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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 나들이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칼바위)



~~~ 호랑이를 닮은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터, 칼바위)

한우물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암산 한우물

호암산폭포

▲  호암산 한우물

▲  호암산폭포

 



 

천하를 접수한 가을이 늦가을로 점점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호암산
을 찾았다.

호암산(虎巖山, 393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우뚝 솟아 있
다. 서울 금천구(衿川區)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는 그는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의 모습)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좋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옛 금
천<衿川, 시흥(始興)> 고을의 중심 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이라 불
리기도 했다.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함
께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인식되었다. 하여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한양)을 지키고
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
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호암산성과 석구상, 한우물, 제2한우물터, 삼성산성지 등의 늙은 명소
와 호압사, 약수사, 불영암 등의 오래된 절이 깃들여져 있으며, 시흥계곡과 잣나무산림욕
장, 호암산폭포 등의 싱그러운 자연 명소가 있다. 또한 칼바위와 신랑각시바위 등 잘생긴
바위들도 잔뜩 포진해 있으며, 조망도 가히 천하일품이라 서울의 상당수 지역과 안양, 광
명, 부천, 인천, 서해바다, 북한산(삼각산)은 물론 공기가 좋을 때는 멀리 파주와 금지된
땅인 개성(開城) 지역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호암산 정상부와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
러운 능선길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서울둘레길
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을 가로질러 흘러가며, 잣나무 산림욕장을 중심으
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그
러다보니 일찌감치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져들었고,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고 있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석구상, 호암산성(사적 343호)까지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과 광명, 부천, 김포 지역


호암산은 시작이 좀 빡세서 그렇지 잠깐의 고생으로 정상부와 능선까지 오르면 느긋하고 부드
러운 곡선의 산길을 즐길 수 있다. 내가 호암산을 즐겨찾기하며 종종 찾는 이유의 하나도 바
로 그것이다.

정상 동쪽에 자리한 깃대봉(민주동산)에서 남쪽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남쪽
으로 가면 장군봉(412m)과 삼성산으로 이어지고, 서남쪽으로 가면 호암산 서남쪽 능선과 남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장군봉이나 서남쪽 능선이나 길은 거의 부드러운 편이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광명시 지역이 바로 밑에 바라보이고, 광명시의
지붕인 도덕산~가학산 산줄기 너머로 서해바다까지 능히 시야에 잡힌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호암산 북쪽 산줄기와 서울 서남부 지역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안양시와 수리산
호암산과 삼성산, 수리산(修理山) 사이로 극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시(安養市)가
포근히 뉘어져 있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⑤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서울 서남부 지역

▲  호암산 서남쪽 능선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남쪽 봉우리까지는 느긋한 능선길(서남쪽 능선)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
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산길 곳곳에는 이름이 없는 멋드러진 바위
와 벼랑이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
말 꿀맛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북쪽 모습)

호암산 서남쪽 능선을 더듬어 남쪽 봉우리로 올라서면 금줄이 둘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석구상 북쪽으로 서남쪽 능선에서 석구상, 한우물로 이어지는 길목인데, 근래 이곳이 호암산
성 북문(北門)터로 확인되면서 북문터 보존을 위해 금줄을 빙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그
서쪽에 계단식 우회길을 내었다.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들어서면 꼭 거치던 곳이었는데, 그동안 100번 이상 무심히 밟고 지나
갔던 곳이 북문터였다니 새삼 놀라고 말았다.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모습)

호암산 남쪽 봉우리(347m) 정상부에는 호암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산성의 형태
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石城)
으로 조성되었는데, 축성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뒷면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운 내탁법(
內托法)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산성 둘레를 약 1,250m, 남아있는 길이는 300m로 보았으나 2018년 이후 업데이트되
어 산성 둘레는 약 1,547m, 남아있는 것은 약 1,016m, 산성 면적은 133,790m로 확장되었다.

1990년 봄, 호암산성과 한우물 일대를 조사하면서 우물터 2곳과 건물터 4곳이 발견되었고, 무
려 6,500여 점에 이르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이 쏟
아져 나왔는데, 신라 중기 것이 많이 나왔다. 하여 신라 중기인 6세기 말~7세기 초에 군사기
지 및 행정치소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672년에 당나라군의 공격
에 대비하고자 쌓았다는 설도 있다. 그 시절 신라는 옛 고구려(高句麗) 땅인 요동(遼東)과 평
안도를 중심으로 당나라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산성 서쪽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바라보이고, 북쪽으로 한강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잡
힌다. 하여 서해바다와 한강, 내륙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양천고성(陽川古城, 서
울 가양동)과 행주산성(幸州山城), 오두산성(파주시)를 잇는 거점 성곽으로 여겨진다.

고려 때는 한강과 서해바다를 살피는 요충지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그
런데로 밥값을 하였다. 특히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에서 왜군을 때려잡은 권율(權慄)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자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여 서울 수복 작전을 펼쳤다. 호암산은 서울
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
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현재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
성은 관리 소홀과 대자연의 무심한 장난, 덧없는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상당수 녹아내렸고,
산꾼들의 무심한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산성 내에 늙은 존재로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 건물터, 석구상이 있으며, 불영암
이란 작은 절이 있다. 성곽은 동벽이 그나마 잘 남아있고, 북문터 주변과 서문터 주변, 남문
터 주변에 조금씩 남아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석구상 주변에서 북문터, 석수역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능선에
서 남문터, 불영암 남쪽 가파른 곳에서 서문터가 새롭게 확인되어 3개의 성문(城門)이 있었음
을 알려주며, 자연에 묻혀있던 성벽 흔적도 많이 건져내었다. 이들 성문터와 성벽 흔적은 예
전부터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그곳이 산성의 흩어진 흔적이자 살점이었던 것이다.

호암산성은 석구상과 한우물, 제2한우물터, 건물터를 모두 한 덩어리로 묶어서 '서울 호암산
성'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343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호암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8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북문터 남쪽 높은 곳에는 호암산의 오랜 명물인 석구상이 있다. 사방이 난간으로 둘러진 기단
(基壇) 위에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엽게도 앉아있는데, 지금은 석구상으로 통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광화문(光化門)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와 호암산의 기운으로
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
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 7리(縣
南 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석구상으로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석구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
습 같기도 하나 양이나 개구리처럼 보이기도 하여 보면 볼수록 정말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석
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긴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랑지
와 비슷해 손으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보인다. 그는 정
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
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산꾼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올 정도로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작게나마 웃음을 준다.


▲  석구상의 귀여운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  석구상 남쪽 호암산성 동벽

석구상을 지나면 인공티가 팍팍 느껴지는 다소 부풀어오른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호암산성
의 동벽(東壁) 흔적이다. 예전에는 수풀에 감싸여 있었으나 산성을 무수히 깔고 앉던 수풀을
싹 쳐내고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으며, 석구상 바로 남쪽 동벽에는 나무데크길을 씌워 헝클
어진 산성 흔적을 보호한다. 그리고 동벽 서쪽에는 제2한우물과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크고 견고했던 성곽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2m 내외로 움푹 낮아졌고, 산길로 변해버
린 동벽에는 성돌이 이리저리 박혀 단단한 성곽을 이루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숲 그늘에 자리한 호암산성 동벽
고된 세월에 많이 초췌해진 산성 동벽이 그런데로 산성의 모습을
풍기며, 건물터 유적 동쪽까지 이어진다.

▲  호암산성 동벽 (남쪽에서 본 모습)

거의 앉은뱅이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1.5km 구간 중 석구상에서 건물터 유적에 이르는 동벽이
그나마 상태가 좋다. 비록 산성은 헝클어진 상태이나 성곽 밑은 아주 각박한 경사라 성곽 길
을 음미하면서 걸을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안전시설도 전혀 없음)



 

♠  호암산 한우물과 불영암(佛影庵)

▲  윗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호암산 남쪽 봉우리 정상 서쪽에는 불영암과 호암산의 오랜 명물인 한우물이 있다. 여기서 한
우물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정(山頂)에 이런 거대한 우물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
인데, 천하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긴다.
특히 이곳은 물을 대줄 수원(水源)도 마땅치 않다고 하는데, 이런 큰 우물이 1개도 아니고 2
개나 있었음에도 물이 늘 풍부하게 고여 있으며,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하여 그 신비로움을 더
욱 끌어올린다. (지금은 이곳 우물만 있으며, 제2한우물로 살아가는 다른 우물은 터만 남음)

한우물은 다른 말로 천정, 용복, 용초 등이라 불렸으며, 7~8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
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우물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당
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닦았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하면서 12개 기종 1,313점의 유물이 앞을 다투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
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많이 나왔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임진왜란 시절인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하나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군사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우물터(제2한우물터)가 발견되
어 제1한우물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나 현재는 우물 보호를 위해 딱히 손은 대지 않는다. (한우
물로 들어가는 수맥 일부를 불영암에서 쓰고 있음) 우물에 가득 모인 수분은 식수가 아닌 우
물을 채워 연못 분위기를 내는 원초적인 역할이나 할 뿐이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틀고 있어 운치를 자아내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
는다. 그리고 우물 주위로 돌난간과 철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한우물 주변은 천하를 조망하기 아주 좋은 곳이다. 하여 이곳에서는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
구 등 서울 서남부와 경기도 광명, 부천, 인천 지역이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
을 하며, (대기가 좋을 때는 고양, 파주, 개성까지 시야에 들어옴) 우물 주변에는 의자가 여
럿 있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을 굽어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의 깊은 속살
우물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우물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벽산아파트와 시흥동, 독산동 등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호암산 북쪽인 목골산을 비롯해 금천구와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과
한강 너머의 서울 서북부 지역, 북한산(삼각산), 고양, 파주 지역이 시야에 보인다. 그리고
푸른 창공에는 김포공항으로 내려가는 비행기가 하나 떠있다. (호암산은 제주와 부산 등 지
방에서 김포공항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비행기 구경에는 아주 좋음)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자리하여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나
벽산아파트,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띈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오랫동안 승려들의 기도 수행처로 쓰였던 듯 싶으며, 호암산성 서벽에 위치해 있고
조망이 우수하여 산성을 지키며 속세를 살피던 망대의 역할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100년 이
상 묵은 절들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내걸기 마련이나 이곳은 그런 것도 없어서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금의 절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
물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게 불리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어 물수급은 어렵지 않으며,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만큼은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우물과 일품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 절을 세웠
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아
무리 시흥동 벽산아파트가 키다리라고 한들 불영암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조촐한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
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잠시 두어 볼거리를 늘리기도
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
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어 이곳의 새로운 명물을 꿈꾼다.

*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02-809-3754)


▲  불영암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는 조촐한 외부와 달리 꽤 장엄하다.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이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대동하여 3존상을 이루고 있고, 우측 벽에는 여지가 그린
104위 신중탱화가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간단하게 이루어진 불영암 범종각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의 보
금자리이다. 6시와 18시가 되면 잠든 범종을
흔들어 깨우는데, 그 종소리가 호압사와 벽산
아파트단지까지 널리 울려퍼진다.

            ◀  산신각 산신상
대웅전 뒤쪽 벼랑에는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
신각이 달려있다.
불영암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벼랑에
나무로 대를 쌓고 그곳에 1칸짜리 산신각을 닦
았는데, 보통 산신 가족은 산신 할배와 호랑이
, 동자 등이 전부이나 이곳은 특이하게 사슴까
지 겯드려 놓아 그의 구성원을 늘렸다.


▲  세모로 솟은 돌탑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
영암에 알렸다. 하여 불영암에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나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
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그
리고 옆에 놓인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짐)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는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머리만 심은 단출한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머리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을 주나 장대한 세월은 저들을 완전한 하나의 존재
로 만들어 줄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있는데, 그 모습이 마
치 불상에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듯 하며, 석불 머리 옆에는 산신각이 달려있다.


▲  불영암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불영암 경내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광역시가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두 망막을 제대로 흥분시킨다.
한우물과 불영암 구역에서 제일 높은 곳이자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니 한우물에 왔다면 이곳
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덤으로 누리기 바란다. 대웅전 옆에서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바로
산신각이다.



 

♠  호암산 마무리

▲  호암산성 서문터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 방향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호암산성 서문터가 마중을 한다. 호암
산에 오면 거의 이 코스로 내려가는 편이었는데, 예전에는 호암산성이 여기까지 팔을 뻗을 줄
은 생각도 못했고, 여기에 성문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글쎄 여기서
성곽과 성문터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동안 호암산성이 숨겨왔던 속살이 많이 들춰지면서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호암산성 서문터와 돌탑 하나

서문터는 각박한 경사지에 자리해 있고, 좌우로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감히 기웃거릴
수 없는 천험(天險)의 자리이다. 남문은 여기보다 지형이 약간 좋으나 역시 공격에 불리하며,
북문도 능선에 자리하나 적들이 호암산 정상부를 점령하고 치고 들어올 경우 수비가 약간 힘
들 수 있다.


▲  속세를 향해 고개를 내민 칼바위조망대

서문터에서 2~3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쳐도 피가 나
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있어 자
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미련없이 굴러떨어질 것 같은 모습이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는 것보다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
장이라도 속세를 향해 칼질을 벌일 듯한 기세라 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하다.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이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이런 바위에는 옛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인데,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급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 고을까지 쳐들어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무수히 때
려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단단히 쫄은 왜장은 그에게 턱걸이 내기를 해서 이기면 물러가
겠다고 제안을 했는데, 바로 이 칼바위에서 내기를 한 것이다.
자신만만하던 왜군 장사는 턱걸이가 100번째에 이를 무렵, 힘이 다 떨어져서 바위 밑으로 떨
어져 골로 갔는데, 그때 바위의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어쨌든 시흥 고을 장사는 내기
에서 이겼고, 약속을 철석처럼 어기기 일쑤였던 왜군이 의외로 후퇴하여 사라지자 긴장이 풀
린 장사는 인근에 소변을 보았는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한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
갔다고 하며, 그 바위가 옆에 있는 팽이바위라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 때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
도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이 어려운 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 옆에 있는 팽이바위 (고양이 얼굴처럼 보이기도 함)

▲  칼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칼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 남부와 광명시 동부, 가학산~구름산 산줄기, 인천광역시 등

▲  칼바위 조망대에서 지켜본 햇님의 칼퇴근 현장
햇님은 무수한 빛을 뿌리며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천하는
점차 달님의 검은 도화지로 타들어간다.

▲  호암산 산길 (칼바위에서 호암산폭포 방향)

▲  호암산의 새로운 명물, 호암산폭포

칼바위에서 7~8분 정도 내려가면 서울둘레길5코스와 만난다. 여기서 북쪽(호압사입구)으로 조
금 가면 호암산폭포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겉으로 보면 자연산처럼 보여 서울에 이런 실한 폭
포가 있었나? 싶어 감동이 생길 수 있지만 현실은 근래 닦여진 인공폭포이다.

폭포가 있던 곳은 그냥 가파른 산지였으나 2011년 여름에 일어난 산사태로 아주 민망한 모습
이 되었다. 하여 금천구청은 3억원을 투입해 인공폭포로 다져 2012년 8월 11일에 세상에 내놓
았는데, 폭포 높이는 무려 75m, 경사도는 20~70도로 서울에서 가장 큰 폭포가 되었다.
인근 지하수를 소환해 폭포수로 삼았으며, 인공폭포긴 하지만 주변 풍경과 잘 조화를 이루게
최대한 인공미를 배제하여 딱 봐도 인공티가 나지 않게끔 만든 것이 큰 특징이다. 인공폭포란
한계는 있지만 감쪽 같이 자연산처럼 만들어 거부감을 크게 잠재웠으며, 물이 늘 흐르는 것이
아닌 일정 시간에만 잠깐씩 폭포수를 흘려보내 그것이 좀 아쉽다. 폭포 가동 시간은 8시, 9시
, 10시, 12시, 16:30, 17:30분이며, 30분 정도 물을 흘려보내고 닫아버린다. (폭포 가동 시간
은 변경될 수 있으며, 겨울에는 작동하지 않음)

폭포 중간에는 쉼터를 만들어 폭포를 가까이서 느끼도록 했고, 폭포 밑에 서울둘레길이 지나
는 곳에 둑을 쌓고 폭포의 전경을 볼 수 있게 했다. 허나 폭포긴 해도 물줄기가 그리 시원하
진 못하다. 그냥 물이 흐르는구나 여겨질 정도. 그리고 겨울 제국 시절에는 폭포수가 얼어붙
어 거대한 빙폭을 이룬다.


▲  호암산폭포의 전경을 구경할 수 있는 호암산폭포 둑방

▲  벽산5단지 정류장 옆에 있는 호천약수터
호암산에 여러 약수터가 있지만 속세와 가장 가까이 붙은 샘터는 바로 이곳이다.
이곳을 끝으로 가을에 찾아간 호암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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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월 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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