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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여름맞이 나들이 (아차산성, 아차산5보루, 아차산1보루)


    
' 아차산 여름맞이 나들이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  아차산성
◀  아차산1보루
▶  아차산3층석탑

아차산3층석탑

 



아차산(峨嵯山, 285m)은 내 즐겨찾기의 하나로 낮과 저녁(야간 등산)을 가리지 않고 무수
히 안겼던 친숙한 뫼이다. 특히 듣기만 해도 가슴이 꽤 벅차오르는 세 글자. 고구려(高句
麗, 고구리)의 영광스러운 흔적이 풍부히 깃든 현장으로 북쪽 미수복지(북한, 만주, 요동
,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 등)를 제외한 이 땅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의 성지(聖地)이기
도 하다.

아차산은 용마산(龍馬山, 348m)과 망우산(忘憂山, 282m), 홍련봉(紅蓮峰), 시루봉을 식구
로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의 품을 무려 100회가 넘게 구석구석 더듬었으나 미답처(未踏處
)들이 일부 깨알처럼 남아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하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그 미답처
들을 여럿 잡고자 여름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 한복판에 다시 아차산을 찾았다.



 

♠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싱그러운 생태공간
~ 아차산생태공원

▲  아차산생태공원 동쪽 연못 (습지원)

아차산의 신세대 명소인 아차산생태공원은 도심 속의 싱그러운 생태공원으로 홍련봉과 더불어
아차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다.

이곳은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1996~2001년) 계획에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29.5억원
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2000년부터 토지 보상과 설계 용역, 공사 다지기를 거쳐 2001년 12
월 31일 만남의 광장이 우선 준공되었으며, 2002년 3월 29일에 생태공원이 완성되었다.
공원 면적은 23,450㎡로 생태공원(자생식물원, 나비정원, 습지원, 생태자료실)과 만남의광장,
소나무숲, 생태관찰로, 관상용 논, 재배용 밭,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야유회장(4개소), 운
동장과 여러 운동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인어공주상 등도 갖추어 공
원의 풍치를 돋구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다양한 생태체험학습 프로그램(조류탐험교실, 곤충교실, 식물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공원이 닦여진 이후 고라니와 꿩, 해오라기, 쇠박새는 물론 멸종위기종인
맹꽁이까지 종종 관찰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 땅에서 처음으로 금개구리까지 목격되어 이곳의
생태계가 적지 않게 살아났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저 무늬만 생태공원이 아닌 진정한 생태공
원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공원에는 쉼터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으며, 숲이 짙고 그늘의 질이 우수해 잠시 망중한에 잠기
기에 좋다.

* 아차산생태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70 (영화사로 145 ☎ 02-450-1655)
* 아차산생태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생태공원 위쪽을 장식하고 있는 관상용 논

아차산생태공원의 백미(白眉)이자 아름다운 거울이라 할 수 있는 습지원(연못)은 그 이름 그
대로 습지식물의 삶터이다.
연못 한복판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쳐져 있어 시각의 농간으로 2개의 연못으로 보일 수 있
지만 실제는 하나로 주변 나무와 봄꽃, 지나가는 햇님과 달님, 구름까지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동쪽 못에는 서양 동화의 단골 모델인 인어공주상이
고운 맵시를 드러내며 연못의 운치를 한껏 띄운다.


▲  인어공주가 살고 있는 습지원 동쪽 연못

▲  습지원의 구수한 양념, 인어공주상
인어공주와 분수대 사이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반짝 모습을 비추었다.


인어공주는 윗도리는 여자 사람, 아랫도리는 물고기로 서양 동화에서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다
. 잘빠진 몸매와 아름다운 가슴을 모두 드러낸 채, 바위에 걸터앉아 두툼한 꼬랑지를 흔드는
모습이 은근 매혹적이라 정처가 없는 나의 두 눈이 자꾸 그에게로 쏠린다.
그는 습지원을 닦으면서 갖다둔 조각품일 뿐, 아차산과는 관련이 없으며, 이곳이 어린이의 생
태학습 체험장의 역할을 하고 있어 순수함의 비중이 아직까지는 높을 그들의 눈높이와 공간의
성격을 배려하여 배치하였다.

그런데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반가운 손님이 인어공주상과 분수대 사이에 반짝 왕림을 하였다
. 바로 일곱 색깔 무지개이다. 언제부터인가 1년에 1번 볼까 말까 한 존재가 되어버린 무지개
,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보는 무지개로 갑작스런 그의 등장은 이번 아차산 미답처 사냥에서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하늘의 게시이자 복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날 계획한 미답처는 모두
인연을 지었음)


▲  무거운 동전은 이곳으로?? 연못에 동전을 버리는 공간
인어공주 누님이 바라보는 방향에 동전을 받아먹는 동그란 돌통이 있다. 그곳에
동전이 들어가면 행운이 온다나 뭐라나? 그렇게 모인 동전은 광진구청에서
수거하여 불우이웃돕기에 쓴다고 한다. (과연??)


▲  분수가 한참 나래를 펼치고 있는 습지원 서쪽 못

▲  생태공원 동쪽 산책로 (생태자료실 동쪽)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갈려면 이곳을 거쳐 가면
된다.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내
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



 

♠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흔적이 고루고루 깃든 삼국시대 산성 유적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①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밀
어내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늙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차산성 외에 장
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기지가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
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의 라이벌이기
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치자고 요구했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그 사건을 구실로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
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해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은 개로
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게
넘겼다.
그렇게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
원대륙(서토)의 무수한 영토를 거느리며 천하의 바다를 장악했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후손들
이 위례성을 찾느라 오랜 세월 진땀을 뺀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②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서울 동부 지역,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堡壘)를 주렁주렁 달아
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水落山),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
천 지역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
한 요새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
가 전사했다고 전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
(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
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세월과 자연에 의
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③ 장대터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
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
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 등이 남아
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
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
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숨겨진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
산을 지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인 '연화문와
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
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
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
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
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
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속시원히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
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광진구,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떡밥이 꾸준히 나오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빗장은 열리지 못했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워커힐 쪽에서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으나 통제되어 있어 대놓고 들어가
기는 그렇다. 하여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광진구청에서 운영하는 아차산
역사문화해설(역사문화투어)을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다.
(문의 광진구청 문화체육과 ☎ 02-450-7593)
내가 아차산을 무수히 오갔으나 아직까지 아차산성의 속살은 들어가지 못했다. 아차산성 내부
가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롭게 둘러볼 때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 해방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 서벽을 지나면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낙타고개와 아차산 주능선으로 이
어지며, 동쪽은 아차산성 북벽 앞과 우미내계곡, 고구려 대장간마을로 이어진다.
여기서 아차산 동쪽 구역(구리시 아천동)으로 넘어가 우미내계곡과 아차산 큰바위얼굴, 석실
고분(石室古墳), 아차산3층석탑, 범굴사(대성암), 아차산2보루터를 둘러보고 아차산6보루터를
거쳐 서울과 구리의 경계선인 아차산 주능선으로 들어섰다. (아차산 구리 구역은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음)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아차산6보루, 5보루, 1보루)

▲  아차산6보루터 - 사적 455호

범굴사(대성암)에서 뒤쪽 너른 바위를 올라 아차산2보루터를 지나면 주능선 바로 직전에 6보
루가 마중을 한다.

언덕처럼 봉긋 솟은 터가 바로 6보루터로 2005년에 아차산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 허나 아직까지 속시원한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생김새가 보
루터 비슷하게 생겨서 아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6보루의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여기서 나온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아차산 주
능선의 바로 동쪽으로 아차산의 옛 과거를 적지 않게 간직하고 있으리라 여겨지며, 속히 발굴
조사를 벌여 6보루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구의동(九宜洞), 자양동(紫陽洞),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
산, 사패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했는데, 이들 보루 중, 그
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보루 1곳, 홍련봉 보루 2곳,
시루봉보루, 수락산 보루 1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묶어 국가 사적 455호
지정했다.


▲  소나무가 운치를 자아내는 아차산 주능선길

아차산6보루와 간만에 인연을 짓고 아차산의 하늘길인 아차산 주능선으로 진입했다. 천하 둘
레길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157km)도 신세를 지는 능선길로 서울둘레길 2
코스(용마,아차산코스 12.4km)가 지나간다. 여기서 남쪽으로 향하면 아차산5보루터가 깃든 두
툼한 언덕이 마중을 한다.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거친 세월의 강물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있는 형편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
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닦았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아차산5보루는 현재 문화유산 보호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아차산5보루 정상을 장식하고 있는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
는 돌 대부분은 헝클어진 5보루 성돌로 그 성돌이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탑으로 다
시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①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②
아차산 남쪽 자락과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③
아차산 남쪽 자락과 광진구,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성남시 지역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1보루 (가운데 봉우리)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에서 능선길을 조금 내려가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가 나온다. 이곳이 넘
버원 1보루가 된 것은 아주 단순하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용마산~망
우산 주능선을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
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아차산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
으며, 1월 1일만 되면 해맞이광장과 함께 새해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아주 북새통을 이루
어 발을 디딜 공간 조차 없을 지경이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  아차산1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해질녘에 서울시내

▲  아차산 해맞이광장 주변

아차산1보루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아차산 해맞이광장이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묵은 1,000
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하던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이 이곳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졌는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았다.
여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축제가 성황리에 열린다.


▲  아차산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광진구와 송파구, 강남구, 대모산과 관악산 등


아차산 해맞이광장을 벗어나 무덤 갈림길에 이르니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햇님의 근무 시간
이 나날이 연장되면서 아직도 대낮과 같은 상태이나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아차산의 여러 미
답처(온달샘 석탑, 석실고분, 아차산3층석탑)와 쿨하게 계산을 끝낸 상태라 내려가는 발걸음
이 아주 가벼웠다. 비로소 그들과의 술래 신세를 면했기 때문이다.

무덤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직진하여 너른 바위 위에 들어앉아 황색 지붕을 휘날리는 고구려정
을 둘러보고, 친수계곡과 동의초교를 거쳐 어린이대공원후문(아차산역)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6월 나들이는 다음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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