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같은 호수에 깃들여진 큰 옥의 티, 병자호란(丙子胡亂) 삼전도
굴욕의 상징물인
삼전도비(三田渡碑) - 사적 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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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호각까지 갖춘 삼전도비 |
송파대로가 지나가는
석촌호수 서호 동쪽 언덕에 삼전도비라 불리는 큰 비석이 위엄을 부리며
자리해 있다.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못지 않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삼전도 굴욕을
머금은 우울한
존재로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유쾌하지 못한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사방이 훤히 트인 곳에 자리해 있고 무려 보호각까지 두르고 있어 그에 대한 해코지가
많이 줄었지만 석촌동(石村洞) 어린이공원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시절에는 비석에 테러(?)나
해코지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비석을 손상하면 처벌한다는 경고문까지 붙어있었다. 특히
2007년에는 빨간색 페인트로 비석 뒷쪽에 크게 '철거'라고 쓴 사람이 붙잡혔으며, 2008년에는
비석에 불을 지른 사람도 있었다.
나도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저런 것을 뭣하러 국가 사적까지 지정해가며 보호를 하는가 의문
을 품으며 비석을
갈아 없애기를 바랬다. 거기다가 비석 옆에 삼전도 굴욕을 담은 부조비까지
있었으니
그런 마음을 더욱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발버둥을 친다고 삼전
도 굴욕이란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나간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될
우리의 역사이며, 비록 비석의 성격은 심히 불쾌
하나 엄연히 조선이 만든 비석이다.
특히
만주
문자와 몽골 문자, 한문 등 3개 문자를 모두 담은 특이한 비석으로 당시 글자를 연
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비석의 조각이 수려하고 정교하여
조선 후기 대표적인 금
석문(金石文)으로 꼽히고 있다.
비석인데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남원(南原)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와 더불어 매우 특이
한 케이스이다. 비석의 보존상태와 다듬은 솜씨가 뛰어나 국가 보물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지
만 비석의 성격
때문에 국가 보물로 삼기에는 속이 심히 뒤틀리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
워서 어정쩡하게 사적으로 삼은
모양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병자호란과 삼전도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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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사람들의 오랜 스트레스이자 발암물질이었던 삼전도비 |
① 만주족(여진족)의 마지막 몸부림과 병자호란 이전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滿洲族)은 우리의 친척 민족으로 예로부터 말갈족(靺鞨族), 여진족(女
眞族) 등이라 불렸다. 말갈이란 이름은 고구려(高句麗) 때 지방 사람들을 일컫던 말로 오늘날
흔히 부르는 촌사람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옛 조선(고조선)과 고구려, 발해(渤海, 원래 이름은 고려)의 일원으로 살았으며, 신라 왕족이
고려에 반발하여 무리를 이끌고 옛 발해 땅으로 넘어가 정착하여 여진족 등 북쪽 세력과 어우
러졌고, 점차 그들을 통합해 힘을 기르면서 1113년 아골타<阿骨打, 신라 왕족의 후손 또는 고
려 사람 금준(今俊)의 후손>가 금(金)을 세웠다. 금이란 이름은 그들의 성인 김(金)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금나라는 옛 발해인과 옛 신라인, 고려인, 여진족 등이 어우러진 나라로 150년
동안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위엄을 떨쳤으나
13세기 중반 몽골의 원(元)나라에게 크게 털리
면서 함경도와 요동(遼東), 만주,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살았다.
이후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서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며 세력을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
과
명이 완전 지쳐있는 틈을 이용해 세력을 불렸고,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 누르하치가
여진족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1616년 스스로 한(칸, 汗)을
칭하며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흥경(興京)에 도읍을 했다. 그가 바로 청태조(淸太祖)이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커지자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 군주였던 광해군(光
海君)은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이를 슬기롭게 해결하고자 1619년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군사
를 주어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항복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이에 강홍립은 요동으로
넘어가
대충 싸우다가 항복했다.
또한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과의 양면외교정책을 구사하며 국방을 기르고 있었다. 후금을 나
라로 인정하며 호의를 베푸니 딱히 충돌은 없었다. 허나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에 쩔
어있던
신하들은 그의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이른바 재조지
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후금을 멀리하라고 귀가 따갑도록 주청했다.
그래도 말이 안통하자 서인(西人) 패거리는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仁祖)>을
앞세워
광해군의
폭정을 바로잡는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이
다.
서울을 점령한 서인 패거리는 광해군을 붙잡아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의 어린 왕후이자 광
해군의 의붓어머니>가 갇힌 서궁(西宮, 덕수궁)으로 끌고가 대비 앞에 무릎을 끓게 했다. 대
비는
매우 흥분된
표정으로 광해군의 죄 30여 개를 나열하며 꾸짖었는데, 그중에는 명나라에
대한
불경죄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서인 패거리의 건의에 따라 광해군의 실용적인 중립외교를 버리
고
명나라를 섬기는 정책으로
외교 방향을 바꿨다. 후금을 치러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
)에게 요동에서 가까운 철산(鐵山)의 가도(椵島)를 주둔지로 제공하는 등 쓸데없는 지원을 아
끼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이는 후금을 제대로 자극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후금은 오로지 중원대륙 도모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조선이 배후에서 저리 설쳐대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인조반정 때 논공행상(論功行賞)에 크게 불만을 품
고 1624년에 반란을 일으키다 털린 이괄(李适)의 부하들이 후금으로 넘어가 광해군이 부당하
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며
조선의 군사력이 약하니 속히 치라고 청나라 태종(太宗)을 들쑤셨
다.
드디어 1627년 1월 청나라 태종은 아민(阿敏)에게
군사 3만을 주어 항복한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조선을 공격했다. 그들은 '폐위된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 는 명분을 내걸고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허나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임경업(林慶業)의 저항에 발목이 잡히자 그냥 성
을 버리고
남하, 황해도 황주까지 진출하니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삼아 막게 했으나
패배를 거듭하여 개성까지 밀려났다.
이에 크게 쫄은 인조는 강화도로 줄행랑을
쳤으며, 2월 9일 후금은 유해(劉海)를
강화도로 보
내 명나라의 연호를 폐할 것과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며 항복을 제의했다. 후금의
파상적인 공격에 염통이 쪼그라든 인조는 바로 교섭에 응했고, 양국이 형제국(후금이 형, 조
선이
아우)의 관계를 맺는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는 바로 군사를 돌렸다. 조선은 왕자 대
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냈다.
② 병자호란 발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명나라 연경(燕京)까지 쳐들어가 크게 세력을 넓혔다. 이윽고 조선에게
군신(君臣)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과 백금 1만 냥, 말 3천 필, 군사
3만을 요구했으나 인조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와
마부태(馬夫太)를
보내 다시 군신
관계를 요구하니 후금의 무례에 뚜껑이 뒤집힌 인조는 사신 접견을
거절하고
전국에 비밀리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을 공격할 채비를 한다.
조선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음을 깨달은 용골대는 겁에 질러 서둘러 도망을 쳤는데, 운이 좋
게도 인조가 평안도에 보낸 선전유문을 입수하여 태종에게 보냈다. 인조의 격문에 뚜껑이 핵
폭탄만큼이나 폭발한
태종은 더욱 강도를 높여 조선을 위협했으며, 1636년 4월 황제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하였다. 허나 조선은 여전히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
시로 일관했다.
청태종은 조선을 제대로 응징하고자 1636년 12월 2일, 청군 7만과 몽골과 요동에서 징발한 몽
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12만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의주부윤(義州富潤)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그들을 막아섰으나 정묘호란 때
그에게 크게 혼쭐이
난 적이
있어 그냥 비켜가
버렸다.
빈수레가 요란하듯, 청을
공격하자며 선전유문까지 뿌린 조선 조정은 정작 전쟁준비와 첩보망
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개판이었다. 그들은 12월 13일이 되서야 임경업과 김자점(金自點)이
보낸 장계를 보고 청군의 침입을 알았던 것이다.
12월
14일 청군이 개성을 넘자 엉덩이에 불이 난 조정은 서둘러 강화도로 줄행랑을 치려고 했
다. 허나 그날 밤 청군 선봉이 영서역(迎曙驛, 서울 불광동)에 이르고, 선봉장 마부태(馬夫太)
는 이미 인왕산 서쪽 홍제원(洪濟院)에 도착해 도성(都城)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한강까지
차단시켜 강화도로 가는 길을 미리 막아버렸다.
이에 울상이 된 인조와 신하들은 피난길을 멈추고 다시 환궁하여 속절없이 대책을 논의하다가
평안도 철산부사(鐵山府使)를 지냈던 지여해(地如海)가 자신에게 정병 500명을 주면 홍제원을
공격해 청의 선봉부대를 때려잡겠다고 했다.
허나 나약한 신하들의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최명길(崔鳴吉)이 술과 고기를 싸가지
고 홍제원 청군 진영을 찾아가 시간을 좀 벌기로
했다. 최명길이 청군 선봉장에게 왜 쳐들어
왔냐고 항의하며 그들의 발을 묶는 동안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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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부만 남은 비석
귀부 거북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왜 자신이 그런
굴욕적인 비석이
되어야 했을까? 번민에 잠긴 것은 아닐까? 그의 표정은
오늘날
강대국 틈바구니에 치여 사는 우리의 자화상 같다. |
③ 도망치는 인조와 남한산성(南漢山城) 항쟁
12월 14일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줄행랑을 쳤다. 세자의 말고삐를
잡던
관리가 도망을 치자 세자가 손수 채찍을 잡았을 정도이니 그 꼬라지가 참 말이 아니다.
광희문(光熙門)을 지나자 청군의 침입에 겁을 먹은 서울 백성들의 피난행렬과 뒤범벅이 되었
는데,
인파에
휩쓸리고 엎어지면서 그 곡성은 하늘을 진동했다고 전한다.
저녁 무렵 얼어붙은 송파나루를 건넜는데, 이때 인조를 수행한 사람은 겨우 5~6명, 왕의 체통
은 산산히 구겨졌다.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배에 마구 매달리는 것을 매정하게 칼로 내리찍어
백성 여러 명이 죽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얼마나 춥던지 인조의 발에 동상이 걸려 오금동 백
토고개에 이르렀을 때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인조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아이고
내
오금이야' 주접을 떨었는데, 그런 연유로 오금동(梧琴洞)이란 지명이 생겼다.
간
신히 털방석을
하나 마련하여 수행원이 방석 모서리를 들고 인조를 호종했다고 하니 왕을 잘
못
만난 신하들의 노고에 눈물이 날 정도이다.
12월 15일
자정에 이르자 간신히 남한산성 남문에 이르렀다. 성에 들어오자 훈련대장 신경진(
申景禛)에게 성을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으는 한편, 명나라에
서둘러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구했다. 그리고 영의정 김류(金瑬)의 건의로 야음을 틈타 다시
강화도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산길에 얼음이 얼어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자빠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걸어서 갔으나, 여러 번 얼음길에 꽈당하여 체면이 말이 아니므로 다시 산성으로 돌
아왔다.
12월 16일이 되자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 밑까지 들이닥치고, 1637년 1월 1일 청태종의 본
진이 송파에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대군을
집결시키면서 성은 완전히
고
립되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경기도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서둘러 군사를 꾸리고 산성으로 들
어갔다. 이렇게 군사가 모아지면서 성을 지키는 군사는 13,000명으로 늘어났다. 허나 성에서
보유하고 있는 쌀이 14,300석, 장 220항아리로 겨우 50일 정도의 식량 밖에는 없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탓이다.
탄천에 이른 청태종은 군사를 보내 남한산 동쪽 망월봉(望月峰)에서 성 안을 살피게 하면서
성을 공격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포위만 했다. 조선군의 식량 사정을 간파한 것이다.
성 안에 갇혀 몸이 근질근질했던 장수들은 군사를 이끌고 종종 성밖을 나와 주변을 서성이던
청군을 죽여 군의 사기를 올렸으나, 겨우 서너 명에서 수십 명을 죽이는데
불과했다. 이건 어
디까지나 청군이 조선군에게 던진 얄미운 미끼였던 것이다.
이렇게 소규모 전투로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인조와 신하들은 40일이 지나자 식량부족으로 매우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못난 왕과 신하들은 그래도 우선 순위로 밥이라도
먹겠지만 군사
들과 내관, 궁녀를 비롯한 소위 아랫 것들은 그러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문을
닫아
걸고 구원군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구원군은 죄다 청군에게 격파 굴욕을 당하면서 그들의 성적
도 시원치 못했다.
①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군사는 험천(險川, 성남 분당구 남부)에서 패해 남포현감
이경(李慶)이 전사
②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군사는
광주 쌍령에서 패
배, 두 병사(兵使)가 전사
③ 전라병사(全羅兵使) 김준용(金俊龍)은 수원 광교산(光敎山)에서 청나라 장수 액부양고리(
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유일하게 대승을 거뒀으나 방심하여 패주
④ 그 외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강원도 금화(金化)에서 전사, 부원수(副元帥) 신
경원(申景瑗)은 평안도 맹산(孟山) 철옹(鐵甕)에서 생포됨,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토산(兎
山)에서 패주,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와 함경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
게다가 명나라 또한 이미 망조가 들어 원군을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겨우 등주총병(登州總兵
) 진홍범(陳弘範)을 시켜 수군이라도 보내려고 했으나 바람과 파도로 보내지도
못했다. 그 외
에 전국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정홍명(鄭弘溟) 등이 많은 의병을 이끌고
올라갔으나 너무
늦어서 공주(公州)에서 해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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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전도 굴욕 장면, 수항대에 높이 앉은 청태종의 위엄이 돋보인다.
(석촌동 삼전도비 어린이공원에 있었음) |
④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삼전도 굴욕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면서 사방에서 달려오는 구원군을 격파하는 한편, 주변을 노략질하
면서 아주 느긋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남한산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성을 넘어 항복하는 병사가 속출했고, 유난히도 징한 추위로 얼어죽는 병사도 적지 않았
다.
상황이 이토록 최악에 치닫자 좌의정 홍서봉(洪瑞鳳)과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을 청태종에
게
보내 최명길이 작성한 국서를 보내고 화해를 청했으나 청태종은 조선 왕이 직접 자기 군문
에
항복하고 전쟁을 주장한 사람 2~3명을 결박지어 보내라고 답을 보냈다.
그 답에 뚜껑이 뒤집힌 인조는 다시 대책을 강구했으나 항복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싸우자
는
주전파(主戰派)가 서로 소리를 지르며 논쟁을 벌이니 뾰족한 대책을 없었다. 그러다가 1월
말
강화도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날라오자 이내 기가 꺾여 항전 45일
만에 성문을 열고 백기를
들고 만다.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蘊)은 자살하겠다고 난리를 쳤으나 실패했고, 최명
길이 청태종을 찾아가 인조의 항복 문서를 들이밀었다. 허나 청태종은 그동안 조선에게 당한
개무시를 제대로 설욕하고자 다음의 강화조약을 제시했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의 예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명과의 관계를 끊으며, 명에서 받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와 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심양(瀋陽. 청나라 수도)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 황제의 생일)과 정조(正朝),
동지(冬至),
천추(千秋, 황후/황태자의 생일), 경
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군사를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 1639)부터 일정하게 세폐(歲幣)를
보낼 것
하나 같이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들이지만 인조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청의 요구를 받
아들이고 2일 뒤인
1월 30일, 세자와
신하, 수행원 500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나왔다. 청
태종은 삼전도에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그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대국의 위엄을 부리며
인조를 기다렸다.
그곳으로 안내된 인조는 태종의 요구에 따라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3
번 절을 하고
절을 할 때마다 3번씩 총 9번 이마를 땅바닥에 박는 것)의 항례(降禮)를
치뤄야
했다. 인조의 머리박기 굴욕에 세자와 신하들은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통곡을 했고, 청나라
장수와 군사들은
통쾌해 했다.
그렇게 삼전도 굴욕을 치른 인조는 서울로 환도했으며,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
와 빈궁(嬪宮),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인질로 삼고, 척화파 인물인 김상헌을 비롯하여 홍익한
(洪翼漢),
윤집(尹集)
등을 데리고 2월 15일 철군했다. 또한 조선 사람을
무수히 포로로 잡아
갔는데, 그
수가 최대 50만이나 된다는 설이 있다. 특히 사대부와 왕실의 여인을 무수히 잡아
가면서 풀어주는 대가로 상당한 돈을 요구했다.
그들이 돈을 치루고 고생 끝에
귀국을 해도 정작 양반사대부들은 쓸데없는 유교 이념을 내세
워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오히려 손가락질하여 심각한
사회문
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인조는 무악재 북쪽 홍제천(弘濟川)에서 목욕을 하면 잃었던
정절을 되찾은 것과 같다
며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고 왕명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 청에 끌려가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
녀(還鄕女)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바람
피운 여자를 쌍스럽게 표현한 '화냥년'의 유래가 되었
다.
이렇게 하여 병자호란은 청의 빛나는 대승리, 조선의 쪽팔리는 대참패로 막을 내렸다. 광해군
이 이런 비극을 피하고자 중립외교로 실리를 취하며 국방을 키웠건만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에 환장한 지배층과 인조의 그릇된 정책이 이런 화를 자초한 것이다. 조선이 정절처럼
가지고
있던 명에 대한 사대(事大)의 긍지, 그리고 나라의 자존심이 일개 오랑캐로 무시했던
청나라에게 보기 좋게 짓밟힌 것이다.
그 충격은 조선 지배층에게는 실로 엄청났다. 인조도 그렇고 양반사대부와 유생들까지 그 휴
유증에서 오랫동안 허우적거린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피해도 상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청
나라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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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삼전도비의 탄생
1639년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라며 글을 지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인조
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글을 쓸
문인을 찾았
지만 아무도 나서질 않자 간신히 장유(張維)와
와 조희일(趙希逸)을 시켜 지은 글을 보냈다.
허나 태종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며 계속
퇴짜를 놓았다. 그래서 인조는 특명으로 이경
석(李景奭)에게 글을 쓰게 했고, 그 글을 보고
흡족한 태종은 이를 비석에 새기라고 지시했다. |
▲ 삼전도비 귀부의 앞모습 |
1639년 12월 8일 인조는 공조(工曹)를 시켜 삼전도 수항단터에 높게 제단을 만들어 그 위에
삼전도비를 세웠는데, 글씨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던 한성판윤(漢城判尹) 오준(吳竣)이 썼다.
글씨
또한 아무도 쓰지 않으려는 것을 그가 억지로 맡아 쓰게 된 것이다.
오준은 자신의 자랑거리인 글재주를 나라의 치욕스런 비문을 쓰는데 사용된 것을 매우 부끄럽
게 여겼다. 하여 비석이
완성되자
바로
벼슬을 버렸으며, 붓을 부러트려 다시는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런
비문을 써야했던 자신의 오른손까지 돌로 마구 찍어 병신을 만들었
다. 허나 조정 신하들은 비석 제작에 억지로 참여했던 이경석과 오준을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탄핵했다.
비문은 한자와 몽골 문자, 만주 문자 등 3개의 문자로 되어있는데, 비문 뒤쪽의 왼쪽은 몽골
문자 20행, 오른쪽에 만주 문자 20행이 박혀 있으며, 앞쪽에는 칠분해서체 한문으로 쓰여있다.
청나라가 조선을 공격한 이유와 조선이
항복한 경위,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회군(回軍
)한
내용, 침략을 공덕이라 미화한 개소리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리니, 만물을 죽이기도 하고 생육(生育)도 한다. 오직 황제(청태종)
만이 이를
본받아 위엄과 은덕을 아울러 핀다.
황제가 동방(조선)을 정벌하니 그 군사가 10만이라 위세가 뇌성벽력처럼 천지를 진동하니 군
사가 범처럼 용맹하고 맹수처럼 날쌔어라. 서번(西蕃)의 궁발(窮髮)과 북락(北落)이 창을 잡
고 앞에 달리니 그 위세가 더욱 찬란하구나. 지극히 인자한
황제는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니,
10줄의 조서가 밝아 이미 엄숙하고 온화하기 그지없어라.
처음에는
미혹하여 알지 못해 스스로 재앙을 불렀구나. 황제의 밝은 가르침, 마치 자다가 깨
어난
듯,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신민을 이끌고 귀순하도다. 위엄이 두려워서가 아닐세.
오직
덕에
의지함이라. 황제가 착하게 여기어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도다. 화(和)한
안색과
기쁜
웃음으로 무기를 거두었네. 무엇을 예물로 주었는가. 경마(輕馬)와 경구(輕裘)를
주었도다.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모두 노래하여 황제의 은덕을 칭송하네. 우리 임금이 돌아옴은 황제의
은덕이라. 황제가 회군하여 우리 백성을 살리도다. 우리의 탕잔(蕩殘)함을 불쌍히 여겨 농사
를
권하니, 국토는 옛날과 같이 되고 조정이 새로워졌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얼어붙은
풀뿌리에 다시 봄이 오도다. 한강 가에 우뚝 선 비석에 아로새긴 황제의 아름다운 공덕, 삼한
(三韓)에 영원토록 빛나리라'
비석은 원래 청나라군이 머물렀던 삼전도(송파나루)에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삼전도
비에
이를 갈던 백성들이 비석을 때려눕혀 묻어버리면서 100년 이상 제자리를 알 수 없게 되
었다. (고종의 명으로 땅에 묻었다고도 함)
그러다가 왜정(倭政)이 1913년 고적(古蹟)이란 이름으로
파내서 다시 세웠고, 1956년 치욕적
인 비석이라 하여 다시 때려눕혀 생매장시킨 것을 1963년 홍수로 얄밉게도 모습을 드러내자
사적으로 지정해서 보호했다. 이후 1983년 5월 석촌동 아름어린이공원으로 옮겼는데, 그때 삼
전도 굴욕을 담은 부조비(浮彫碑)을 만들었다.
문화재보호법으로 비석 반경 100m 안에 건물 재건축이 힘들어 민원이 쇄도하자 송파구청에서
2003년 문화재청에 비석의 이전을 요구했다. 재건축 민원 때문인 것도 있지만 집 부근에
치욕
의 산물이 있다는 점도 지역 주민들에게는 꽤나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만약 고구려의 광개토
태왕(廣開土太王)비였다면 그렇게까지 민원을 때렸을까?
비석 이전을 두고 송파구청과 문화재청 등이 오래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의 제자리를 더듬고자
서울학연구소에 의뢰한 결과 석촌호수 서호 북동쪽 수중이 원래 자리임을 확인했다. 하여 그
곳과
가까운 서호 언덕으로 옮기기로 문화재청과 합의를 보았고 2010년 봄, 지금 자리로 이전
되었다.
현재 비석은 2기로 1기는 귀부만 달랑 있는데, 이 비석이 처음 지어진 것이다. 허나 청나라에
서 더 크게 비석을 세울 것을 요구하여 기존 비석은 그냥 두고 옆에 새로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비신(碑身) 높이는 3.95m, 너비 1.4m이며, 무게는 무려
32톤이나
나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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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의 꼭대기와 이수(螭首) 부분
이수 아래에 쓰인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는 청나라 사람으로
한족
출신인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의
모습이 꽤 생동적이다. |
비석의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허나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나 열불이 나므로 조
선 사람들은 간단히 '한(汗)의 비'라고 불렀다. 여기서 한은 북방 민족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청태종은 큰 나라의 황제가 아닌 일개 북방 오랑캐의 우두머리로 얄잡아 부른 것이다. 1963년
그를 사적으로 지정하면서 지명을 따서 그냥 삼전도비라 불리게 되었다.
수치스러운 비석이라고 마냥 해코지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므로 더욱 보
존에 힘써야 될 것이다. 또한 삼전도비는 우리에게 강하게 경고한다. 말못하는 자신들에게 분
풀이나 저지르지 말고 그런 역사를 거울로 삼아 그런 개망신을 당하지 말라고, 다시는 자신과
같은 비석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더 이상 굴욕의 대상이 아닌 주변 나라를 굴복시키는
주체가 되라고 말이다. 주변 나라가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앞다투어 항복의
예를 올리는
그 순간 귀부의 표정도 씨익~ 밝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4월 석촌호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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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전도비 귀부의 뒷모습 |
▲ 귀부만 있는 비석의 뒷모습
주저앉은 뒷발과 오그라든 꼬랑지가 귀엽다 |
* 삼전도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