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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동 경국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동 경국사 '
경국사 숲길
▲  경국사 숲길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찾아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1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절을 대상으로 그날의 메뉴를 물색했
으나 서울에서 미답(未踏)으로 남은 늙은 절은 이제 씨가 마른 상태이다.
그래서 서울 밖으로 나갈까도 했으나 멀리 나가는 것도 귀찮고 해서 가본 절에서 적당한
곳을 골라 재활용하기로 했다. 하여 경국사를 시작으로 여러 오래된 절을 돌기로 했는데,
경국사는 이상하게도 이번을 포함하여 석가탄신일에만 무려 5번이나 인연을 지은 석가탄
신일 인연 사찰로 거의 4년 만에 방문이다.

도봉동(道峰洞) 집에서 정릉동(貞陵洞) 경국사까지는 버스로 40~50분 정도 걸린다. 12시
에 집을 나서 경국사 정류장에 두 발을 내리니 그날 같이 움직이기로 한 친한 후배가 대
기를 하고 있었다. 원래 혼자 석가탄신일 절 투어를 하려고 했으나 그가 그날 쉰다고 새
벽에 연통을 보내서 같이 가게 되었다.

경국사는 석가탄신일 대목이라 정류장부터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정릉천에 걸린 극
락교를 건너니 일주문이 중생 맞이에 여념들이 없고, 절로 인도하는 길 좌우에는 오색영
롱한 연등이 길게 이어져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  경국사 옆을 흐르는 정릉천(貞陵川)
정릉천은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경국사 옆구리를
살짝 지나간다. 그 하천에 무게가 백두산만한 나의 번뇌를 내던지고
경국사 경내로 들어선다.



 

♠  경국사(慶國寺) 입문

▲  경국사 일주문(一柱門)

극락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바로 눈앞에 일주문이 크게 아른거린다. 문이 바로 앞에서
나를 뚫어지라 굽어보니 안그래도 큰 문이 더욱 장대하게 보여 제대로 주눅을 들게 한다. 돌
로 만든 굵직한 기둥에는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새겨져 있어 문의 위엄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지붕 밑에는 '삼각산 경국사'라 쓰인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국사의 싱그러운 보물, 경국사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숲내음이 진동하는 푸른 숲길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경국사의
첫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속세(俗世)에서 오염된 망막에 한줄기 감동을 선사하는 이
숲길은 300년 묵은 소나무까지 100m 정도 곧게 펼쳐져 있는데, 거기서 서쪽으로 꺾여 경내로
이어진다. 숲길의 길바닥은 다행히 콘크리트로 닦지 않고 박석(薄石)을 깔아 숲길의 운치를
전혀 해치지 않았다. (흙길이었으면 더욱 좋았겠지;;)

하늘로 늘씬하게 솟아 하늘과 햇님을 가리고 선 나무들이 저마다의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앞
다투어 갖은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머리와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경국사가 이렇게 경
내를 앞에 두고 숲길을 내민 것은 극락교와 일주문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번뇌와 속세
의 기운을 자연의 힘에 의지해 싹 털고 경내에 임하라는 뜻이다.


▲  정처 없는 내 마음을 제대로 뒤흔든 경국사 숲길
집으로 몰래 가져와 나 혼자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허나 조물주가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하니 사진으로 대신 품으련다. 이 숲길은 봄도 아름답지만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늦가을도 단연 백미(白眉)이다.

▲  300년 묵은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1호

숲길이 서쪽으로 100도 구부러지는 곳에 숲길의 최고 어른인 소나무가 있다. 나이가 무려 300
년이 넘었다는 늙은 나무로 몸매도 매우 준수해 키가 무려 20m를 넘는다. 
하늘을 떠받들며 숲길을 다스리는 이 나무는 매우 지극한 나이임에도 그 흔한 '서울시 보호수
' 등급이 아닌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이 제멋대로 정한 등급이 뭐 그리 중요하냐 싶겠지만 서울에서는 100살이 넘는 나무 중
에 지방기념물 이상의 지위를 얻지 못한 나무들은 상당수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 300살이면 99% 보호수로 지정되고도 남을 연세인데 그에 상응하는 등급을 줘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소나무 그늘에는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다.

소나무 북쪽에는 부도탑(승탑) 2기와 비석(碑石) 3기로 이루어진 너른 공간이 있다. 다들 고
색의 때가 얇은 존재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이들 부도탑은 이
땅의 현대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승려 2명의 사리탑으로 경국사에서도 매우 비중이 큰 인
물들이다. 그러니 한번 더듬고 가길 권한다.
비석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큰 존재가 경국사의 내력을 머금은 사적비(事蹟碑)로 1995년에
지관이 세웠다.


▲  자운대율사 계주원명사리탑(戒珠圓明舍利塔)

네모난 기단 위에 마치 범종(梵鍾)이 그대로 돌로 굳은 듯한 모습의 석종형 승탑은 자운대율
사(慈雲大律師, 1911~1992)의 사리탑으로 탑 이름은 계주원명사리탑이다.

자운대율사는 왜정(倭政) 이후 계율을 무시하고 대놓고 혼인하여 가정을 꾸리고 심지어 고기
까지 처묵처묵하는 등, 불교가 타락의 극치를 보이자 이에 발끈하여 불교 중흥과 율풍(律風)
진작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는 1940년부터 서울 도심에 있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며 율장과 관련 자료를 찾고자 매일
도시락을 싸들며 국립중앙도서관을 들락거렸다. 그래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수록된 오부율
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해 연구했으며, 1948년에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처음으로 보살계(菩薩戒) 수계법회를 열었다.

1949년에는 천화율원 감로계단(千華律院 甘露戒壇)을 설치해 대각사에서 범망경(梵網經), 사
미율의(沙彌律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비구계본(比丘戒本) 등의 간행을 준비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분실하고 만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부산에서 다시 율문(律文)을 준비
하여 한문본(漢文本) 25,000권을 포함해 총 48,000권을 간행하여 불교의 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되어 1991년까지 많은
승려에게 계를 주었으며, 1992년 2월 7일, 해인사(海印寺)의 부속암자인 홍제암(弘濟庵)에서
바쁘게 살아온 삶을 마무리 지었다.
자운이 세상을 뜨자 그와 인연이 있던 경국사에서 그의 승탑을 만들었는데, 2년 동안 공을 들
여 2005년에 완성을 보았다. 승탑은 그의 명성과 업적에 걸맞도록 특별하게 계단형(戒壇形)으
로 만들어 두고두고 그의 업적을 기린다.

자운대율사 사리탑 뒤쪽에 자리한 고운 맵시의 승탑은 보경보현대종사(寶鏡普賢大宗師)의 사
리탑으로 충주 정토사지(淨土寺址)에 있던 고려시대 승탑인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
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승탑 바로 옆에 자리한 보경의 행적비는 1991년 지관이 찬
(撰)을 하고 세운 것으로 그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경은 1916년 이곳 주지가 되어 60여 년 동안 경국사를 꾸린 인물로 교학(敎學)과 선지(禪智
)를 두루 익혔고, 계율에도 무지 철저해 승가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탱화를 잘 그려 화승(畵
僧)으로도 널리 활동을 했는데, 경국사의 탱화 상당수는 그의 손길에서 탄생했다.


▲  펼쳐진 책 모양의 불교대사림(佛敎大辭林) 편찬발원문

불교대사림(불교대사전)은 지관이 오랫동안 추진한 편찬 사업으로 10여 권을 편찬했다. 이 발
원문은 지관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것인데 그 내용에서 그의 지성이 제대로 우러나온다.


▲  경국사 샘터 위에 자리한 조그만 석불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조그만 저들도 과일과 떡, 돈으로 초파일 특수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나보다 저들이 훨씬 돈이 많으니 내가 저 자리에서
석불 흉내를 내며 대신 하고 싶을 정도이다.

▲  공양삼매경에 빠진 경내 앞 (관음성전 공양간 앞)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휘어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숲속에 숨겨진 경국사가 모습을 비춘다. 경내
앞에는 너른 공터가 펼쳐져 있고, 공양 수요를 위해 돗자리가 넉넉히 깔려 있는데, 공양 수요
가 워낙 많아 돗자리는 물론 공터 주변에 앉을 만한 자리는 싹 사람들로 넘쳐난다. 공양은 천
막 뒷쪽 관음성전 밑에 있는 공양간에서 제공하고 있는데, 공양 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금강
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줄도 길고 해서 우선 경국사의 보물을
살펴보고 공양에 임하기로 했다.

공양간 앞 천막에서는 믹스커피와 티백 녹차를 제공하고 있는데 무려 500원씩이나 받는다. 그
외에 연등 만들기 체험, 기와 시주, 불교용품 판매로 짭짤하게 초파일 특수를 누린다. 그럼
여기서 잠시 경국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에 제일 남쪽, 정릉천을 낀 숲속에 둥지를 튼 경국사는 1325년에 자정율사(慈
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이 북한산 청봉(靑峰) 밑에 있어서 절 이름을 청암사(靑岩寺)라 했다고 하며, 1330년에 무
기(無奇)가 이곳에 머물러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치었고, 1331년에 채홍철(蔡洪哲,
1262~1340)이 절을 증축해 승려들의 수행을 도왔다고 한다.
1349년 보우대사<원증국사(圓證國師)>가 이곳에 머물다가 공민왕(恭愍王)이 내린 금란가사(金
襴袈裟)와 주장자(柱杖子)를 받고 국사(國師)가 되었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서서히 망해가다가 결국 중종(中宗) 시절에
완전 망하여 터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545년 왕실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일으켜 세
웠고, 1546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지원으로 크게 중창을 벌였다. 이때 문정왕후에게 잘보이
고자 부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慶國寺)로 이름을 갈았
다고 전한다.

1669년 속세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
인 정릉(貞陵)이 복원되자 근처에 있던 봉국사(奉國寺), 흥천사(興天寺)와 함께 정릉을 지키
는 원찰(願刹)이 되었다. 이때 경국사로 이름을 갈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정릉의 원찰이
되어 망할 일은 없게 된 경국사는 이후 탄탄대로를 누비게 된다.

1698년 연화승성(蓮華昇城)이 절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
각의 다른 이름으로 당시의 상량문이 남아있다. 1737년에는 낙암의눌(洛巖義訥)이 주지로 부
임하여 절을 손질했고, 1793년에는 천봉태흘(天峰泰屹)이 크게 중수했다.
1855년 예봉평신(禮峰平信)이 법당을 다시 세웠고, 1864년 고종(高宗)의 즉위를 축하하는 재
를 열어 왕실에 더욱 굽신거렸다. 그리고 1868년에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회
를 열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범종(梵鍾)을 하사했으며, 1870년에 큰방을 수리했다.

1878년에는 함홍치능(涵弘致能)이 고종의 지원으로 요사를 중수하고,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의 49재를 지냈으며, 1887년에는 석찬(碩讚) 등이 팔상도(八相圖)와 지장시왕
도, 신중도, 현왕도, 감로도 등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1914년 기송석찰(其松錫察)이 극락보전을 다시 세웠고, 1917년에 정릉천에 반야교(般若橋)를
놓았다. 1921년부터는 보경(寶鏡)이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는데, 그는 직접
건물에 단청을 입히고 큰방에 아미타후불탱과 구품탱 등을 그렸으며, 1930년에는 영산전과 산
신각, 큰방을 중수하고, 1936년에는 영산전에 석가모니후불탱과 신중탱, 18나한탱 4폭, 범종
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삼성보전에 약사탱, 칠성탱을 봉안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에 들렸는데, 보경의 인격에 크게 감동을 먹어 참
다운 승가(僧伽)의 모범이 이곳에 있다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경국사의 단
골이 되어 여러 차례 보경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1953년 11월 닉슨 미국 부통령이 서울을
방문하자 이승만이 한국 문화의 참모습이 경국사에 있으니 한번 가자며 그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이때 닉슨은 경국사에서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 방문 일정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히며 경국사를 크게 찬양했다.

보경이 사라진 이후, 현대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지관(智冠)이 주지로 머물며 관음전과 삼성
보전, 영산전, 산신각, 환희당 등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하여 경국사를 반석 위에 올렸다. 또
한 1989년에는 극락보전을 크게 넓혔으며, 1991년에 보경의 행적비를 세웠다. 이후 사적비를
세우고, 삼성보전과 관음성전을 새로 지었으며, 자운의 부도인 계주원명사리탑을 세웠다. 그
지관이 2012년 1월 입적하면서 그의 사리를 공개했는데, 이때 많은 중생이 몰려와 그를 애도
하며 사리를 친견했다.

북한산(삼각산)에 안겨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주택가에 빙 둘러싸인 형태로 다행히 절 주변
이 수목들로 삼삼해 심산유곡의 산사에 파묻힌 기분이다. 또한 정릉천이 바로 앞에 흘러 속세
와 적당히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처럼 포근하고 그윽하기만 하다.

청정한 승가의 본가임을 자처하는 이곳에는 극락보전과 관음성전, 삼성보전, 무우정사, 명부
전, 영산전, 산신각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비롯해 팔상도,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4호
)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괘불도는 관람이 어려움) 그 외에 이곳에서 가
장 늙은 보물인 철조관음보살좌상과 보경이 그린 여러 불화 등이 전한다.
건물들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어 고색의 멋은 별로 없지만 그 속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고색의
기운을 피우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 경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753 (보국문로 113-10 ☎ 02-914-5447)



 

♠  경국사 둘러보기 (관음성전, 극락보전 주변)

▲  관음성전(觀音聖殿)의 뒷모습

공양간 윗쪽에는 육중한 덩치의 관음성전이 자리하여 경내를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그 흔한
관음전(觀音殿)으로 경국사는 유난히 '성(聖)'과 '보(寶)' 돌림을 좋아하는지 그 글자가 첨가
된 건물이 많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은 옛 무량수각(無量壽閣) 자리에 2000년대에 새로 지은 'ㄷ'모
양의 집으로 관세음보살의 거처이다. 건물이 워낙 넓어 서큰방이라 불리기도 하며, 법회와 강
의 장소로 쓰인다. 그리고 바로 밑에 넓게 자리를 파고 공양간을 닦으면서 졸지에 2층집이 되
버렸다.

관음성전 정면에는 불당에서 흔치 않은 툇마루가 있으며, 건물 안에는 목관음보살좌상과 감로
도 등 여러 탱화와 중생들의 돈을 받아 만들어진 무수한 원불(願佛)이 일제히 금빛 물결을 이
루며 내부를 장엄한다. 또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화엄회(華嚴會)','
법화회(法華會)' 현판과 이승만이 남긴 '경국사' 현판이 걸려있다.


▲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8호

관음성전 중심에는 이 건물의 주인장인 관세음보살좌상이 자리해 있다. 어린 동자승이 관세음
보살 누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보관(寶冠)과 복장, 장식물을 슬쩍 착용한 것일까
. 아니면 잠시 관세음보살 체험을 해보는 것일까. 표정이 어린 아이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하다
. 게다가 덩치도 쥐방울만하여 귀여움도 가득 묻어나 나도 모르게 쓱쓱 쓰다듬고 싶다.

이 보살상은 원래 경국사 것이 아니었다. 1703년 전남 영암군 도갑사(道岬寺)에서 조성된 것
으로 도갑사의 부속암자인 견성암(見性庵)에 있었다.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만든 것으로
어찌어찌하여 서울까지 흘러들어왔는데,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덕분에 경국사의 늙은 문화
유산이 하나 더 늘었으니 경국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 그가 경국사에 들어온 이후에는 한
동안 극락보전 불단 우측에 있던 것을 관음성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살상의 높이는 60cm로 그의 뱃속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따르면 색난(色難)을 수조각
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대유(
大裕) 등이 같이 조성했다. 색난은 조선 후기에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불상 전문 승려이다.

앳된 표정이 묻어난 얼굴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눈은
살짝 뜨고 있는 것 같다. 코는 끝이 오똑하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려하면
서도 신라 금관(金冠)처럼 무거워 보이는 보관을 썼는데, 귀 옆까지 관대자락이 내려와 보관
의 수려함을 더욱 드높인다. 그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삐죽 나와있는데, 이마 중간
에는 백호가 찍혀 있으며, 볼살은 두툼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신체는 나름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작은 어깨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목 뒷부분이
약간 접혀있고, 법의의 왼쪽은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
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다. 그리고 법의 오른쪽은 어깨를 덮은 뒤 오른
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런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과 수평 혹은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 후기 불상의 가
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첫째 손가락과 3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고
그의 필수품인 정병(政柄)을 살짝 쥐고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오른쪽 발이
훤히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조선 후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 드러낸 보살상으로 나무로 빚어 도금을 입혔으며, 그의 뒤
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중심이 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한다. 이 후불탱은 1924
년에 보경이 그렸다.


▲  경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1호

관음성전 우측 벽에는 매우 복잡하게 생긴 탱화가 있다. 이 탱화는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염
원하고자 만든 감로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크게 유행한 감로왕도(甘露王
圖)의 하나이다.
그림을 보면 밑부분은 극락왕생을 못해 방황하는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중
간에는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윗쪽에는 극락으로 들어간 영가
의 환희가 담겨져 있다.

무수히 많은 인물의 표현과 생동감있는 자세 연출로 조금의 공백도 허용치 않고 알차게 채우
고 있으며, 서울/경기와 강원도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인 축연과 철유가 상궁(尙宮)들의 시
주로 1887년경에 그린 것으로 왕실의 불화 발원 사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이 비록 대내외적으
로는 불교를 배척했지만 속으로는 적지 않게 불교를 옆구리에 낀 것이다. 특히 19세기부터 20
세기 초까지 상궁은 물론 왕비와 후궁의 시주로 그려진 불화가 서울과 경기도 사찰에 상당히
존재한다.


▲  경국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경국사의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관음성전의 뒷통수
를 바라보고 있다. 관음성전과 더불어 동쪽을 바라보고 선 그는 뜨락보다 한 3m 높은 기단(基
壇) 위에 자리해 있어 자못 웅대해 보이는데,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된 것이며, 한때
는 건물 앞쪽에 1칸 정도 보태어 공간을 넓혔으나 나중에 철거했다.

건물 내에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과 신중도, 팔상도 등의 문화유산이 있는데, 경국사에서 소
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유산 7점 중 3점이 이곳에 깃들여져 있으니 꼭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 보물 748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하 목각탱)과 조그만 아미타3존상이 봉안되어 있
다. 아미타3존상은 근래에 달아놓은 것이지만 그 뒤에 든든히 자리한 목각탱은 경국사에서 특
별히 애지중지하는 보물로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조선 후기 후불목각탱이다.

이 목각탱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을 입힌 것으로 겉으로 보면 꽤 복잡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
면 구조는 단순하다.
목각탱 중앙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두손을 무릎에 댄 이른바 설법인
(說法印)을 취하고 있는데, 앙련(仰蓮)이 새겨진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에 앉아있다. 그
런데 목각탱의 주인공임에도 그를 둘러싼 인물들보다 덩치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풍긴다. 그
래도 그들과 달리 주형광배(舟形光背)를 달아주어 그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고, 광배의 위, 아
래가 비슷한 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양식이다. 또한 광배 안에는 연꽃을 새기고
일정한 너비의 주연(周緣), 밖으로는 화염(火焰) 무늬를 생겼는데, 그 무늬는 위로 솟구치고
있고, 그 안쪽에 조그만 불상이 4구 정도 있다.
 
아미타여래의 옷무늬는 통식(通式)으로 조선시대 양식이며, 그 좌우에는 아미타8대보살을 각
각 4명씩 배치했다. 그들 가운데 지장보살을 제외히고 모두 가지각색의 보관(寶冠)을 쓰고 연
꽃을 들고 있으며, 앙련 위에 앉아있다. 그 밑의 좌우 끝에는 사천왕(四天王)의 하나인 증장
천왕(增長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을 배치해 아미타불의 호위를 부탁했고, 보살들 바깥 좌
우에는 나한상(羅漢像)을 1구씩 두었다.

목각탱의 양식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몇 없는 조선 후기 목
각탱이자 서울에 거의 유일한 늙은 목각탱화로 그 가치는 대단하다. 그런 목각탱을 간직하고
있으니 경국사는 예사로운 절은 아닌 것 같다.


▲  경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3호

극락보전 좌측 벽에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빼곡히 담겨진 신중도가 있다. 이 탱화는 1887년
상궁들의 시주로 혜산 축연(惠山 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과 제
석천(帝釋天), 범천(梵天)이 있고, 그 좌우에 명왕(明王)와 신장(神將)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인도의 토속신으로 범천은 무려 힌두교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 이들을 모두 영입하여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신장으로 꾸몄다. 특이한 것은 산신(山神)과 조왕신(竈王神) 등 우리나
라의 토속신이 위태천(韋太天)의 협시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  경국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2호

신중도 주변에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도가 있다. 이 탱화는 1887년에
상궁들의 시주로 보암 긍법(普庵 亘法)과 금운 순민(錦雲 洵玟), 봉규(奉奎), 종현(宗現) 등
이 그린 것으로 전체적으로 구성이 안정되어 있고 청색 사용을 자제했다.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 화승의 새로운 도상과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곳 팔상도는 다
른 절과 달리 그림 4개를 하나로 하여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 사진의 4폭은 큰 네모 안에
가로가 조금 긴 직사각형을 두고 그 안에 4폭을 담았으며, 아랫 사진의 4폭은 가로가 매우 길
쭉한 것이 특징이다.


▲  삼성보전(三聖寶殿)

극락보전 좌측에는 삼성보전이 자리하여 나란히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원래는 왼쪽 1칸만 삼성보전이고, 오른쪽 2칸은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으
로 쓰였으나 범종(梵鐘)을 내보내면서 3칸 모두 완전한 삼성보전이 되었다.
이곳 삼성보전은 산신과 독성, 칠성의 거처인 삼성각(三聖閣)의 다른 명칭이나 현실은 엉뚱하
게도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칠성(치성광여래)를 협시로 배치한 약사3존
상의 공간이다. 물론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나 산신각과 천태성전을 별도로 두면서
산신과 독성을 그곳으로 빼고 그 빈 자리에 약사여래와 미륵보살을 투입하면서 그렇게 된 것
이다.


▲  하얀 피부의 삼성보전 약사여래상과 약사회탱

달랑 1칸에 비좁게 살았던 약사여래와 미륵보살, 칠성 3형제는 범종을 밀어내고 집을 넓히면
서 각각 1칸씩 공간을 누리게 되었다. 약사회탱, 미륵탱, 칠성탱은 1939년에 보경이 그린 것
으로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온갖 과일과 음식들로 불단이 무너질 지경이다.


▲  삼성보전 미륵보살과 미륵탱
하얀 피부의 조그만 미륵보살 뒤로 보경이 1939년에 조성한 미륵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석가탄신일 행사가 펼쳐지고 있는 극락보전 뜨락
행사 무대 옆에는 아기부처에게 관불(灌佛)을 행하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닦여져
있다. 오색 연등이 무리를 지으며 행사장 허공을 낮게 드리우고 있어
하늘이 움푹 낮아진 기분이다.



 

♠  경국사 명부전, 영산전

▲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뜨락에서 초파일 행사가 열리고 있어 일제히 앞쪽으로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워 극락
보전 뒷쪽으로 해서 명부전으로 넘어갔다.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상과 시왕(
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시왕도와 사자탱, 시왕탱 등
이 걸려있고. 좌측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의 철조관음보살좌상이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0호)

푸른 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나
란히 서 있다. 이들은 보경이 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으로 그들 뒤에 자리한 탱화가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이다.

이 탱화는 1870년에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있는 지장시왕도를 참고하여 혜산 축연(惠山 竺
演)이 그린 것이다. 혜산은 구한말에 강원도와 서울/경기에서 활동했던 화승으로 서울에는 흥
천사와 경국사를 비롯해 그의 불화 20여 점이 전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수화사(首畵師
)로 활동하면서 불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림을 보면 선악동자를 함께 그린 전형적인 지장시왕도 형식으로 유난히 가늘고 긴 눈과 아
주 작은 입 등 얼굴 한 가운데로 몰려있는 이목구비, 좁은 미간, 눈 주위와 코/뺨 부분에 음
영을 표현해 얼굴의 골격을 강조한 점은 다른 지역의 불화와 구별되는 서울,경기 지역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이다.


▲  명부전 우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철조관음보살좌상

지장보살상 좌우에는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시왕)이 각각 5왕씩 앉아있다. 복장은
거의 비슷하지만 손짓이나 얼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서로 다르다. 그들 뒤에는 시왕탱이
있는데, 역시 1왕당 1폭씩 배치하여 총 10폭을 이룬다.

명부전 좌측 벽에는 시커먼 피부를 지닌 철불(鐵佛)이 사람처럼 앉아있다. 여기서는 그를 철
조관음보살좌상이라 부르는데, 파리도 쑥 미끄러질 것 같은 탱탱한 피부와 달리 경내에서 가
장 늙은 존재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11세기 경에 요(遼)나라에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요나라는 옛 조선(고조선)과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자 동이족의 일원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비록 200년도 버티지 못했지만 요서(遼西)와 만주, 화북 지역을 차지하며 크게 위엄을 떨쳤다.
이 보살상이 과연 요의 것인지 이불의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와 조선의 불상, 보살상과
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고 있어 물 건너 온 것은 확실하며, 언제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왔는
지는 그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성인 남자 키 정도 되는데 얼굴은 그냥 무표정에 가까워 보인다. 두 손
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손가락에는 특이하게 반지가 끼여져 있다. 적의(翟衣) 형태의 옷
에는 용과 새, 사자 등이 새겨져 있고 보관에는 모란꽃무늬를 매우 정교하게 나타냈다. 그리
고 정병(政柄)까지 새겨져 있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지나 정병은 근래에 손질한 것
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허나 경국사에서는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관세음보살로 받들고 있어 한때 관
음전에 있기도 했으며,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임에도 많은 것이 아리송한 상태라 아직 지정
문화재 등급을 얻지 못했다.


▲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영산전(靈山殿)

명부전에서 서쪽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 부처와 그의 열성제자인 나한(羅漢)들의 공간, 영산
전이 모습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을 1930년에
보경이 중수했다. 어칸 위에 달린 영산전 현판은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필체가 무척 돋보
인다.


▲  영산전 석가3존상과 석가모니후불탱

현란한 보관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린 석가여래의 표정이
꽤 후덕해 보인다. 이들 3존상은 보경이 만든 것으로 뒤에 있는 석가모니후불탱도 1935년에
그가 그렸다. 분업 정신이 투철한 불교계에서 주지승이 직접 불상과 보살상을 만들고 불화까
지 그리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림과 조형에 능한 보경이 주지로 있으면서 불상을
조성하고 그림까지 그리니 제작 비용은 크게 절약되었을 것이다.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석가3존상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상과 나한탱이 배열되어 있다. 하얀 피부의 나한
상은 좌우에 각각 9개씩 18나한을 이루고 있는데, 16나한은 지겹도록 봤지만 18나한은 생소하
다. 경국사를 찾은 중생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그들 뒤에는 나한탱이 2폭씩, 4폭이 자
리해 있는데, 나한과 동자가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보경이 만든 것으로 왼쪽에 1폭은 1966년에 다시 그렸고, 우측 벽 구석의 신중탱
은 1966년에 제작되었다.


▲  경국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 뒷쪽 언덕에서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산신각은 산신의 공간으로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건물이다.

▲  산신각 산신탱

소나무와 산을 배경으로 한 산신탱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진하게 우러나온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곳에 꿀단지나 아리따운
처자라도 있는 것일까.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 그림은 1980년에 덕문(德文)이 조성
한 것으로 그 앞에 산신의 탈을 쓴 애기 같은 산신상은 근래에 봉안된 것이다.


▲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천태성전(天台聖殿)

산신각, 영산전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천태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건물로 보통은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제일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천태
성전이 그 자리를 누리고 있다. 건물 이름이 좀 낯설긴 하지만 천태(天台)란 이름에서 이미
답은 나왔다. 바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독성의 거처는 독성각(獨聖閣)이란 흔한 이름을 쓰지만 북한산(삼각사) 진관사(津寬寺)의 독
성전(獨聖殿)이나 삼천사(三千寺)의 천태각처럼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하며, 경국사는 그의 거
처를 크게 높여 천태성전이라 부른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담장을 두르고 있어 특별한 이미지를 선사하지만 담장 안에 담긴 천
태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건물이다.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탱은 1980년에 덕문이 조성한 것으로 그 앞에 있는 독성상은
그 이후에 장만했다.

▲  무우정사(無憂精舍)와 3층석탑

종무소에서 해우소(解憂所)로 가다보면 종무소 바로 뒷쪽에 무우정사가 있다. 그 뜨락에는 극
락보전 앞에도 없는 3층석탑이 서 있는데, 그 탑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무우정사가, 탑 좌우로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가 좁은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다소 고급 분위기가 느껴지는 무우정사는 주지승이 거주하는 집으로 가운데 칸이 약간 앞뒤로
삐죽나와 '十' 모양의 구조를 이룬다. 지관이 설계하고 지은 것으로 현관에는 금강반야대(金
剛般若臺)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한 3층석탑은 석가탑(釋迦塔)을 그대로 모
방하여 맵시가 고운데, 경국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왜 법당인 극락보전을 놔두고 이곳에 두었
는지는 모르겠다. (극락보전 뜨락이 조금 좁기는 하지만 무우정사 앞보다는 넓음)
무우정사 일대를 문수원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중생들의 출입을 통제했으나 이때 가
보니 활짝 열려 있었다.

참고로 무우정사의 무우는 무우수(無憂樹)에서 유래된 말로 아수가수(阿輸迦樹)를 한자로 번
역한 이름이다. 부처는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밑에서 태어났고 과거 1불인 비바시불도 이 나
무 아래에서 성도(成道)했다고 하며, 보리수와 더불어 불교에서 꽤 애지중지하는 나무이다.


▲  경국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경국사 경내를 깔끔하게 복습하고 공양간으로 갔다. 보통은 '금강산도 식후경' 원칙을 지키는
편이나 이번에는 초파일 여로(旅路)와 사진기 데이터를 먼저 살찌우고 그 다음에 뱃속을 찌우
기로 했다.
절을 둘러보는 동안 공양밥을 기다리는 줄은 90% 이상 감소하여 줄에 동참한지 3분 만에 밥그
릇을 손에 쥐었다. 이곳 공양밥은 다른 절과 비슷한 비빔밥으로 밥과 콩나물 등의 여러 나물,
고추장이 담겨져 있다. 밥과 함께 오이냉국과 절편이 옵션으로 제공되었는데, 오이냉국은 물
대신 마시면 되고 절편은 후식거리로 먹으면 된다.
이곳 초파일 공양밥은 보통 14~15시까지 제공하나 수요가 너무 많을 경우 일찍 마감된다. 그
러니 가급적 14시 이전까지는 가야 안전하게 공양밥을 받을 수가 있다. (이는 다른 절도 비슷
함)

우리는 돗자리에 앉아 공양밥을 들었는데, 절을 1바퀴 둘러보고 먹는 밥이라 그런지 맛이 좋
았다. 거기에 절편까지 모두 섭취하니 뱃속은 만땅이 되고 졸음이 슬슬 다가와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한다. 커피를 마실까 했으나 믹스커피를 무려 500원에 팔고 있어 바깥에서 캔커피를
사먹기로 하고 졸음의 희롱을 박차며 경국사를 나왔다. 그곳에 머문 시간은 공양시간을 포함
해 1시간 30분 정도.
우리가 나갈 때도 경국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파도처럼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속세로 빠져나가 경내는 크게 혼잡하지는 않았다. (조금 혼잡한 편)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경국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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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5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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