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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 대성사, 성안공 상진 묘역, 우면동 지역(월산대군이정 태실, 형촌 회화나무, 우면동유적, 식유촌 회화나무)



' 서초구 우면산, 우면동 나들이 '

월산대군 이정 태실, 태실비

▲  월산대군 이정 태실, 태실비

대성사 목불좌상 성안공 상진 묘역

▲  대성사 목불좌상

▲  성안공 상진 묘역

 



 

♠  우면산 북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산사, 대성사(大聖寺)

▲  대성사 대웅보전(윗쪽 건물)과 종무소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대성사의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된다. 1층에는 종무소와
극락전, 요사, 선방 등이 들어있고, 윗층에 대웅보전을 두었다.


천하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추석)가 다가왔다. 제아무리 즐겁다는 명절이라고 해도 딱히 정처
(定處)도 없고, 할 일도 없으며, 나를 부르는 곳도 솔직히 없다. 하여 심심함도 달랠 겸, 서
울에 일부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를 몇 개라도 지우고자 서초구 우면산(牛眠山, 293m)으로
출동했다.

서초구(瑞草區)의 남쪽 지붕인 우면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소가 자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나 나는 서울의 북쪽 끝, 도봉동(道峰洞)에
있고 우면산은 한강 남쪽 멀리에 있다. 하여 그의 품을 찾으려면 대중교통으로 적어도 1시간
20분 이상은 가야 된다.
예술의전당 뒤쪽에 자리한 대성사를 그날의 첫 메뉴로 정했는데 그곳은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절이다.

▲  시커먼 피부와 똥배를 드러낸
포대화상의 위엄

▲  우면산이 베푼 물로 가득한
대성사 석조(石槽)


대성사는 우면산 북쪽 자락이자 예술의전당 뒤쪽에 자리한 조그만 산사이다. 절에서 내세우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에 따르면 384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에 불교를 전
하고자 백제의 국도인 한산(위례성)을 찾았다. (마라난타의 불교 전래 부분은 역사 기록에 있
음)

서토(西土,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과 왜열도를 다스리던 해양대국 백제(百濟) 조정의
넉넉한 대접을 받으며 불교 전파에 매진하다가 그만 풍토병에 걸려 고생을 했다고 한다. (또
는 바다를 건너 백제로 오다가 병에 걸렸다고 함)
그러다가 대성사 자리에 있던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고 이에 감동을 먹어 그곳에 대성초당
을 지으니 그것이 대성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절
이자 백제 불교의 시작점에 세워진 절로 의미가 참으로 깊어 보인다.
허나 아쉽게도 관련 유물과 기록은 전혀 없다. 조선 명종(明宗) 시절에 보우대사가 머물며 불
교 중흥을 구상했다는 이야기 외에는 20세기 이전 역사는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
이다. 다만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하나인 승려 백용성(白龍城 1864~1940)이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빨라도 18~19세기에 법등을 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384년 창건설은 대성
사의 부질없는 메아리이자 욕심일 뿐이다.

     ◀  날씬한 모습의 약사여래3층석탑
기단부와 탑신(塔身) 사이에 작게 공간을 내어
조그만 사자상 4기를 배치하고 그 한복판에 약
사여래를 두었다. 그래서 탑 이름도 약사여래3
층석탑이다.

백용성은 이곳에 머물며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기독교 목사
인 길선주(吉善宙), 이필주(李弼柱) 등과 교류하여 종교 화합을 통한 3.1운동 및 민족중흥을
도모했다. 허나 왜정(倭政)은 그를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절에 불을 질렀다. 이후 중창을 했
으나 6.25때 파괴되었으며, 1954년에 다시 지었다. (백용성의 사리탑은 합천 해인사에 있음)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을 비롯해 산신각과 요사채 등 4~5동 정도의 건물
이 있으며 대웅전 밑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요사(寮舍), 납골당 등을 담은 너른 건물을 닦았
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불좌상이 있으나 그 외에 딱히 늙은 존재는
없으며, 경내 앞에 3중으로 이루어진 석조(石槽)가 있어 우면산이 베푼 물로 늘 가득하다.

  ◀  토굴처럼 지어진 산신각(山神閣) 내부
산신각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
들이 들어있다. 호랑이와 동자의 표정이 꽤 익
살스럽고 귀여워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에게
한줄기 웃음을 선사한다.

       ◀  용왕대신(龍王大神)의 거처
산신각 옆에는 작게 굴을 파고 용왕패를 봉안
했다.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는 이곳에 웬 용왕인가
싶겠지만 용왕은 바다뿐만 아니라 강, 샘물 등
천하의 모든 물을 관리한다. 하여 창건설화에
서 샘물을 강하게 내세운 대성사도 샘물의 무
탈함을 빌고자 이렇게 용왕의 보금자리를 마련
한 것이다.


▲  대웅보전에 봉안된 금동석가여래상과 금빛으로 치장된 닫집
석가여래의 표정이 후덕해보여 무슨 소망이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허나 현실은 소망만 듣고 바로 흘려버리는 모르쇠...

▲  대웅보전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초구와 강남구 지역을 비롯해 남산과 멀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까지
시야에 들어와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가성비는 썩 괜찮다.


▲  극락전(납골당)에 봉안된 조그만 목불좌상과 지장보살(왼쪽),
관세음보살상(오른쪽)

▲  대성사 목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2호

대성사의 유일한 보물인 목불좌상은 종무소가 있는 대웅보전 밑층에 있다. 신발을 벗고 안으
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종무소와 강당 등이 있고, 왼쪽에 문이 닫힌 납골당(극락전)이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이 목불은 백용성이 20세기 초(1919년 이전)에 대성사에 주석하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허
나 다른 안내문에는 조선 후기(18~19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나와있어 시대가 약간 차이가 있
다. 아마도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을 백용성이 도금을 입혀 이곳에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며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인 조선 후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높이는 62cm, 어깨 너비 28cm, 무릎 너비 39cm 정도의 작은 불상으로 몸통에 비해 얼굴이 좀
크다. 표정은 좀 우울해 보이며 나발(螺髮) 스타일의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다.
두 눈은 가늘고 코는 오똑하며 붉은 입술은 다물고 있는데 볼에 살이 많아 보인다. 귀는 어깨
까지 늘어져 있고, 몸에 걸친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옷 주름은 간결하게 처리되었다. 두 손
은 가슴 앞에서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어
그가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귀뜀해준다. 하여 그의 공간을 극락전(極樂殿)이라 하였다.


▲  목불좌상이 있는 극락전(납골당) 내부
극락전의 낮은 허공에는 납골당에 걸맞게 죽은 영가(靈駕)를 위한 하얀 연등이
빼곡히 들어차 다소 오싹하고 우울한 기분을 준다.


그의 좌우에는 근래 지어진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과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이 앉아
있다. 이들은 중심 불상(목불)보다 훨씬 덩치가 크나 어디까지나 그의 협시(夾侍) 보살에 지
나지 않는다. 그들은 목불과 함께 대웅보전에 있기도 했으나 지금은 극락전에서 영가들을 지
키고 그들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

* 대성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산141-7 (남부순환로328길49 ☎ 02-583-1475)
* 대성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성사 샘터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멀리 도봉산까지 보임)



 

♠  고등학교 안에 자리한 조선 중기 사대부 묘역
성안공 상진(成安公 尙震)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0호


▲  서쪽에서 바라본 성안공 상진 묘역 (앞쪽이 상진 부부묘)

대성사를 나와서 근처에 있는 성안공 상진 묘역을 찾았다. 이곳은 상진의 3대가 묻힌 사대부
묘역으로 특이하게도 상문고등학교 교내에 들어있다. 즉 학교 안에 늙은 무덤들이 시퍼렇게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후손인 목천상씨 문중에서 조상들의 묘역도 지키고 교육
사업도 벌이고자 무덤 옆에 학교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1969년 학교법인 상문학원을 세워 1970년 1월 상문중학교를 설립했으며, 1972년 상문
고등학교를 설립해 중/고교를 같이 운영하다가 1975년 중학교를 정리하고 고등학교만 운영하
고 있다. (학교 이사장을 상씨들이 맡고 있음) 그래서 천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옛 무덤을 간
직한 고등학교가 되었다.

소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교내 북쪽 언덕에 묘
역과 신도비가 있는데 교문을 들어서면 약간
오른쪽 방향으로 그 언덕이 보여 찾기는 매우
쉽다.
묘역은 속세에 공개되어 있는데, 평일과 수업
을 하는 토요일에는 관람이 제한될 수 있으니
수업이 없는 일요일과 휴일에 찾는 것을 권한
다.

◀  상진 신도비를 머금은 비각(碑閣)


▲  성안공 상진 신도비(神道碑)

묘역 북쪽 밑에는 상진의 신도비가 비각 안에 소중히 감싸여 있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
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쓰기 마련이나 이곳은 묘역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지형상 동북
쪽에 비석을 두었다.

비석은 꽃무늬가 새겨진 비좌(碑座)와 상진의 생애와 품성이 정리된 비신(碑身), 지붕돌로 이
루어져 있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비좌와 지붕돌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총 높이 362cm, 비
신 높이 220cm, 너비 106cm, 두께 36cm이다. 1566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손자 손시손
의 부탁을 받은 홍섬(洪暹)이 지었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썼던 여성군(礪城君) 송인(
宋寅)이 썼으며, '成安公 神道碑銘'이란 두전(頭篆)은 상진의 2째 사위인 예문관검열 이제신(
李濟臣)이 썼다.
비각은 원래 없었으나 비석의 건강을 위해 근래 씌웠으며 지금은 신도비를 포함한 묘역 전체
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처음에는 신도비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묘역 (앞에서부터 상시손, 상붕남, 상진 묘)

상진 묘역은 상진 부부와 그의 아들 내외, 손자 내외 등 3쌍 6기로 이루어져 있다. 다들 묘표
(墓表)와 상석(床石), 혼유석(魂遊石), 문인석(文人石), 장명등(長明燈) 등을 갖추고 있어 16
세기 사대부의 무덤 양식을 흔쾌히 보여주고 있다.

묘역의 주인공인 상진(1493~1564)은 자가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과 향일당(嚮日堂), 범
허재(泛虛齋)로 아버지는 찰방(察訪)을 지냈던 상보(尙甫)이고, 어머니는 연안김씨(延安金氏)
로 박사(博士)를 지낸 김휘(金徽)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부여 임천 지역의 큰 부자로 증조부인 상영부(尙英孚)는 이자놀이로 크게 배를
불렸다. 허나 말년에 부질없음을 깨닫고 차용증서를 모두 불태워 지역 사람들에게 크게 칭송
을 받았는데, 이후 상진의 벼슬이 높아지자 주위에서 증조부의 선행 덕분이라고 칭송을 했다.

일찍 부모를 잃어 8살 때부터 큰 누님집에서 살았는데 누님의 남편은 하산군(夏山君) 성몽정(
成夢井)이다. 공부와 완전히 담을 쌓으며 말타기와 활쏘기 등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친구
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모도 없는 아이라서 공부도 안한다!!'는 식으로 개무시를 당하자 너
무 열받은 나머지 15세에 늦깎이 공부를 하여 겨우 10개월 만에 글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1516년에 생원시(生員試)에 붙었고, 1519년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예문관검
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이어서 봉교(奉敎), 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특
진되었다.
1528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는데, 당시 영경전(永慶殿)에서 거행된 세자의 친제(親
祭)에 병으로 불참했다가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이후 재기용되어 장령과 홍문관교리(弘文館
校理) 등을 역임했으며, 지방 관리의 탐학을 제거할 것과 농촌 진흥책을 건의했다.
1533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이어서 부제학(副提學),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면서 언
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형조참판(刑曹參判)과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다.

1539년 중종(中宗)의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는데 전
례가 없는 특진이라며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체직(遞職)되
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  묘역 위쪽에 자리한 상진과 전주이씨 부부묘
상진 부부묘는 봉분 밑도리에 특별히 호석(護石)까지 둘렀다.
(상붕남, 상시손 묘에는 호석이 없음)


1543년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고, 154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병조판서(兵曹判書
)가 되었다. 중종의 신임으로 우찬성(右贊成)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지돈녕부사(知
敦寧府事)에 체직되었으며, 얼마 뒤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윤원로(尹元老)와 결탁한 전력으로
인종(仁宗) 즉위와 함께 경상도관찰사로 떨려났다.

1545년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잡자, 그의 천거와 문정왕후(文定王后
)의 후원으로 병조판서에 중용되었으며, 마정(馬政)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실시에 노력했다.
1548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우찬성이 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임했으며, 1549년에 이기와
윤원형(尹元衡)의 추천으로 이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부터 이기, 심연원(沈連源) 등과 국정을 주관했는데, 문정왕후가 주장한 양종(兩宗) 설립
에 온건론을 펴서 유생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해 민원을 살폈으며, 1551년 좌의정(左議政)에, 1558년에 영의
정(領議政)이 되어 5년 동안 국정을 이끌었다. 이때 황해도 평산에서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했으며, 사림(士林) 패거리들을 적극 등용하기도 했다.
이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
았다. 그리고 1564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니 명종은 성안(成安)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그
를 위해 도노덕대신(悼老德大臣)이란 시를 짓게 했다.

▲  상진 묘역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고된 세월에도 표정과 하얀 피부는
여전하니 그 비결이 궁금하다.

▲  상진 묘역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그들 뒤로 보이는 기와집에 상진 신도비가
들어있다.


그는 매우 청렴하여 주로 오두막살이를 했는데 윤원형이 사람을 보내 먹을 것이 풍족한지 염
탐케 했다. 마침 하인이 맷돌에 통밀을 갈고 있어서 물어보니
'우리 나리는 죽으로 저녁을 때웁니다'고 했다. 또한 집에 도둑이 침투하자 그를 잡았는데 관
청에 넘기지 않고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남의 물건에 손 대지 말고 나를 찾아오시오' 타이르며 물건을 쥐
어 보냈다.

상진은 성품이 넉넉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남의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16년 동안 정
승을 지내면서 세운 업적은 그 시절 황희(黃喜), 허조(許稠) 다음 수준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가 살았던 남대문로3가(남창동) 일대를 상정승골, 상동(尙
洞)이라 불렀으며, 영조 임금도 이곳을 지나갈 때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전한다.

그는 그의 자식들에게 너무 과거 급제와 출세
에 매진하지 말라며 이런 걸쭉한 말을 남겼다.
(연려실기술에 실려있음)

'세상에는 과거에 낙제하고 상심하는 사람이
있다. 허나 어찌 대장부가 시험관 한 사람의
눈으로 결정한 것을 두고 걱정하고 즐거워하
겠는가. 이런 연연함의 폐단이 차츰 벼슬도
잃을까 근심하는데까지 이른다. 하지만 그릇
이 이 정도에 머물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타서 검은
피부가 되버린 상진 묘표(묘비)

  ◀  상붕남(尙鵬南)과 전주이씨 부부 묘표
상붕남(1511~1542)은 상진의 아들이다. 유우(
柳藕)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경사(經史)에
밝고 예서(隷書)에 능했으며 음보(蔭補)로 관
직에 등용되어 판결사(判決事)까지 지냈다.
허나 벼슬에 별로 뜻이 없어 시서(詩書)로 일
생을 살았다고 전한다.

   ◀  상시손(尙蓍孫)과 청송심씨 부부묘
상시손(1537~1599)은 상진의 손자이자 상붕남
의 아들이다.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을 지냈으며 죽은 이
후 정3품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조선 10현상(賢相)의 하나로 격하게 추앙을 받
던 상진이었으나 그의 아들과 손자는 눈에도
거의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수준이었다.

   ◀  상시손 묘 망주석과 검게 탄 동자석
상진과 상붕남묘에는 문인석을 두었으나 상시
손묘에는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작은
동자석이 그 자리를 대신해 잘나갔던 집안의
무덤치고는 소박한 모습을 보인다.
상시손이 크게 벼슬을 하지 못한 탓도 있으나
상진이 벼슬에 너무 연연치 말고 청렴하게 살
것을 후손에게 부탁했으므로 그 영향도 있다.

* 성안공 상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1002 (명달로 45)



 

♠  우면동의 여러 명소들

▲  월산대군 태실을 품은 태봉(태봉근린공원)

우면산 동남쪽에는 서초구의 일원인 우면동(牛眠洞)이 자리해 있다. 서초구의 서남쪽 끝이자
경기도 과천시와 살을 맞대고 있는 변두리로 우면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는데, 형촌과 식
유촌, 송동, 성촌 등 1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시골이었으나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주택과 아파트들이 마구 들어섰다. 비록 적지 않게 성형은 되었으나 우면산 자락에 자
리해 있고 녹지가 많아서 전원 분위기는 조금 남아있다.

우면동 한복판에는 태봉이란 조그만 언덕이 있다. 우면지구를 개발하면서 언덕 주변을 손질하
여 태봉근린공원(이하 태봉공원)으로 삼았는데, 그 언덕 정상에 태봉의 주인인 월산대군 태실
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  월산대군 태실로 인도하는 숲길 - 수풀의 패기가 가히 천하를 찌른다.

태실로 가는 산길은 수풀이 살벌하게 우거져서 그렇지 경사는 거의 느긋하다. 숲으로 들어서
니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 공기부터가 다르며, 강렬한 햇살도 숲의 기운에 눌려 옆으로 비켜
간다. 공원에서 3분 정도 오르면 그 산길의 끝에 태실이 모습을 비춘다.


▲  월산대군 이정(月山大君 李婷) 태실 - 서울 지방기념물 30호

태봉 정상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월산대군 태실은 태실비(胎室碑)와 석함(石函) 1기로 이루어
져 있다.
태실(胎室)이란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탯줄을 버리지 않고 태항아리에 넣어 특별
히 엄선된 명당(明堂) 자리에 봉안한다. 조선의 군주는 총 27명, 그들의 아들, 딸까지 합치면
수백 명이 넘으니 태실도 그만큼 조성되었을 것이다. 허나 정작 서울 토박이 태실은 월산대군
태실이 유일하다.

태실비는 난쟁이 반바지를 2번 접은 정도의 매우 작은 크기로 비신(碑身)과 비석 받침이 하나
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 앞면에는 '월산군정태실(月山君婷胎室)'이라 쓰여있어 태실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으며, 뒷쪽에는 '천순6년 5월18일 입석(天順六年五月十八日 立石)'이라 쓰
여있어 1462년 5월에 세웠음을 속삭이고 있다.
태항아리를 머금던 석함은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데, 안에 담긴 태항아리와 지석(誌石)은 왜정
때 싹 털려 지금은 왜열도 아타카(安宅) 콜렉션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그 항아리가 희소가치
가 대단했던지 왜열도의 어느 미술잡지에 세상에 딱 2개 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소개되기
도 했다. <항아리의 출처도 나와있음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현 우면동)'>

서울 유일의 태실이자 제자리에 원형대로 남은 태실이고, 조선 왕실의 안태(安胎) 의식이 담
긴 현장으로 2010년에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럼 월산대군은 누구일까?

월산의 이름은 이정,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다. 1454년 세조(世祖)의 맏아
들로 일찍 죽은 덕종(德宗, 추존된 묘호)과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성종의 친형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할아버지인 세조의 귀여움을 받으며 궁궐에서 자랐다. 1460년 월산군(
月山君)에 봉해졌고, 1468년 동생인 잘산군(乽山君)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가 되었다.
1469년 작은아버지인 예종(睿宗)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 1순위로 지목되었으나 한명회(韓明澮
)와 소혜왕후의 뜻으로 동생인 잘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성종이다. 성종은 형을 달래고자
1471년 월산대군으로 급을 올렸으며, 그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하여 전지(田地
)와 노비, 구사(丘史) 등을 넉넉히 주는 등 성의를 보였으나,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좌리공신
이나 받아야 되는 자신의 처지에 열불이 나 자연으로 뛰쳐나가고 만다.

월산은 양화도(楊花渡, 양화대교 주변) 북쪽 언덕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을 수리해 망원정(望
遠亭)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살림을 차려 매일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팔자 좋은 삶을
누렸다.
그러다가 어머니(소혜왕후)가 병에 걸리자 입궐하여 극진히 간병을 했는데 너무 무리를 했는
지 그만 1488년,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은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中善)의 딸로 소생은 없었으며, 첩을 통해 아들 2명을
얻었다. 또한 1473년까지 집에 별묘(別廟)를 세워 아버지 덕종의 제사를 주도했으나 덕종이
종묘(宗廟)에 봉안되면서 그의 위치는 종실의 일부로 떨어지게 된다.

월산은 학문을 좋아해 왕족을 위한 종학(宗學)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경사자집(經史子集)
을 두루 섭렵했다. 성품은 침착 결백했고, 술과 산수를 좋아했으며 부드럽고 율격(律格)이 높
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속동문선(續東文選)에 그의 시가 여럿 실려 그의 시심(詩心)을 보여
주며, 저서는 풍월정집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월산의 저택은 지금의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자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망친 선
조(宣祖)와 신하들은 1593년 2월 서울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모두 파괴된 상태라 머물 곳이 여
의치 않았다. 이에 선조는 크게 발작을 하며 거처를 찾으라고 다그쳤는데 다행히 월산의 저택
이 멀쩡하게 살아있어 그곳을 임시 궁궐로 삼고, 주변 집을 몰수해 궁역(宮域)에 넣었다. 그
것이 바로 덕수궁<경운궁(慶運宮)>의 시작이었다. 이후 궁궐을 보수하면서 월산의 집은 철거
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을 메운 건물은 모두 고종(高宗) 때 지어진 것이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  서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석함에 담겼을 그 귀한 알맹이는 언제나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안그래도 작은 태실, 알
맹이까지 강제로 털렸으니 태실의 우울한 그늘은 언제나 거두어질지 모르겠다.

* 월산대군 이정 태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91-1


▲  형촌마을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28호

태봉 북쪽에는 형촌(荊村)마을이 자리해 있다. 1740년대에 풍양조씨가 들어와 터를 닦은 마을
로 당시 이곳에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가시내꿀(또는 샛말)이라 불렀는데, 그것을 한자로 표시
해 형촌마을이 된 것이다.
풍양조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현대까지 이어오다가 1963년 경기도 시흥군(始興郡)에서 서울
로 편입되었으며, 강남 개발 이후 마을 개량 사업을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개량 사업으로 인해
주민 절반 이상이 마을을 떠났고 그 틈을 타 외지인들이 대거 들어왔다. 하여 토박이 주민의
평범한 주택과 졸부들의 현기증 나는 저택과 빌라가 공존하는 어색한 현장이 되었다.

형촌에는 수백 년 묵은 보호수 2그루(회화나무와 돌배나무)와 석불, 성정승묘, 우면산 자연생
태공원 등의 명소가 있는데,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회화나무는 약 230년 묵은 나무로 높이 12
m, 둘레 280cm이다. 골목길 중앙에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주택들이 바짝 붙어 있어 나무의
생육 공간은 넉넉치 못하다. 마을의 오랜 내력을 알려주는 존재라 예우 차원에서 나무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 마음 편히 살게끔 해주는 것이 마땅하나 사람들의 욕심이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하여 골목길 중앙과 집들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나무와 사람, 차량 서로가
불편하게 되었다.


▲  회화나무 그늘에 깃든 우면동 석불 (동자상미륵)

회화나무 북쪽 그늘에는 조그만 석불이 우두커니 서 있다. 이곳에선 마을을 지키는 신령한 힘
을 지닌 동자상 미륵 또는 미륵불(彌勒佛)로 여기며 신성시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그에게 제를
올렸다.
허나 토박이 주민들이 많이 빠져나갔고 우면동의 오랜 무형자산인 우면두레도 희미해진 상태
라 그에 대한 숭상심도 많이 떨어져 나무의 밑도리나 뚫어지라 바라보며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맞아야 되는 우울한 신세가 되었다. 만약 그에 대한 숭상이 여전했다면 그를 위한 집을 세우
던지 무슨 배려를 했을 터인데 그런 것은 없다. 그러니 석불은 마냥 나무에 의존하고 있다.

석불의 높이는 1m 정도로 그나마 밑도리는 땅 속에 묻혀있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
르겠으나 나무 밑도리를 바라보게 배치한 것도 이상하며 밑도리도 모두 끄집어내 온전한 모습
으로 세상 앞에 섰으면 좋겠는데, 마을 사람들이나 서초구청, 서울시에서 그런 의지까지는 없
는 모양이다.
그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얼마나 울었길래 얼굴이 죄다 지워진 것일
까? 그저 얼굴과 귀의 윤곽만 확인이 가능하다. 머리에는 돌갓을 쓰고 있는데 고려와 조선의
많은 미륵불들이 돌갓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불로 조성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성시기는 조선 너머까지는 갈 것 같지는 않고 형촌마을이 형성된 1740년대 이후 마을 수호
신으로 세웠을 가능성도 있으나 얼굴이 저 지경이 된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불우한 시간을
보내며 방치되어 있던 것을 이곳으로 가져와 마을 수호신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설
마 마을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못된 짓을 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돌갓을 쓰고 있으니 자연의
괴롭힘의 의한 얼굴 훼손도 적을 것이다.

그가 동자상미륵이 된 것은 키가 어린이처럼 작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동네 미륵
불로 서울시에서는 그에 대한 조사를 벌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씌워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의 어두운 얼굴도 조금은 밝아지지 않을까?

* 형촌 회화나무, 석불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18-4


▲  망루근린공원 정상에 자리한 정자 쉼터

형촌마을에서 형촌천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를 타고 바깥으로 나오니 서초네이처힐2단지 서쪽
에 자리한 망루근린공원(이하 망루공원)이 마중을 한다. 처음에는 이 땅에 흔한 근린공원으로
여겨 넘어가려고 했으나 공원 안내도를 보니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겉보기와 달
리 이곳에는 구석기시대부터 근대까지 여러 시대를 초월한 유적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은 우면동 유적이라 불리는데, 망루공원을 중심으로 태봉 주변과 서초네이처힐단지
에 분포되어 있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2008년 이후 우면지구와 우면산터널 도로를
닦는 과정에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2010년까지 발굴조사를 거치면서 수백 점의 유물
이 쏟아져 나왔으며, 발굴이 끝나자 유적이 집중적으로 나온 서초네이처힐2단지 서쪽을 공원
으로 꾸며 망루공원으로 삼았다.
허나 유적은 모두 흙과 수풀로 덮었고, 그 위에 조그만 표지를 세운 것이 전부라 이곳이 유적
지란 기분이 거의 나질 않는다. 일부 유적에 한해 속살을 드러내고 유리 보호막을 설치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 부분이 참 아쉽다. 게다가 망루공원 외에 유적은 아파트와 도로로 죄다 밀어
버려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땅의 개발의 칼질은 참으로 천박하기 그지 없어 옛 유적이고 사람이고 죄다 갈아버리는 못
된 습성이 있는데 우면동 유적은 그나마 2년 동안 발굴조사라도 했고, 일부는 공원이 되면서
그런데로 살아남아 다행이다.

이곳 유적은 구석시시대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난 문화층부터 신석기시대 야외 화덕 자리, 백
제와 신라의 마을 유적과 무덤 흔적, 신라 후기부터 고려까지 이용되었던 논과 물길의 흔적,
조선시대 구들과 무덤, 기와가마터, 근대 수레길 등이 확인되었다. 구석기 문화층은 태봉 남
쪽과 동쪽에서 나왔는데, 긁개와 밀개, 여러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이곳이 발견됨으로써 서울
의 구석기 유적은 면목동(面牧洞) 유적과 함께 2개가 되었으나 아쉽게도 둘 다 개발의 칼질로
사라졌다.
백제시대 마을 유적은 망루공원 일대에서 11동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4호 집자리가
이들 마을 유적의 중심부이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시루, 병, 굽다리 접시, 뚜껑, 장군, 납작
밑단지 등의 토기가 나왔고, 도끼, 끌, 손칼, 화살촉, 창의 물미 등의 철제품과 가락바퀴, 소
형 절구 등의 석물도 나와 당시 생활상을 알려준다. 특히 재가 나온 집터가 많아 화재로 소실
되었음을 알려주는데 아마도 백제와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서 파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백제와 신라의 무덤도 여럿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집자리 유적과 같은 언덕에서 발견되
었다. 무덤은 마을이 사라진 이후 들어선 것으로 백제의 무덤은 2기가 나왔는데 모두 굴방무
덤이다.
백제 1호분은 네모진 돌방과 다른 돌방으로 연결되는 널길이 덧대어진 모양으로 돌방은 길이
330cm, 너비 336cm이다. 이들 묘는 귀족이나 지방 세력의 묘로 여겨지는데, 돌방 바깥 위쪽에
는 눈썹 모양의 도랑이 둘러져 있으며, 살포와 도끼낫, 창의 물미를 비롯한 여러 철제 유물과
관못, 꺽쇠 등도 나와 목관(木棺)을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신라의 무덤은 신라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것들로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주류를 이룬다. 여
기서는 굽다리사발과 둥근밑항아리, 손칼 등이 발견되었다.


▲  백제시대 집터 1호 자리

망루공원 정상에는 조촐한 정자 쉼터가 있다. 그 안에는 여기서 발견된 삼국시대 마을 유적과
무덤 유적에 대한 설명문, 유적과 출토유물 사진이 걸려있어 이곳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도와준다. 정자 주변에는 집터와 고분이 발견된 자리에 조그만 표시를 설치했는데, 유적은 모
두 흙과 수풀로 덮어버렸다.

구석기부터 근대까지 수천 년의 흔적이 복합적으로 담긴 이 땅에서 흔치 않은 유적으로 국가
사적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부여하여 어엿한 사적(史蹟)공원으로 꾸몄으면 좋겠다.
그냥 이렇게 조그만 동네 공원의 일부로 썩히기에는 장대한 세월을 이어져 내려온 그들 유적
이 너무 아깝다.

▲  삼국시대 석실묘 6호 자리

▲  백제시대 집터 5호 자리

▲  백제시대 집터 4호(왼쪽)와
6호(오른쪽) 자리

▲  삼국시대 석실묘(石室墓) 1호 자리

▲  시대가 아리송한 석곽묘 1호 자리

▲  시대가 아리송한 석곽묘 2호 자리


▲  식유촌(植柳村)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5호

우면동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망루공원을 보너스로 둘러보고 과천 방향 47번 국도(중앙로
)를 따라 식유촌으로 이동했다.
식유촌은 우면동의 서쪽 끝이자 서초구의 서남쪽 끝에 자리한 시골마을로 경기도 과천시가 바
로 코앞이다. 마을 이름은 버드나무를 심는다는 뜻으로 우마니(우면동의 옛 이름) 마을 근처
인 이곳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허나 마을 이름과 달리 버드나무는 없
다 싶이 하여 그 이름은 무색해졌다. (종종 이름을 혼돈하여 석유촌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음)
 
식유촌에는 마을의 장대한 내력을 알려주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다. 그는 약 360년 묵은 나무
로 높이 18m, 둘레 3.8m에 이르며 예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존재로 1945년에 나무에서 구렁이
4마리가 튀어나와 사방으로 사라졌다고 하며, 이내 해방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식유촌 회화나무를 끝으로 우면산, 우면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식유촌 회화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5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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