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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동 백련산 백련사



'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백련산 백련사 '
백련사 약사전
▲  연분홍 연등이 하늘을 훔친 백련사 약사전 앞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왔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석가탄신일 앓이가 좀 심한 편이라 그날에 대한 기대감이 큰 편이다.
하여 심쿵(심장이 쿵쿵)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적당한 절을 물색했으
나 서울에서 미답(未踏)의 고찰(古刹)은 이제 씨가 마른 상태이다. 그래서 이미 인연을
지었던 절 중에 아직 사진에 담지 않은 곳을 골라 영화사(永華寺)와 백련사 등 여러 절
을 그날의 메뉴로 정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오전 11시, 기분 좋게 집을 나서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영화
사(☞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비빔밥 스타일의 공양밥을 배불리 섭취한 다음, 홍은동
(弘恩洞) 백련사로 넘어갔다.
영화사에서 백련사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홍제역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0번(백련사↔홍제역)으로 환승하여 백련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  정토도량 백련사(白蓮寺) 입문

▲  백련사 일주문(一柱門)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에서 2분 정도 가면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1999년에 짓
기 시작해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본 것으로 일주문의 규모는 서울 사찰 가운데 거의 3위 안에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현판에는 '삼각산정토백련사(三角山淨土白蓮寺)'라 쓰여 있어 이곳의 정체를 널리 알리고 있
는데, 엄연히 백련산(白蓮山) 자락에 있지만 조금 거리가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가져와 칭하
고 있다. 허나 북한산 탕춘대(蕩春大) 능선에서 갈라진 서남쪽 산줄기가 바로 백련산이라 삼
각산을 칭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넓게 따지면 이곳도 북한산의 일원으로 볼 수 있음)
그리고 정토는 백련사의 옛 이름이자 이곳에서 내세우고 있는 정토도량을 뜻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석가탄신일 특수를 노리며 절에서 깔아놓은 커피와 아이스크림 판매 천막
이 지갑 좀 펼쳐보이라며 발길을 붙잡는다. 이제 갓 5월이건만 철모르고 찾아온 더위에 냉커
피 1잔을 사먹었는데 가격이 무려 3,000원대나 한다. 판매를 맡은 이들은 청소년들로 아마 백
련사 승려의 자녀거나 신도로 여겨진다.
참고로 백련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절 주변에 승려 가
족들이 사는 집이 잔뜩 깔려있다. 태고종의 중심 사찰인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러가기)
처럼 말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백련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이 땅 최초의 정토도량(淨土道場)을 내세우는 백련산 백련사
백련산 남쪽 중턱에 자리한 백련사는 747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부처의 정토사상을 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이 절을 세웠다고 하며 절 이름도 그에 걸맞게 정토
사(淨土寺)라 했다고 한다. 그 연유로 이 땅 최초의 정토도량임을 아주 강하게 내세운다.
허나 아쉽게도 진표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심히 회의감을 들
게 한다. 게다가 창건 이후 14세기 말까지 이렇다할 기록도 없다. 다만 1399년 무학대사(無學
大師)의 지시로 함허대사(涵虛大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어쩌면 이때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다
.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1413년 태종(太宗)의 형인 정종(定宗)이 요양차 이곳에 머물렀으며, 세조(世祖)의 장녀인 의
숙공주(懿淑公主, 1442~1477)가 20세에 남편을 잃고 비통함에 잠겨있던 중, 백련사에서 해동
묵(음나무)를 보고 인생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공주의 무덤이 근처에 마련되자 그
의 원당(願堂)이 되면서 백련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전한다. <의숙공주의 묘는 현재 경기도 의
왕시에 있음>
또한 경복궁(景福宮)에서 봤을 때 절이 서쪽에 있어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뜻하는 '서방정(西
方淨)','정토사'라 불렸는데 어느 여름, 연못에서 하얀 연꽃이 피어올라 백련사라 했다는 설
도 덧붙여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중건했으며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승려들이 모두 도
망치고 건물은 거의 퇴락했다. 1659년에 3년에 걸쳐 중창을 벌여 1662년 법당을 다시 지었으
며, 1701년 절이 소실되자 1702년에 중건했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낙창군 이탱(洛昌君 李樘, 선조의 증손자)이 돈을 내어 1774년 크게 중창
했으며, 1891년 경운(慶雲)이 법당과 여러 전각을 다시 짓고 1911년 명부전을 중수했다. 그리
고 서옹이 1914년 삼성전을 중건하고 1917년 사무실을 신축했다.
예로부터 서백련(서쪽의 백련사)이라 하여 동쪽의 청련사<靑蓮寺, 왕십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양주시 장흥으로 자리를 옮김>,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 관련글 보기), 북쪽의 북한
산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와 함께 한양도성의 4대 비보사찰로 꼽히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약사전, 명부전, 관음전, 범종각, 요사 등 10여 동
의 건물이 있으며, 그 주위로 승려 가족들이 사는 집이 무더기로 몰려있다. 지정문화재는 아
직 없는 실정이나 1569년에 만들어진 '융경(隆慶) 9년명 동종'이 가장 오래된 존재이며 19세
기에 조성된 괘불과 여러 탱화들이 전한다. 그리고 500년 묵은 음나무가 있었으나 세월의 고
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몇 년 전 하직하고 말았다.
또한 백련사는 예로부터 약수 맛이 좋았다. (10대 시절에 마셔봤음) 허나 그 착했던 물도 앞
서 음나무처럼 옛말이 되버린 상태이다. 하긴 서울에 이름난 약수들이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환경오염의 마수(魔手) 앞에 상당수 고통을 받으며 명이 끊겼으니 백련사 약수라고 예외일 수
는 없을 것이다.

* 백련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산11-155 (백련사길 170-72, ☎ 02-302-0288)
* 백련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무량수전 앞에 펼쳐진 석가탄신일 산사음악회

백련사의 중심인 무량수전(無量壽殿) 뜨락에는 산사음악회가 신명나게 열리고 있었다. 이제는
석가탄신일의 필수 요소로 자리를 잡아 음악회를 여는 절이 많은데 보통은 저녁이나 오후 늦
게 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대낮으로 시간을 잡았다.
공연장 앞에는 하얀 연등과 연분홍 연등을 적절히 조합하여 하늘을 대신하게 했고 그 밑에 넓
게 방석을 깔아 방청석으로 삼았다. 그리고 공연장 뒤쪽에 나를 흥분하게 만든 괘불이 높다랗
게 걸려 시끌벅적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정말 보기 힘든 괘불이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것이다.

천하에 300곳 이상의 절을 들락거렸지만 괘불을 본 것은 정말 손에 꼽는다. 그만큼 보기가 힘
든 비싼 존재로 그나마 석가탄신일이 만날 확률이 좀 크다. (내가 만난 괘불의 대부분이 석가
탄신일에 본 것임)
나를 흥분시킨 백련사 괘불은 1892년(또는 1868년)에 조성된 것이다. 높이는 약 6m 정도로 따
사로운 5월 햇살에 비춰 더욱 윤기가 흘러 보인다.


▲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온 백련사 괘불(掛佛)의 위엄

▲  백련사 괘불과 그 앞에 펼쳐진 산사음악회 현장

▲  원통전(圓通殿)

원통전은 관세음보살 누님의 거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백련사는 이곳
외에도 칠성각 옆에도 관세음보살의 거처인 관음전을 두었으며 명부전 옆에는 따로 석조관세
음보살입상까지 지어놓아 관세음보살상만 무려 3기나 갖추고 있다. 이곳처럼 관음전(원통전)
계열의 건물을 2개나 지닌 절은 처음 보는데, 정토도량 외에 관음도량까지 염두에 둔 모양이
다.


▲  원통전 내부
늘씬한 몸매의 금동관세음보살상과 백의관음(白衣觀音) 후불탱, 신
중탱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  백련사의 법당인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서방정토의 주인장,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ㄱ'모습의 팔작지붕 2층 집
으로 1층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 등으로 쓰이며 2층이 바로 무량수전으로 실내가 연병장만
큼이나 넓다. 또한 이곳말고도 동쪽에 극락전이라고 아미타불의 거처를 또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곳이 정토도량을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량수전의 별칭이 바로 극락전임)



 

♠  백련사 마무리

▲  백련사 약사전(藥師殿)

원통전 옆구리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인 약사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집으로 내부에 1569년에 조성된 '융경(隆慶) 9년명 동종(銅鍾)'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동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그가 백련사
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며, 불단에 자리한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은 19세기 것이다.


▲  약사전 석조약사여래좌상
하얀 피부를 지닌 밝은 표정의 약사여래좌상이 좌우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거느리며 약사3존상을 이루고 있고, 그 뒤에는
19세기에 그려진 약사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다.

▲  약사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탱화들 (극락구품도, 신중탱, 현왕탱 등)

▲  석조관세음보살상과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저승(명부)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2017년 5월에 장만한 석조관세음보살상이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
끄러운 하얀 피부를 자랑하며 자리해 있다.


▲  19세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 도명존자(道明尊者)

▲  명부전 우측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 시왕상과 시왕탱


▲  한 지붕 세 가족을 이루고 있는 관음전, 칠성각(七星閣),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3칸짜리 맞배지붕 집이 있다. 이미 원통전이란
관세음보살의 거처가 있음에도 이곳에도 1칸을 떼어나 그의 공간을
추가했으며 가운데 칸은 칠성, 오른쪽 칸은 산신의 공간이다.

▲  극락전과 칠성각 사이를 가득 메운 연분홍 연등의 고운 물결
연등에 의해 하늘이 푹 낮아진 기분이다.

▲  극락전(極樂殿)의 옆구리

극락전은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무량수전 다음으로
큰 집으로 백련사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정토도량임을 강조하고자 그의 공간을 2개씩이나
두고 규모도 크게 다졌다. (극락전 계열의 집이 2동이나 있는 절은 처음 봄)


▲  극락전 내부

극락전을 끝으로 백련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의 석가탄신일 인심도 확인할 겸, 공
양밥 1그릇 들고 갈까 했으나 영화사에서 먹은 것이 다 소화되지 않았고, 아무리 둘러봐도 공
양밥을 주는 곳이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공양시간은 끝난 듯 싶었다. (백련사 공양밥이 맛있
다고 함)
두 다리도 잠시 쉴 겸, 잠시 신명나는 산사음악회를 구경하다가 보조 메뉴로 급히 정한 다른
절로 길을 잡았다. 이후에 간 고찰들은 자주 복습했던 곳이라 사진에 따로 담지 않아 본글에
서는 생략한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나들이는 보다 흥겨운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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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5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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