산(삼각산) 남쪽 봉우리로 큰 형제봉
463m)과 작은 형제봉(461m)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형제처럼 다정하게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형제봉능선이라 부른다. 이 능선은 종로
구와 성북구(城北區)의 경계선 역할도 하고 있으며, 동서로 조망이 펼쳐져 썩 괜찮은 산길로
추앙을 받는다. 그 조망의 끝판왕은 보현봉 밑에 자리한 일선사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칼바위능선
사진 가운데에 바위가 짙게 깔린 곳이 칼바위로 북한산에서 이름난
바위 능선길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산 밑에 정릉동과 길음동을 비롯하여 성북구, 강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구리시 등이 바라보인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구,
구리 지역


형제봉 능선에서 나의 목적지인 영취사로 가려면 천상 일선사입구까지 가야된다. 중간에 동쪽
으로 내려가는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정 탐방로와 비밀 샛길이 일루 오라며 유혹을 건네나 그
길의 속내를 알 수가 없고 괜히 조금이라도 빨리 가겠다고 금지된 그 길로 발을 들였다가 길
이 더 꼬일 수 있다.

형제봉 능선길은 부드러움과 각박함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각박하다고 하여 그렇게 절망
적인 길은 아니며 이 땅에 흔한 초급 능선길이다. 형제봉 북쪽에서 잠시 내리막길이 이어지다
가 다시 오르막길이 몇 배 이상으로 펼쳐지며,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느긋한 수준이다.


▲  푸른 옷을 두텁게 두른 형제봉(463m)
형제봉 정상은 접근이 가능하다. 허나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고 통과했다.

▲  계단을 이루고 있는 형제봉 북쪽 능선길
능선 북쪽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어서 평창동(동령폭포) 갈림길 이후부터는
길이 괜찮게 닦여져 있다.

▲  숲터널을 이루며 넓게 닦여진 형제봉 북쪽 능선길
숲의 등등한 기세에 뜨거운 햇살도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  일선사 입구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발에 불이 나도록 속도를 내며 오르니 어느덧 일선사입구에 이
르렀다. 여기서 왼쪽 길은 일선사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대성문 방면으로 그 길을 조금 가면
바로 오른쪽에 영취사, 정릉으로 내려가는 정식 탐방로가 있다.
여기서 '일선사를 보고 가는가? 그냥 통과하는가?'를 두고 잠시 갈등을 하였다. 아무리 햇님
의 근무 시간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시간은 벌써 17시가 넘었고, 일선사는 막연히 선학원 소속
의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땡기지가 않았지. 허나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어
찌 생긴 절인지 잠깐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여기서 일선사까지는 200m 거리, 그 산길의 끝에는 일선사가 일품 조망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인공티가 너무 거슬리는 대성문 방면 산길 (일선사입구에서 대성문 방면)
산길의 야성을 순화시키고자 인공티를 너무 과하게 넣은 것 같다. 죽도록 힘든
 구간이 아닌 이상은 흙길로 그냥 두는 것이 진정한 산길이 아닐까 싶다.


▲  일선사입구에서 일선사로 인도하는 산길
오색연등만 따라가면 별탈 없이 일선사에 이른다.



 

♠  서울에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조망이 우수한 절집, 절은 작지만
대도시 서울을 앞뜰로 삼은 ~ 북한산 일선사(一禪寺)


▲  일선사 대웅전(大雄殿)

일선사는 보현봉(普賢峰) 동쪽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사(山寺)이다. 첩첩한 산
주름에 묻힌 진정한 산사로 시내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속이라 제아무리 찰거머리 번뇌라도
감히 따라오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평창동 평창공원지킴터에서도 1시간 이상을 올라
가야 되며 정릉동 종점에서도 비슷한 시간을 내던져야 이를 수 있으니 이곳에 궁벽한 위치를
알만하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일선사는 북쪽과 서쪽은 보현봉으로 막혀있어 가파른 벼랑을 이루
고 있고, 남쪽은 낭떠러지에 가까우며, 오로지 동쪽에 바깥 세상과 이어지는 외줄 산길이 있
다. 절은 위치상 도심이 보이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규모는 비록 작지만 조망(眺望) 하나
는 천하 일품이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자연히 앞뜰로 삼고 있어 뜨락
또한 기가 막히게 넓다.
특히 서울 사찰 중 조망 맛집 1위를 거머쥔 산사로 가까이에 평창동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을 비롯하여 종로구, 중구, 성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송파구, 강남/
서초구, 동작/관악구, 금천구, 영등포구, 마포구, 관악산~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산줄기, 남
한산성까지 아낌없이 시야에 잡힌다. 절과 방향이 다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은평구, 서
대문구, 강서구, 양천구 등을 제외하면 서울의 상당수가 일선사에 몸을 보이는 셈이다.
그럼 조망 맛집 2위 사찰은 어딜까? 그곳은 400m 고지에 자리한 도봉산 원통사(圓通寺)로 도
봉구, 강북구, 노원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아차산 산줄기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조
망 맛집 3위 사찰은 310m 고지에 자리한 호암산 불영암(佛影庵)으로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
구, 광명시, 인천 지역 등이 바라보인다. (1~3위는 그곳을 다녀간 경험을 바탕으로 순위를 매
김)

일선사는 조망도 좋은 만큼 구름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서울 사찰 중 3번째로 하늘과 가
깝다. 제일 하늘과 맞닿은 절은 북한산 문수사(文殊寺)로 해발 640m에 자리해 있지만 조망은
조망 1~3위 절보다는 못하며, 2위는 도봉산 관음암(觀音庵)으로 해발 560~570m 고지이다. 그
다음이 이곳 일선사가 되겠다. 해발고도와 조망 부분에서 가히 서울 사찰 으뜸의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일선사는 언제부터 법등(法燈)을 켰을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일선사는 그저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내 생각과 달리 나이
를 제법 먹은 절이라고 한다. 절에서 들려주는 창건 설화에 따르면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
詵國師)가 보현봉 밑 보현굴(다라니굴)에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니 그것이 일선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관련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그저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
다.
창건 이후 탄연(坦然)이 절을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는 없으며, 태조 이성계(李成桂
)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한양)로 콩 볶듯이 도읍을 옮기자 무학대사(無學大
師)가 보현사를 두고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터로 격하게 띄워주면서 태조의 명으로 중수했다
고 한다.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된 이후, 서울 주변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절(호압사, 개운
사, 사자암 등)이 많이 생겨났는데, 일선사도 그때 지어진 절이 아닐까 짐작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옛날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600년 이후 서울을 지키
는 외곽 수호사찰로 인정되어 왕명으로 중창했다고 하며, 이후로 300년 이상 뚜렷한 발자국이
전하지 않아 조그만 석굴 암자 규모로 터를 유지하거나 얼마 가지 않아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0년에 이르러 절의 화주(化主)인 김만신행이 원래 보현굴 자리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자리에 절을 옮기고 절 이름을 관음사(觀音寺)로 갈았는데, 이를 통해 왜정 때 작게나
마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1957년 시인 고은<高銀, 법명 일초(一超)>)이 이곳에 머물며 절 이름을 도선대사의 '선'. 자
신의 법명인 일초의 '일'을 따서 일선사(一詵寺)로 갈았으며, 1962년 재단법인 선학원의 일원
이 되면서 가운데 한자만 바꾸어 지금의 일선사(一禪寺)가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정덕(幀德)
이 주지로 들어와 30년 동안 불사(佛事)를 일으켜 지금의 일선사를 이룩했다.
그는 1994년에 옛 법당을 밀어버리고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를 새로 짓거나 증축했다. 그리고
많은 탱화와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했으며, 절로 이어지는 길을 정비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고는 하나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산산히 사라져 고색의 유물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망은 가히 일품이라 그것으로 절의 부족한 부분이 많이 커버된다. 특히 대웅전은 어느 절
법당(法堂)에 못지 않은 큰 규모라 내심 놀랬다.
원래 절 자리에는 보현굴(다라니굴)이란 석굴이 있는데, 조선 초에 활약했던 기화함허(己和涵
虛)를 비롯해 많은 승려가 그곳의 신세를 졌다고 한다. 현재 절 자리는 1940년 이후이니 일선
사의 과거를 들추려면 보현굴 주변을 뒤집는 수 밖에는 없다.


▲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상
초파일을 맞이하여 미리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광합성 작용을 받고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 앞이 협
소하여 그나마 조금 트인 측면(동쪽)에 대웅전 현판과 출입문을 내어 좁은 측면을 정면으로
삼고 있는데, 건물 내부에는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석가여래3존상을 위시하여 칠성탱과 중생
들의 소망을 머금은 조그만 원불(願佛)이 가득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칠성탱(七星幀)

▲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약사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하얀 피부의 작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중심으로 풍만하게 생긴 금동관세음보살상,
산신(山神)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등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20세기 후반에 마련된 것으로 보
통 산사에는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등 삼성(三聖)의 보금자리를 따로 두기 마
련이나 일선사는 자리가 협소하여 약사전과 대웅전에 나누어 배치했다.

▲  약사전 약사여래불과 약사후불탱,
관세음보살상

▲  산신 가족의 단란한 가족 사진
산신탱(山神幀)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①
종로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성동구, 송파/강동구 등


요사(寮舍) 동쪽에는 물통과 의자 등이 있는 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이곳은 조망
이 아주 좋은 자리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이 나의 발 밑에 펼쳐져 올망졸
망 펼쳐져 있어 잠시나마 천하의 주인이 된 듯 즐거운 기분이 든다. 이런 것이 바로 산을 타
는 재미의 하나이지. 허나 현실은 저 너른 땅에서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땅은 나의
작은 집 외에는 단 한 뼘도 없다는 것. 그것이 뼈저린 함정이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②
사진 중앙에 보이는 산이 내가 거쳐갔던 형제봉이다. 그 너머 길쭉한 산줄기는
북악산(백악산)이며, 그 너머로 종로구, 중구, 남산, 성북구, 성동구,
강남/서초구, 대모산,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③
형제봉과 북악산을 중심으로 인왕산,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마포구,
강남/서초구, 동작/관악구, 관악산, 호암산이 바라보인다.


일선사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초파일 준비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꽤 부산했다. 낼 중생들
에게 제공할 공양밥과 국을 큰 솥에 미리 만들고 있었는데, 이곳 공양밥 맛이 제법 좋다고 한
다. 초파일 외에 동짓날에는 팥죽을 제공하며, 일요일 점심 시간(12~13시)에도 공양을 제공한
다고 하니 그때 이곳을 지날 일이 있다면 잠시 들려서 한 그릇 들고 가는 것도 좋다.

일선사에서 보현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비법정으로 묶여서 금지된 산길이 되었다. 그래
서 이제는 완전 막다른 곳이 되어 천상 왔던 길로 돌아나가야 된다. 그렇다고 금지된 길을 무
리해서 가지는 말도록.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도 있고, 괜한 모험에 인생을 거는 것
만큼 무모한 것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산6-1 (평창6길 79-141 ☎ 02-379-8697)


▲  일선사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길 (일선사입구 방면)



 

♠  늙은 석탑을 지닌 깊은 산골의 절집, 북한산 영취사(靈鷲寺)

▲  영취사 5층석탑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0호

일선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입구로 내려갔다. 여기서 정릉 방면 산길로 접어들어 원
래 목적지인 영취사로 내려갔는데 그 길이 속세살이만큼이나 제법 각박한 경사였다. 다행히도
내려가는 길이라 덜 힘들지 만약 이 길로 올라왔다면 제대로 땀을 뺐을 것이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고 지나가는 산꾼도 없는 상태라 걸음을 몇 배로 재촉하여
미끄러지듯 10분을 내려가니 인기척 소리가 조금씩 들리면서 숲 사이로 영취사 지붕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듣는 인기척만큼 썩 반가운 것은 없지~! 그렇게 1굽이를 내려가니 영취
사에 이른다. 이 산길은 영취사 경내를 거쳐가기 때문에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절을
경유해야 된다.

경내에 이르니 이곳 역시 초파일 준비로 조금은 부산해 보였다. 사람들이 연등을 달거나 청소
를 하면서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침 18시가 넘은 상태라 밥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올라 나
의 시장기를 자극시킨다. 영취사도 초파일과 동짓날, 그리고 일요일 점심에 산꾼과 중생들에
게 공양밥을 제공한다. 비빔밥 또는 국수를 주고 있는데, 혹여 저녁공양이라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새가슴 마냥 요사 주변을 기웃거려봤지만 결국 먹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공양
1그릇 먹고 가도 되냐고 막 들이밀고 그랬는데 나이를 먹으니 점점 소심해지는 것 같다.

해발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영취사는 '절간답다'는 말이 아주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이
다. 경내 주변이 죄다 숲이라 여기서는 하늘 밖에 보이지 않으며, 남쪽이 확 트여 형제봉능선
에서도 능히 바라보이는 일선사와 달리 숲에 푹 묻혀있어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정도
로 심산유곡이다.
허나 일선사와 달리 등산로가 경내를 지나가 주말, 휴일에는 지나가는 이들이 많다. 등산로가
접한 경내 밑부분에는 쉼터와 5층석탑이 있고, 거기서 1단계 올라가면 요사가 있으며, 다시 1
단계 오르면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  우중층한 대석(臺石) 위에 자리한 영취사 5층석탑

내가 영취사를 간만에 찾은 것은 경내에 서린 늙은 5층석탑을 보고자 함이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 석탑은 울퉁불퉁하게 생긴 커다란 대석 위에 작게 서 있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히고 그 위를 연꽃무늬 석재로 마무리를 했다. 여기서 2중 기단과 5층
탑만 원래 것이고 나머지는 탑의 초라함을 달래고자 20세기 중반 이후에 새로 덧붙인 것들로
탑 자체는 아주 작은 수준이며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작은 석탑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원래 요사 앞에 기단부가 묻힌 상태로 있었다고 전한다. 문병대 박사가 직접 찾아와 그
를 평가하니 무려 고려 후기~조선 초기 석탑으로 밝혀졌다. 마침 서울에 토박이 석탑이 별로
없고 고려 말~조선 초기 탑이 매우 희귀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어 이곳의 듬직한 꿀단지
가 되었다.
이후 탑은 보다 넓은 지금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여러 장의 돌을 높이 쌓아 대석을
다진 다음 조그만 탑을 올려 키를 높였다. 탑의 왜소함을 극복하고자 대석을 쌓았지만 오히려
대석이 너무 지나치게 커서 탑이 더욱 작아 보인다.
기단은 2중으로 밑 기단은 조금 높으나 고된 세월의 상처가 남아있으며, 손상된 부분 사이에
는 잡석을 끼웠다. 윗 기단은 밑 기단에 비해 높이가 약간 낮으며,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
는데, 윗층 옥개석(屋蓋石)과 연꽃무늬 석재는 새로 만든 것이다. 탑신은 1층만 달랑 남아있
고 윗층 탑신은 납작하여 무늬만 남은 실정인데,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으며, 1층 탑신 중앙에 감실(龕室) 같은 것이 뚫려 있어 불상을 봉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은 두툼하나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이 적지 않으며 머리 장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사라졌고 근래 만든 연꽃무늬 석재만 달랑 놓여있다.

기단부와 탑신의 구성법, 간략화된 옥개석 층급(層級) 표현 등을 통해 고려 후기~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토박이 탑으로 가치가 인정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  북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늙은 5층석탑을 지니고 있는 이곳 영취사는 1962년에 신정옥(申貞玉)이 세웠다. 그는 1928년
7월 14일 충남 예산군 신례원에서 독립운동가 신현상(申鉉商)의 딸로 태어났는데, 불명(佛名)
은 대지행(大智行), 호는 초일(草一)로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수양녀(收養女)이기도 했으며,
1947넌에 마곡사(麻谷寺)에서 칩거 수양을 했다.
1972년 영취사 법당을 중건하고 요사를 신축했으며, 계속 절을 살펴주어 경내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의 남편은 강성진으로 삼보증권회장 및 대한증권업협
회장을 지냈으며, 자녀 또한 모두 사회에서 듬직한 지위를 누렸다.


▲  정면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중생들이 갖다놓은 작은 불상과 동자상들이 석탑에 기대어 앉아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고 있다.

▲  5층석탑 앞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5층석탑이 영취사의 유일한 보물이자 듬직한 꿀단지라 그 앞에 관불의식의 현장을 정성스럽게
닦아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초파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꽃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의식
의 현장에 주인공인 아기부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1년 만에 외출을 할 생각에 그도 마음이
너무 설레서 긴장이 된 모양이다. 

▲  영취사 요사 (선방, 공양간)

▲  대웅전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아주 조촐한 모습의 용왕각(龍王閣)

▲  용왕각에 봉안된 용왕탱

5층석탑에서 대웅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오른쪽에는 선방(禪房)과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
을 도맡고 있는 요사가 있고, 왼쪽에는 장난감 집처럼 아주 조그만 용왕각이 있다. 바다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이런 첩첩한 산골에 바다 용왕(龍王)의 거처인 용왕각이라...? 옛날에 이곳
이 바다였을까?
허나 용왕이라고 꼭 바다만 관리하라는 법은 없다. 그는 바다를 비롯해 천하의 모든 물을 관
리하는 존재라 물이 늘 풍족히 나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의 거처를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용왕각 옆에는 샘터가 있으나 물이 거의 없었고, 대신 요사 밑에 따로 샘터를 만들어 물을 제
공하고 있다.

▲  대웅전 - 기존 맞배지붕 건물에
1칸을 덧붙인 구조이다.

▲  삼성각(三聖閣) - 산신과 칠성,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서울
이곳도 결코 낮은 곳은 아니지만 삼삼한 숲의 방해로 겨우 일부만
시야에 들어온다.

▲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경내 (바로 밑 지붕이 요사)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3존상을 이루고 있다. 후불탱이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으며, 그 좌우로 신중탱 등 온갖 탱화들이
대웅전 내부를 환하게 비쳐준다.


경내 높은 곳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건물이 다들 조그만 수준으로 1974년 이후
에 중건을 하여 아직 고색의 때는 익지 못했는데, 대웅전 불단에는 벌써부터 갖다놓은 온갖
공양물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영취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1 (☎ 02-911-0005)


▲  대지행 신정옥 영취사 창건 공덕비
창건주 신정옥을 기리고자 절에서 정성을 다해 지은 공덕비이다.



 

♠  북한산(삼각산) 마무리

▲  한데 뭉쳐진 커다란 바위들 (영취사 남쪽)
바위의 모습이 썩 예사롭지가 않아 보여 예로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절찬리에 쓰였던 듯 싶다.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선들도 멋지고 말이다.


영취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8시 반이 넘었다. 나날이 길어지는 연장 근무에 입이 한참이
나 삐죽 나왔을 햇님 덕에 아직까지 환한 낮을 유지하고 있지만 산속이 도시보다 밤이 일찍
온다. 그래도 그날의 목적을 모두 이루었고, 거기에 일선사라는 강제 보너스도 받았으니 보람
찬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영취사를 뒤로 하고 정릉계곡을 따라 정릉 기점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오로지 내려가기만 하
면 되는지라 힘든 것은 없으며, 영취사에서 조금 내려가면 삼봉사 입구가 나온다. 이곳은 딱
히 끌리는 것이 전혀 없는 현대 사찰이라 그냥 통과했다.


▲  속세로 인도하는 정릉계곡 산길 (삼봉사 입구 부근)

▲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산길 (삼봉사 입구 남쪽)

▲  가늘게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은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  푸른 숲터널을 이루는 정릉계곡 산길

▲  마이산(馬耳山) 탑사 돌탑의 후예일까? 거대한 돌탑의 위엄
이곳을 오간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 하나를 깃들여 돌을 얹혔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세모 모양의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망을 향한
중생들의 집념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려놓은 탑이다.

▲  청수천약수<淸水川藥水, 청수천샘터, 청수약천(淸水藥泉)>

정릉계곡 중류 쯤에 이르면 북한산(삼각산)의 유명 약수의 하나라는 청수천샘터가 마중한다.
샘터의 이름인 '청수'는 정릉계곡의 별칭으로 '청수골','청수계곡'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하류에 있었던 유명한 고급 요리집 청수장(淸水莊)의 이름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청수천샘터는 2개의 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은 계곡 암반에서 나오고, 오른쪽은 바위
밑에서 나온다. 어느 것을 마셔도 상관없으며 그건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나는 물 욕심
이 많아서 양쪽 물을 모두 마셔보았는데 딱히 특별한 맛은 없는 자연의 물맛 그대로이다.
이곳은 물이 풍부하여 물이 마를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관리도 썩 잘되어 있는 편이다. 샘
터 앞에는 의자, 정자 등의 쉼터가 베풀어져 있으며, 샘터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풍경이 바위
와 어우러져 걸쭉한 멋을 자아내고 있다. 계곡 물도 티 하나 없이 맑고 수심도 얕아서 성하(
盛夏)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쿨하게 풍덩하고 싶지만 상수원 보호와 계곡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여기서 계곡 종점(정릉 기점)까지 계속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있으니 괜히 발도 들이지 말기
바라며, 계곡에 정 들어가고 싶다면 청수천샘터 윗쪽으로 가야 된다. 그곳은 해방된 공간이나
계곡 풍경은 다소 별로이다.

▲  청수천약수 왼쪽 샘 (계곡 옆)

▲  보호각을 갖춘 청수천약수 오른쪽 샘


▲  청수천약수 곁을 흐르는 정릉계곡
청수천약수를 빚은 정릉계곡은 청정한 빛을 띄우며 속세로 흘러간다.
여기서부터는 접근이 금지된 계곡이니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자~~!

▲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청수천샘터 옆 계곡 (수심이 1자도 안됨)

▲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는 정릉계곡 산길 (청수천샘터 남쪽)

▲  정릉계곡 하류 산길 (보국문 갈림길 직전)

▲  암반들이 층층이 주름진 정릉계곡 하류
조그만 폭포들이 주름진 바위를 타고 속세로 신나게 흘러간다. 산행을 시작했던
정릉으로 다시 내려오니 시간은 19시. 이렇게 하여 초파일 전날
북한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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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5월 3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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