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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  봉원사에서 만난 한 송이 연꽃
 



 

여름 제국의 무더운 한복판에 이르면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살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봉원사에서 열
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이곳 외에도 조계사(曹溪寺)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2003년에 처음 시작하여 벌써 20년 가까이 이르렀는데, 봉원사 연꽃은 이미 지겹게 인연
을 지었다. 허나 여름에는 친여름파인 연꽃의 향연을 꼭 봐줘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
)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봉원사 연꽃축제날의 서광이 밝아오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의 문을 두드
렸다. 이번에는 바로 봉원사로 가지 않고 안산자락길을 반바퀴 정도 돌아 봉원사로 들어
섰는데, 경내로 들어서니 벌써부터 연꽃 향기가 후각을 마구 찌르고, 연꽃의 아름다움이
속세살이로 오염된 두 눈과 정처 없는 마음을 찌르며, 연잎의 살랑거리는 소리가 청각을
찔러댄다.



 

♠  봉원사(奉元寺) 입문 (만월전, 명부전, 미륵전)

▲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
刹)로 꼽히는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
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
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
이 없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붕어(崩御)한 이
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소실된 것을 1651년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며, 이후 동,서 요사채가 불
타자 극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
을 옮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는데,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봉원사가 떠난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
역인 수경원(綏慶園)이 1764년에 닦여졌는데, 이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願刹) 역할까지 자연스럽게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게 되었다.

1788년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으며
,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
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는 큰 비운을 겪는다.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 패거리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
자 봉원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삼천불전과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와 범종, 약사불회도, 산신도, 독성도, 시왕도 및 사자/장군도, 도량장엄용 불화(오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십이지신도), 도량장엄용 불화(칠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의소제
각 편액, 용암사(龍巖寺) 감로왕도, 반야암(般若庵) 목조관음보살좌상, 반야암 목조석가여래
좌상, 반야암 석조보살좌상 등 지방문화재 20점 정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 모두 2014년 이후
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용암사와 반야암은 봉원사의 부속 사찰임)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국가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
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
문화축제'를 칭하고 있는데, 봉원사 연꽃축제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
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꽃밭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봉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만월전(滿月殿)

안산자락길에서 조금 내려가면 기와집 일색의 봉원사 뒷통수가 보인다. 그 뒷통수가 점점 커
지면서 제일 먼저 만월전이 마중을 나오는데, 안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봉원사 경내를 거쳐
가기 때문에 자연히 산꾼의 왕래도 잦아 늦은 시간에도 길을 열어둔다.

만월전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곳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이곳에는 1894년에 조성된 약사불회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5호)와 1904년에 그려진 독성도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6호), 1905년에 조성된 산신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5호)가 봉안되
어 있는데, 이 건물은 무슨 사연을 숨기고 있는지 늘 굳게 잠겨져 있어 봉원사를 여러 번 왔
음에도 단 1번도 그 속살을 구경한 적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만월전 앞에는 극락전이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
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아미타
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자
애수'란 어여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
무가 그늘을 베풀고 있다. 나이는 100~150년
정도로 여겨지는데, 왜 자애수라 불리는지는
모르겠다.


▲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조
선 후기에 조성된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삼봉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한다. 하지만 내 눈이 안경이
라고 내 침침한 두 눈에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
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기 때문에 역시 의구심이 든다.
허나 봉원사가 태조 이성계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열었던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
로 한 글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
로 교체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을 수도 있다.

또한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 정릉(貞陵)
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란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서울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
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이리저리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이완용이 쓴 주련을 싹 뜯어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시왕도(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9호)

녹색 승려 머리에 금동 피부를 지닌 지장보살상은 지장전의 주인장으로 좌우로 도명존자(道明
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왕(十王)과 판관(判
官), 사자(使者), 인왕상, 동자 12위 등이 자리해 명부전 식구들은 총 33기이다.
2019년 7월 말에 지방문화재 지정 신청을 위해 그들을 조사했는데, 지장보살상 몸속에서 조성
발원문 2점과 후령통 2점, 묘법연화경 일부가 나왔고, 도명존자 몸속에서는 명주저고리와 명
주천, 무독귀왕에서는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다라니가 나왔다. 그리고 좌측 판관상에서 후령
통 3점과 1546년에 제작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3
), 성종 시절에 쓰여진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2호
), 묘법법화경(일부) 등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 당시 발원문(發願文)은 3개가 나왔는데, 제작시기와 만든 사람, 시주자 등의 정보를 담
고 있으나 처음 봉안되었던 절 이름은 없다. 또한 대좌(臺座) 상면에 쓰인 조성기를 통해 수
조각승 색난(色難)을 비롯한 18명이 1704년 6월 30일에 완성했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무독귀왕이 들고 있는 네모난 지물 밑면에 숨겨진 묵서명(墨書名)을 통해 1858년에 봉
원사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여 비록 그들의 제자리를 확인할 수 없지만 1858년을 전후로 봉
원사에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조성시기와 제작자 등을 알려주는 발원문과 글씨를 남겨둔 제작자의 작은 배려 덕에 여
러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봉원사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1호로 지정됨)

그리고 지장보살 뒤에 든든히 걸린 지장시왕도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9호)는 목재로 딴 패널
형태로 관리 소홀로 화기(畵記) 부분이 사라져 자세한 정보는 알 도리가 없다.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위왕, 시왕상, 보살상, 공양천녀상, 동자상, 시방불상이 빙 둘러싸
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불화에 많이 쓰인 바림기법으로 옷주름 표현을 하고 있으며, 연화문(蓮花紋)
과 연화당초문(蓮花唐草紋), 모란화문, 운문(雲紋), 동심원문(同心圓文), 나비문, 칠보문 등
이 장식되어 있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 황색 등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채도
가 낮고 탁한 색조를 보인다. 특히 상/하단에는 얼룩이 심하며 피부색도 많이 변색되었고 곳
곳에 보채(補彩)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의복 문양, 무독귀왕상과 시왕상이 쓴 관, 손에 들고
있는 지물, 지장보살상의 광배 등은 금니(金泥) 기법을 사용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지장시왕도과 비교하여 19세기 후반 불화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 지
장시왕도의 일반적인 도상 형식과 다르게 간략화되어 집중도 있는 화면과 공간 구성이 돋보인
다.

▲  명부전 옆구리에 자리를 닦은 연꽃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
을 세워 그날의 높은 뜻을 기린다.


▲  미륵전(彌勒殿)과 7층석탑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낸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그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
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를 지닌 7층석탑이 서 있는데, 그는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
나는 석탑 양식으로 20세기 중~후기에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  봉원사 칠성각, 삼천불전, 대웅전

▲  칠성각(七星閣)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6호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의 보금자리이다. 허
나 이상하게도 칠성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봉원사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약사여래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치성광여래도(서울 지방
문화재자료 80호
)가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
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들어있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세음보살
누님이 용선을 타고 파도를 즐기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이다.

▲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 수각(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는 거의
마를 날이 없다. 특히 한여름에는
연꽃보다 샘물이 더 반갑지.


▲  삼천불전과 3층석탑(가운데 탑)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
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다.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봉원사 산사음악회 (범패 공연이 한참 펼쳐지고 있다)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를 위시해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열린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되며 거의 무한 리필임, 차가 매우 시원함) 그
리고 17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⅓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절 축제를 이용하여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의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
겨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대웅전 뜨락 연꽃축제장에서 바라본 삼천불전

▲  연꽃의 향연을 바라보는 대웅전(大雄殿)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18세기 중반 건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
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
로 홀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재가 되었으니 6.25 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
다 할 것이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부질없이 또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흥선대원군이 부질없는 명당(明堂) 욕심으로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
(伽倻寺)로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할 때 그 절을 강제로 불을 질렀는데, 그때 타
지 않고 남은 것을 가져온 거라고 한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었으니 명당의 치명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상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좌우에 자리해 3존상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호법신들의 정모 현장, 신중도(神衆圖)

신중도에 빼곡하게 담긴 존재들이 모두 절과 석가여래를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이라고 한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그들을 담아놓아 너무 정신이 없는데, 여러 번의 화마(火魔)로 많은 것을
잃은 봉원사라 그런 사고가 다시는 없도록 호법신은 싹 소환하여 담은 모양이다. 저들의 한결
같은 보호가 있다면 정말 든든하겠지.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아미타불이 극락왕생하는 고혼들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들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앞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다소 낡아보이는 영안각(靈晏閣)

▲  단촐한 1칸짜리 건물, 전씨영각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
각(雲水閣)으로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이며, 그 옆에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혼백을 봉안하
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는데, 겉 나이는
거의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그 좌측에 있는 1칸짜리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봉원사에 넘긴 전성기
부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기일마다 절에서 온갖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
데 절에서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유하면서 사당까지 지어 제삿밥까지 직접 챙겨
줄 정도이니 시주한 돈이 꽤 되었던 모양이다. 역시나 절이나 속세나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
는 모양이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염불당)

▲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과 맵시를 견주면서 연꽃축제의 열기는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
보이는 연꽃들은 정처 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그들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이라도 싹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

▲  연분홍 연잎을 4박자로 펼쳐보인 홍련의 경쾌함

▲  홍련을 희롱하는 나비
연꽃 속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진 것은 아닐까?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닫은 홍련

▲  두툼하게 살이 오른 홍련

▲  푸른 연잎 밑에서 여름 햇살을 피하는 연꽃

▲  아주 화사하게 피어난 홍련

저토록 아름다운 연꽃이지만 그 미모는 불과 1달도 못 가서 꺾이고 만다. 한참 물이 오른 지
금이야 사람들이 서로 보려고 아우성을 떨지만 그때가 되면 누가 저들을 챙겨 보겠는가? 그래
서 인생은 부질없는 모양이다.


▲  푸른 연잎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 홍련

▲  산바람을 즐기며 목운동을 하는 홍련 3자매의 위엄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 같은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푸른 연잎 속에 홀로 솟은 홍련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연꽃들

▲  방긋 웃는 푸른 연잎과 그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연꽃들

▲  작게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푸른 연잎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  수조에 몸을 담군 연꽃 무리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출렁이는 연꽃 밀림 너머로 바라보이는 대방

▲  봉원사 대방<大房,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
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
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
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
소했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 석조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고루고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聖地)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하얀 피부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높이 37cm
에 작은 불상으로 경주 불석으로 조성되었는데, 그는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
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깃든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
데, 그때 들어온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것은 없다.
그의 뱃속에서는 '금강반야바라밀경'과 '팔엽대홍련지도', '준제구자천원지도', '열금강지방
지도' 등 각종 다라니가 나왔는데, 그들을 머금은 복장 주머니에는 '證明臣 華應 亨眞 謹封(
증명신 화응 형진 근봉)'이라 쓰인 띠를 둘렀다. 허나 이들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화응
형진이 봉안한 것이지 불상 조성 당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으며, 추사 김정희(金正喜)
가 쓴 현판과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대방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이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넉넉히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
란 글씨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
고 없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의 뒷모습 (건물 왼쪽 문짝에 그려진 것이 이만봉이 그린 신장도)
대웅전과 대방 앞은 물론 절의 숨겨진 뒤쪽까지 숙성된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돌덩어리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연꽃 밀림 너머에서 바라본 대방
지금은 연꽃 밀림이 되었지만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8월 말) 이곳은 원래의 모습
(대웅전 뜨락)으로 돌아간다.


▲  연꽃 밀림에서 바라본 삼천불전의 야경
산사음악회의 밤은 깊어만 가고...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몰랐
다. 그야말로 연꽃이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봉원사에는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늙은 나무(느티나무, 회화나무)와 16나한상,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등의 볼거리가 더 있으나 이들을 사진에 담지 않았고 시간이 늦
어 제대로 친견하지 못해 본글에서는 쿨하게 생략한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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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8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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